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붓다교리

붓다의 진리관 ① 진리성의 주장

by 파장波長 2022. 4. 30.

진리성의 주장과 근본 입장

빛의 속도로 앞을 향해 달리던 기차에서 다시 빛의 속도로 앞을 향해 공을 내던졌다고 가정해 보자. 이때 던져진 공의 속도는 정지한 사람이 볼 때 얼마일까? 빛의 속도로 달릴 기차도 있을 수 없고 빛의 속도로 공을 내던질 사람이나 공도 원리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이 물음의 핵심은 (빛의 속도)+(빛의 속도) = (얼마)' 인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쉽사리 빛의 2배 속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1+1=2라는 수식을 우리는 바탕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1+1=2! 우리는 이 수식을 신앙한다. 거의 대부분이 이 수식의 문제점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간다. 그리고 살아가는 데 별다른 불편도 없다. 가히 수학적인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물리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답이 틀렸음을 알 것이다. 정답은 역시 빛의 속도 일 뿐이다. 1+1=2라는 수식이 여기서는 적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1+1=1이 되어 버리는 이상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1+1=2라는 수식은 현실의 좁은 범위를 살아가는 데 그냥 불편없이 사용된 편의상의 것이었을 뿐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존재나 우주의 끝으로 생각되는 곳이나 물질의 가장 깊은 곳과 같이 궁극적인 것에는 잘 들어맞지 않는 면이 분명 있다. 너무나 진리인 듯 하였던 1+1=2라는 기본적인 수식마저, 어떻게든 보완을 필요로 하는 결코 절대적인 진리는 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은 단지 물리학자나 수학자들의 상황은 아닌 듯하다. 종교인들에게도 암시하는 바가 크다. 각각의 종교인들이 절대 적으로 신앙하고 있는 자기 종교의 진리도 어떤 상황에서는 전혀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한 곳 이라도 나타난다면 그것은 이미 부분적인 진리일 뿐 궁극적인 진리는 못 된다. 이처럼 궁극적인 진리가 아니라면 적지 않은 문제가 예견된다. 진리가 아닌 것을, 결국 그 종교인은 진리라고 잘못 신앙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종교에서의 잘못된 신앙은 물리학자나 수학자가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종교인의 신앙은 자신의 삶과 죽음이 전제 된 것이기에 그렇다. 나아가 내세(來世)라는 것이 있다면, 그 자신의 세세생생을 전제하는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물리학자나 수학자의 잘못 된 판단은 기껏 그의 한 생애에 영향을 끼칠 뿐이지만 종교인의 잘못된 신앙은 그의 영원을 못 쓰게 만들 위험성이 있다. 

또한 종교인의 신앙은 결코 개인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대중 속으로 확산된다. 반드시 다른 개인과, 그 신앙을 전제로 합치든지 아니면 대립하고 만다. 그 범위는 가족 단위일 수도 있고 크게 국가와 국가 사이의 관계일 수도 있다. 잘못된 신앙 때문에 얼마든지 큰 환난이 일 어날 수 있음을 예견할 수 있다.

그리고 물리학자와 수학자의 판단은 얼마든지 고쳐칠 수 있다. 학문의 세계란 열려 있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그러나 종교인의 신앙은 잘 잘못을 가리지 않고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잘못된 신앙을 폐쇄적으로 집착 할 때 개인이나 그가 소속된 사회 전체에는 파멸의 씨앗이 잉태되어 있 다. 따라서 우리는 겸손하고 진지한 자세로 자신의 종교를 통해 파악한 신앙의 핵심인 진리 주장에 대해 검토해 봐야 한다. 신앙의 문을 열고 첫 걸음마를 시작하는 어린아이의 심정으로 되돌아가 무엇이 진리일까를 다시 물어 봐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부처님이 진리성 주장에서 내세우는 근본 입장을 음미하지 않을 수 없다.

