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불교는 우주의 본질이나 윤회와 같은 내생의 문제 등 인도인들의 복잡한 문제의식에 대한 연기적 관점의 답변입니다. 반면에 중국인들은 유교와 같은 보다 실제적이고 현실 중심적 사고에 젖어 있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처음 불교의 경전을 접했을 때에는 그 풍부하고 정교한 비유와 사상, 사유체계에 압도당하여 그 내용을 탐구하고 체계화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으나, 일련의 경전번역물이 쌓이자 그들의 체질에 맞는 불교의 요소를 뽑아내어 그야말로 중국화하려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여러 종파들 중 가장 중국화된 불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선종(禪宗) 입니다.
선(禪, dhyana)은 선정(禪定)이라고도 번역하며, 계(戒)·정(定)·혜 (慧) 삼학(三學) 가운데 하나로 중시되어 왔습니다. 모든 경전에서 부처님이 법을 설하실 때에는 반드시 선정에 드신 후에 설합니다. 즉 선정은 깨달음의 바른 지혜를 낳는 원천이며 바른 행인 계를 지탱하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방대한 경전을 통하여 설하신 연기법의 이치는 이 선정의 행을 통하지 않고서 체득할 수 없습니다. 이렇듯 깨달음에 이르는 필수불가 결한 수레가 곧 선(禪)입니다. 이러한 선의 실천을 종(宗)으로 내세운 것이 바로 중국의 선종입니다.
선종은 다른 종파와는 달리 갖가지 틀에 얽매임이 없었습니다. 경전을 강조하지 않고 오히려 경전 밖의[敎外別傳], 경전 이전의[不立文字], 참된 존재의 성품을 바로 가리켜[直指人心], 그 참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루는 것[見性成佛]을 표방했습니다. 이러한 종취는 유교의 경서에 따라 지배되는 사회질서를 거스르지도 않으며, 도가의 자유로우면서도 만유의 본질인 도를 추구하는 분위기와 잘 융화되었습니다. 경전의 번역을 중심으로 이루어 졌던 기존의 중국불교계는 자연히 국왕의 배려와 지원, 그리고 학식 있는 이들의 실질적인 역경작업을 통하여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경전의 뜻을 전해받아 오직 존재의 참모습을 구하는 실천 수행만이 과제가 된 선종에서는 더 이상 그러한 계급적 제약도 없으며 장황한 사변적인 교리의 전개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불교 전래 초기부터 번역되어 온 갖가지 선경(禪經)에 의하여 행해져 온 선수행(禪修行)의 실마리들은 당대(唐代)에 이르러 하나의 종파를 형성하게 됩니다. 이들은 평화와 안정이 지속된 당대의 자유분방한 분위기에 힘입어 지극히 간단한 대중의 언어로써 선지(禪旨)➊를 대중 속에 깊이 전파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중국 선종은 남북조 시대에 들어온(470년 혹은 520년) 인도승 보리달마를 초조(初祖)로 하여 혜가 - 승찬 - 도신 - 홍인을 거쳐 육조 혜능 (638~713)에 이르러 조사선(祖師禪)의 전통이 확립되고, 혜능과 아울러 홍인 문하의 신수에 의해 남돈북점(南頓北漸)❷이라는 남북 양종의 선 맥이 형성됩니다. 혜능 이후 남악 회양과 마조 도일을 거쳐 백장 회해 (720 ~814)에 이르러 비로소 교단으로서의 선종이 성립합니다. 회해는 당시까지 대부분 율사(律詩)에 속해 있던 선원(禪院)을 독립시키고 대소승의 계율을 집약하고 절충하여 교단의 규칙을 정했습니다. 그것은 선종의 사회적 독립의 기초가 되었으며, '일상생활 속에서 그대로 진리를 본다'는 마조 도일의 주장이 빠질 수 있는 자유로운 생활의 절대긍정이라는 위험을 없애 주었습니다. 회해의 또 하나 중요한 일은 청규(淸規)의 제정입니다. 일상 생활을 중시한 마조의 정신을 이어 그는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사상을 확립하여 승려의 노동을 의무화 했습니다. 이것은 출가자는 생산노동이나 경제행위에 참여하지 않았던 불교 본래의 전통을 뒤엎는 것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선종의 철저한 경제적 자립을 보장하는 기반이 되기도 했습니. 