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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입문

붓다의 다섯 가지의 눈 五眼

by 파장波長 2022. 5. 22.

『금강경』 제18품 일체동관분(一體同觀分) 에서 붓다는 수보리에게 부처에게 오안(五眼)이 있는가 물어 봅니다. "수보리여 여래에게는 육안(肉眼), 천안(天眼), 혜안(慧眼), 법안(法眼), 불안(佛眼)이 있는가?" 수보리는 붓다는 당연히 오안(五眼)을 같고 있다고 대답합니다. 붓다가 깨달음을 증득해서 같게 된 오안은 무엇일까요? 일체 중생도 여러 부처나 보살처럼 심성(心性)의 본체를 지니는데, 이것은 바로 생명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붓다는 이 생명의 근원 속에 내재된 다섯 가지 기능을 오안(五眼)이라 말합니다.

① 육안(肉眼)

육안은 바로 부모로부터 받은 눈으로서, 현재의 우리 눈입니다. 육안은 물질세계를 볼 수 있어, 우리의 모든 감각과 지각이 이것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육안은 마음과 서로 연계되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경전에서 마음과 눈을 같이 논하고, 마음의 이치를 말하고자 할 때 먼저 눈에 대해 언급 합니다. 눈은 마음의 스위치로서, 마음과 눈은 대단히 밀접한 관계가 있습 니다. 도교의 『음부경(陰符經)』에서는, “눈은 마음의 기미〔眼者心之機〕라고 했습니다. 바로 눈은 마음의 스위치로서, 이 때문에 옛사람들은 여러 곳에서 모두 마음과 눈의 관계에 대해 언급합니다. 맹자 또한 사람을 대할때 특히 눈을 관찰할 것을 강조합니다.

누구든 모두 눈을 가지고 있지만, 한 쌍의 눈이 보는 것은 모두 다릅니다. 예를 들어 하얀색 벽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흰색이라 하겠지만 실제로 사람마다 느끼는 흰색의 정도는 아주 다릅니다. 난시인 사람과 근시인 사람, 한 눈은 근시이고 한 눈은 난시인 사람, 혹은 색맹인 사람 등 사람마다 각기 다릅니다. 일체 중생의 마음이 다르기에 눈 또한 다릅니다. 

옛말에 이런게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얼굴 모양만큼이나 각기 다르다고요. 사람의 마음은 모두 다른데, 마치 사람의 얼굴이 서로 다르게 생긴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얼굴이 똑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에 똑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도 없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 역시 똑같을 수 없습니다. 흰색이나 노란색을 사람마다 똑같은 정도로 느낄 것이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차이가 많이 납니다. 노안(老眼)인 사람도 있을 테고, 같은 노안이더라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겁니다. 이는 모든 사람의 업력(業力)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일체의 병은 업()에 따라 생겨납니다. 선()에는 선업이 있고, 악() 에는 악업이 있습니다. 업은 마음에서 생깁니다. 바로 절대 유심(唯心)의 이치입니다. 지금 붓다가 묻습니다. “부처가 된 사람에게는 보통의 육안이 있겠는가?" 당연히 있겠지요. 육안이란 물리세계의 현상을 보는 눈입니다. 

② 천안(天眼)

천안은 우리 같은 보통 사람에게는 없습니다. 천안의 능력은 물질세계를 초월합니다. 예를 들면 귀신이나 영혼을 보거나, 천신(天神)을 보거나, 더 나아가 다른 세계를 보는 능력입니다. 요즘은 천리안(千里眼)이란 말을 하는데, 이는 도교의 전설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천안은 욕계(欲界) 내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태양과 달 및 기타 행성에서의 일뿐 아니라 은하계 바깥의 일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천안입니다. 어떤 사람은 타좌시 나타나는, 별빛이 반짝거리는 것 같은 환영을 보고는 천안이 생긴 것이라 여깁니다. 이건 천안이 아닙니다. 이걸 뭐라 해야 할까요? 이름을 붙여 본다면 안천(眼天)이라 할 수 있을까요? 아무것도 모르는 안에 아무것도 모르는 '천' 말입니다.

불교에서는 불상을 조성하면서 눈을 하나 더 만들어서 천안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이것은 혜안(慧眼)을 표시한 것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이나 생물은 제3의 눈뿐 아니라 제4의 눈을 갖기도 합니다. 불교에서는 천안을 수련하는 방법이 있으며, 열 쌍의 눈을 수련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전면과 후면, 머리 꼭대기, 그리고 마음속과 목구멍 속에 모두 한 쌍의 눈이 있습 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것은 보통의 눈과는 다릅니다. 마치 동영상 카메라처럼 어떤 것을 찍어 낼 수 있을 뿐입니다. 천안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업보로 인해 얻는 것입니다. 많은 생애에 걸쳐 수지(修持)를 행하고 정()을 닦아 온 결과 이 생애에서 얻는 천안입니다. 이것은 타고나는 것으로, 선행의 응보로서 갖게 된 자연스런 능력입니다. 다른 하나는 닦아서 얻는 것입니다. 이 생애에서 수련을 통해 계정혜(戒定慧)를 성취함으로써 얻는 천안입니다.

천안이라고 해서 눈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천안은 육안의 원래 모습으로서, 다른 종류의 기능이 나타난 것입니다. 천안을 얻은 사람도 우리 같은 사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저절로 여러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수지(修持) 공부를 하다 보면 기맥이 후뇌에 이르러 시각 신경이 자극을 받게 되는데, 이로 인해 눈에서 여러 환상들이 보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천안으로 본 것이 아닙니다.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진정으로 천안이 통한 사람이라면, 그 눈빛이 섬광처럼 맑고 깨끗해서 지극히 투철하게 보아 낼 수 있습니다. 물질이 그에게 장애가 될 수 없으니, 그의 눈은 자연히 투시 능력을 갖게 됩니다.

