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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교리

불타관 ⑤ 삼먁삼보리, 반야바라밀

by 파장波長 2022. 4. 30.

벽지보리와 삼막삼보리

부처님이란? 깨달음을 얻은 분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깨달음을 ‘아뇩다라삼막삼보리’❶라고 합니다. 아뇩다라삼막삼보리에 대해 논하는 것은 부처님에 대해 살펴보는 또 다른 핵심적인 방향이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먼저 아뇩다라삼막삼보리가 단 한 번에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선 아뇩다라삼막삼보리는 범어 아눗타라삼약삼보리(anuttarasamyaksambodhi)라고 하는데 그 뜻은 '최상의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 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최상이라는 말은 그 하위의 것이 있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제 경전에서는 일종의 하위의 깨달음에 해당하는 것을 설하고 있습니다.

1. 벽지보리의 존재

우리가 알고 있는 붓다는 위없는 깨달음을 얻는 사람이었고, 무상정등각자(無上正等覺者)의 덕성을 같고 계신분입니다. 그런데 이와 함께 경전에서는 벽지불(辭支佛)❷이라는 부처님을 설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 부처님이 있다. 하나는 여래, 응공, 정등각자이고, 다른 하나는 벽지불이다.”⟪南傳 增支部 二法部 ⟫여기서 프라티예카 붓다(Pratyeka buddha) 의 소리 옮김인 이 벽지불은 일찍부터 연각(緣覺) 또는 독각(獨覺)이라고 번역하였던 것인데 그 교리적 위상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꽤 까다롭습니다. 왜냐하면 벽지불은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은 일반적인 부처님을 언급하는 명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역시 '부처님' 이라는 말을 끝에 붙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벽지불이란 어떤 부처님일까요?가.

"벽지불은 중생들 가운데 고갱이이며, 떨림 없는 분들이며, 벽지보리(하나에 대한 깨달음)' 에 도달한 분들이다. 화살을 뽑았고, 재생(再生)으로 이끄는 번뇌가 다하셨다. 괴로움의 뿌리를 잘랐고 죽음의 힘에 정복되지 않고 승리하신 분들이다. 교만을 도려내었고, 얼룩을 벗었고, 지고의 용기를 지녔고, 최후의 몸을 지니신 분이다.”(南傳 中部《이시길리經》)

여기서 보면 '벽지보리 (하나에 대한 깨달음)' 에 도달한 자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벽지불의 경우 깨달음 중에서도 벽지보리를 얻은 자라고 명시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경전에서 벽지불에 대하여 벽지보리와의 관계 속에서 누누이 언급하고 있음을 볼 때 삼삼보리보다 하위의 깨달음은 분명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서 우리는 삼막삼보리를 단번에 성취한다기 보다는 벽지보리를 경유하여 삼막삼보리를 성취한다고 봐야 하고, 이 두 가지 깨달음을 정확히 파악함으로써 붓다에 대한 이해도 보다 확실해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깨달음의 세 가지 범주 

그러면 먼저 이 두 깨달음의 같은 점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① 깨달음이란 아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단순한 느낌이 아닙니다. 그것이 단순한 느낌이라면 결코 보편성과 타당성을 띠지 못합니다. 여인이 겪는 출산의 고통을 남자들이 결코 알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붓다께서는 깨달음을 아는 것이라고 규정합니다. 고도로 정밀한 지적 체계가 깨달음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지적인 체계이므로 말로 표현 할 수 있고, 그 말을 통하여 객관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바탕을 얻게 되는 것입ㄴ다.

