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붓다담소

윤회와 인과(因果)를 믿어라.

by 파장波長 2024. 2. 22.

고해(苦海)의 파도를 타고 출렁이는 중생은 누구나 행복을 원한다. 사바세계! 참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세계인 감인세계(堪忍世界), 잡된 인연으로 얽히고 설켜 있는 회잡세계(會雜世界)에 몸을 담고 있는 중생이기에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 가는 것 자체가 너무나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당연한 바람을 이루지 못한 채 한평생을 고해 속에서 헤매다가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왜 이렇게 살다가 죽어야 하는 것일까? 고해를 벗어나 복된 삶을 영위할 수는 없는 것인가?

아니다. 누구나 행복이 충만된 삶을 누릴 수 있다. 행복만이 아니라, 영원과 자재로움과 맑은 삶을 얻는 비결도 있다. 실제로 부처님께서는 이 비결에 따라 가장 완벽한 해탈을 이루셨고, 한평생 동안 복된 삶을 이루는 방법을 일러주셨다. 이제 그 많은 가르침 중 특별히 두 가지를 뽑아 함께 살펴보도록 한다.


오늘은 어제의 연장, 내일은 오늘의 상속

욕지전생사(欲知前生事) 전생의 일을 알고자 하는가? 
금생수자시(今生受者是) 금생에 받는 삶이 그것이다. 
욕지내생사(欲知來生事) 내생의 일을 알고자 하는가? 
금생작자시(今生作者是) 금생에 짓는 선악이 그것이다.

오늘은 어제의 연장이요 내일은 오늘의 상속이다. 전생은 금생의 과거요 내생은 금생의 미래이다.

사람들은 어제를 돌아보고 내일을 기약하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그렇지만 전생을 생각하고 내생을 바라보며 금생을 살아가는 이는 흔치 않다.

왜 어제는 돌아볼 줄 알면서 전생은 묵살하고, 내일은 기약하면서도 내생은 잊고 사는 것일까? 그것은 전생과 내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요, 지금 이 순간에 너무 집착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는 이상 전생 · 금생 · 내생의 삼세윤회(三世輪廻)는 반드시 있다. 왜냐하면 삼세윤회는 인(因) · 연(緣) · 업(業) · 과(果)의 넷으로 구성된 필연적 법칙이기 때문이다.

인연업과(因緣業果)

‘인’은 씨앗(因子)이요 ‘연’은 연지(緣地), 곧 씨앗이 뿌려지는 밭이며, ‘업’은 밭에 뿌린 씨앗이 결실을 볼 때까지 가꾸는 행위이다. 이렇게 인과 연과 업이 모이면 결과는 자연 ‘성(成)’일 수밖에….

씨가 좋고 밭이 좋고 농사를 잘 지었으면 복을 많이 받을 것이고, 나쁜 씨를 나쁜 밭에 뿌리고 가꾸는 일을 게을리했다면 수확이 나쁜 것은 정한 이치이다. 심은 대로 거두고 지은 대로 받는 것이니,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 이것이 사바세계의 생리(生理)이다.


장수의 비결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장수만세>라는 프로를 보았는데, 아나운서가 80이 넘은 한 노인에게 질문하였다.

“장수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우리 마누라 속을 썩이지 않는 것이 저의 장수 비결입니다.”

이 대답에 관람하던 모든 사람들이 박장대소를 하였다. 그냥 우스갯소리 같은 이 말 속에 깊은 생활철학이 담겨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왜? 사람이 한평생 살아가는데 있어 부부보다 더 가까운 사람은 없다. 부부는 모든 일을 함께 의논하며 살아간다. 부부는 한몸이다. 가장 친하고 서로를 아껴주는 이가 부인이고 남편인 것이다.

이와같이 한몸이나 다를 바 없는 부인의 속을 썩이지 않는다면 남편의 마음도 그만큼 편안할 것이다. 또 남편 때문에 속상할 일이 없는 부인은 항상 즐겁고 평화롭고 따스한 마음을 갖추게 될 것이다. 자연히 음식도 정성껏 만들고 때때로 정성껏 달인 보약도 대령할 것이다. 어찌 남편이 건강 해지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와는 반대로 부인의 속을 썩히면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음식도 아무렇게나 할 것이고, 설사를 하든 체하든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는 식으로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남편의 마음마저 불편하여 하는 일까지 시원스럽게 풀리지 않게 되고 말 것이다.

