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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교리

붓다의 수행관 ① 닦음과 됨

by 파장波長 2022. 5. 1.

어느 종교에서나 실천은 중요시하지만 불교만큼 실천을 중시하는 종교도 드뭅니다. 불교에서는 실천을 수행이라고 부르며 수행의 중요성을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한때 제자들에게 부처님의 법은 바다와 같다고 설하시면서 그 이유를 여덟 가지로 설명하셨다. 그 중에서 부처님은 바다에는 지상에서 볼 수 없는 진귀한 보배가 많이 있는데 자신의 법 속에서도 다른 데서는 볼 수 없는 보배가 있다고 하시면서, 그것은 다름 아닌 수행법이라고 설하셨다.”《남전 소부, 자설경 우리는 이미 부처님의 법이 보배임을 알고 있습니다. 불교에 세 가지 보배가 있으니 부처님이 보배이며, 교법이 보배이며, 승가가 보배입니다. 여기서 이미 부처님 교법은 보배인데 그 보배로서의 교법 중에 또 보배가 있으니 그것이 수행법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붓다께서는 당신의 교법 중에서도 수행법을 특히 귀중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수행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수행이라는 단어의 수() 자에 '주의하여 닦음' 이라고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닦아야 할까. 경전에서는 이러한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빛나고 찬란한 것이다. 단지 바깥에서 들어온 때에 의해 더러워질 뿐이다. 《남전 증지부, 일법부 ”이 가르침은 우리의 마음을 닦아야 할 대상으로 보게 합니다. 

그런데 ‘닦음' 이라는 말은 무언가 깨끗하고 긍정할 만한 것이 있는데, 그것을 더럽고 부정적인 것이 가리고 있을 때 그 더러운 것을 닦아 내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닦음이라는 말을 우리의 존재에 적용해 보면 우리 속에 무언가 깨끗하고 긍정할 만한 것이 있는데 그것을 더러운 것이 가 리고 있기에 닦아 내자는 말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 속에 과연 긍정할 만한 어떤 것이 있다고 해야 하는가.

경전에서는 언제나 무아(無我)를 이야기합니다. 무아란 우리 속에 영원 불변의 어떤 주체가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 속에 영원 불변의 주체적 실체가 없다면 우리는 과연 어디서 참으로 긍정할 만한 것을 찾을 수 있는가. 무상하게 변하는 어떤 것을 우리는 참으로 긍정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결국 영원 불변의 실체가 있다는 것과 직결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수행을 막연히 닦는 것으로 이해하여 우리 속에 마치 영원 불변의 긍정할 만한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인 양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서 마음을 닦음의 대상으로 설하였지만 그 마음도 영원불변의 실체로 봐서는 안 됩니다. 붓다께서는 이미 여러 곳에서 의지 또는 식별을 무상(無常), 고(), 무아(無我)라고 설하십니다.《잡하경 또한 "마음이란 가장 빨리 회전하는 것이며” 《남전 지부, 일법부 "마음이란 원숭이가 이 가지를 놓고 다른 가지를 잡듯이 순간순간 바뀌어 무상한 것인데 어리석은 자들은 이것을 자아' 라고 집착한다.” 《남전 상응부, 연기상응라고 설하셨듯이 마음도 결국 부단히 바뀌는 무상한 존재인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을 닦는다고 해도 그 마음을 영원 불변의 어떤 실체를 닦는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붓다의 무아의 가르침을 위배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면 수행의 진정한 뜻은 무엇일까. 수행이라고 번역되는 범어는 바와나(bha vana)입니다. 이말은 bh라는 동사의 사역 명사형에 해당한데 bh 라는 동사는 '~이 되다'는 뜻을 지닌 말입니다. 마치 술이 식초가 되듯이 변하고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바와나'는 그 말의 사역 명사형이므로 우리말로는 ‘바뀌게 하는 것’, ‘변하게 하는 것' 의 의미입니다. 이처럼 수행을 ‘바뀌게 하는 것', '변하게 하는 것' 으로 이해하고 나면 우리는 무아설과의 논리적 일관성을 확보하게 됩니다.

어차피 모든 것은 변한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 불교의 기본 태도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변한다면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변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변할 것인가 입니다. 나쁘게 변하지 않고 좋게 변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쁘게 되지 않고 ‘좋게 되게 하는 것’ 입니다. 따라서 이미 좋게 된 자라면 수행은 필요없습니다. 그는 자연히 좋게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라한이나 부처님에게는 수행이 필요 하지 않습니다. 이미 좋은 자로 바뀌었고, 되어 있는 자로서 자연히 그렇게 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수행은 나쁜 자 또는 좋지 않은 자가 좋게 되기 위해서 취하는 실천인 것입니다. 

