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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교리

붓다의 수행관 ④ 대승불교

by 파장波長 2022. 5. 1.

초기불교의 수행을 통해서 우리는 벽지보리의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벽지보리는❶ 삼막삼보리의 전단계입니다. 따라서 벽지보리에서 머물러서는 안되고 삼먁삼보리의❷ 깨달음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이처럼 벽지보리를 넘어서 삼먁삼보리를 얻고자 하는 실천이 바로 대승 불교의 수행입니다. 따라서 대승불교의 수행은 열반에 대한 부정에서 출발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벽지보리를 넘어서는 것이 대승불교의 수행인데 벽지보리는 열반과 관련된 깨달음이기 때문입니다.

반야바라밀다의 수행

대승불교의 수행은 반야부 경전에서 먼저 설하는데 이 경전은 반야의 수행을 설하는 경전입니다. 그런데 반야는 실제 열반의 절대성을 부정하면서 출발합니다. 원래 반야는 인도 말 프라즈냐(prajna)를 소리 옮김 한것인데 이 말은 '프라 - 라는 접두사와 - 즈냐' 라는 어근으로 구성된 말입니다. 그런데 이 접두사는 '진행적으로, 능동적으로, 머뭄이 없이' 라고 하는 뜻을 지닙니다. 그리고 어근 '즈냐'는 알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반야는 어떤 앎의 경지에 머물지 않고 진행적으로 알아 나가는 것을 뜻합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뜻은 여러 가지로 분석 가능하지만 그 핵심적인 뜻은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곧 '모든 사물이 ①연생(緣生)관계를 맺으므로 ②자성(自性)이 공하다고 아는 것’이 반야입니다. 여기서 열반을 생사와 대비 하면서 반야는 출발하는데, 열반은 생사와 ①연생 관계를 맺으므로 ②자성이 공하다고 아는 것이 반야의 시작이다.

이처럼 열반의 자성이 공하다라고 부정하는 것이 반야인데 여기서 열반을 넘어서는 대승불교의 수행이 시작됨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면 열반의 자성이 공한 이상 열반에 머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열반에 머물지 않는다고 생사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열반의 자성이 부정되어 열반에 머물지 않는 것과 똑같이 생사의 세계도 자성이 부정되므로 생사에 머물지 않을 것도 당연한 것입니다. 나아가 열반에 머물지 않는데 생사에 머물 리는 없습니다. 이런 뜻을 부처님은 뗏목의 비유와 함께 “법도 버리는데 하물며 비법이랴.”《금강경 라고 설하면서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열반에 조차 머물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하면 그것은 머묾이요, 망념일 뿐입니다. 따라서 열반을 벗어나기 위한 실천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열반을 벗어나기 위한 실천을 하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열반을 벗어날 것입니다. 열반을 벗어남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새로운 경지를 얻은 것을 의미합니다. 이 새로운 경지는 생사로 되돌아간 상황이 아니고 열반에서 더 진행한 상황입니다. 따라서 ‘한 단계 진전한 열반' 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한 단계 진전한 열반' 을 다시 최초의 '열반' 과 대비 하면서 반야의 수행을 진행해야 합니다. 즉 '한 단계 진행한 열반’도 최초의 열반 과 연생 관계를 맺기에 자성이 공하므로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벗어나기 위해 수행하여 벗어나게 되니 그것은 ‘두 단계 진행한 열반' 이라고 불러 볼 만합니다. 이렇게 두 단계 진행한 열반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우리는 이 이후의 과정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곧 “망념(妄念)의 부정이 행(行)을 일으키고 행은 경계를 얻는다. 그러나 그러한 경계에 집착하면 그것은 또 하나의 분별망념이다. 다시 망념의 부정이 일어나고 그것은 행을 일으키고 행은 경계를 얻는다. 그리하여 무한한 자기부정적 실천이 계속된다.” 여기서 망념의 부정' 이란 열반 등을 그 자성이 공하다고 아는 반야를 뜻하고, ‘행을 일으킴' 이란 기존의 경지를 부정하고 벗어나려는 실천을 뜻하고, ‘경계를 얻음' 이란 그로부터 한 단계 진행한 경지를 얻는 것을 뜻합니다. 이처럼 ①반야 → 실천 → 얻음 → ②반야 → 실천 → 얻음 → ③반야 → 실천 → 얻음 →...... → ∞로 전개되므로 이러한 무한 부정의 과정 속에 대승의 수행이 그 토대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한 부정이 반야에 의해 계속되면 그 끝은 어디일까. 무한 부정이라는 말은 그야말로 결코 긍정할 만한 것이 없다는 표현인데 놀랍게 도 반야부 경전은 한결같이 '반야에 의해(般若] 피안에(波羅) 도달한 것 (蜜多)'이라는 긍정적인 표현을 내놓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한 부정의 진행에 어떤 목표가 있음을 보여주고 그것을 피안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그리고 바라밀 ‘다'의 '다'는 그곳에 궁극적으로 안착함을 강하게 암시합시다. 따라서 대승의 수행은 먼저 ‘반야바라밀다에 도달하기 위한 실천이다.' 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그 실천의 방법이 여러 가지로 세분화 되어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바라밀다의 육바라밀 수행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삼막삼보리의 수행 

