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품 법계를 두루교화하다
第19品·法界通化分
須菩提! 於意云何? 若有人滿三千大千世界七寶, 以用布施, 是人以是因緣, 得福多不?
수보리! 어의운하? 약유인만천대천세계칠보 이용보시 득보다부?
如是! 世尊! 此人以是因緣, 得福基多.
여시! 세존! 차인이시인연, 득복심다.
須菩提! 若福德有實, 如來不說得福德多, 以福德無故, 如來說得福德多.
수보리! 약복덕유실, 여래불설득복덕다, 이복덕무고, 여래설득복덕다.
복덕은 얻을 수 없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떤가?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채운 칠보로써 보시한다면, 이 인연으로 인한 복덕은 많지 않겠는가?"
須菩提! 於意云何? 若有人滿三千大千世界七寶, 以用布施, 是人以是因緣, 得福多不?
수보리! 어의운하? 약유인만천대천세계칠보 이용보시 득보다부?
『금강경』은 시종 두 문제 사이를 왔다 갔다 합니다. 최고의 지혜 성취에 대해 언급하면, 그것이 최고조에 이를 때쯤에서 큰 복보(福報)에 대해 말합니다. 복지이엄(福智二嚴)이란? 범부가 성불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혜가 장엄해야 하고, 복덕이 장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복덕이 있어야만 비로소 진정한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스스로 총명하지 못하다고 느낍니다. 기억력도 시원찮고, 게다가 이해력도 부족합니다. 복덕이 충분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도 어머니 배 속에서 나왔는데 왜 내 머리는 이렇게 시원찮은 걸까? 투태(投胎) 할 때 창고에 처박혀 있던 곰팡이 낀 머리라도 갖고 나온 걸까?’ 사실 기능은 다를 바 없지만 자신의 복덕이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진정한 복덕, 심리적 건강과 두뇌의 건강은 스스로의 수지(修持)에 달려 있습니다.
부처가 수보리에게 묻습니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가령 어떤 사람이 다이아몬드나 금, 은, 마노 등 세상에서 제일 귀한 칠보로써 보시 한다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칠보로써 보시한다면, 이 행위로 인해 얻 을 수 있는 복덕이 대단히 크지 않겠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그 사람은 이 인연으로 해서 복덕이 아주 많습니다.”
如是! 世尊! 此人以是因緣, 得福基多.
여시! 세존! 차인이시인연 득복덕자.
이것은 수보리의 대답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그렇게 보시한다면 정말 대단합니다! 장래의 복보도 아주 클 겁니다!”"
“수보리여! 만약 복덕이 알찬 것이라면, 여래는 복덕이 많다고 말하지 않을것이다. 복덕이 없기 때문에 여래는 복덕이 많다고 말한다.”
須菩提! 若福德有實, 如來不說得福德多, 以福德無故, 如來說得福德多,
수보리! 약복덕유실, 여래불설득복덕다, 이복덕무고, 여래설득복덕다.
부처가 말합니다. "그대는 알아 두어야 한다. 인세간(人世間)에서 말하는 대복보란 돈 많고, 오래 살며, 자식 많고, 훌륭하며, 좋지 않은 것이 없어, 더 이상 좋을 것이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과거의 마음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니, 모두다” 인생이란 모두 구름 잡는 것입니다.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면서도 한사코 얻고자 합니다. 사람이 나면 죽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사람들은 모두 선(仙)을 배우고 도(道)를 배워 장생불사 하고자 합니다. 복보는 다함이 있습니다. 사람의 영화는 한순간입니다. 마 치 손전등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손전등으로 밝게 비추지만 한평생 비출 수는 없습니다. 세간(世間)의 복보는 실재하지 않습니다. 복덕은 공허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는 말합니다. “세간의 복덕이 아무리 많다 해도, 그것은 손가락 튕기는 사이에 사라져 버릴 허망한 꽃〔空花〕에 지나지 않는다. 복덕이 없기 때문이다〔以福德無故〕.”
아무도 소중히 여기지 않는 복
진정한 복보는 무엇일까요? 청정무위(淸淨無爲)입니다. 마음속에 이미 번뇌도 비애도 없고,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으며, 영예도 모욕도 없습니다. 상반된 두 가지 것들이 모두 없어 영원토록 지극히 평정합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상계(上界)의 복보로서, 바로 청복(淸福)입니다. 청복은 어떤 사람이든 모두 갖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도 모두 한가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루 종일 아무 일 없이 집안에 있다 보면 견디기 힘듭니다! 마치 사람들에게 잊혀진 것 같고, 사람들에게 소외되고 있는 것 같아 절로 눈물이 나옵니다. 명함 한 장 내미는 사람 없고, 초대장 하나 오지 않으며, 전화 한 통화 해 주는 사람 없으니 참으로 서글퍼집니다. 이런 사람은 청복이 있어도 그것을 누릴 줄 모릅니다. 불법을 배우는 사람은 먼저 이 점을 뚜렷이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 일체 사람들의 심리를 부처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진정한 첫 청정이 다가와도 그것을 향수할 줄 모릅니다. 불법을 공부하여 공성(空性) 즉 자성(自性)의 청정무위를 증득하고 대지혜를 성취하는 것, 이것이야마 로 진정한 복보라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복보는 그렇게 얻기 어려운 것 일까요? 아주 쉽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이런 복보가 다가오면 오히려 외면하고 스스로 번뇌를 찾으려 합니다.
이 구절이 왜 이곳에 삽입되었을까요? 삼심(三心)은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삼심(三心)을 얻을 수 없다는 이 경계에 도달하기는 아주 어렵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경계를 닦아서 얻고자 한다면 반드시 진정한 복보가 있어야만 합니다. 불교의 기본적인 첫걸음은, 인생에서 수행을 하려고 해도 ‘가만지신(暇滿之身)’을 얻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서두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가만지신' 이란 건강하고 한가한 몸입니다. 그렇지만 세상 사람들은 한가로움을 누릴 줄 모릅니다. 몸이 건강하면 어디 가서 소모하려 하고, 진정으로 고요하고 한가로운 상황이 되면 반대로 비통해합니다. 그래서 '전도된 중생(顚倒衆生)'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 출처 : 남회근 선생 '금강경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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