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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담소

바라밀다(波羅蜜多)-해탈의 언덕

by 파장波長 2024. 3. 4.

바라밀다(波羅蜜多)는, 마하반야(摩訶般若)의 힘에 의해 즐겁고 자유롭고 편안한 대해탈(大解脫)의 세계에 이르게 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바라밀다의 산스크리트 원어인 파라미타 (pāramitā)는 파라(para彼岸)와 미타(mita:到)의 두 낱말 이 붙어서 이루어진 합성어로서, 도피안(到彼岸)으로 한역(漢譯)되어지며, 중국 및 우리나라에서는 줄여서 ‘바라밀’ 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먼저 파라미타의 '파라(para)'에 대해서 살펴보면, 파라는 피안(彼岸), 이상의 세계인 저 언덕을 뜻합니다. 생로병사의 고통으로 가득 찬 이 세상, 참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이쪽 사바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한없이 즐거운 세상이 ‘파라’의 세계입니다.

범어 ‘파라’는 천당(天堂)을 뜻합니다. 히브리어나 라틴어에서도 ‘파라(para)’는 하늘나라 · 천국 · 유토피아 · 이상향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영어의 파라다이스(paradise) · 파라솔(parasol) 등도 ‘파라’의 파생어로서, 모두가 하늘 나라와 관계가 있습니다. 파라다이스는 곧 천국의 낙원, 아주 즐거운 하늘나라 꽃동산을 뜻하고, 파라솔은 하늘과 통하는 것을 차단하여 햇빛을 가리고 비를 막는 도구인 것입니다. 이 ‘파라’를 불교적으로 해석하면 열반의 세계, 해탈의 세계, 극락 또는 불국정토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이상적인 세계가 이 지상보다 훨씬 높은 하늘에 있으며, 그 하늘나라에 태어나고자 하는 소원은 동양과 서양이 조금도 다를 바 없었던 까닭에, ‘파라’라는 단어는 가장 좋은 낱말의 하나가 되어 인간의 심성을 두드렸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파라 뒤에 붙는 ‘미타(mita)’는 거기에 ‘도착한다’ 그것을 ‘완성한다’, 그것을 ‘이룩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파라미타’라고 하면 ‘파라에 도착했다.’, ‘파라를 완성했다’, ‘파라를 이룩하였다.’는 등의 종결적인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불교에는 바라밀 외에도 이 ‘파라’를 앞에 붙인 아주 중요한 용어가 있습니다. 바라제 · 바라이 등이 그것입니다.

바라이(parajika, 波羅夷)의 ‘이’는 기(棄)로 번역되며, ‘포기한다 · 버린다’는 뜻입니다. 흔히 불문(佛門)에서 축출당하게 되는 4바라이죄(四波羅夷罪)라고 하면 살생(殺生) · 투도(偸盜) · 사음(邪淫) · 망어(妄語) 등의 네 가지 무거운 죄를 지칭하게 되는데, 수행인이 이와같은 행위를 하는 것은 곧 해탈의 세계로 나아가기를 포기하는 일이 되기 때문에 이와같은 이름이 붙여진 것입니다.

이에 반해 바라제(prati, 波羅提)라고 할 때의 ‘제(提)’는 ‘발을 보호한다.’는 뜻이 됩니다. 바라제는 흔히 계율(戒律)로 번역하는데, 불살생 · 불투도 · 불사음 · 불망어 등의 계율을 잘 지키는 그 자체가 해탈의 세계로 나아가는 발을 잘 보호해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곧 바라는 ‘해탈을 보호한다.’, ‘해탈의 세계로 가는 발을 보호한다.’는 뜻입니다. 불제자들이 즐겨 외우는 <천수경 千手經>에는 ‘나무대비 관세음 원아속득계족도(南無大悲觀世音 願我速得戒足道)’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가령 우리가 전쟁터에 있다고 하면, 전쟁마당에서 피난을 갈 때 손가락이나 팔이 하나 떨어진다고 하여 도망을 가지 못할 까닭이 없지만, 발가락은 하나라도 다치게 되면 도망을 갈 수 없게 되고 맙니다. 이처럼 피안에 이르는 데도 발이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계법(戒法)으로써 발을 잘 보호하여 한시라도 빨리 피안의 세계로 나아가기를 발원하며 ‘원아속득계족도’라 하는 것입니다.