춘추 전국 시대에 편작()이라는 의사가 있었습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가 신선을 만나 사물을 투시할 수 있는 보물 하나를 얻은 뒤 엑스 선보다도 더 예리한 투시 능력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사람의 오장 육부 속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기에 진단시 조금의 착오도 없었다고 합니다. 이 밖에 당대 이후의 많은 기록에서도 나타나지만, 어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풍수를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지하 몇 장() 정도의 깊이는 아무런 기계 없이도 볼 수 있어서 지하의 수맥을 훤히 알았다고 합니다. 

이런 눈 역시 천안은 아닙니다. 업보에 따라 통하게 된 것으로, 기껏해야 귀안(鬼眼) 정도라 할까요? 진정한 천안은 『법화경』에서 말하듯 부모로 부터 받은 눈이며, 반드시 수지(修持)를 거쳐 정력(定力)을 얻은 후에야 통할 수 있는 것으로, 시방세계(十方世界) 일체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육안이 물질세계의 통상적 현상을 보아 내는 것이라면, 천안은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세계를 투시합니다. 천안은 정력(定力)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정()에 이르러 얻게 되는 신통력입니다. 사람의 왕성한 생명력이 정점에 달하면 일체의 물리적 장애를 뚫을 수 있는데, 이것이 소위 말하는 신통력입니다. 신통은 반드시 정력이 충분해야 얻을 수 있습니다. 소위 말 하는 정기신(精氣神)이 충만하고 왕성해야만 비로소 얻을 수 있습니다.

③ 혜안(慧眼)

혜안 역시 육안과 분리 될 수 없는 것으로, 부모로부터 받은 육안에 새로운 기능이 나타난 것입니다. 혜안이란 곧 지안(智眼)으로서, 계정혜(戒定慧)의 공력이 드러난 것입니다. 즉 정()을 닦아 지혜가 드러난 것으로, 이것은 보통의 지혜가 아니라 지혜가 힘〔慧力〕으로 변한 것입니다. 이런 혜력이 있어야만 비로소 지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혜가 어떻게 힘으로 변할 수 있을까요? 보통 사람이라도 총명한 사람이라면 어떤 이치를 생각하여 통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흡연이 폐에 좋지 않으니 끊어야 한다는 것은 이치상 통한 것입니다. 그러나 습관 때문에 끊을 수 없습니다. 지혜에 힘이 없으니 끊을 수 없습니다. 성벽(性降)이 나쁜 사람이라도 탐진치(貪眞癡)의 이치는 모두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에 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불법을 공부하여 이치로는 능통하지만 막상 구체적인 일에 부닥쳐서는 그렇게 되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지혜의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지혜의 역량이 부족하면 열매를 증득할 수 없고, 도 ()를 이룰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혜안은 지혜의 역량이 충분 할 때에만 비로소 드러날 수 있습니다.

④ 법안(法眼)

법안이란 또 어떤 것일까요? 혜안으로 공()을 보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자성(自性)의 공()을 인식하고, 공성(空性)의 본체를 보아 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법안입니다. 법안으로 보면 일체 중생이 평등하며, 공()도 유()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공()에만 떨어진 것은 소승과(小乘果)에 불과합니다. 법안은 진정으로 공 속에 있는 묘유(妙有)를 볼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얻을 수 있습니다. 범부의 경계로 말하자면 이것은 성공연기(性空緣起)이며, 깨친 지혜의 경계로 말하자면 진정한 공에서 묘유가 일어나는〔眞空起妙有〕것입니다. 이것이 법안의 이치로서, 평등하게 보는 것입니다. 

⑤ 불안(佛眼)

불안은 일체 중생을 평등하게 볼 뿐 아니라 오직 자비로써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비는 불교 용어로서 두 개의 개념이 합쳐진 말입니다. 자()는 부성(父性)으로서 남성의 사랑을 나타내며, 비()는 모성(母性)의 지극한 사랑을 나타냅니다. 즉 자비란 부성과 모성이 지닌 어진 덕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선하며, 아무런 조건이 없고 또 평등합니다. 그래서 대자대비(大慈大悲)라 합니다. 불안으로 보면 일체 중생이 모두 가련합니다. 그래서 보시하려 하고 중생을 구하려 합니다. 이 것 역시 불안의 자비와 평등입니다. 이 불법을 배우는 자가 법()에 따라 수지(修特)하여 진정한 성취를 얻으면 반드시 이 다섯 종류의 눈을 갖게 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돈오(頓悟) 성불하여 즉각 이 다섯 종의 눈을 갖게 되었다면 그가 증득한 불법은 대체로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론상으로만 깨달아서 이 다섯 종의 능력이 나 타나지 않았다면, 그건 스스로를 속이고 남까지 속이는 것입니다.

부처가 말하는 오안(五眼)은 계정혜(戒定慧)를 성취하면 자연 얻게 되는 법문으로서, 사람마다 본래 구비하고 있는 능력입니다. 단지 우리가 수지(修持)의 과정을 거치지 못했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수지 과정을 거친다면 우리 생명의 근원 속에서 자연 오안의 기능이 발휘될 겁니다. 

 

∴ 출처 : 남회근 선생 '금강경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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