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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관 ⑤ 불국정토 아미타불

by 파장波長 2022. 5. 1.

불교는 깨달음과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알려주는 나침판 입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궁극적으로 자각(自覺)의 깨달음입니다. 그러나 정토부 경전에 오게 되면 누군가의 각타(覺他)에 의존하게 됩니다. 마치 유신론적 종교와 같은 타자의 힘에 의존하는 것이 한 방법이 되는데, 그 주된 방법이 아미타라는 부처님과 극락이라는 불국정토의 존재 및 염불왕생(念佛往生)의 진실을 믿는 것으로 규정됩니다.

자각(自覺)이라고 하지만 그곳의 불교도 자세히 살펴보면 역시 다른 존재의 도움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곧 불교란 개인의 깨달으려는 노력과 붓다의 깨닫게 하려는 노력이 함께 어우러져 성취되는 것으로서 부처가 전제되지 않은 채 혼자서 깨달으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불교는 깨달은 자가 깨닫고자 하는 자를 깨닫게 하는 종교라고 설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깨달으려는 노력의 태도에서 뿐만 아니라 붓다의 깨닫게 하려는 노력의 관점에서도 음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붓다의 입장에서 불교를 말해 봅시다. 붓다께서는 중생을 깨닫게 하여 자신과 같은 부처를 이루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붓다께서 중생을 가르치는데(깨닫게 하는 데) 두 가지 방향이 자연히 예상됩니다. 하나는 중생 속에 찾아와 깨달음의 길을 보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중생을 불러들여 깨달음의 길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 중에서 중생 속에 찾아와 깨달음의 길을 보이신 대표적인 붓다가 석가모니 부처님십니다. 그리고 그 부처님의 중생교화를 궁극적으로 밝힌 경전이《법화경》등입니다. 그런데 붓다께서 찾아온 중생의 세계는 오탁악세(五濁惡世)❶입니다. 그리고 붓다께서 찾아와야 하므로 그곳 중생과 같은 모습을 하게 됩니다. 아울러 끝없이 중생 속에 뛰어 들어 교화하려면 그 수명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아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신앙의 주제를 만나게 됩니다. 곧 여래의 구원실성(久遠實性)❷과 수명무량(壽命無量)을 신해(信解)❸해야 합니다. 그것은 붓다만이 다 알 수 있는 내용이므로 붓다가 되기 전의 수행자에게는 미지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곧 알지 못하는 것이지만 수용해야 하고 그 방법은 신앙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법화(또는 화엄)의 차원에서도 우리는 이미 상당한 수위의 신앙을 요청받고 있었음을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중생을 불러들여 깨달음의 길을 보이신 붓다를 살펴봅시다. 이러한 대표적인 부처님이 아미타 부처님으로 바로 정토부 경전이 아미타 부처님의 교화를 밝힌 경전입니다. 그런데 그 부처님이 중생을 불러들이는 세계는 오탁악세가 아닌 정토(淨土)❹입니다. 그리고 붓다께서 중생을 불러들여야 하므로 중생과 같은 모습이어서는 안 되고 중생의 관심을 끌만한 모습이어야 하므로 무량한 광명으로 스스로의 장엄[불신장엄 佛身莊嚴]을 보이고 일곱 보배로 극락장엄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토로 불러들인 중생을 제도하려면 정토에서의 수명을 무량하게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중생들과의 만남을 성취할 충분한 기회가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열반에 들더라도 관세음(觀世音)❺과 대세지(大勢地)❻ 보살을 차례로 부처님의 위를 잇게 함으로써 정토에서의 부처님의 상속이 영원히 계속되게 합니다.

또한 "아미타 부처님의 수명의 횟수는 매우 길고 오래 되었으니 누가 마땅히 그것을 알고 믿겠는가? 부처님 홀로 그렇다고 알고 믿을 뿐 이다.”《불설무량수경 佛說無量壽經》라고 설합니다. 여기서는 여래의 무량한 수명을 주장하는《법화경》의 분위기가 그대로 계승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중생의 입장에서 불교를 말해 봅시다. 중생은 근본적으로 붓다를 만나지 않고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붓다에게 두 가지 교화 방향이 있으므로 부처님께 의지하는 방법에도 두 가지가 있게 됩니다. 먼저 부처님이 찾아온 경우는 부처님을 만나서 뵈었기에 그 분의 실재(했음)를 믿는 것은 쉽습니다. 그렇지만 현실은 오탁악세이므로 깨달음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어렵고 깨닫기는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행하기 어려운 여건이지만 괴로움을 해결하고 부처를 이루겠다고 강한 원을 세워야 합니다. 다음은 부처님을 찾아가야 할 경우인데 아미타 부처님은 죽은 뒤에 가는 대상이므로 지금으로서는 본 적이 없어 그 분의 실재를 쉽게 믿을 수는 결코 없습니다. 그러나 가기만 하면 오탁이 사라진 불국정토이므로 깨닫는 노력도 용이하고 깨달음을 이루기도 쉽습니다. 그래서 믿기 어려운 여건이지만 극락에 왕생하여 부처를 이룰 수 있도록 아미타불의 존재성을 강하게 신앙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지금껏 살펴본 초기 및 대승불교의 자각적 수행의 흐름과 정토부의 사상은 종이의 양면과 같은 것임을 말할 수 있습니다.

