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사회는 진보했지만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은 빈곤 속에서 고통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미국에서는 2010년 기준 전 국민의 35.9%가 비만에 시달리며 10만개 내외의 다이어트 관련 기업이 있고, 한해에 약 80조원을 다이어트에 소비한다고 합니다.
전 세계에서는 약 3,000만명이 심각한 기아상태에 있으며, 8억 3,000만명은 만성적인 영양실조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매년 약 700만명이 영양실조로 실명을 하고 있으며 그 대부분은 어린이들입니다. 아프리카, 아시아, 남아메리카의 빈국에는 무려 5,000만명의 맹인들이 있습니다. 비타민 한 알만 제때 먹으면 얼마든지 피해갈 수 있는 시력장애인데도 말입니다.
그동안 인류는 산업혁명과 정보혁명을 통해 생산량이 엄청나게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서조차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사회는 진보했지만, 왜 여전히 빈곤한가?' 이에 대해 많은 경제학자들이 답을 시도했지만, 이 문제에 대해 가장 진지하고도 열정적인 답변을 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헨리 조지일 것입니다.
19세기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
헨리 조지(Henry George)는 남북전쟁 후 복구사업이 한창이던 19세기 미국의 격변기를 보낸 사람입니다. 1839년 필라델피아에서 무려 9명의 형제자매가 복작거리는 가난한 출판업자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성공회 학교를 다녔지만 종교적 훈육에 대한 거부감과 가난 때문에 14세에 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그는 출판사 식자공, 외항선 선원, 금광 광부 등 온갖 직업을 전전하면서 숱한 고생을 한 끝에 기자를 거쳐 '샌프란시스코 데일리 이브닝 포스트'라는 신문사를 차렸습니다. 이후 이름이 알려지면서 가난에서 벗어나게 되었지만, 오랫 동안 밑바닥 생활을 해온 그에게 떠나지 않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바로 '인류는 진보했건만 왜 여전히 빈곤한가?' 라는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40세에 이러한 문제의식에 답하는 『진보와 빈곤』이라는 기념비적 저작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정규교육이라고는 14세까지가 전부인 그의 책은 그야말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서 19세기에 성경 다음으 로 많이 팔린 책'이라는 말까지 들었습니다.
왜 도시의 노동자들은 가난할까?
돈벌이에 밝은 어떤 사업가에게 물어보자. “작은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이 10년 후에는 큰 도시로 성장하여 마차 대신 기차가 다니고 전기가 양초를 대체하게 된다. 기계와 기술이 발전해 노동의 효율이 엄청나게 높아진다고 하자. 그러면 10년 후에 이자율이 높아지겠는가?”
돈벌이에 밝은 사업가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임금수준이 오르겠는가? 노동력 말고는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독립적으로 생활하기 쉬워지겠는가?"
돈벌이에 밝은 사업가는 다시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다!”
“그렇다면 이자도 오르지 않고, 임금도 크게 오르지 않는다면 오르는 것으 무엇인가?"
그 사업가의 대답은 이러했다.
“바로 지대, 즉 토지가치이다. 당신도 토지를 구입해서 보유하도록 하라.”
이런 상황에서 당신이 이 충고를 따른다면 다른 할 일이 없어진다. 가만히 앉아서 담배나 피우고 있으면 된다. 나폴리나 멕시코의 거지처럼 누워 있어도 좋다. 풍선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든지 구멍을 파고 땅속에 들어가도 된다. 아무일도 하지 않고, 사회의 부에 손톱만한 기여를 하지 않더라도 10년 후에는 부자가 될 것이다. 그 새로운 도시에서 당신은 호화주택에서 살 것이다. 그러나 이 도시의 공공건물에는 빈민구호소가 있을 것이다.
'왜 도시의 노동자는 시골의 지주보다 더 가난할까?' 헨리 조지의 해답은 명쾌합니다. 바로 토지의 독점적 점유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사실 시골의 땅값이 낮다면 시골 지주의 재산은 별 볼 일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술과 노동력으로 하는 생산활동에는 세금이 붙는데다가, 노동자들은 벌어들인 돈의 상당량을 토지소유자와 독점사 업자들에게 방값과 같은 경제적 지대로 바쳐야 합니다. 게다가 토지에 대한 접근성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토지 소유자들이 불로소득을 얻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토지의 불로소득에 대한 금지
헨리 조지는 단지 토지를 소유했다는 이유만으로 지주들이 불로소득을 얻는 것은 “심각한 불의(不義, injustice)”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합니다. “토지에서 불로소득을 얻지 못하게 하라!” 토지에서 불로소득을 얻지 못하게 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① 토지를 공유화해서 지주가 지대를 얻지 못하게 만드는다.
