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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워야 담을 수 있다.

by 파장波長 2024. 3. 6.

부처님 당시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한 외도(外道)가 부처님을 찾아와 물었습니다.

“감히 부처님께 말 있음(有言)으로도 묻지 않고, 말없음(無言)으로도 묻지 않습니다. 일어주십시오.”

이에 부처님은 조용히 자리에 기대 앉으셨고, 그 순간 외도는 부처님의 행동을 보고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오 부처님이시여, 대자대비로써 저의 미(迷)한 구름을 모두 벗겨 주셨습니다. 이 기쁘고 감사한 마음을 어떻게 다 아뢰오리까!” 마음을 완전히 비우고 법문을 청한 외도는 부처님의 참 법문을 듣 고 대오(大悟)했던 것입니다.

외도가 간 뒤 부처님 곁에 있던 아난 존자가 물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한 말씀도 없이 그냥 자리에 기대 앉으셨을 뿐인데, 그 외도가 어떻게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까?”

“아난아, 매우 훌륭한 말(馬)은 채찍의 그림자만 보아도 힘껏 달려 가느니라. 아난아, 너는 20년 동안이나 내 곁에 있으면서도 나의 참 법문을 듣지 못하고 있구나.”

모름지기 법문을 들을 때는 빈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빈그릇에는 능히 담을 수 있지만 그릇이 차 있으면 아무리 좋은 자비법문, 오도 법문(悟道法門)이라 할지라도 담을 수가 없습니다.

법문을 들을 때는 아무리 좋은 생각이라 하더라도 번뇌망상에 불과합니다. 이를 분명히 자각하여 마음을 비우고 법문을 들으면 깨달음의 기연(機緣)은 반드시 찾아들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법의 문을 열고, 법의 집안으로 들어가는 요긴한 비결입니다. 말만 듣거나 법문을 입으로만 되새기는 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귀로 듣고 입으로 내뱉으며 비판하는 것, 이것은 지식에 불과할 뿐 결코 지혜가 될 수 없습니다.

지식의 지(知)는 화살 시(矢)에다 입구(口)자를 합한 글로서 ‘귀 로 들어와서 입으로 쏙 나와 버리는 배움(入口之學)’을 가리킵니 다. 이구삼촌(耳口三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입과 귀의 거리는 세 치밖에 되지 않습니다. 법문은 귀로 듣고 입으로 내뱉기 위해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법의 세계, 곧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법문을 듣는 이는 귀로 듣지 않고 마음으로 들어야 하며, 알지(知)가 아니라 지혜 지(智)를 이루어야 합니다.

‘알 지(知)’ 밑에 ‘날일(日)’자, 즉 태양처럼 밝게 빛나는 지혜의 광명으로 모든 사람을 밝혀 주어야 합니다.

옛 스님의 말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독사가 물을 마시면 독을 이루고, 소가 물을 마시면 젖을 이룬다.

지혜롭게 배우면 보리를 이루고, 어리석게 배우면 생사를 이룬다.

진정 그러합니다. 똑같은 법문을 듣고 어떤 사람은 도를 깨치는데 어떤 사람은 도를 깨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태양과 같은 광명을 뿜어내고 어떤 사람은 더욱 암담해지기도 합니다. 독을 만들 것인가 젖을 만들 것인가, 보리(깨달음)를 이룰 것인가 생사를 이룰 것인가? 그 열쇠는 각자가 쥐고 있습니다.

마음 가득 번뇌망상을 담고 말만 배우고자 하거나 지식 충족의 수단으로 법문을 듣는다면 생사 이외에는 이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온전히 마음을 비우고 법문을 들으면 틀림없이 깨달음을 이룰 수 있습니다. 부처님과 모든 선지식이 한결같이 말씀하셨듯이 모름지기 마음을 비우고 법문을 듣도록 합시다.

멀지 않은 날, 틀림없이 깨달음이 찾아들 것입니다. 법문을 들을 때 나에게 맞다는 생각이나 맞지 않다는 생각. 법문을 잘한다는 생각, 못 한다는 생각, 재미있다는 생각, 재미없다는 생각은 모두 번뇌망상입니다. 이런 번뇌망상을 완전히 비울 때 감로수(甘露水), 곧 감로의 법문이 고스란히 담기게 됩니다.

일타 큰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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