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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교리

붓다의 사상-연기(緣起)

by 파장波長 2022. 6. 22.

부처님의 팔만사천 법문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마음 심(心)자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에는 마음 심(心)자에 못지않게 중요한 핵심단어가 있으니 그게 연기(緣起)입니다. 마음이 내적이고 주관적인 느낌이라면 연기는 외적이고 객관적인 느낌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부처님께서는 고타마 시타르타 태자로 계시던 어느 날 생로병사의 과정을 겪는 인간의 모습을 보시고 고(苦)를 통찰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하면 우리 인간들이 그러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를 화두로 삼게 되었고, 그 후 출가, 수도하시어서 깨달으신 것이 연기법인 것입니다.

연기법은 분명 있는 그대로의 진리임에 틀림없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붓다가 깨달은 인간관이고 세계관이기도 합니다. 즉 우리 인간과 세계, 우주는 연기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세계, 자연, 우주가 모두 연기적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독립적 존재, 관계가 아니라 상호의존적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분리될 수 없는 유기적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기적 관계에 부합하는 존재방식, 삶의 태도, 관계방식은 자연이고, 선(善)이고, 웰빙이고, 깨달음이고, 열반입니다. 반대로 연기적 관계에 위배되는 존재방식, 삶의 태도, 가치, 관계는 인위적이고, 불선(不善)이고, 탐진치 삼독이고, 고통입니다.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연기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연기를 깨닫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45년간의 세월동안 우리들로 하여금 오직 연기의 도리를 이해하고 깨달아서 실천할 수 있도록 가르침을 펴셨습니다. 그 가르침을 듣고(聞), 사유해서(思), 일상의 삶과 관계 속에서 실천하도록(修) 노력하는 것을 우리는 깨달음의 길, 수행의 길이라고 부릅니다.

그러한 깨달음의 길, 수행의 길의 가장 단순한 형태, 기본적인 모델 가운데 하나가 사성제, 즉 4가지 거룩한 진리입니다. 

첫 번째 진리는 연기적 존재방식, 태도, 가치에 위배되는 삶, 인식, 관계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고통이 존재한다는 가르침인 고성제(苦聖諦)입니다. 

두 번째 진리는 연기적 존재방식, 태도, 가치에 위배되는 삶, 인식, 관계를 유발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 자신이 상대적, 상호의존적인 존재가 아니라 독립적이고 절대적인 존재라는 사실에 집착하기 때문이라는 가르침인 집성제(集聖諦)입니다. 

세 번째 진리는 반연기적 태도, 방식, 가치 등을 제거하는 방식이 있다는 가르침인 멸성제(滅聖諦)입니다.

네 번째는 반연기적 태도, 방식, 가치 등을 제거함으로서 연기적 삶, 머무름, 관계를 실현하는 진리의 길을 완성해가는 가르침인 도성제(道聖諦)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사성제는 연기를 깨달아가는 개념적 틀의 성격이 강합니다. 개인적 경험이긴 하지만 실제로 이를 수행에 적용시켜서 활용해 보면, 자칫 대상을 경험함에 있어서 치우치고 한정된 인과관계에 고정되어 분석적인 성향을 띠게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 결과 경험의 대상을 향한 우리의 의식이 역동적이고, 확산되기 보다는 오히려 경계를 한정시키고 단절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느낌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것을 우리도 똑같이 깨달아서 삶의 괴로움으로부터 해방하고자 하는 열망은 모든 불자들의 바램입니다. 다만 어떻게 깨달을 수 있는지, 얼마나 효과적이고 실용적으로 깨달을 수 있는지 그것이 문제입니다.

불교의 모든 가르침들은 어떻게 하면 우리도 부처님처럼 깨달을 수 있는지 그 방법들을 개인의 수준과 조건에 맞추어 팔만사천가지(셀수 없이 많다는 의미로)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천백억화신불, 온 우주에 가득한 불보살님들이 다양한 인연으로 우리들의 근기에 맞추어 깨달음을 돕는다고 합니다. 또 평생을 공부해도 다 공부하지 못할 정도로 무수히 많은 경전들과 논서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다양한 방편들이 애초에는 우리들의 수준에 맞추어 깨달음을 보다 효과적으로 돕고자 시작된 친절함이고 연민이었을 텐데 세월이 흐르면서 더러는 불교를 이해하는데 오히려 걸림돌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처음 불교공부를 하고자 마음을 낸 사람들에게는 지나치게 넘치는 방편들이 어디서 어떻게,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복잡함과 혼동을 주기 때문이다. 무작정 인연이 닿는 데로 그 모두를 공부하기에는 이 한생이 너무 짧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혼신을 다해서 오직 치열하게 수행하셨던 부처님께서도 깨달음을 이루는데 9년의 세월이 필요했는데 이것저것 다 챙기면서 살고 있는 지금 우리들이 단번에 끝장을 보겠다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날마다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는 믿음과 확신을 갖고 싶어 한다는 사실에는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수행해야 우리가 어제보다 더 성장한 오늘, 오늘보다 더 지혜로워진 내일을 확신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공부해야 우리가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연기를 통찰하고, 연기적 삶의 태도와 가치를 내재화하고 일상의 삶과 인간관계를 통해서 그것이 드러나게 할 수 있을까요?

사실 연기는 말이고 꼬리표입니다. 우리들 자신과 세상이 존재하는 방식,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가리키는 손가락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과 세상 자체를 보지 않고 연기라는 개념에 메이면 연기는 더 이상 손가락 역할조차 포기된 개념이고 관념이고 망상이 됩니다. 그렇다면 연기라는 이 특별한 손가락은 우리 자신과 세상의 그 무엇을 가리키고자 하는 것일까요? 그것을 사성제의 고성제와 집성제의 단계에서 보면 아집(我執)과 집착 · 고착(執着·固着)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멸성제와 도성제의 단계에서 보면 무아(無我)와 무상(無常)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연기는 아집과 고착, 무아와 무상이 우리의 내면과 세상 속에서 각각 고통과 열반, 어둠과 빛, 무지와 지혜로 작동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손가락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전자의 단계에 휩쓸리고 있는 순간은 중생의 무지가 치성한 순간이고, 후자의 단계에 휩쓸리고 있을 때는 우리의 불성, 본각이 작동하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연기는 우리들로 하여금 괴로움의 순간에는 우리의 내면에 아집과 고착 · 집착이 출현하고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라는 메시지 입니다. 나아가서 무상과 무아가 작용하는 순간의 만남, 경험이 진실한 성장과 행복을 낳는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결론적으로 부처님이 깨달으신 연기를 우리도 깨닫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과 세상을 통해 무상과 무아를 보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집착과 아집을 통하지 않고 진실로 무상과 무아를 깨닫는 길이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그래서 번뇌가 곧 보리라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살면서 아주 많이 힘들어지는 순간에, 그 순간이야말로 깨달음의 문이 열려 있음을 자각할 수 있다면 더 없이 복된 삶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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