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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교리

중국불교 종파 ④ 정토종(淨土宗)

by 파장波長 2022. 5. 2.

불교의 수행법 중 우리 불교 대중들이 지금까지 가장 넓고 깊게 행하고 있는 것은 바로 염불행(念佛行)일 것이입니다. 부처님을 염(念)하라는 가르침은 “밤길을 가거나 두려운 마음이 들 때에는 부처님을 생각하고, [佛] 법을 생각하고[念法] 승가를 생각하라[念].”는 《잡아함경》 권35의〈염삼보경(念三寶經)〉 법문이나 소승의 오정심관(五淨心觀) 수행 가운데서도 보이지만, 본격적인 염불 정토왕생 사상의 대두는 초기 대승불교 시대에 여러 가지 정토계 경전이 성립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무량수경》《관무량수경》《아미타경》이 중국 정토종의 소의경전이 되었습니다. 《무량수경》은 아미타불이 극락세계를 건설하게 된 원인인 법장 보살의 48가지 큰 서원과 염불을 통한 극락왕생을 설 하고 있습니다. 관무량수경은 주로 극락왕생의 방법으로서 16가지 관법을 설 하며, 아미타경은 아미타불과 서방정토의 장엄을 설하고 그곳에 왕생하는 길로서 아미타불의 칭명염불(稱名念佛)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정토종(淨土宗)의 초조(初祖) 여산 혜원慧遠 (334-416) 도안법사에게 법문을 듣고 출가하는 중국그림

이들을 포함한 갖가지 정토계 경전이 중국으로 전래되면서 남북조 초기에는 석가불 신앙이 일반적이었으나 점차 미륵 신앙이 그와 세력을 겨루게 되고 나아가 남북조 말기에 이르러 북조에서는 관음 신앙이 그 두 신앙을 능가하게 되었습니다. 반면 정토종의 핵심인 아미타불 신앙은 아직 큰 두각을 나타내지 않다가 동진불교계의 지도자 여산 혜원(廬山 慧遠, 334~416)이 일으킨 백련사(白蓮社)를 계기로 집단적으로 전파되었습니다. 혜원을 중심으로 하는 결사에서는 철저하게 계율을 지키며 선정을 통하여 아미타불을 염하며 서방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하였으며 실제 혹은 꿈에서 아미타불을 친견한 이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여산에 들어가 입적할 때까지 30여년간 사회로 나오지 않았던 혜원의 정토신앙 운동은 그의 입적 후 더이상 대중에게 확산되지 못하고 점차 자취를 감추었지만, 혜원의 인품과 엄격한 수행규범은 이후 정토종 신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그를 정토종의 초조(初祖)로 받들게 되었습니다.

혜원 이후 정토의 교리와 수행법을 사회적으로 전파하는데 크게 기여한 이는 담란(臺灣, 476~542)입니다. 그는 일찍이 도교의 불로장생술에 관심이 있었으나 보리류지(菩提流支)로부터 관무량수경을 전수받고서 개종한(530년 무렵) 이후 오로지 정토교리를 전파하는 데 여생을 바쳤는데, 특히 그는 용수의《십주비바사론》에 근거하여 정토교를 이행도(易行道)로 규정했습니다. 이행도란 아미타불을 믿고 그의 원력(願力)에 의해 서방정토에 왕생하는 타력적(他力的) 방법입니다. 이것은 계율을 지키고 선정을 닦아 깨달음을 구하는 자력(自力)적인 수행법인 난행도(難 行道)에 대비되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대중들에게 칭명염불(稱名念佛)하기를 적극 권하였습니다.

담란 사후 중국에는 말법사상이 대두하였습니다. 즉 정법(正法) 500년, 상법(像法) 1000년, 말법(末法) 1만 년이라 하여 부처님 입멸 1500년이 넘는 시기에 해당하는 당시(550년 무렵)를 말법시대로 규정하고 그에 대처하려는 자각과 움직임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러한 말법사상은 이미 천태종의 남악 혜사(515~577)에 의해 비롯되었으나 집단적인 세력으로는 정토교와 삼계교가 있었습니다. 삼계교(三階敎)의 신행(信行, 540~594)은 말법시대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일승이나 삼승과는 다른 궁극적이고 보편적인 불법(普佛法)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곧 일체중생은 본래 부처이므로 모두 공경해야 하며, 한편 그러한 부처의 모습을 가로막는 자기 내면의 악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둘은 본래 얻을 것이 없음(不可得)을 여실히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사상 위에서 그들은 많은 대중들의 지지를 받았으나, 말법시대에 중요한 것은 오직 참된 믿음뿐이며 그 외에 어떠한 가치나 정부도 믿을 수 없다, 고 타종파나 정부까지 모두 적대시하여 결국은 왕권으로부터 탄압받게 됩니다. 이와는 달리 같은 시기의 정토교 지도자였던 도작(道韓, 562~ 645)은 이 시대야말로 모든 중생을 죄악과 부패로부터 구원하겠다고 서원한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며 모든 죄를 참회하여야만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염불을 쉽게 하기 위하여 콩으로 횟수를 세도록 했습니다(小豆念佛), 그리하여 세 현(縣)의 일곱 살 이상 남녀노소가 모두 염불을 하였으며, 어떤 여자신도는 염불하면서 센 콩의 수가 57석이 되었고, 어떤 비구는 80석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이들의 수행은 국민들과 왕실의 지지를 얻어 더욱 교세를 넓혀갈 수 있었습니다.