당말(唐末)에 일어난 회창폐불(845~847) 사건 때 대부분의 사원이 파괴되고 수많은 승려가 환속당하여 여타의 불교 종파는 쇠퇴의 길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러나 선종은 경전이나 불상 같은 형식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또한 관민(官民)의 경제력에 기생하지도 않고, 오로지 최소한의 규율 속에서 자립적인 노동으로 구도의 교단을 이끌었으므로 계속하여 번창의 일로를 달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백장 회해 이후 전개되는 선의 황금기에는 사자상승(師資相承)의 가풍에 따라 오가칠종(五家七宗)으로 나뉘어 교단이 확장되어 갔다. '오가칠종'이란, 임제종 · 위앙종 · 조동종·운문종 · 법안종과 임제종 내의 황룡파 와 양기파를 합한 것입니다. 임제종은 방이나 할로써 제자를 다루어 방편이 빈틈없고 빠른 가풍이며, 위앙종은 스승과 제자가 조용하고 화목하게 법을 주고받으며, 조동종은 군신(君臣)이 합하고 편정(偏正)이 서로 돕는다는 조동군신오위(曹洞君臣五位)의 방법이 유명하고, 운문종은 운문 문언의 삼구(三句)가 유명하며, 법안종은 '소리를 듣고 도를 깨달으며, 형색을 보고 마음을 밝히니, 언구 속에 창을 감추고 말 속에 메아리가 있다'고 하듯 스승과 제자 사이에 특별한 기연을 시설하지 않아도 저절로 깊은 의미를 전달하는 가풍이었습니다. 이 중 임제계와 조동계가 이후까지 번성하며 오늘날까지 전해져 간화선(看話禪)❸과 묵조선(默照禪)❹의 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임제 의현(臨濟 義玄, ?~867)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가 부처라는 화신 위에 그러한 깨달음의 구체적인 실천을 '오직 밖에서 구하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면 서 있는 곳이 모두 진실이다[隨處作主 立處皆眞]’라고 하며, 일체의 외재적인 권위를 부정하여 “안으로나 밖으로나 무언가를 만나면 곧 죽여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 그래야만 비로소 해탈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의현은 이러한 참자아에 대한 확신을 덮고 있는 어리석음을 깨기 위하여 제자 앞에서 고함[喝]을 지르기도 하고 방망이로 때리기도 했습니다[棒]. 또한 분석적이고 관념적인 사유방식에서 나온 제자의 질문에 대해서 그와는 전혀 관계없이 보이는 답을 주어 강한 의구심을 일으켜 그것을 뚫고 나가게 하는 방법을 사용 했습니다. 이것을 공안(公案)이라 합니다. 이 공안의 언구[話頭]를 참구해 나가 는[看] 것이 곧 간화의 선법입니다.
이러한 공안에는 1,700칙이 있다고 하여 일반적으로 ‘천칠백공안' 이라 부릅니다. 그중 48공안을 선별한 것이《무문관(無門關》인데 그 제1칙에 실린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화에서 '무'자 화두가 남송(南宋)의 선종을 풍미하게 됩니다.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고 묻자, 조주 스님은 “없다.”고 답했습니다. 경에서는 모든 중생에게 다 불성이 있다고 하였는데, 조주 스님은 없다고 했으니 왜 그렇게 답하셨을까? 하는 커다란 물음이 선수행의 과제가 되어 ‘무자화두’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이 밖에도 ‘이뭣고[是甚麼]’, '뜰 앞의 잣나무[庭前柏樹子]’ 등 우리에게 지금까지 행해지는 화두도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간화선법은 결가부좌했을 때뿐 아니라 걸어다니고 머물고 눕고 말하고 침묵하고 움직이는 모든 순간에 늘 커다란 의문을 계기로 깨어있어 언제든지 미망을 깨뜨릴 수 있도록 이끄는 방법입니다. 간화선풍은 중국뿐 아니라 우리 나라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으며 지금까지도 꾸준히 행해 지고 있습니다.
