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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교리

붓다의 인간관 ① 결정론적 해석의 부정

by 파장波長 2022. 4. 14.

결정론적 해석의 부정

 

붓다께서 지금으로부터 약 2,600여 년 전 인도의 북동부 지역에 위치한 카필라바스라는 작은 왕국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인도의 정치, 경제, 문화, 종교의 중심지는 이 작은 왕국과 거의 인접해 있었다고 여겨지는 마가다 국과 코살라 국이었습니다. 마가다 국은 지금의 인도 비하르 주정부가 있는 곳이고, 코살라 국은 웃타르 프라데슈 주정부가 위치한 곳으로서 이들은 카필바라투스의 현재 위치인 네팔 남부와 접경한 지역입니다. 따라서 출가를 결행한 붓다는 가까운 곳에 위치한 종교와 문화의 중심지로 부터 쉽사리 당시 인도의 종교 사상계의 흐름을 가장 확실하게 경험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붓다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스스로 경험한 당시의 종교 사상에 대해서 자주 말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은 유신론과 숙명론과 유물론 셋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유신론은 인간과 세계의 모든 것이 절대적인 창조신의 의지에 의해 창조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데 비해 숙명론과 유물론은 그러한 신이 존재를 거부합니다. 신보다는 숙명적인 원리에 따라 인간의 삶과 세계의 전개 등이 지배되고 좌우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숙명론입니다. 그리고 유물론은 그러한 숙명적 원리도 받아들이지 않고 인간과 우주의 모든 것은 오직 물질의 우발적인 결합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당시의 세 가지 종교 사상은 서로가 서로를 용인하지 못하면서 격렬하게 대립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 가지 종교 사상들은 한 가지 점에서 대단히 일치하고 있음을 붓다께서 발견했습니다. 바로 인간관에서 그들은 일치했습니다.

 

유신론의 경우 인간의 삶은 신의 의지에 의해 결정된어 있다고 봐야 하고, 숙명론의 경우에도 인간의 삶은 운명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유물론을 택할 때에도 그것이 극단적인 유물론이든 부대현상론적인 유물론이든 삶의 횟수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 삶은 결국 물질의 구성에 따라 결정된다고 봐야 합니다. 붓다는 이처럼 당시의 인도 사상을 살펴보면서 묘하게도 모든 사상들이, 인간의 삶이 무언가 인간 외적인 것에 통제되고, 결정되어 있다고 보는 데 일치함을 발견한 것입니다.

 

물론 인도의 유신론인 바라문 사상에서 인간의 의지가 전적으로 부정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인도의 자이나교에서는 더욱 적극적으로 인간의 의지가 존재함을 주장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인간 존재를 대하는 마지막 자세는 결정론적이었으니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먼저 그 누구도 원천적으로 어쩔 수 없었던 당시의 사성계급을 들 수 있습니다. 노예의 신분인 자는 자기의 의지와 관계없이 평생을 노예로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태어날 때 노예계급으로 태어난 자는 그것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바라문 계급으로,  왕족 계급으로, 서민 계급으로 태어난 자는 그것으로 어쩔 수 없이 바라문으로 왕족으로 또는 서민으로 정해진 삶을 살아야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일으키는 의지라는 것은 결정된 길에서 벗어나는 것이 못 됩니다. 단지 그 결정된 길을 살려는 의지일 뿐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더 이상 순수하고 엄밀한 의미에서의 의지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절대적인 자유 선택성이 그곳에서는 상실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도의 사회적인 계급 구조 속에서 인간의 삶이 결정된 것으로 나타나고, 또한 인간 존재는 결국 변화에 종속되어 있어 죽음이라는 한계 상황을 최종적으로 겪어야 합니다. 그것은 전혀 의지적 선택이 아닙니다. 실로 죽기를 선택하는 것은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일은 아닙니다. 우리가 선택하는 것은 오로지 사는 것입니다. 이처럼 살기를 바라고 살기 위해서 인간의 모든 활동이 전개됨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삶은 죽음으로 끝나고 마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먼저 인도 전통의 바라문교는 유신론으로, 이 사상은 모든 것이 신의 뜻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전제를 세우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바라문교의 ‘사트-전변설'(Sat 轉變說)을 살펴보면 “태초의 사트가 많아지려는 욕심을 일으켜 불과 물과 식물을 내놓고 이 셋이 화합하여 복합물들이 되고 여기에 사트가 생명을 지닌 개아(個我)의 상태에 들어가 일체 현상계가 전개된다.” 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정신 또는 의지는 신의 정신 또는 영혼이 목숨을 지닌 개체 자아의 형태로 나뉘어진 것이므로 이미 더 이상 신의 의지를 거스를 수 없는 것” 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의지라는 것이 있는 듯하지만 결국 우주와 인생은 결정된 것이라고 결론 내리는 것입니다. 

 

숙명론은 인도 자이나교의 사상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우리 의지를 독자적인 것으로 꽤 비중있게 긍정했다. 자이나교에서는 태초로부터 우리의 정신 실체와 물질 실체가 끝없이 상호 대립적으로 관계하면서 쉼없이 활동을 일으키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이 자이나교의 업(業)이다. 그런데 이 업은 그 흔적 또는 세력을 정신 실체의 위에다 남기게 된다. 그와 같이 영겁의 세월 동안 정신 실체와 물질 실체의 활동은 있어왔고, 그 활동의 세력이 정신 실체 위에 남김없이 쌓이어 결국 현재의 정신은 그 위에 태초로부터 지었던 업의 세력으로 잔뜩 덮여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이것을 업의 총화라고 표현한다. 즉 ‘자유로움을 제압하여 결정된 흐름에 종속시키고 있다.’ 는 다분히 역설적인 이론을 주장한 셈이다.

 

그리고 유물론자들은 의지를 어떤 경우 아예 인정하지 않음으로 해서 어려운 논점을 처음부터 피하고 있다. 곧 극단적인 유물론자들은 의지 또는 정신이란 물질 입자들의 미세한 결합에서 생기는 미묘한 물질적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우리 삶은 물질의 구성 상태에 따라서 그 상태가 전개되는 데에 입각하여 그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다는 설명을 내 놓는 것이다. 또한 이떤 유물론자들은 인간 정신의 비물질적 특성을 인정하는 듯하면서도 그 정신에서 의지적 자유성을 배제해 버림으로써 또한 문제를 피해 가고 있다. 의지가 없으니 처음부터 삶은 물질이라는 외적인 요인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다는 이론이다.

 

이러한 인도 사상계의 결정론적 인간 해석에 대하여 부처님은 단호히 비판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그 무엇에도 예속될 수 없는 지극히 자유로운 존재인을 천명하고 있다. 인간을 제약하는 것은 오직 인간 스스로 일 뿐이지 그와 다른 어떤 외적인 결정요인도 인정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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