수행이 이와 같이 되게 하는 것이고 바뀌게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제 자연히 다음의 네 가지를 묻게 된다. 

첫째, 무엇을 바꾸는가? 
둘째, 무엇으로 바꾸는가? 
셋째, 어떻게 바뀌는가? 
넷째, 무엇에 의해 바뀌는 가?

첫째, 무엇을 바꾸는가? 잘못 된 것에 대한 집착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악()한 것, 삿()된 것, 속()된 것, 미 혹()한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이들에 집착하는 마음이 악심, 사심, 속심 미혹심인데 이 마음들을 바꿔야 합니다.

둘째, 무엇으로 바뀌는가? 좋은 것에 대한 계합(契合)❶ 상태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좋은 것인가? 선()한 것, 바른 것(), 참된 것(), 밝은 것()좋은 것입니다. 이것들에 계합한 마음이 선심, 정심(正心), 진심(眞心), 깨달음의 마음인데 이 마음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셋째, 어떻게 바뀌는가? 이 물음은 나쁜 것에서 좋은 것으로 몇 단계에 걸쳐서 바뀌는 것인지 아니면 한꺼번에 나쁜 것에서 좋은 것으로 바뀌는 것인지를 묻는 것인데 결코 한꺼번에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붓다께서는 앞서와 같은 바다의 비유에서 바다가 점점 깊어지듯이 수행의 경지도 점점 깊어지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결코 쭉 곧은 절벽처럼 한꺼번에 깊어 지는 일이 없다고 분명히 단언하셨습니다. 《남전 소부,  자설경》 이처럼 몇 단계에 걸쳐서 바뀐다면 그 단계는 어떠한가? 바로 악하고 삿되고 속되고 미혹한 단계에서 먼저 선한 단계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런 뒤 바른 것의 단계로 바뀌고 다시 참된 것의 단계로 바뀌고 최종적으로 밝음의 단계 곧 깨달음의 단계로 바뀌어야 합니다. 

넷째, 무엇에 의해 바뀌는가? 이 물음은 실제 그러한 전환의 동력인이 되는 실천법에 대해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크게 우리는 두 가지 수행의 체계를 만나게 되는데 하나는 초기불교의 수행도이고 또 하나는 대승불교의 수행도입니다. 

이처럼 불교의 수행은 단순한 닦음이 아닙미다. 그것은 바뀜이요, 됨인 것입니다. 범부 속에 성인이 있어 범부를 닦아 내어 성인을 끄집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범부 속에 성인은 없습니다. 단지 범부를 성인으로 전환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점진적인 과정을 통해 전환하는 것입니다. 비유하면 알에서 나비가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알에는 나비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비는 그 알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알에서 바로 나비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알에서 애벌레로 애벌레에서 번데기로 그 번데기에서 끝으로 나비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알을 그냥 둔다고 전환의 과정이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알에 적절한 온도와 습도라는 여건을 충족시켜 줘야 알이 전환되기 시작할 뿐이다. 

이처럼 알 속에는 알만이 있듯이 범부 속에는 범부만이 존재합니다. 굳이 성인이 있다고 한다면 성인이 될 성품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성품은 존재가 아니라 존재의 가능성일 뿐입니다. 따라서 범부 속에 성인은 없습니다. 금광석 속에 금이 숨어 있는 것처럼 범부 속에 그렇게 성인이 숨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말입니다. 알 속에 나비가 없듯 이 범부 속에 성인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알이 애벌레로 번데기로 결국 나비로 바뀌게 되듯이 범부도 선한 자로 바른 자로 참된 자로 그리고 결국 깨달은 자로서의 붓다로 바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도와 습기가 알을 애벌레로 바뀌게 하듯이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수행도들이 범부를 선한자로 내지 깨달은 자로 바뀌게 합니다.

수행은 이와 같이 닦음의 과정을 바탕에 두고 궁극적으로 '됨'을 성취하려는 것이라고 알아야 할 것입니다.


Note :
계합(契合)이란, 부합하다 또는 일치하다. 눈과 사물이 서로 어우러져 만상을 일으킴을 말함. ‘한마디 말이 서로 계합하면 머무를 것이나, 계합하지 않으면 떠나리라.’ 이것은 영묵선사 (靈黙禪師)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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