무른 어떤 견해가 진리이려면 그것은 보편성과 타당성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 부처님의 기본 입장이었다. 만일 어떤 현상은 잘 설명되지만 합리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조금이라도 나온다면 그 견해를 진리라 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당시 인도의 종교계에는 크게 유신론과 숙명론 및 유물론적 진리관이 존재하 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인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현실 중의 하나인 죄악과 의지라는 현상을 설명하지 못하므로 보편타당성이 충족되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유신론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무릇 모든 것이 유일신의 뜻에 의해 이루어질 경우 인간이 죄를 지을 때 그 죄의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 할까? 그것은 당연히 신의 책임으로 돌려야 한다. 왜냐하면 그 죄도 신의 뜻으로 지어졌다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인간에게 죄가 있다는 것은 분명 모순이다. 인간의 자유의지도 유신론에 입각하면 더욱 큰 모순이다. 모든 일이 신의 뜻대로 이루어진다면 인간에게 이렇게도 하려 하고 저렇게도 하려는 의욕이나 욕심은 애당초 발생조차 할 수 없다. 인간의 의지를 부정하려 하겠지만 의지가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자명한 사실로 인식된다고 보는 것이 불교의 입장이다.

운명론과 유물론도 이 문제에 있어서 설득력 있는 답변을 주지 못한다. 모든 것이 숙명적으로 또는 물질 상호간의 우발적인 결합에 의해 일어난다면 우리의 죄도 그런 것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우리 인간의 잘못을 물을 수는 없을 것이다. 더욱이 자유로운 인간 의지의 존재는 생각 조차 할 수 없다.(南傳 支部度經》), 이렇게 볼 때 앞의 세 가지 견해는 비록 우주의 많은 부분을 설명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인간의 죄악과 자유의지라는 중요한 현상에는 결코 타당성 있게 적용되지는 못하므로 진리라고 할 수 없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또한 어떤 견해가 진리이려면 그것은 검증 가능성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 부처님의 기본 입장이다. 즉 부처님은 진리의 체험을 중요시한다. 어떤 주장도 그것을 스스로의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을 것을 자못 강조한다. 유신론의 경우 어떤 경로를 통해서도 유일의 브라만 신(Brahman) 을 본 자가 없다면 그 실재성은 문제된다고 지적한다.(南傳 長部三明 》), 그리고 인도 당시의 숙명론은 정신 실체(jiva)와 물질 실체(pudgala)가 원인으로 주장된다. 여기서 정신 실체는 불생불멸의 영속체로서 태초로부터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한번도 생멸함이 없는 실체라면 그러한 정신은 당연히 태초의 상태에 대한 기억을 동반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누구도 태초에 대한 기억을 지니지는 못하였다. 심지어 한 생전에 대한 기억조차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숙명론적인 견해도 검증 불가능한 진술에 불과하다. 인도의 유물론도 마찬가지다. 태초 에 진실로 물질적인 요소부터 시작되었는지 그 이전에 정신과 물질 이전의 상태인 제3의 실체가 있었는지에 대해, 물질은 그 자체 내에 어떤 정보도 갖고 있지 않다. 결국 유물론도 그 진실성을 검증할 길은 없다. 이처럼 부처님은 당시 모든 인도의 종교 또는 사상들이 검증 가능성을 충족시키지 못하기에 궁극적인 진리라고 할 수 없음을 지적하셨던 것이다. 

부처님은 남전 중부 경전 《사자후경 (獅子风經)》에서 “어떤 종교 사상도 궁극적인 것은 다음과 같은 모습을 보여야 하니, 즉 일관된 것이고, 탐착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떠난 것이고, 합리적인 것이고 편듦과 대립함이 없는 것이고 희론을 떠난 것이어야 한다.”고 규정하셨다. 여기서 일관 된 것과 합리적인 것이라는 규정이 바로 타당성에 대한 요청이고, 편듦 과 대립함이 없는 것이라는 규정이 보편성에 대한 요청이고, 희론을 떠난 것이라는 규정이 검증 가능성에 대한 요청으로 보인다. 따라서 진리성 주장에 있어서의 부처님의 기본 태도는 보편 타당성과 검증 가능성을 갖추는 것이라고 정리하면 될 것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