② 토지의 사유화를 인정하되 순수하게 '토지'에만 세금을 매기고 그와의 나머지에는 세금을 물리지 않는다.
나머지는 바로 토지에 지은 건물, 심어진 수목, 다양한 시설 등의 자본입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토지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생산활동이기에 그 이익은 투자자들 에게 돌아가는 것이 옳다고 본 것입니다.
헨리 조지, 칼 마르크스와 논쟁
토지와 자본을 이처럼 구별하는 그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비판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는 토지와 자본 모두를 공유화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는 토지만을 대상으로 단일세를 걷자고 했을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손'의 가격 기능과 사유재산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같은 시기를 살았던 마르크스와 헨리 조지는 이 문제에 대해 공개논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한편 그의 사상은 19세기 영국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조지주의 운동 '(Georgism, 지공주의)이 일어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개인의 노동 생산물의 소유는 인정하지만, 토지를 비롯하여 자연에서 온 것들은 공유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책은 번뜩이는 경제학적 논리뿐만 아니라 당시 미국사회를 풍자한 명쾌하고도 문학적인 문장 덕택에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헨리 조지 사상과 한국
헨리 조지는 19세기를 살았지만, 그의 사상은 21세기의 우리나라에도 들어맞는 면이 있습니다. “열심히 일한 사업가보다 공장용지를 잘 선택한 사업가가 훨씬 큰돈을 벌어들였다”는 이야기는 전국 각지에 넘쳐납니다. “100년 동안 농사를 지어도 벌지 못할 돈을 토지보상을 통해 움켜쥔 농부” 의 횡재담도 마찬가지입니다. 2008년 세계 경제위기 이후 집값은 떨어지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이 부동산 불패신화를 붙잡고 있습니다. 나날이 치솟는 전세가로 인해 서민들 은 대출이자에 시달리고, 청년 세대는 월세방에 그들의 임금 중 많은 부분을 할애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사회의 생산력은 진보했건만, 우리가 여전히 빈곤에 허덕이는 원인은 '토지의 독점에 있다’는 헨리 조지의 일갈은 너무나 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사실 토지 소유를 기반으로 한 지대는 불로소득을 방지하기 위하여 정부가 환수해야 한다고 주장한 헨리 조지의 사상은 그렇게 과격한 것도 아니며, 낡은 것도 아닙니다. 최근까지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시행된 바 있는 아이디어입니다.
첫 번째 시도는 노태우 정부가 1990년에 도입한 토지공개념입니다. 토지공개념은 토지 국유화와는 전혀 다른 것이며 3가지 법률을 토대로 시행되었습니다.
① 택지를 기준 이상으로 소유하면 중과세하는 택지소유 상한에 관한 법률
② 토지개발로 생긴 이득을 환수하는 개발이익 환수에 관한 법률
③ 지가 상승 이익을 노린 유휴지와 기업의 비업무용 토지에 대해 과세하는 토지초과 득세법
그런데 이 3가지 토지공개념은 헌법재판소에 의해서 “토지공개념은 합헌이나 일부에 위헌적 요소가 있다”는 이유로 거의 유명무실해져 버렸습니다.
두 번째 시도는 노무현 정부의 '종합부동산세'입니다. 일정금액을 초과하는 부동산 보유자에게 높은 세금을 매기는 것으로 헨리 조지의 사상에 좀 더 근접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헌법재판소가 위헌적 요소가 있다는 판결을 내리면서 법이 개정되었고 효과가 많이 약해졌습니다.
유의할 점은 비록 토지공개념이나 종합부동산세 등은 일부 시행상의 불의리한 점 때문에 헌법재판소에서 위헌판결을 받았지만, 우리 헌법이 병시하고 있는 국토의 효율적 이용과 경제적 기본권에 비추어 분명히 ‘합한’ 이라고 판시했다는 것입니다. 부동산 소유가 소수에게 집중되고, 이로 인해 빈부 격차가 큰 문제가 여전하므로, 헨리 조지의 사상은 계속 연구할 가치가 있습니다.