진정 ‘마누라 속을 썩이지 않는 것이 장수의 비결’이라고 한 그 노인의 말이 명답이 아닐 수 없다. 곧 마누라 속을 썩이지 않는 것은 인(因)이요, 장수는 과(果)인 것이다. 이와같은 인과의 법칙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한치의 어긋 남이 없이 작용하고 있다.


창조론 · 우연론 · 숙명론이 아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것 가운데 인연과 인과의 법칙을 벗어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반드시 어떤 원인에 의해 결과가 나타나는 것일 뿐, 원인 없는 결과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밥을 먹다가 혀를 깨물게 되면 우연으로 돌려버리기 일쑤지만, 의학적으로 살펴보면 혀를 깨무는 것조차도 분명한 까닭이 있다고 한다. 우리 몸에 흐르고 있는 피가 오장육부(五臟六腑)를 순환하다가 어떤 이상을 일으키면 맥박이 불규칙하게 뛰고, 불규칙한 맥박이 신경계통에 자극을 주면 이가 혀를 깨물게 되는 것이다.

왜? 하필이면 바로 그 순간 맥박에 이상이 생기고 신경이 잘못되는 것인가? 이 모두가 인과의 맥락에서 보면 결코 우연일 수가 없는 것이다.

나아가 불교에서는 우주의 생성과 유지와 변화, 인생의 모든 것을 인과관계로 풀이하고 있다. 따라서 인과의 도리를 벗어난 우연론이나 전지전능한 창조주에 의한 창조론은 수용하지 않고 있다. 진정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어떻게 하다가 우연히 생겨난 것이라면 인과의 원리에 따라 전개될 수가 없다.

그리고 전지전능한 신이 우주만유와 생명계를 창조하였다면, 우리가 암흑과 죄악, 약육강식의 공포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불행을 겪지 않아도 될 것이다. 만약 신이 잠깐의 실수로 세계를 잘못 창조하고 잘못 관리하여 이렇게 되었다면 그 전지전능한 힘으로 다시 개조하고 재창조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와 역사의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그렇다면 이 세계가 전지전능한 신의 창조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인류의 역사, 우리의 현실이 신의 창조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불교의 인과론이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숙명론이나 운명론과 같은 것은 결코 아니다.

운명론이나 숙명론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사람의 운명은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어 있다고 한다. 곧 사주팔자대로 산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스스로의 자율적인 의지와 창조적인 노력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삶의 흐름을 바꾸어놓을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열심히 살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이것은 불교의 인과론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불교의 인과론은 모든 것을 자신에게로 돌리고 있다. 나의 행위가 원인이 되어 나의 삶이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 내가 받고 있는 이 결과는 어제의 행위가 원인이 되었고, 오늘 내가 짓는 행위는 내일의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불교의 인과론은 내일을 창조하고 오늘의 과오와 고뇌를 근원적으로 개조하기 위한 인과론이다. 곧 보다 적극적인 삶, 보다 멋진 삶의 길을 열어주고 있는 것이 불교의 인과론인 것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만 ‘있다’ 하고 보이지 않는 것은 ‘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인과응보와 윤회를 쉽게 믿으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만물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자라나고 있고 모든 것은 모르는 사이에 무르익어가고 있다.

삼세의 인연 또한 시간과 공간의 파장(波長)으로서, 전생에 하던 일과 생각했던 일을 금생에도 하게 되고, 금생에 하는 일과 생각하는 일은 내생으로 연장 확대되어 간다.

실제로 전생에 도를 많이 닦은 사람은 현세에서도 어려움 없이 도를 닦아 이루고, 전생에 예술을 깊이 익혀 영감을 기른 사람은 현생에서 특별히 예능 공부를 하지 않았는데도 이름난 예술가가 된 사례들이 허다하게 전해지고 있다. 인연따라 생겨나고 인연따라 사라지는 종연생(從緣生) 종연멸(從緣滅)의 법칙! 이는 만고불변의 철칙인 것이다. 이제 인과응보와 윤회를 증명하는 실화 한 편을 음미해 보도록 하자.


윤회의 실체와 인과법을 깨닫고 출가한 제선스님

지금은 누구도 그분의 생사여부를 알지 못하지만, 이 시대의 고승 제선(濟禪)스님이란 분이 계신다.