② 깨달음은 보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아는 것이라고 해서 그것이 단순한 지적 관념의 연결에 그치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그것은 모습을 같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깨달음은 어떤 모습을 전제로 고도의 지적 체계를 세우고 있는 것이므로 단순한 관념의 유희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구체적인 모습에 대한 표현이고 그 모습은 수행자의 수행의 정도에 따라 밝혀지는 것이므로 의미있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붓다께서 말씀한 법이 가지는 그러한 모습을 법상(法相)이라고 합니다. 바로 그 법상을 보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③ 깨달음은 타동사로서 무언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깨닫는 것일까요? 바로 궁극적 참존재를 깨닫는 것입니다. 참존재란 우선 참 존재라는 표현부터 이해해야 합니다. 참존재는 불생불멸의 특징이 있습니다. 결코 무에서 생하고 무로 멸하는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또한 참존재가 단순한 관념이 아닌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무언가 정해지지는 않지만 어떤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불생불멸의 참존재를 전통적으로 실상(實相)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 실상에는 수준의 높고 낮음에 따라 몇 개의 구별이 있습니다. 깨달음의 완성은 여러 실상 중에서도 궁극적 실상을 깨닫는 것이라고 규정하게 됩니다. 이러한 궁극적 참존재들의 체계를 전통적으로 실상문(實相門)이라고 부릅니다.

④ 우리는 실상을 발견하면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붓다께서는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한 불생불멸의 실상이야 말로 참으로 존재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은 생하고 멸하거나 나고 죽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우리가 현재 경험하는 것은 생멸하는 세계인데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불생불멸의 실상이라는 것은 대단히 모순되어 보입니다. 붓다께서는 우리의 생멸계란 실상에 대한 망집, 착각, 배반을 시작으로 이탈되어 나온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탈되는 과정을 정확히 깨달았으니, 이처럼 실상으로부터 이탈되는 과정도 깨달음의 내용이 됩니다. 전통적으로 이 과정을 연기문(緣起門)이라고 불렀다.

⑤ 우리의 현실이 생멸의 괴로움으로 끝나는 것이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불생불멸의 실상에서 이탈되어 나온 것이므로 우리는 그곳으로 되돌아 갈 수 있고 또한 되돌아 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냥 돌아가고 싶은 마음만 가진다고 돌아가게 되는 것은 아니라 수행을 해야합니다. 이러한 수행의 체계를 전통적으로 수행문이라고 불러 왔습니다. 붓다의 깨달음은 바로 이 수행에 대한 깨달음까지 포함합니다.

3. 열반, 반야바라밀다, 여(如)

‘생멸하는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고(緣起) 체계적인 수행을 함으로써 우리는 불생불멸의 실상계로 되돌아 가게 된다.' 는 것이 바로 깨달음의 기본적인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돌아 간 세계로서 경전에서 널리 이야기 되는 첫번째 세계가 바로 열반❹의 경지입니다. “열반에는 죽음도 없고 재생도 없고 감도 없고 옴도 없다. 오직 진실한 즐거움이 그곳에 있다.” (南傳小部 《自說經》)라고 설해진 것이 대표적입니다. 그러면 이 열반을 증득하는 깨달음이 바로 삼먁삼보리일까? 그렇지 않습니다. 열반을 증득한 것은 벽지보리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열반은 사제법의 궁극적 경지이면서 십이연기설의 기본적인 근거가 되고 있는데 십이연기설에 보다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십이연기와 관계하는 위치가 바로 벽지불이므로 열반은 벽지보리의 내용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열반이 더 이상 궁극적 경지가 아니라면 어떤 것이 더 궁극적인 경지일까요? 경전에서 우리는 반야바라밀다❺ 또는 구경열반 등으로도 표현되는 세계를 일단 만나게 됩니다. 곧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머무나니 마음에 가림이 없고 두려움이 없고 뒤바뀐 생각을 넘었고 구경 열반을 성취하였다. ⟪般若心經⟫” 여기서 구경열반이란 궁극적인 반이라는 뜻으로 열반에도 초기의 것과 궁극적인 것과의 구별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우리는 한 번의 열반이 있고 난 뒤에 그것을 넘어서 새로운 깨달음의 세계가 점점 펼쳐진다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경열반 또는 반야바라밀다의 경지는 마지막 경지라고 볼 수 있을까요? 경전에서는 새로이 주목해야할 실상의 세계를 언급하니 그것은 곧 그러한 것(여(如)' 의 세계입니다. “제법의 실상은 오직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능히 다 알 수 있는 것으로 모든 법은 그러한 정체, 그러한 존재 방식, 그러한 표현, 그러한 특상, 그러한 자성을 지니고 있다.(梵本 《법화경 法華經》구편품 方便品).” 여기서 그러한 정체 내지 그러한 자성은 그러한 것' 이라는 최종적인 경지에 대한 자세한 표현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오직 알 수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것은 앞서 보살이 파악했던 반야바라밀다와 구경열반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번째로 '그러한 것' 이라는 실상의 세계를 말해도 좋습니다. 그럴 때 앞서 말한 아뇩다라삼막삼보리의 대상이 바로 이 여如(그러한 것)'가 아닌가 합니다. 최종적인 것은 역시 ‘반야바라밀다’ 이기보다는 '여' 이고 아뇩다라삼막삼보리는 최상의 깨달음이므로 최상의 깨달음의 대상은 최종적인 '여' 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 부처님이란 연기의 세계에서 수행을 통하여 실상을 깨닫되 열반의 경지를 먼저 깨닫고[벽지불 壁支佛] 이어 반야바라밀다의 경지를 경유해 그러한 것'의 경지를 깨달은 자(무상정등각자 無上正等覺者)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깨달음을 얻으면 무량한 수명 속에서 열여덟 가지 덕성(십팔불공법)❻을 갖춘 채 중생 교화를 계속하는 영원한 부처님이 된다. 고 할 수 있습니다.