임제 의현과 같은 시대에 동산 양개(洞山 良价, 807~869)에 의해 일어난 조동종(曹洞宗)의 분위기는 이와 대조적입니다. 여기서는 고요하고 참된 본성을 관찰하기 위하여 좌선을 하기도 하며, 스승이 제자와의 문답을 통하여 직접적이고 분명하며 자상하고 비밀스럽게 가르치기도 합니다. 아울러 논쟁과 사유도 적당히 강조했습니다. 동산은 편정(正)과 공훈 (功)이라는 두 가지 오위송(五位頌)을 읊어 자신이 깨달은 세계와 그에 이르는 길을 자상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조동종은 중국에서는 12대 법손 천동 여정(天童 如淨)에 이르러 쇠퇴하였고, 그의 법을 이은 일본인 도원(道元)이 본국으로 돌아가 북조선의 전통을 크게 펼쳤습니다.
이상과 같은 선종의 모습 속에는 중국불교 역사상 대중 속에서 오랫동안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지만 그 밖의 부정적인 면도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우선 지나치게 경전을 도외시한 나머지 경전을 보고 진리를 구하는 이는 참된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고 하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경전은 부처님이 입멸하신 후에도 그 가르침을 전승하려는 간절한 노력에 의해 전래된 것으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은 것입니다. 그 손 가락만을 보고 달이라 해서는 안 되지만 달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 됨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경전은 깨달음으로 이끄는 나침반이자 깨달음을 검증하는 한 표본인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계율을 경시했다는 점입니다. 선종에도 백장청규의 형태 등으로 소정의 교단규칙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스승에서 제자에게로 비밀스럽게 법을 전하는 우파니샤드적 전법형태에 의존한 선종은 인도불교의 상가 공동체적 구도생활과는 다른 개인적이고 자의적인 생활의 경향을 띠었습니다.
위의 두 가지 경향은 계·정·혜 삼학 가운데 선정만을 치우치게 강조 한 데서 비롯된 결과일 것입니다. 물론 선정을 통한 지혜도 중시하였으나, 경전에 설해진 지혜의 원만한 회향이라는 면에서는 부족함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여래보다 오히려 조사(祖師)를 중시한 중국 조사선의 편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밖의 종파들 가운데 선정 수행을 가장 중시한 것은 천태종입니다. 천태종은 수(隋)에 의한 남북조의 통일이라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 불교의 종합적 체계를 이룩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서 통일적인 교판을 세우고 교학적으로 방대한 체계를 정리했습니.
그러나 [속고승전]에서도 천태종의 역대 조사들을 모두 선사(禪師)라고 기록하듯이 그 근본 종지는 철저하게 부처님의 가르침인 경전에 의거 하는 선정삼매를 통한 깨달음에 있었습니다. 조사선에 대비하여 이러한 선법을 여래선(如來禪)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혜사와 지의로 이어지는 수많은 선정의 지침서는 이후 중국불교의 실천론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간화선과 같이 단박 깨치는 가르침과 경전에 의거한 원만한 깨달음의 전통을 잘 융화하여 올바른 실천수행의 모습을 우리 사회에 정립해 가야 할 것입니다.
Note :
➊선지(禪旨)란, 범어 dhyana, 음을 따라 선나(禪那), 줄여 선(禪)이라 한다. 고요히 생각함(정려 靜慮), 생각으로 닦음(사유수 思惟修), 악한 것을 버림(엽악 棄惡), 또는 공덕림(功德林)등으로 번역. 순수한 집중으로써 스스로 마음을 밝히는 일(자정기의 自淨其意)이다. 그러므로 선(禪)은 선종(禪宗)의 전유물이 될 수 없고 모든 수행의 방법이다. 염불이고 간경(看經)이고 순수한 집중을 거치지 않고는 삼매(三昧)가 나타날 수 없고 따라서 지혜의 눈도 뜰 수 없다. 이러한 보편적인 선이 종파적인 데에 치우친 나머지 그 본래의 의미는 변질되고 만다. 종파선은 달마(達磨)스님이 인도로부터 중국에 온 후 크게 발달하여 이른바 조사선(祖師禪)이 형성된 데서 비롯된다.
