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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입문

부처님의 십대제자

by 파장波長 2022. 5. 29.

부처님 법을 이어받은 제자들은 수없이 많았습니다. 경전에 등장하는 제자들은 최초의 교진여(憍陳如)등 5비구(五比丘)로부터 마지막 제자 수발타라(須跋陀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여러 계층, 폭넓은 연령층을 보이고 있습니다.

부처님 제자는 통상 1천2백50명으로 알려져있는데, 금강경을 비롯한 많은 경전에는 자주 ‘대비구 1천2백50명과 함께 있었다’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실제로 부처님의 제자는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지만 ‘1천2백50명’이라고 하는 숫자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부처님이 포교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른 종교를 믿던 사람들이 집단으로 개종을 해 왔습니다. 배화교를 믿던 가섭(迦葉) 3형제가 1천 명의 무리를 데리고 와서 부처님께 귀의했고, 그 후 사리불(舍利弗)과 목건련(目建連)이 함께 했던 250명을 데리고 와서 귀의해서 이 무리를 합한 수가 1천2백50명입니다. 그래서 경전에 1천2백50명의 숫자가 자주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들을 ‘상수제자(常隨弟子) 혹은 대비구(大比丘) 1,250 제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경전에 이름이 나오는 제자의 숫자는 비구가 886명, 비구니가 103명, 우바새가 128명, 우바이가 43명으로 1,150명입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의 귀의는 불교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물론 불교에 대한 인식을 높였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명성이 높아져 당시 마가다국왕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왕과 유명한 부호, 장자(長者)들이 부처님의 제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들 왕이나 부호들이 보시하고 기증한 토지나 정사(精舍) 등으로 인해 불교 승가는 보다 공고히 됐으며, 불교의 체계적인 발전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됩니다. 곧 승가의 계율과 규율, 규정 등이 만들어져 체계적인 승가의 발전이 이루어지는 토대가 마련되었습니다. 그리고 승가가 발전함에 따라 제자들 사이에 명망(名望)있는 제자가 등장했습니다. 10대 제자로 불리는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부처님께 귀의하는 지혜(智慧) 제일 사리자 존자


 1. 지혜(智慧)제일 사리자(舍利子)

흔히 10대 제자 중에서 가섭(迦葉)과 아난(阿難) 존자를 첫손에 꼽기도 하지만 실제로 부처님이 살아 계실 당시에 제일 존장이고 뛰어난 제자는 사리불과 목건련(목갈라나) 존자였습니다.

사리불(舍利弗)은 산스크리트어로 사리풋다 혹은 샤리푸트라(Sariputra)이며, 사리자(舍利子)라고도 합니다. 사리불은 마가다국 출신으로 목련존자와 함께 육사외도(六師外道)의 한 사람인 산자야(Sānjaya)의 제자였다가 부처님의 제자인 앗사지(馬乘;Assaji)를 만나고 그의 인도로 그들을 따르는 250여명의 무리와 함께 귀의했습니다.

당시 설법을 하시던 부처님이 이들이 오는 것을 보고, “교단의 두 기둥이 온다”고 하셨을 정도로 처음부터 신뢰한 제자들이었습ㄴ니다. 그리하여 사리불은 석가모니의 오른쪽에 앉아 수제자와 같이 아꼈다고 합나다.

부처님께서는 사리풋타와 목갈라나(목건련)로 하여금 승가의 일을 분담해 보살피도록 하시고, 여래가 안 계실 때에는 그들이 승가의 일을 책임지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부처님은 긴요한 상황이 생기면 특별한 임무를 이 두 상수제자에게 부여하시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예컨대 데바닷타(Devadatta)가 승단을 이탈해 베살리(Vesāli) 출신의 갓 출가한 비구들을 꼬드겨서 가야시산(象頭山, Gāyasīsa)으로 데리고 가자, 부처님께서는 두 상수제자를 보냈습나다. 그들은 데바닷타가 잠시 잠들어 있는 틈을 타 500명의 비구들을 설득해 모두 데리고 왔습나다.