Note :

❶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는 붓다의 완전한 깨달음을 의미하는 불교교리.무상정변지·무상정등각 으로 산스끄리뜨어 아누따라삼약삼보디를 음사한 것으로 ‘위없는 올바르고 두루 한 깨달음, 또는 지혜’라 번역된다. 무상정변지(無上正遍智),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으로 한역되며, 빠알리 원어도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이라 번역된다. 한문의 음사표기는 아누다라삼막삼보제(阿耨多羅三藐三菩提)이지만, 속화된 발음의 변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 읽는다. 부처님의 완전한 깨달음을 가리킨다.
『금강경』의 「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에서 ‘붓다가 설하시길 붓다가 연등불이 계신 곳에서 무유법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佛於然燈佛所 無有法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는 구절을 볼 수 있다. 『아함경(阿含經)』 계열의 『초전법륜경(初轉法輪經)』에서 붓다가 사성제를 통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설한 장면을 비롯해 경전에서 무수히 언급되고 있다.
❷벽지불(辭支佛)은 연각(緣覺)이라고도 말하며, 스승 없이 혼자 깨닫는 사람이라고 해서 독각(獨覺)이라고도 한다. 벽지불이란 어느 한 쪽에 치우쳐 집착한다는 뜻. 벽지불은 부처님과 비슷한 위신력(威神力)을 지녔으나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깊은 원력(願力)이 없고 보시행(布施行)을 닦지 않기 때문에, 인연이 엷어 세간의 등불이 되기 어렵다.
❸실상(實相)이란, 생멸무상(生滅無常)의 상(相)을 떠난 만유(萬有)의 참모습으로 진여(眞如)와 본체(本體)인 동시에 진제(眞諦)인 공 (空)을 말한다. 다시 말해, 잡을 수 없는 찰나의 흐름 속에서 비추어 볼 때, 일체의 상(相)은 오고 감이 없으며,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니니, 이것을 깨달아 아는 것이 중도 (中道)의 지혜이며 열반이다.
❹열반(涅槃)이란, 산스크리트어 nirvana의 nir-은 끈다는 뜻이고, -vana는 불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본래의 뜻은 사후(死後)가 아닌 현세에서의 온갖 고통과 욕망 그리고 번뇌의 불이 꺼진 상태를 의미한다. 이를 달리 말하면, 열반이란 도(道)를 완전히 이루어, 모든 고통의 번뇌가 끊어진 해탈의 경지로서 우주의 마음이다. 그러나 소승(小乘)과 대 (大乘)의 열반에 대한 해석이 다소 다르다. 즉 소승 (小乘)에서는 명상을 통해 중생들의 이기심과 고해(苦海)의 사바세계를 벗어남으로써만 열반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데 반해, 대승 (大乘)에서는 깨침과 생사불이(生死不二) 그리고 대비심(大悲心)만이 모든 중생을 열반에 이끌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용수의 중관론에서는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버림도 없고, 도달하는 곳도 없고,  끊을 것도 없고, 영원한 것도 없고, 생멸도 없는 것, 이것을 일러 열반이라 한다.’ 이렇듯 알고 보면 열반이라는 것도 자성이 있거나 영원불변한 그 어떤 것이라 말할 수도 없는 무변광(無邊光)에 대한 허공과 같은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한자문화권에서는 열반을 적멸(寂滅), 멸도(滅度), 원적( 圓寂)이라 번역한다. 