그러나 반야바라밀다는❸ 아직 삼막삼보리의 경지는 아닙니다. 왜냐면 그것은 피안에서의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 삼먁삼보리는 붓다의 궁극적 경지로서 붓다의 깨달음은 바로 중생들이 살고 있는 이 차안(此岸)에서 성취되는 것이기에 벌써 반야바라밀다의 피안적인 단계를 다 시 넘어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육바라밀 수행을 성취한 뒤에 이제 마지막 붓다가 되기 위한 수행이 남아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붓다께서 세상에 출현하는 본래 목적을 설한다는《법화경》에는 반야 바라밀다는 붓다의 삼막삼보리에 이르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고 설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붓다와 같은 깨달음을 모든 중생들도 함께 얻도록 하는 데 있다고 설합니다.《법화경, 방편품》이처럼 중생들을 전제로 붓다의 깨달음을 성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법화경》과 같은 대승경전에 입각할 경우, 새로운 수행은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먼저 스스로 삼먁삼보리를 얻고 붓다가 되어 불국토를 건설하겠다는 서원(誓願)을 세우는 것입니다. 원이란 소망과 결심을 결합한 불교 특유의 덕목입니다. 진정 어떤 목표이든 희망하고 그것을 반드시 성취하겠노라고 결심하는 것이 '원' 입니다. 그럴 때 반야바라밀다를 성취한 보살은 이제 부처를 이루고 싶다고 희망하고 그것을 반드시 실현하고자 결심해야 하는 ’원'을 굳건히 견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 차원에서의 수행입니다.

그리하여 불자로서 그러한 원을 세우지 않고 그러한 바램을 일으키지 않는 자야말로 최대의 교만이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법화경, 방편품》 뿐만 아니라 화엄부의《십지경》에서도 “모든 부처님을 모든 공양구로 공양하기를 원하고, 부처님의 교법을 모두 받들어 보호하기를 원하고, ...... 아다라삼막삼보리를 성취하고 성불하기를 원한다.” (범문 《십이지경》환희지(歡喜地)는 원을 굳건히 세우라고 대단히 강조합니다. 그리하여 《화엄경》에서는 이윽고 원바라밀다(願波羅蜜多)를 정립시킬 정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육바라밀 수행을 이어 삼막삼보리를 성취하고 부처를 이루겠다는 원을 세우는 것이 또 하나의 대승의 수행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둘째, 삼먁삼보리를 이루기 위해서는 최상의 방편을 성취해야 합니다. 반야바라밀다가 성취되는 피안으로부터 중생들의 차안으로 돌아가는 수행이 삼먁삼보리를 이루기 위한 최종적인 수행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되돌아가면서 중생들과 만나게 되는데 그 만남 속에서 피안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방법이 필요합니다. 그 특별한 방법이 방편(方便) 으로, 방편을 교묘히 성취해 내는 것이 또한 이 차원의 수행입니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방편이 완성되고 지견(知見)이 완성되는 것이 부처의 경지라 규정하고 있으며묘법연화경, 서품》, 원의 바라밀다와 함께 방편 바라밀다라는 덕목까지 성립시켜 놓은 것입니다.《십이지경, 제7 원행지 이러한 수행 끝에 피안과 차안이 가치론적으로 대통합을 성취하게 되었을 때 삼막삼보리가 성취되고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대승불교의 수행은 열반에 대한 벽지보리를 넘어서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래서 육바라밀 수행을 통해 반야바라밀다의 경지를 성취합니다. 그런 뒤 중생이 사는 차안으로 회향하여 서원을 견고히 하고 두루 방편을 펴서 마침내 삼먁삼보리를 성취하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Note :
❶벽지보리(僻地菩提)란, 초기불교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기 위한 것으로 선정(禪定)수행과 조도(助道)수행이다. 선정 수행의 핵심은 구차제정(九次第定)으로 선정의 9가지로 사선정(四禪定), 사무색정(四無色定),  멸진정(滅盡定)을 말한다.
❷삼먁삼보리(三藐三菩提)란, 석가모니 부처님의 위없는 깨달음이라는 뜻인 동시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번역으로, 정등정각 (正等正覺)을 한층 높인 말. 그렇다면 위없는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 만유의 무자성과 연기법이며, 또 그것이 곧 불생불멸과 열반이라는 것
❺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는 대승불교의 근본 목표다. 곧 대승은 반야바라밀을 목표로 실천 수행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붓다의 반야바라밀깨달음의 체험을 통해 얻은 불교의 핵심근거라는 확신이 담겨져 있다. 반야바라밀의 여섯 가지 실천덕목은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반야(般若)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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