숨겨져 있는 진리의 힘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최후는 그의 소설만큼이나 극적입니다. 귀족이었던 그는 82세가 되던 해에 가출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모스크바 역을 서성거리던 그를 알아보고 러시아의 미래에 대한 의견을 물었습니다. 그는 모여든 군중들을 향해 30분이 넘게 헨리 조지의 사상에 대해 열변을 토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어느 작은 기차역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생의 마지막에 선 대문호 톨스토이와 러시아 시민들의 마음을 흔든 연설의 주제는 바로 헨리 조지였던 것입니다.
1897년 헨리 조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식이 있던 날 10만명이 조문을 했고 4개의 서로 다른 교파의 성직자들이 조사를 했습니다. 그의 평생동지였던 맥글린 신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감히 성경을 본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느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 이름은 헨리 조지라.” 한 평생 단 하나의 질문만을 고민해 왔던 헨리 조지. 그의 묘비에는 자기 자신에게 서약한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내가 분명히 하고자 노력해 온 그 진리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가능했다면 결코 숨겨져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동지들이 발견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수고를 할 사람들, 고난을 받을 사람들, 필요하다면 죽 기까지 할 사람들, 이것이 진리의 힘이다.
헨리 조지의 사상과 한국의 '자산' 지니계수
우리나라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어느 정도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굶주림으로 죽어나갈 정도는 전혀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리 평등한 국가도 아닙니다. 국가의 부의 불평등 정도는 여러 가지 척도를 통해서 측정할 수 있는데, 학교에서 배우는 ‘지니계수'가 가장 많이 이용됩니다. 지니계수란 부의 불평등도를 숫자로 표시한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단 한 명의 부자가 국가의 모든 부를 소유하고, 나머지 국민들은 한푼도 없는 국가의 지니계수는 1입니다. 반면 모든 국민이 예외 없이 똑같은 부를 소유한다면 이때 지니계수는 0이 됩니다. 물론 1이나 0과 같은 숫자는 나올 수가 없으며, 지니계수가 0.2 정도면 매우 평등한 사회, 0.6 정도면 매우 불평등한 사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소득 지니계수는 0.35 정도로 만족할 만한 수치는 아니지만 독재에 시달리는 저개발국가의 지니계수가 0.5를 넘으니, 그래도 소득면에서 우리는 어느 정도 평등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발표하는 지니계수는 ‘연소득'을 기준으로 합니다. 하지만 자산을 기준으로 지니계수를 구할 수도 있습니다. 한 사람이 얼마를 벌어들이는가에 대한 지니계수는 소득 지니계수이고,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자산을 소유하고 있는가, 즉 자산의 불평등 정도는 자산 지니계수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자산' 지니계수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수치가 나옵니다.
2021년 우리나라의 순자산 지니계수는 0.603, 주택 지니계수는 0.6으로 매우 불평등합니다. 특히 토지 보유를 통해 구해본 ‘토지자산' 지니계수는 2006년 무려 0.848에 달합니다. 수학적으로는 가능한 수치이지만, 경제학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수치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부동산 소유는 이 불가능한 수치를 실현해 버린 것입니다. 이로 인해 허구헌날 언론에는 '전세대란', 월세 폭등 따위의 무서운 이야기들이 실립니다. 전셋값을 구하지 못해 길거리로 나앉게 된 가장이 일가족과 동반자살을 했다는 끔찍한 기사도 나옵니다.
우리나라의 부동산문제는 그야말로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만큼 심각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전체 자산은 대략 6,500조원인데, 이 중 부동산 자산 이 무려 5,000조원을 넘습니다. 전체 자산의 약 77%가 부동산이라는 말입니다. 선진국에서는 부동산 비율이 50%를 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쉽게 풀어서 말하자면, 한국인들은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을 거의 대부분 '부동산에다가 쏟아붓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니 절망에 빠진 빈곤층은 자살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토지 소유로 인한 불로소득을 제한 하자'는 헨리 조지의 사상은 우리가 꼭 고민해 볼 가치가 있습니다.
∴ 이 글은 최진기 선생의 강의를 참고해서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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