바라제, 계율로써 발을 잘 보호하여 해탈의 세계로 나아가면 쉽게 바라밀다를 이룰 수 있고, 바라이죄에 빠지면 바라밀다와는 갈수록 요원해질 뿐입니다. 과연 우리 불교인의 이상향인 파라의 세계는 무엇에 의해서 도달(밀다)할 수 있는까요? 두말할 나위 없이 우리 속에 잠재되어 있는 마하의 영원생명 · 무한능력을 반야로써 하나로 모을 때 이 해탈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마하를 반야하기만 하면 파라에 밀다할 수 있는 것이니, 사람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무한대의 이 마음자리 (摩訶心)을 올바르게 관찰하고 집중시켜 견성성불(見性成佛) 의 경지로 나아가야 합니다.


용맹정진의 긴고주

이제 우리가 이 마하반야바라밀의 세계로 나아가는 데 있어 깊이 명심해야 할 한 가지 사항은, 마음이 대상을 향해 부산히 흩어질 때 용맹정진의 자세로 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용맹정진!

이 용맹정진에 대해서는 <서유기>에서 손오공을 통해 은유적으로 잘 나타내어주고 있습니다.

손오공이 8만4천 번뇌망상을 일으키고 바라이죄를 지어 스스로 갇히고만 오음산의 굴 속에서 꼼짝없이 고통을 받은 것도 이미 5백년. 그때 당나라 태종(太宗)은 현장법사(玄漿法師:602-664)에게 천축국(天竺國)으로 가서 불경을 구하여올 것을 명했습니다. 현장법사가 그 멀고 험한 길을 혼자 갈 수 있을까 염려하여 관세음보살님께 도움을 청하자, 관세음보살은 인연(因緣)이 무르익었으니 곧 떠날 것을 재촉 하였습니다.

“가거라. 아무런 걱정말고 가거라. 저 유사(流砂: 모래가 흘러가는 사막)를 지나가면 오음산이 나타나고, 그 산의 꼭대기에는 관세음보살의 본심미묘진언(本心微妙眞言)인 ‘옴마 니반메훔’ 여섯 글자를 쓴 말뚝이 박혀 있을 것이다. 그 말뚝을 뽑으면 오음산이 터지면서 원숭이 한 마리가 나오리라. 그놈은 기운이 천하장사인 돌원숭이 손오공이다. 손오공의 머리를 깎아 제자로 삼아서 데리고 간다면 그 어떤 어려움도 능히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손오공은 성질이 괄괄하고 버릇이 없어서 억지를 부릴 때가 많을 것이니, 제자로 삼는 즉시 머리에 이 둥근 금테고리를 씌워라. 억지를 부릴 때 내가 일러주는 긴고주(呪: 머리에 쓴 고리를 조이게 하는 주문)를 외우면, 손오공은 머리가 부서지는 듯한 고통 때문에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떠나라. 조금도 염려말고 길을 떠나라.”

현장법사는 천축국을 향해 길을 떠났고, 과연 관세음보살의 말씀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손오공을 오음산의 감옥에서 구하여 함께 길을 가는데, 갑자기 여섯 명의 도둑이 나타났다. 현장법사는 놀라 자리를 피하고, 손오공과 도둑이 마주서게 되었다.

“이놈, 가진 것을 모두 놓고 가거라.”
“못 주겠다면 어쩔 것이냐?”
“네놈의 머리를 깨뜨려 버리겠다.”
"그래? 깨뜨려라.”

내미는 손오공의 머리를 여섯 도둑이 칼로 내리치고 도끼로 찍었으나, 손오공의 돌머리는 조금도 상처를 입지 않는 것이었다. 제풀에 나가떨어진 도둑들을 향해 손오공은 ‘이 제 내가 때릴 차례’라고 하면서 여섯 도둑들의 머리를 여의봉으로 후려치자 모두 죽고 말았다. 현장법사가 돌아와보니 사람이 여섯이나 죽어 있지 않은가.

