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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담소

중도(中道)를 따르라

by 파장波長 2024. 3. 6.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수목나 존자가 있었습니다.

존자는 원래 거부 장자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존자가 태어 나자마자 억만 금의 재산을 물려주겠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해서 이름을 수목나, 곧 문억(聞億)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어찌나 귀엽게 컸든지 땅을 밟은 적이 없어 발바닥에 털이 날 정도였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아이가 철이 들자 부처님을 친견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부처님이 계신 곳까지 운하를 파고 배를 띄워서 수목나로 하여금 부처님께 가서 법문을 듣게 하였습니다. 수목나는 부처님의 법문을 듣는 순간, 공부하여 도를 이루려면 승려가 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느껴 굳은 결심과 함께 출가를 하였습니다.

수목나 존자는 열심히 정진하였습니다. 어찌나 열심히 정진하였던지 그 곱던 발바닥이 터져서 마치 짐승을 잡아 끌고다닌 것처럼 절 마당에 피가 묻어 있기도 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를 보고 그를 위해 신발을 신어도 좋다는 법을 제정하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쓰고 공부를 해도 별로 진전이 없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나는 돈과는 인연이 많지만 도와는 전혀 인연이 없나 보다.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 그 많은 돈으로 스님들을 위하여 길을 닦고 집을 짓고 많은 공양을 올리는 것이 좋겠다.’

이때 부처님께서는 수목나 존자의 마음을 읽으시고 그의 앞에 나타나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수목나야, 너는 마을에 있을 때 무엇을 즐겨 했느냐?”
“거문고 타기를 즐겼습니다.”
“거문고 줄이 너무 팽팽하면 어떻게 되느냐?”
“거문고 줄이 끊어집니다.”
“거문고 줄이 너무 느슨하면 어떻게 되느냐?”
“줄이 늘어지면 올바른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잘 들어라. 공부도 그와 마찬가지다. 너처럼 억지로 애를 쓰며 공부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발바닥이 터지고 몸이 피로해져서 쓸데없는 생각이 더해질 뿐이다. 마치 거문고 줄을 고르는 것과 같이 공부하되 너무 팽팽하게 해서도 안 되고 너무 느슨하게 해서도 안 되느니라. 모든 신묘한 법이 그 가운데 있으니 잘 명심하여라.”

수목나 존자는 이 법문을 듣고 크게 깨달아 자기의 몸과 마음에 맞게 공부를 해서 아라한과를 증득했습니다.

공부하는 데 있어서 가장 금물은 퇴굴심(退屈心)과 용이심(容易心) 입니다. 만일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마치 천 길 벼랑을 줄을 타고 올라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일으켜서 “아이구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절대로 못한다.” 하는 퇴굴심을 일으킨다거나 그 반대로 자주 귀에 익은 이야기라 해서 “그까짓쯤이야.” 하는 용이심을 내서도 안 됩니다. 법문을 들을 때뿐만 아니라 세상사를 경험함에 있어서도 퇴굴심이나 용이심이 깊으면 이루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다음과 같은 옛 노래가 있습니다.

빠른 결과도 바라지 말고, 
나태한 마음도 내지 말라.
비워야 담을 수 있으니  
슬금슬금 가다 보면 
해돋을 때 아니올까.

부지런히 간다고 해서 해가 빨리 뜹니까? 느릿느릿 간다고 해서 해가 늦게 뜹니까? 해는 뜰 때가 되면 절로 뜹니다. 세상 만사에 조급증도 품지 말고 나태심도 가지지 말아야 합니다. 어떠한 일이든 그 일의 성패 여부는 바로 조급증과 게으름 두 가지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수행도 마찬가집니다. 하루아침에 깨달음을 얻겠다거나 아니면 내일 모레… 하며 미루면 결코 소기의 목적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거문고 줄이 너무 팽팽하거나 너무 느슨하면 절대로 제 소리가 나지 않듯이 우리의 수행도 중도(中道)를 취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 아야 합니다.

일타 큰 스님 법문글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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