스님은 출가하기 전, 일본에 유학하여 대학을 다니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는데, 졸업 후 제주도로 돌아와서 하는 일 없이 지내자 일본경찰들이 요시찰인물(要視察人物)로 지목하여 감시를 늦추지 않았다. 때마침 집안 어른들은 적당한 규수가 있다며 결혼을 시켰고, 얼마 후 잘생긴 아들을 품에 안을 수 있게 되었다.

‘아무리 뜯어보아도 나무랄 데 없는 놈이야. 이 아이를 나라의 재목으로 키워야지!’

아들에게 특별한 정을 느꼈던 그는 아들을 지극정성으로 키웠다. 옷도 먹는 것도 제일 좋은 것들로만 사주면서 애지중지 키웠다. 그런데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며칠이 지났을 때, 잘 놀던 아이가 갑자기 “아야!” 하더니 탁 쓰러져서 영영 깨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아이의 시체를 안고 몇날 며칠 동안 밥도 먹지 않고 눈물로 지새웠다. 날이 갈수록 그의 우울증은 커졌고 집안은 엉망이 되어갔다. 보다 못한 어머니가 분위기를 바꾸면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돈을 주며 여행할 것을 권하였다.

“금강산 구경이나 다녀오너라.”

그러나 금강산을 가기는커녕 서울에서 내기 바둑을 두다가 받은 돈 모두를 날려버렸다. 어차피 특별한 의욕이 없었던 그는 노동판에서 일도 하고 구걸도 하며 이곳 저곳을 떠 돌아다녔다. 그럭저럭 그의 발길은 묘향산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넓은 감자밭을 일구며 토굴살이 하는 노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토굴에서 며칠을 붙어 살다가 스님과 가까워지자 그는 아들을 잃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런데 스님, 그 아이가 왜 그렇게 죽어버린 것일까요? 그 까닭을 알지 못하고는 제대로 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것 알아보는 것이야 간단하지. 7일만 잠 안자고 기도 하면 금방 알 수 있어.”
“정말입니까?”
“만일 그렇게 해서 기도성취 못하면 내 목을 베어라. 아니, 부처님 목도 떼어버려라.”
“좋습니다.”
그날부터 기도는 시작되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평소 아들 생각에만 빠지면 잠자지 않고 며칠을 지새던 그였는데, 이상하게도 기도를 시작하자 잠이 마구 퍼붓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스님은 그의 졸음을 허용하지 않았다. 조금만 졸면 언제 나타났는지 주장자로 머리를 탁 때리면서 호통을 치곤 하셨다.

“때려 치워라. 벌써 졸았으니 소용없어. 기도성취 보려거든 다시 시작해.” 

며칠 동안 졸고 혼나고 졸고 혼나기를 거듭한 그는 ‘먼저 잠 안자는 연습부터 해야겠다.’는 결심으로 깡통을 두드리며 감자밭 주위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그렇지만 졸음을 이기기는 쉽지가 않았다. 어떤 때는 밭두렁에서 떨어져 거꾸로 쳐박힌 채 잠에 골아떨어지기도 하였다. 깨고나면 목이 퉁퉁 부어 있고……. 이렇게 갖은 고생 을 하며 잠과 싸운지 42일째 되는 날, 물건들이 커 보이기도 하고 작아 보이기도 하는 등 시야는 흐렸지만 잠은 오지 않게 되었다.

“오늘부터 다시 기도를 시작해라.”

스님의 지시대로 그는 7일 동안 잠을 자지 않고 관세음보살을 끊임없이 불렀다. 하지만 아들이 죽은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속았구나. 부처도 관세음보살도 원래 없는 것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니 성이 나서 불상의 목을 떼겠다며 불단 앞으로 가다가 탁자에 소매가 걸려 앞으로 넘어졌다.

바로 그 찰나, 아들이 그의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너무나 반가워 안으려 하자 아들은 ‘히’ 웃으며 저만치 물러 서는 것이었다.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겨우 다가가면 또 도 망가버리고 도망가버리고…… 마침내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저런 놈은 아예 없애버려야 한다. 저놈을 어떻게 할까? 돌멩이로 머리를 쳐버릴까보다!’

이렇게 못된 생각까지 하다가 아이의 엉덩이를 발로 차자, 아이는 ‘아야!’ 소리를 지르며 뒤로 돌아서는데, 순식간에 개로 변하는 것이었다. 순간 그의 뇌리로 일본에서의 유학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대학을 다닐 때 머물렀던 친척 아저씨 집에는 개가 한 마리 있었다. 개는 그를 열심히 따랐을 뿐 아니라 말귀도 매우 밝았다. 산책을 갈 때도 극장 구경을 갈 때도 개는 열심 히 쫓아왔다.