그리하여 사리불 존자는 부처님 문하에서 수행을 하면서 가르침과 깨달음을 가장 잘 이해하므로 대중들을 교화하는 일을 맡았으며, 지혜가 출중해 ‘지혜 제일’ 사리불 존자라 칭송했습니다. 사리불은 부처님 보다 먼저 입적을 했습니다. 부처님이 열반하시기 전, 목건련이 열반한 후에 자신이 태어난 고향인 마가다국의 나라다(那羅陀-나알라다) 마을에서 병으로 열반했다.

대승불교에서는 사리불이 불교 교리를 쉽게 정리하는데 일조하면서 대승불교의 기초를 닦았다는 식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나다. 그래서<반야심경> 등 대승불교 경전에 자주 등장합니다. <아미타경>에서는 장로 사리불이라고 칭하고, <법화경>에서는 사리불이 부처님으로부터 화광불(華光佛)이 될 것이라는 수기를 받았습니다.


2. 신통(神通) 제일 목건련(目建連)

목건련(犍連)은 산스크리트어로 마우드가리야나(Maudgalyayana)라고 하며, 이를 음사해 목건라야나(犍羅夜那)라고 하고, 다시 이를 줄여서 목건련 혹은 목련이라고 부릅니다.

목건련은 바라문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시리불과 죽마고우의 사이로 함께 부처님께 귀의했습니다. 부처님 왼쪽에 앉게 해 부처님이 수제자와 같이 아끼고 신통력을 자제할 것을 권했습니다. <우란분경>에 의하면, 지옥에 떨어져 아귀도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모친을 부처님의 말씀으로 16명의 비구에게 공양해 그 위신력으로 구했다고 합니다.

그는 신통력으로 유명한 전설이 많습니다. 데바닷타가 일부 비구들과 교단을 이탈할 때 하늘을 날아오르는 신통력으로 설득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통력 때문에 타교단의 시기를 받아 석가모니 부처님보다 먼저 피살 입멸했습니다. 즉, 평소 불교 교단을 시기하던 집장범지(執杖梵志)라는 외도에 의해 피살됐다고 합니다.

여기에 관한 일화를 ‘목건련위집장범지피살(犍連爲執杖梵志被殺)’이라고 합니다. 이는 목건련의 본생담(本生譚)이기도 합니다. 목건련은 전생의 숙업으로 인해 5백 생 동안 늘 피살되고 이 생에서도 타살됐다고 하는 일화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지은 바 업은 누구라도 비켜 갈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증일아함경(增壹阿含經)>에 보면, 목건련 존자가 가사를 수습하고 발우를 들고 왕사성에 들어가 걸식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집장범지(執杖梵志) 무리들이 멀리서 목련 존자가 오는 것을 보고 모여들어서 말하기를 구담 사문의 제자 가운데 이 자보다 뛰어난 사람이 없으니, 우리 모두는 그를 에워싸고 때려죽이자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래서 범자들은 목건련 존자를 에워싸고 기와나 돌을 던져서 가해를 하고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이에 목건련 존자 몸의 뼈와 살이 문드러져 극심한 고통은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목건련 존자는 그들을 미워하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내가 숙세에 지은 죄가 깊고 무거워 그 과보를 피하려고 했으나 끝내 피할 수가 없구나, 이것은 허공중에서 그 과보를 받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지금 몸에 극심한 고통이 있어 그대에게 고하고 열반에 들고자 한다고 했다.’… 이렇게 돼서 목건련은 사리불과 부처님보다 앞서서 입적했습니다.