정토 사상에서의 신앙의 대상은 아미타불과 극락정토의 존재성 그리고 염불 왕생의 진실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 신앙은 무턱대고 신앙하는 것이 아니라 믿을 만한 근거를 확보하여 믿어야 합니다. 

우선 인과의 법칙을 근거로 제시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전생(前生)의 존재성을 보면, 그것은 기억나지 않으므로 결코 실증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에서는 업인과보의 삼세윤회를 가르칩니다. 이것은 바로 인과의 법칙에 의한 단언입니다. 그리하여 우주의 성립도 지켜본 것은 아니나, 하나의 결과로서 그것은 공업을 원인으로 한다고 설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경전에서 법장 비구의 48대원과 그것의 완벽한 실천에 대해서 보게 되는데 이것이 원인이 되어 극락과 아미타불이라는 결과가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인과의 법칙에 입각하는 한 전생을 믿는다면 극락과 아미타 부처님도 믿어야 하는 것입니.

그리고 실상(實相)❼의 법칙을 음미해야 합니다. 불교에서는 실상 곧 참존재에 대한 언급이 미묘합니다. 이미 불교에서는 죽어 보지도 않고 죽음의 구조를 해명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것에 대해 설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죽음을 실제 경험하지도 않고 죽음을 경험한 이상으로 정확하게 죽음에 대해 포착하는 것도 참으로 신비한 부분으로서 음미할 만하지만 그렇게 포착된 죽음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죽음 자체를 극복하여 참존재를 획득한 다는 것도 주목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참존재가 궁극적으로 죽음으로 귀결되는 생사의 양면 관계 또는 상대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이 지금의 주제와 관련해서는 가장 주목해야 합니다. 곧 죽음이 있으면 불사(不死)가 있고, 차안이 있다면 피안이 있고, 중생이 있으면 부처가 있고, 오탁악세가 있으면 불국토가 있으니, 극심한 지옥이 있으면 극락이 존재한다고 봐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를 찾아와 교화하는 부처님이 계시면 우리를 불러들여 교화하는 부처님도 있다고 봐야 하는 것 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보지 못했지만 극락정토와 아미타 부처님의 실재성을 또 한번 믿을 수밖에 없는 근거를 음미하게 됩니다.

여기에 더하여 계합(契合)❽의 법칙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불교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법칙은 모든 것은 유사한 법끼리 무리지어 화합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악업을 지은 자들은 악업을 지은 자들끼리 어울립니다. 선업을 지은 자들은 선업을 지은 자들끼리 어울리니 전자의 극단적인 경우가 지옥 등의 악취이고 후자의 최상의 경우가 천상인 것입니다. 마찬가지의 논리가 극락정토의 실재성과 왕생의 진실성을 담보하는 하나의 근거가 됩니다. 곧 아미타불을 부르고 그의 정토에 가서 태어나고자 하는 자들은 또한 그들끼리 모일 수밖에 없음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아미타 부처님의 정토에 태어나려는 자들은 어떠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가 주제로 될 뿐입니다. 그런 자들이 모여 또한 아미타 부처님의 정토가 더욱 번창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토부 경전에 입각할 때 극락에 왕생하기 위한 노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정악(正惡) 다섯 가지 악을 짓지 말아야 한다. 다섯 가지 악이란 살생과 모함과 사음과 교만과 무책임을 행하지 말라는 것이다. 
② 정행(行善) 어렵지만 선 을 지어야 한다. 악세 또는 예토에서의 선업이 훨씬 수승한 것이라 고 정토부 경전은 설한다. 
③ 발심(發心) 보리의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④ 지심(至心) 극락정토를 지극하게 믿어야 한다. 
⑤ 신낙(信樂) 그 믿음에 기쁨을 느껴야 한다.
⑥ 욕생(欲生) 정토에 나기를 원해야 한다.
⑦ 염불(念佛) 아미타 부처님을 결코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한다.