“너는 극장에 못들어간다. 집에 가 있다가 나중에 오너라.”

그러면 개는 집으로 갔다가 그가 극장에서 나올 시간에 맞추어 다시 와서 좋다고 매달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영리하던 개가 어느날 갑자기 병이 들어 통 먹지를 않았다. 얼마 더 지나 뼈만 앙상하게 남아 곧 죽을 것처럼 되자, 친척 아저씨는 개를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도시 한복판에서 개가 죽으면 재수없다. 상자에 실어서 교외로 가지고 나가 버려라.”

할 수 없이 개를 담은 상자를 자전거에 싣고 교외로 나간 그는 숲속에 상자를 내려놓고 개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를 버리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구나. 네가 죽을 병이 들어 밥도 먹지 않으니…… 여기 있다가 편안하게 죽어라.”

순간, 개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가슴이 아팠지만 일어서서 자전거를 끌고 돌아서는데, 개가 ‘왕’ 소리를 지르며 쫓아오는 것이었다. 비실비실 쫓아오다가 쓰러지고 쫓아오다 쓰러지고…… 어느덧 날도 저물어 교외의 어떤 집에 들어가서 하룻밤 신세를 지기로 하였는데, 거기까지 쫓아온 개는 그의 곁에 바싹 붙어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마치 ‘나를 버리고는 못간다.’는 듯이.

마침 바짝 마른 개를 측은하게 여긴 그 집 주인은 장국에 밥을 말아주었고, 이제까지 먹지 않던 개가 기운을 차려야 겠다고 결심한듯 그릇까지 싹싹 핥아먹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에도 장국 한 그릇을 말끔히 먹어치우고는 병이 나은 듯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자전거를 타고 달리기 시작하자 개는 죽을 힘을 다 하여 뒤를 따랐다. 천천히 달리면 천천히, 빨리 달리면 빨리 쫓아오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개가 포플러나무에 오줌을 누는 틈을 타서 그는 힘껏 자전거를 몰았다. 최대 속력을 낸 결과 개를 따돌릴 수 있었다.

그런데 세 달이 지난 후, 그 개가 집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학교가 파하고 돌아와보니 개가 와 있었고, 개는 섬뜩한 눈빛으로 그를 계속 쏘아볼 뿐 만지는 것도 옆에 오는 것도 허락하지를 않았다. 그렇게 한 주일 정도 집에 있다가 개는 다시 사라져버렸다.

“아하, 그 개가 나의 아들로 태어나서 제 찢어진 마음의 앙갚음을 하였구나!”

이렇게 인과의 법칙을 깨닫고 가야산 해인사 백련암으로 출가하여 승려가 된 제선스님은 열심히 참선 수행을 하여 높은 경지를 이루었고, 나이 60이 조금 못되었을 때 천축산 무문관(無門關)으로 들어가 방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고 6년 동안 정진하였다. 그런데 6년을 며칠 앞두고 행방 불명이 되었다. 한 거사가 스님의 수행을 자랑한답시고 TV 인터뷰를 강요하자 자취를 감춘 것이었다.

현재까지 그 누구도 생사여부를 알지 못하는 제선스님. 이 제선스님의 인연 이야기처럼 세상의 모든 일은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없다. 또한 윤회와 인과응보에 대한 실증(實證)은 옛부터 무수히 전하여지고 있으며, 오늘의 우리 주위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실제로 나의 주변에서 전생과 인과를 체험한 사례들도 많이 있다. 

불교의 첫걸음은 인과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된다. 확실히 인과를 믿고 좋은 인연을 맺으며 살아보라. 세상은 새롭게 전개되고, 활기찬 인생이 우리 앞에 전개될 것이다.

이제 장을 달리하여 인생을 새롭게 바꾸는 비결에 대해 논하여 보기로 하자.

일타 큰스님 법문 글 모음

'붓다담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반야(般若)-잘 사는 지혜  (0) 2024.03.04
몸의 긴장을 푸는 수행  (1) 2024.03.02
참된 ‘나’를 찾는 방법  (0) 2024.02.22
언제나 나와 함께 하는 것  (0) 2024.02.22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  (0) 2024.02.21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