3. 두타(頭陀) 제일 마하가섭(摩訶迦葉)

사리불과 목건련이 입멸하자 가섭 존자는 부처님 제자 중 제일인자가 됐었습니다. 가섭파(迦葉波), 대가섭(大迦葉), 대음광(大飮光)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흔히 마하가섭(摩訶迦葉)이라고 합니다. 가섭 존자는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자 상수제자로서 아라한 500명을 거느리고 왕사성 칠엽굴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결집하는 제1차 불전결집을 주도했습니다. 이때 아난 존자는 교법을 암송하고, 우바리 존자는 율법을 암송해서 경장(經藏)과 율장(律藏)을 완성했습니다.

마하가섭은 원래 마가다국 서울 왕사성(라자그리하)에서 멀지 않은 마하띠라(Mahātittha)라고 하는 바라문촌 부호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세속 이름은 삐빨리(Pippali)입니다. 그는 결혼을 원치 않았으나 부모의 강권에 못 이겨 강제로 끌려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서로의 합의로 첫날밤에 잠자리를 꽃 줄로 갈라놓고 각기 따로 잠을 잤습니다. 그리고 아내와 동시에 출가를 결심했습니다. 그들은 함께 머리를 자른 뒤 발우를 손에 들고 우는 하인들을 뒤로 한 채 집을 떠났고 갈림길에서 헤어졌습니다. 그 후 까샤빠는 죽림정사(竹林精舍)로 가서 부처님을 뵙고 제자가 됐고 아내는 비구니 교단에 출가했습니다. 까샤파는 출가 8일 만에 아라한과에 들었다고 합니다.

고사성어 염화미소(拈花微笑),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주인공으로서, 부처님으로부터 첫 번째로 법을 전수 받은 제자입니다(선종의 제1대 조사임). 선가에서는 빛을 마시는 뛰어난 존자란 뜻으로 음광승존(飮光勝尊)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가섭은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거친 옷과 거처에 상관없이 진리를 깨치기 위해 용맹정진하고, 항상 스스로에게 엄해 불교 규율을 잘 지킨다고 해서 행법, ‘두타(頭陀) 제일’로 일컬어졌습니다. 두타(頭陀)란 산스크리트어의 dhuta를 음사한 말로서 의ㆍ식ㆍ주에 대한 집착의 마음을 떨쳐버리기 위한 수행 실천을 말하는 것이다. 즉, 몸과 마음을 다스려서 탐욕을 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두타 제일이란 수행 제일(修行弟一)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두타로 인해 파생되는 단어가 두타공덕, 두타밀행 등이 있으며 강원도 삼척에 있는 두타산(頭陀山) 그리고 두타사(頭陀寺)라는 절 이름도 모두 여기에서 따온 말입니다.


 4. 천안(天眼) 제일 아나율(阿那律)

아나율은 석가족 출신으로 아버지는 슛도다나 대왕의 동생인 쑤꼬다나였습니다. 따라서 아나율은 부처님의 사촌 동생입니다. 말하자면 그는 부처님의 작은아버지 쑤꼬다나〔감로반왕(甘露飯王) 혹은 곡반왕(斛飯王)〕의 아들입니다. 아나율은 부처님께서 고향인 가비라성을 방문하셨을 때 아난다와 데바닷다를 비롯해 우바리 등과 함께 출가했다고 합니다.

아나율은 본래 출가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형인 마하나마가 출가하려고 집안일을 부탁하자, 집안일 하는데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형 대신 출가를 결심했다고 하비다. 따라서 출가동기가 확고하지 못했기 때문에 출가 초기에 아나율은 마음공부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고, 부처님 설법시간에 자주 꾸벅꾸벅 졸았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으로부터 질책의 가르침을 듣고 나서 분심을 일으켜 쉬지 않고 수행하다가 실명(失明)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실명을 한 대신 천안통(天眼通)을 얻었다고 합니다. <법화경>에서는 아나율이 장차 교진여 비구와 같이 보명불(普明佛)이 될 것이라는 수기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5. 혜공(解空) 제일 수보리(須菩提)