그런가하면 무위(無爲), 무작(無作), 무생(無生),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고도 번역한다. 그러나 자아(自我)에 대한 고집이나 열반을 포함한 상(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열반과의 인연은 접어야 한다. 그리고 열반에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가 있다.  1) 자성열반(自性涅槃) 2)유여열반 (有餘涅槃) 3) 무여열반(無餘涅槃) 4) 무주열반 (無住涅槃)
❺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는 대승불교의 근본 목표다. 곧 대승은 반야바라밀다를 목표로 실천 수행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반야바라밀다가 부처님이 깨달음의 체험을 통해 얻은 불교의 핵심근거라는 확신이 담겨져 있다. 바라밀다라는 말은 반야와 바라밀다의 합성어이다. 반야는 프라즈냐(Prajn)의 음사어로 지혜라는 말이며, 사물을 여실(如實)하게 올바로 아는 능력이다.
바라밀다는 파라미타(Pramit)의 음사어로, 그 분석법에 따라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파라미(Prami)-타(t)로 분석하면 ‘완성’, ‘성취’라는 뜻이 된다. 그리고 파람(Pram) -이타(it)로 분석하면 ‘피안에 갔다’라는 의미로 ‘도피안(到彼岸)’으로 번역된다. 따라서 반야바라밀다는 ‘지혜의 완성’과 ‘지혜로써 피안에 도달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이러한 의미를 갖는 반야바라밀다는 대승불교도의 근본목표로서 강조되고, 또한 대승의 보살이 실천하는 여섯가지 실천덕목인인 육바라밀다 가운데 하나로 나타난다. 
여섯 가지 실천덕목은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반야(般若)의 여섯이다. 따라서 육바라밀다란 각각의 덕목을 실천함으로써 대승보살의 공덕을 완성한다는 의미이다. 보시는 주는 것으로써 아낌없이 준다는 의미이다. 지계란 계율을 지키는 것, 인욕이란 참고 견디는 것, 정진이란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 선정은 마음을 깊이 모으는 것, 반야란 올바로 정확하게 아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반야를 제외한 다섯가지 덕목의 실천에는 반야바라밀다가 근본이 되고 있다. 곧 주는 것은 보시이지만, 보시를 행함에 있어 준다는 생각, 무엇을 주었다는 생각, 그것이 공덕이 된다는 생각 등 일체의 집착을 일으키는 마음가짐을 떠나는 지혜를 바탕으로 보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야바라밀다가 근본이 될 때 각각의 덕목은 완성되고, 피안으로 도달케 하는 것이다. 

❻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이란, 부처님만이 가지고 계시는 열여덟 가지 특징으로  1)망상(妄想)을 여읨. 2) 말씀에 실수가 없음. 3) 집착이 없음. 4) 평등함. 5) 항상 마음이 집중 되어 있음. 6) 일체를 앎. 7) 중생구제에 주저함이 없는 의지. 8) 멈춤 없는 노력. 9) 다른 부처님들과 일치하는 가르침. 10) 완전한 지혜. 11) 완전한 해방 12) 완전한 통찰. 13) 지혜로운 행동. 14) 지혜로운 말씀. 15) 지혜로운 마음. 16) 과거에 대한 지식. 17) 미래에 대한 지식. 18) 현재에 대한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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