“오공아! 불법이 대자대비(大慈大悲)인 줄을 모르느냐? 불법의 제1계(第一戒)가 불살생(不殺生)인 줄을 모르느냐? 사람을 때려 죽이다니.”
“햐. 조금 전에는 겁이 나서 똥줄이 빠져라 도망을 가더니, 이제 나타나서 잔소리를 해요?”
“오공아, 여섯 도둑놈 곧 六境)을 돌이키면 육신통(六神桶)을 만들 수 있고, 여섯 가지 인식(六識)을 돌이키면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이룰 수가 있다. 번뇌망상을 떠나서 따로 진리를 구하려는 것은 파도를 떠나서 물을 구하려는 것과 같으니라(廻六賊而六神通 廻六識而六波羅蜜 離妄求眞 離波求水).”

그러나 손오공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꺼떡꺼떡 몸을 흔들며 생트집만 부린다. 현장법사는 이와같이 크게 그릇된 행동을 하고서도 뉘우칠 줄 모를 때 긴고주를 외워 손오공의 버릇을 고치곤 하였습니다.

현장법사는 설법을 통하여, 그리고 긴고주로 손오공을 깨우쳐 88사(使:번뇌의 다른 이름)의 번뇌망상을 모두 조복(調伏)시킴으로써 마침내 바라밀의 세계인 천축국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이와같이 모든 번뇌를 차례로 제어하는 과정을 묘사 하여, 우리의 번뇌망상을 떨쳐버린 자리가 곧 바라밀의 세계임을 은유적으로 깨우친 작품이 <서유기>인 것입니다.

손오공을 꼼짝 못하게 만든 긴고주! 이것은 바로 용맹정진을 나타낸 것입니다. 아무리 잔재주가 많고 힘이 센 손오공이라 할지라도 현장법사가 외우는 긴고주는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긴고주만 외우면 머리에 쓴 금테고리에서 돌기가 나와 머리 속으로 파고들기 때문에, 그 고통으로 인해 떼굴떼굴 구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현장법사를 따라 구도의 길을 떠난 손오공의 마음이 흩어지고 게을러져서 제천대성 시절의 성질이 나올 때, 그 못된 성질을 억제시키는 근본적인 무기로 등장시킨 것이 바로 긴고주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우리들 마음 밖의 일이 될 수는 없습니다. 공부를 하다가 마음에 해태심(懈怠心)이 일어날 때 생사의 문제가 급함을 깨닫고 정신을 바짝 차려 용맹정진하려는 결심을 다시 한번 거두어 잡는 것, 결정코 생사의 큰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대용맹심(大勇猛心) · 견고용맹대력결정심(堅固勇猛大力決定心)을 갖는 것이 바로 긴고주인 것입니다.

흔히 규모가 큰 사찰을 가보면 선방(禪房) 위에 ‘심검당(尋劍堂)’이라고 쓰인 편액이 붙어 있는 경우를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찾을 尋 · 칼 劒, 취모검(吹毛劍)이라는 반야의 칼을 찾는 집이 바로 심검당입니다. 칼날 위에 한 가닥의 머리 카락을 놓고 입김으로 가볍게 불기만 하여도 자를 수 있는 날카로운 마음의 칼, 지혜의 칼을 찾겠다는 대용맹심을 일으켜 견성성불을 위해 정진하는 곳이 심검당인 것입니다.

선방에서 조용히 앉아 참선을 하다보면 갖가지 번뇌망상이 불꽃처럼 일어납니다. 오고 가는 자취도 없이 번뇌가 끊임 없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번뇌를 따라가다 보면 모르는 사이에 해태심이 생겨나게 되고, 화두(話頭)를 거두어 잡기는커녕 혼침(昏沈)과 산란(散亂)만이 분분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참된 수행과는 멀어지고 맙니다. 이때 필요한 것 이 긴고주입니다. 이러한 때 긴고주를 외워야 합니다.

무엇이 긴고주일까요?