선현(善現)이라고도 하며, 십대제자 중 유일한 코살라국(사위국/舍衛國) 출신입니다. 그는 바라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바로 부처님께 기원정사(祇園精)를 지어드린 급고독(給孤獨 = 아나타 핀디카 수닷타) 장자의 조카입니다. 천성이 총명했지만 성질이 포악해 화를 잘 냈으므로 부모는 물론 주위 사람들을 불안하게하고, 주변 사람은 물론 짐승을 봐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이 못살게 굴었습니다. 그 도가 지나치자 부모와 친구들도 그를 외면하고 미워해 산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산으로 들어가서도 마주치는 짐승이나 나뭇가지에 해를 끼치고 다니다가 산신의 도움으로 부처님을 뵈어 교화를 받고 출가, 이윽고 다투지 않는 무쟁도(無諍道)를 깨닫고 무쟁제일자(無諍第一者)가 됩습니다. 출가전의 난폭한 인물이 부처님 교단에 출가한 이후 새로운 인물로 탈바꿈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수보리는 조용한 곳에서 무쟁삼매를 닦아 모든 법의 공적을 관찰해 은둔제일, 무쟁 제일의 인물로 떠올라 마침내 공양을 받을 만한 모든 성문, 아라한 가운데서 으뜸인 십대제자의 한 분이 됐습니다. 또한 수보리는 공()의 이치를 가장 잘 이해했다고 합니다. 집착을 초월한 자유의 경지가 바로 ‘공’이며, 그것을 수보리만이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수보리 존자를 ‘해공(解空) 제일’이라 불렀습니다.

유명한 <금강경>에서 부처님 대화상대가 바로 수보리입니다. 수보리 존자는 지혜를 갖추는 것을 평생의 일로 삼았으므로 혜명 수보리(慧命須菩提)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반야경>에서 반야바라밀을 그가 설했다고 합니다. ‘혜명(慧命)’이란 온전한 지혜를 구족했다는 의미로서 비구 스님을 높여 존칭하는 말로도 쓰입니다. 수보리 존자의 전기는 <증일아함경>에 있습니다. 도교에 영향을 끼쳤는지 <서유기>에서 손오공의 스승으로 나오기도 합니다.


6. 설법(說法) 제일 부루나(富樓那)

부루나 본명은 푸르나 마이트라야니 푸트라(Purna, maitrayani putra)입니다. 풀어보면 자애로운 마음으로 충만 된 여성의 자식이라 할 수 있습나다. 그래서 만자자(滿慈子), 만원자(滿願子), 만족자자(滿足慈子) 등으로 의역 됩니다. 그리고 부루나미다라니자(富樓那彌多羅尼子)는 음역으로서 이를 줄여 ‘부루나’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름 속의 ‘마이트라야니(미다라니/彌多羅尼)’란, 부루나 존자 어머니 이름입니다. 그러니 그 이름의 뜻이 부루나는 미다라니의 아들이란 말입니다.

부루나는 바라문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는 가비라성 정반왕의 국사이며 큰 부자입니다. 그는 부처님과 생년월일이 같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총명한 능력으로 베다(Veda)와 그 밖에 브라만교의 모든 논서들을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부루나는 아버지와 여종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으므로 아버지가 죽었을 때는 재산을 나누어 받지를 못했습니다. 그는 무일푼으로 집을 나왔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성도하신 후 녹야원에서 설법하심을 듣고 친구들과 함께 부처님께 귀의해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고, 지행합일(知行合一), 언행일치(言行一致)의 삶을 영위한 사람으로 ‘설법(說法) 제일’이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부루나는 설법을 통해 9만 9000명을 열반에 들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부루나는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고 그 가르치심을 받들어 가져서 후에 성불할 것이다. 그 부처님의 이름은 법명(法明)이라 하고, 그 나라 이름은 선정(善淨)이다. 그 나라는 칠보를 모아 만든 것과 같이 아름다우며 그 시대를 보명(寶明)이라 한다. 그리고 덕으로써 주위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힘을 갖춘 보살들이 나라 안에 가득할 것이다. 또한 성문도 수없이 많다. 그 성문들은 삼명(三明)이니 팔해탈(八解脫-八背捨)이니 하는 신기한 힘과 사무애지(四無碍智)를 갖추고 모두 화합해서 승()이 될 것이다. 그 나라의 모든 사람들은 음욕과 번뇌가 없다. 오로지 보살도로 법희(法喜)와 선열(禪悅)로써 자기의 몸을 장엄한다. 부언하면 보살행으로 남녀의 차별이 없으며 모든 삼악도에 떨어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부루나에 관한 이야기가 <법화경>에 많이 나옵니다.