도작에 이어 정토종의 교의(敎義)를 체계화하여 종단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한 이는 선도(善導, 613~681)입니다. 그는 서방변상도(西方變相圖)를 보고 정토의 문에 들어와 도작 문하에 들어갔습니다. 도작의 입적 후 그는 장안으로 나아가 《아미타경》을 수십 만 권 베껴 써서 배포하고 염불을 권장하는 등 정토교를 널리 알렸습니다. 그의 저술 가운데《관무량수경소》은 종래의《관무량수경》에 대한 해석을 일변시키는 것으로 정토종의 진수를 담고 있습니다. 《관무량수경소》에서 그는 서방정토로 왕생하는 직접적인 실천으로 염불 · 독경 · 일심으로 정토를 관(觀)함과 아미타불의 찬탄과 공양의 다섯 가지를 들고, 다시 그 가운데 염불을 주된 행위로 삼고 나머지는 부수적인 행위로 봤습니다. 그는 특히 염불뿐만 아니라 참회나 예배 등 나머지의 모든 선업을 긍정하였으며, 경전에 대해서도 정토 삼부경 외에《법화경》《금강경》《열반경》《반야경》등도 극락왕생에 효과가 있다고 하여 독송하기를 적극 장려했습니다.

선도 이후 중국에는 새로운 정토교의 흐름이 생겨났습니다. 자민삼장(慈愍三藏) 혜일(慧日, 680~748)과 법조(法照)로 이어지는 맥이 그것입니다. 혜일은 구족계를 받은 후 인도로 건너가 13년간 그곳에 머무르면서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의 설화에 많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중국에 돌아와서는 경전의 번역이 아니라 정토교리를 전파하는 데 여생을 바쳐, 그 공으로 사후에 현종으로부터 '자민삼장' 이라는 시호를 받았습니다. 당시에 혜능의 가르침에 의거하는 선종이 점차 세력을 넓혀 가자 그는 계율과 경전을 경시하며 치우치게 선정을 행하는 선종의 경향을 비판하여 계정혜 삼학의 원만한 실천을 강조했습니다. 나아가 선(禪)과 교(敎) 또는 염불과 선의 조화로운 수행을 강조해서, 그는 선정(禪淨)일치론 내지는 염불선(念佛禪)의 원류라 불립니다. 혜일의 맥을 이은 법조는 당시 장안에 불공금 강이나 담연, 징관과 같은 다른 종파의 유명한 스님들이 있었으나 이러한 경쟁 속에서도 정토의 수행을 널리 유포시켜 '제2의 선도’ 라 불리기도 합니다. 그는 아미타불로부터 전해 받았다는 ‘다섯 가지 곡조로 아미타 불을 염송하는 법(五會念佛)'을 주창하여 염불을 대중 깊숙이 전파시켰습니다. 그는 본래 천태학을 공부하였기 때문에 자민삼장과 같이 교리와 수행의 조화를 도모하기도 했습니다.

이상과 같은 정토에 대한 개념과 수행은 경전이나 염불수행과 아울러 변상도(變相圖)를 통하여 일반인들에게 쉽게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우선 경전은 글자를 알아야 하며 또한 누구나 구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지만, 극락의 즐거움과 지옥의 괴로움을 한눈에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변상도야 말로 많은 사람들에게 정토의 개념을 단박에 각인시킬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정토신앙은 회창폐불 이후에도 선종과 더불어 유행하기는 하였으나 독립된 종파라기보다는 선·교·율이 화합된 신앙형태로서의 결사염불 이었습니다.

이후 원(元), 명(明)시대를 지나 청대에 이르면 중국불교는 쇠퇴기를 맞게 됩니다. 아울러 교단도 변모하여 거사불교가 유행하면서 선종의 임제종을 재가에서도 여전히 행했으며 그보다 더욱 만연했던 것은 바로 염불 신앙입니다. 아미타불과 관음 신앙은 집집마다 관세음, 곳곳마다 미타불(家家觀世音 處處彌陀佛)이라고 할 정도로 구석구석 미치지 않은 곳 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 나라의 원효 스님이 ‘나무아미타불’ 로써 대중들을 교화한 이래 지금까지 아미타불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는 우리 불교의 모습과도 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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