그럴 때 감응도교(感應道敎)❾라 하여 능히 느끼는 자[감 感] 곧 부르는 자와, 능히 응하는 자[응 應] 곧 아미타불이 서로 사귀는 것[도교 道敎]을 경험하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경험을 공유한 자들이 함께 가서 태어나는 곳이 극락정토이기도 한 것입니다. 결국 아미타불과 극락정토는 인과와 실재와 계합의 법칙을 궁극에까지 치밀하게 밀고 나감으로서 확인된다고 할 것입니다.


Note :

❶ 오탁악세(五濁惡世)란, 다섯 가지 더러움으로 가득한 혼탁한 세상. 속칭 말세를 일컫는 말) 1) 명탁 (命濁) (사람의 목숨이 짧아서 100년을 채우기 어려움) 2) 중생탁 (衆生濁) (중생의 죄업이 두터워 올바른 도리를 알지 못함) 3) 번뇌탁 (煩惱濁) (애욕을 탐하여 마음을 어지럽히고 여러 가지 죄를 범함) 4) 견탁 (見濁) (말법 (末法) 시대에 이르러 나쁜 견해, 나쁜 교법 (敎法)이 무성하여 선 (善)을 닦는 사람이 없고 세상이 어지러워짐) 5) 겁탁 (劫濁) (기근 (饑饉)과 괴질( 怪疾)과 전쟁 등이 연달아 일어남
❷ 구원실성(久遠實性)구원고성 (久遠古成), 구원성 (久遠成)이라고도 말하며, 아득한 옛적에 실제로 이루어졌다는 뜻으로, 구원성불 (久遠成佛)과 같은 뜻
❸ 신혜(信解)-불법(佛法)을 믿어서 진리(眞理)를 터득(攄得)하는 일.
❹ 정토(淨土)란,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난 부처님이 계시는 청정한 국토로 성불을 의미하는 대승불교의 이상향. 그러나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정토에는 타방정토 (他方淨土)와 시방정토 (十方淨土) 그리고 유심정토 (唯心淨土)가 있다. 이때 타방정토 (他方淨土)란 아미타 부처님이 계시는 서방정토처럼 일정한 고정된 장소를 가리키며, 시방정토 (十方淨土)란 일정한 장소에 극한 되지 않고 온 우주에 편재해 있는 것을 말하며, 유심정토 (唯心淨土)란 청정한 마음이 곧 극락정토라는 것을 뜻한다.
❺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란, 대자대비를 근본 서원 (誓願)으로 하는 대보살의 이름. 관세음이란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중생의 음성을 들으신다는 뜻이며, 이를 줄여서 관음 (觀音)이라고도 말함. 이 외에 관자재보살 (觀自在菩薩)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이름이 있다. 왼손에 든 연꽃은 중생이 본래 갖춘 불성 (佛性)을 상징하며, 그 꽃이 활짝 핀 것은 불성이 드러나 성불했다는 뜻이며, 봉오리는 불성이 장차 필 것을 나타냄. 아미타불의 왼편에 모시는 보살로서 부처님의 자비를 나타냄. 관음전 (觀音殿) 또는 원통전 (圓通殿)에 모셔있음.
❻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란, 아미타 부처님의 바른편 보처 (補處). 아미타 부처님의 지혜를 대표하며, 대정진 (大精進) 또는 득대세 (得大勢)라고도 번역. 아미타불에게 자비문과 지혜문이 있는데, 관세음은 자비문을, 대세지는 지혜문을 대표한다. 그리고 이 보살의 지혜 광명이 모든 중생들에게 비치어 삼도 (三道)를 여의고 위없는 힘을 얻게 하므로 대세지라 함.
❼ 실상(實相) 생멸무상 (生滅無常)의 상 (相)을 떠난 만유 (萬有)의 참모습으로 진여 (眞如)와 본체 (本體)인 동시에 진제( 眞諦)인 공 (空)을 말함. 다시 말해, 잡을 수 없는 찰나의 흐름 속에서 비추어 볼 때, 일체의 상 (相)은 오고 감이 없으며,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니니, 이것을 깨달아 아는 것이 중도 (中道)의 지혜이며 열반.
❽ 계합(契合)부합하다 또는 일치하다. 눈과 사물이 서로 어우러져 만상을 일으킴을 말함. ‘한마디 말이 서로 계합하면 머무를 것이나, 계합하지 않으면 떠나리라.’ 이것은 영묵선사 (靈黙禪師)의 말씀
❾ 감응도교(感應道敎)감응도교 (感應道交)와 같은 뜻으로, 중생이 불심 (佛心)을 느낄 때 부처님의 신통력 (神通力)이 여기에 응하는 것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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