그는 자진해서 서쪽 변경 수아나파란타로 포교활동을 떠났습니다. 수아나파란타에서 1년 동안 500여명을 불교로 귀의시킨 뒤 입멸했다고 합니다.


 7. 논의(論議) 제일 가전연(迦旃延)

가전연(迦旃延)은 인도 서쪽에 있던 아반티국(avanti) 크샤트리아 출신입니다. 가전연은 부처님의 태자시절 관상을 봤던 아시타 선인의 제자였는데, 스승의 명으로 부처님의 제자가 됐다고 합니다. 혹은 아반타국왕의 명에 따라 부처님을 그 나라로 초청하기 위해 찾아갔다가 출가했다고도 합니다.

가전연은 부처님 말씀을 논리정연하게 해설해 ‘논의(論議) 제일’이라는 말을 들은 4대 성문(聲聞)의 한 사람입니다. 설법 제일이었던 부루나(富樓那) 존자조차도 그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모양입니다. 설법 제일인 부루나와 논의 제일인 가전연을 비교하면, 부루나는 재가자들을 상대로 말하는데 뛰어났고, 가전연은 출가자들에게 논리적이고 학문적인 해설을 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고 합니다. 많은 내용을 요약해 핵심만을 말하기도 하고, 너무 간략해 뜻이 모호한 내용은 자세하게 풀어서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이 가전연은 총명한 머리로 명석 판명한 논리를 구사해 부처님 말씀을 해설하는데 걸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증일아함경(제2지품)>에서는 “잘 뜻을 분별해 진리를 펴는 데는 가전연 비구가 으뜸이다.”라고 말했을 정입니다. 그만큼 논리력이 뛰어나 여러 가지 논서의 저자로 추정됩니다.

또한 <법화경> ‘수기품’에서는 가전연은 염부나제금광불(閻浮那提金光佛)이 될 것이라는 수기를 받기도 했습니다.


 8. 다문(多聞) 제일 아난(阿難, 아난다)

부처님의 사촌 동생으로 환희(歡喜), 무염(無染) 등으로 한역을 합니다. 가비라성의 백반왕(白飯王), 감로반왕(甘露飯王) 또는 곡반왕(斛飯王)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이는 경전마다 차이가 있어 어떤 것이 옳은지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그의 아버지가 부처님 아버지인 정반왕(淨飯王)과 형제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아난은 25년간 시자로서 부처님 시중을 들며 부처님 말씀을 가장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문(多聞) 제일’이라 합니다. 기억력이 뛰어나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부처님 말씀을 낭독했습니다. 그리고 갸름한 얼굴, 단아한 이목구비, 상큼한 미소 등 그의 뛰어난 외모로 인해 수많은 여인들의 사모의 대상이었으며, 이에 대한 설화가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난은 당시 교단에서 여인 출가를 금하는 관례를 깨고 부처님을 설득해 부처님을 기른 계모이자 이모인 마하파자파티(산스크리트어 Mahapajapati, 大愛道尼)로 하여금 최초의 비구니가 되게 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열반하시자 아직 깨닫지 못했다는 이유로 경전을 결집하는 일원으로 들지 못하게 돼, 7일 밤낮으로 정진 끝에 득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하가섭의 인가를 받아 결집에 참여를 하게 됐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해서, 그는 마하가섭이 주도한 제1차 불전결집에서 부처님 말씀을 집적 암송해 경전 결집에 기여했습니다. 그래서 불교경전에 그의 이름이 십대 제자들 가운데 가장 많이 나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근본불교의 성전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난 존자의 힘이 큽니다.