❷남돈북점(南頓北漸)이란, 중국의 남쪽과 북쪽의 선문 (禪門)이 각각 다른 것을 말함. 남에는 혜능 (慧能), 북에는 신수 (神秀). 신수는 돈오 (頓悟)와 점수 (漸修)를 인정하면서도 교학적 (敎學的)이었고, 혜능은 미오 (迷悟)가 하나이므로 본래무일물 (本來無一物)과 수증불이 (修證不二)를 전하니, 후에 오가 칠종 (五家 七宗)을 이루다.
❸간화선(看話禪)은 화두선 (話頭禪)과 같은 뜻으로, 간 (看)은 본다, 살피다, 주시하다, 또는 참구한다는 뜻, 그리고 화 (話)는 화두 (話頭)의 준말로, 고인 (古人)의 공안 (公案)을 참구 (參究)하여 큰 깨침을 얻기 위한 수행 또는 좌선 (坐禪). 그러나 사실은 말과 생각을 내려놓고 형상 없는 본래 마음을 똑바로 보는 것. 그 배경을 말하면, 묵조선 (黙照禪)이라는 평을 받는 조동종 (曹洞宗)의 선풍 (禪風)에 대한 임제 (臨濟)의 선풍 (禪風)으로 조사선 (祖師禪)의 전통을 가장 잘 전승하고 있는 수행법이다.
이들의 차이는 보는 (看) 대상인 마음 (心)과 話頭의 화 (話), 곧 고칙 (古則) 또는 공안 (公案)의 차이. 이때 (話頭)의 ‘두(頭)’는 조사로서 별 의미가 없음. 그러나 이때 정말 정신 차려야 할 것은, 화두 (話頭)란 공문서 (公案)의 글자가 아닌 활구 (活句)를 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 그렇다면 활구 (活句)란 또 무엇인가? 이것은 언설 (言說)을 떠난 일구자 (一句字)를 말한다. 그렇다면 일구자 (一句字)란 또 무엇인가? 이것을 모른다면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참선은 별 소득이 없을 수도 있다. 활구참구 (活句參究)와 일구자 (一句字), 및 여래선 (如來禪) 참조
❹묵조선(默照禪) 묵조선은 우선 간화선 (看話禪)처럼 좌선할 때 화두 (話頭)를 들지 않는 것이 그 특징. 따라서 묵조선에선 이미 깨쳐 있는 상태에서 행하는 좌선은 더 이상 깨침을 위한 수단이나 과정이 아니라고 한다. 나아가 묵조선에서의 좌선은 앉아 있는 그 자체가 이미 깨쳐있는 공안문 (公案門)이기 때문에, 묵묵히 앉아 자신의 본래 갖추어져 있는 불성 (佛性)을 자각하는 것을 강조한다. 따라서 오로지 묵묵히 앉아있다고 하여 지관타좌 (只菅打坐)라고도 하는데, 사실은 명칭만 다를 뿐 조사선과 큰 차이가 없다. 즉 마음을 가다듬고 조용히 앉아있는 그 자체가 곧 깨달음이라는 위의즉불법 (威儀卽佛法)으로 통한다. 이러한 수행방법의 차이로 인해 묵조선과 간화선은 심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묵조선을 조동선 (曹洞禪)이라고도 말하며, 중국과 일본과는 달리, 현재 한국에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으나, 간화선이 어렵다면 묵조선을 시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그리고 위빠사나도 사실 해보면 번거롭고 생각과 같이 그렇게 쉽지 않다. 무엇이 되었든 다른 것을 폄하하고 자기 것을 강요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것이 아무리 최상승의 것이라 하더라도. 음식 가리는 사람치고 건강한 사람 보지 못했다. 각자의 취향과 근기에 다라라 열심히 하면 된다고 본다. 그런데 간화선에서는 묵조선 을 ‘싸늘한 재처럼’ 아무런 지혜작용이 없는 고목사회선 (枯木死灰禪) 또는 맹선 (盲禪)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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