흐리멍텅한 상태의 혼침과 산란한 마음을 단칼에 요절낼 결심, 그 주문을 외워야 하는 것입니다. 즉, 이 몸으로 이번 생(生)에 기필코 견성(見性)하여 생사대사(生死大事)를 해결 하고야 말겠다는 다짐과 함께 또렷이 화두를 들고 정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긴고주를 외우면서 거듭거듭 삼매 속으로 나아갈 때 반야의 취모검은 눈앞에 나타나게 되고, 바로 우리가 앉아 있는 이곳에 바라밀다, 해탈의 세계가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佛法在世間 不離世間覺 離世覓菩提 猶如求兎角
불법재세간 불리세간각 리세멱보리 유여구토각

불법은 세간 속에 있으며, 세간을 떠나지 않고 깨달음이라. 세간을 떠나 따로 깨달음을 구하는 것은  마치 토끼의 뿔을 구하려는 것과 같도다.

마하반야바라밀을 성취하고자 하거든 마땅히 용맹정진의 마음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세간을 떠나, 번뇌망상이 떠난 곳에서 해탈을 구하거나 다른 이상적인 세계를 찾아가려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머물러 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파라의 세계를 완성 시켜야만 합니다. 현장법사의 설법처럼 여섯 도둑(六賊)을 되돌려서 육바라밀을 이루어가야만 합니다.

육적은 눈[眼] · 귀 [耳] · [鼻] · 혀 [舌] · 몸[身] · 마음 [意]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 [六根]이 해탈을 저해하는 갖가지 죄를 짓게 되므로, 이를 여섯 도둑에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 감각기관을 바르게 쓰면 얼마든지 해탈을 보호하는 훌륭한 일들을 이루어낼 수가 있습니다. 눈으로는 모든 것을 잘 관찰할 수 있는 천안통(天眼通)을 이루고, 귀로는 세간의 모든 소리를 잘 들을 수 있는 천이통(天耳通)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과거 · 현재 · 미래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숙명통(宿命通), 남의 마음을 읽는 타심통(他心通), 어디에나 마음대로 갈 수 있는 신족통(神足通), 모든 번뇌를 끊는 누진통(漏盡通) 등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이 색에 현혹되고 귀가 소리에 미혹되고 코가 냄새를 좇아가고 혀가 맛있는 것을 찾고 몸이 감촉에 휘말리고 마음이 분별경계에 집착하는 상태에서 벗어나, 눈으로 깨닫고, 귀로 깨닫고, 코로 깨닫고, 혀로 깨닫고, 몸으로 깨닫고, 마음으로 깨닫게 된다면, 우리의 모든 삶은 곧바로 보시(布施) · 지계(持戒) · 인욕(忍辱) · 정진(精進) · 선정(禪定) · 반야(般若)의 육바라밀행으로 탈바꿈되어지는 것입니다.

육바라밀!

남을 대할 때는 주는 마음으로 대하며, 보수(報酬)가 없는 일을 연습하여라. 
이것이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이니라.


미안(未安)에 머무르지 말고, 후회하는 일을 적게 하여라.
이것이 지계바라밀(持戒波羅蜜)이니라.

모든 사람들을 부처님으로 보라. 부처님께서 욕(辱)하신다면 배울 일이요 깨우쳐 볼 일이다. 
이것이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이니라.


이 세 가지는 사람으로서 세상을 대하는 법이니 옳거든 부지런히 실행하라.
이것이 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이니라.

이러한 과정으로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서 마음이 안정되나니,
이것이 선정바라밀(禪定波羅蜜)이니라.

이것이 익숙해지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따라서 지혜가 나고 지혜가 있으니 일에 대하여 의심이 없나니라.
이것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니라.

마하반야바라밀!

불자들이여, 우리 모두 마하반야바라밀을 생활화하여, 우리 모두가 갖추고 있는 ‘영원생명 · 무한능력’의 마하심을 개발합시다. 참선 · 염불 · 주력(呪力) · 간경(看經), 그 무엇이라도 좋습니다. 우리의 흩어진 마음을 한군데로 집중하고 모아서 삼매(三昧)를 향해 나아갈 때, 우리들의 삶은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바라밀다! 해탈의 세계란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용맹심을 일으켜 마음의 산란과 혼침을 다스리며 끊임없이 정진할 때, 우리의 눈앞에 대자유요, 대자재요, 대자대비가 충만된 불국정토가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 모두 부지런히 정진합시다. 오직 한 마음 돌이키며 용맹정진 할지니…

나무마하반야바라밀.

일타 큰스님 법문 글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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