<장로게(Theragāthā)>에는 그가 지었다고 하는 일련의 시들이 실려 있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120세까지 살았다고 합니다.


 9. 지계(持戒) 제일 우바리(優波離)

우바리는 석가족 가비라성 궁정 이발사로 사회계급에서 가장 낮은 수드라(sudra)계급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부처님 친족들과 함께 귀의함으로써 불교가 출신에 평등함을 보였습니다. 우바리 존자는 아란야(阿蘭若, āranya-수행처)에 들어가지 않고 교단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수행을 계속 했으며, 계를 지키는데 있어서 매우 엄격했던 우바리는 계율에 통달해 ‘지계(持戒) 제일’로 불렸습니다. 붓다 입멸 직후 제1차 불전결집에서 ‘계율’ 부분은 대부분 우바리 존자에 의해 송출(誦出) 됐습니다.

천민출신으로 가난해 교육도 받은바 없는 그가 계율을 만들어 실천하고 중생들의 희로애락을 눈여겨 살핀 총명한 제자였다고 합니다. 비구에게는 150계(), 비구니에게는 348계의 계율을 가르쳤다고 하니 학교공부가 다가 아닌 듯도 싶습니다. 그 많은 계를 가르친 것은 단순히 그들 수행자들만의 계율이 아니라 이 계율을 널리 전파해 부처님 법이 펴지는데 도움을 주고, 나아가서 모든 중생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고 마음을 다스리며 가난하고 병들고 불행에 처한 이웃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일깨워 주는 생활 지침서이기도 했습니다.


10. 밀행(密行) 제일 라후라(睺羅)

부처님께서 출가하시기 전에 얻은 유일한 친아들로 그가 태어난 날 밤에 윌식이 있었다고 합니다. 산스크리트어로 월식을 ‘라훌라’라고 합나다. 후설에 의하면, 아들의 탄생 소식을 들은 세존은 그 때, 혼잣말처럼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나다. “장애가 생겼구나, 계박(繫縛)이 생겼구나!” 

‘장애’라는 말을 산스크리트어로 ‘라훌라’라고 합니다. 그런데 월식은 빛을 방해한다고 해서 월식도 라훌라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라훌라(Rahula)인데, 장월(障月)이라고 한역하며, 15세 때에 부처님이 가비라성에 설법을 왔을 때 출가했으며, 교단 최초의 사미였습니다.

사리불을 화상(和尙)으로 목건련을 아사리(闍梨)로 하여 20세가 되기 이전에 사미로서 출가를 했으므로 불교 교단에 있어서 사미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어려서 그랬을까? 라후라는 출가를 했어도 웃음이 많고 저주 남을 비방했으므로 부처님으로부터 꾸중을 듣고 그 이후부터 이러한 나쁜 습관을 모두 없애고 밀행(密行)을 했으므로 ‘밀행(密行) 제일’이라는 칭호를 얻게 됐습니다. 밀행 제일에서 ‘밀행’이란 남들이 알지 못하게,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혼자서 조용히 수행하는 것을 말하는데, 계율을 세밀한 부분까지 실천한 것을 말합니다. 배운 바 그대로 작은 것 하나까지 꼼꼼하게 실천했다고 합니다. 주로 사리풋타(Sāriputta)가 보살피고 지도했다고 합니다.

 

∴ 이 글은 많은 분들의 글을 참고하고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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