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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교리

붓다의 사상-12연기

by 파장波長 2022. 6. 24.

12연기(十二緣起)는 불교교리에서 핵심 개념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인가 12연기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아주 심오한 가르침이라는 선입견이 있습니다. 하긴 부처님께서 6년간의 고행 끝에 깨달으신 연기법을 6단계, 8단계, 9단계, 10단계로 분류해서 설명을 시도하다가 최종적으로 12단계로 마무리 해 놓은 것이 12연기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우리들 수준에서 하루아침에 12연기를 이해한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수도 있겠습니다.

12연기의 열두고리는 ①무명-②행-③식-④명색-⑤육입-⑥촉-⑦수-⑧애-⑨취-⑩유-⑪생-⑫노사 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12연기가 ‘괴로움이 발생하고 순환하는 구조’라는 관점에서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고통의 연결고리를 약화시키고 잘라버릴 수 있는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단 12단계 가운데 우리가 가장 강하게 갈등하고 괴로워하는 원인이 되는 곳이 어디인가 생각해 보면 ⑧번째 갈애(渴愛)입니다. 갈애는 대상을 갈망하거나 혐오함으로서 대상에게 끌리거나 밀어내는 에너지 입니다. 우리가 뭔가를 갈망하거나 혐오하고 있을 때 번뇌가 많아지고 고통이 극심해집니다.

그러다가 ⑨-⑩단계에서는 마침내 그 대상에 집착하고 그것과 하나가 되면, 고통은 더 이상 대상으로 인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분리될 수 없는 하나가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고통과 하나가 되어버린, 즉 갈망이나 혐오의 대상과 하나가 되어버린 단계에서 갈망하지 않거나 혐오하지 않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그 반작용도 더 커지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이 단계에서는 노력하면 할수록 더 많이 좌절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는 의미입니다. 이를테면 한창 사랑의 감정이 극도에 달했거나 분노가 치솟은 상태에서 중단하려고 애쓰게 되면 활활 타는 불에 기름을 붙는 격이 됩니다.

갈망과 혐오를 멈추기 위해서는 이들의 원인이 되는 앞의 ⑦단계인 수(受)에서 작업해야 합니다. 우리의 감정이 뭔가를 갈망하거나 혐오하기 전에 반드시 즐거움의 느낌이나 불쾌의 느낌이 선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느낌을 알아차리고 자각해야 합니다. 느낌단계에서는 아직 생각이 깊이 개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각하고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대상에 대한 끌림이나 혐오가 쉽게 해소되고 필요하다면 조절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생각과 계산이 본격적으로 개입된 갈애단계에서 대상을 향한 끌림과 혐오감을 중단하거나 제거하려는 시도는 강력한 역풍으로 효과를 거두기가 힘이 듭니다. 설사 갈망과 혐오에 맞서서 그것을 극복했다고 하더라도 대개는 억압이지 극복이나 초월이 아닙니다. 억압된 것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때가 되면 반드시 더 큰 에너지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갈애의 단계에서 애쓰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겹습니다. 그래서 수행하는 일은 때로 많은 인욕과 정진의 힘이 요구된됩니다. 그런데 그 애씀이 갈망하거나 혐오하는 대상을 방어하고 부정함으로서 억압으로 발전하는지, 아니면 순간순간 갈망하고 혐오하는 감정에 앞서 일어나는 느낌을 자각하고 알아차리려는 노력으로 원천적 봉쇄나 차단, 또는 근본적 해소로 나아가는지를 알고 이해하는 것은 중요입니다.

12연기의 열두 고리 ①무명-②행-③식-④명색-⑤육입-⑥촉-⑦수-⑧애-⑨취-⑩유-⑪생-⑫노사, 가운데 번뇌가 극심한 ⑧갈애를 기준점으로 삼고 고통이 발생하고 순환하는 고리를 끊어낼 수 있습니다. 

망상이 극심한 ⑤육입은 눈, 귀, 코, 혀, 몸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과 마음을 의미합니다. 이들이 각각 감각/인식대상인 색성향미촉법을 만나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느낌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다섯 가지 감각기관과 마음이 각각의 대상과 부딪치는 과정이 인연 따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대상에 부여된 의미, 가치 또한 실제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안이비설신의가 앞의 단계인 ④명색에 의해 오염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 결과 다섯 가지 감각기관과 마음이 자연스럽게 부딪쳐오는 대상과 접촉하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이고 의도적으로 자신이 원하고 좋아하는 것을 찾고 구하거나 싫어하는 것을 밀어내는 내적 에너지를 이미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갈증이 심한 상태에서는 우리의 눈이 물을 찾고, 귀는 물소리, 코는 물의 냄새, 혀는 물의 맛, 몸은 물과의 감촉, 마음은 물을 생각함으로서 안이비설신의 육입이 모두 물을 갈망하고 구하는 비상사태에 돌입해 있다는 것이입니다. 오직 물 이외는 다른 대상이 눈앞에 있어도 쉽게 보여지고 들려지고 냄새 맡아지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의 신체구조와 마음은 일차적으로 생존을 위해 구조화되어있기 때문에 생존을 위협하는 갈증이라는 조건이 발생하면 몸과 마음이 자동적으로 살아남기 위한 노력에 집중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생존과 관계없는 오히려 궁극적으로는 안락하고 행복한 삶을 방해하는 것들을 갈망하고 추구함으로서 자신과 타자, 환경을 파괴한다는 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생존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들, 위의 예에서 물은 필요한 만큼 취하게 되면 갈증이 해소되고 더 이상 탐욕하고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④명색의 단계에서는 물과 같이 생존과 직결되는 대상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자아의식을 채워주는 대상으로 확장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명색(名色)에 대한 이해입니다. 전통적으로 명색은 정신과 물질(6경: 색성향미촉법), 즉 6가지 감각기관인 육입(六入)의 인식대상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때의 인식대상들은 실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아만, 아애, 아견, 아치의 4가지 번뇌에 의해 오염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감각기관과 인식기관은 이들 대상들이 우리의 존재감을 드러내어 주는지, 우월감 또는 열등감을 주는지, 얼마나 더 인정하고 사랑하는지를 분별해 받아들인다는 사실입니다.

갈증이 나는 상태에서 우리의 감각/인식기관인 안이비설신의가 모두 물을 구하는데 총력을 기울이는 것은 당연하고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것들이 돈을 구하고 명예를 구하고 명품을 구하는데 총력을 기울인다면 어떻게 될까요? 전자는 조건이 충족되면 그 욕구가 금방 해소되고 고통도 사라지지만 후자는 그 욕구가 끝이 없기 때문에 고통도 멈추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명색의 단계에서 특별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즉 감각/인식대상에 대해 사심사관(四尋伺觀)을 통해 그 대상들이 가지고 있는 이름〔名〕, 그 이름에 붙여진 뜻〔義〕, 본질적 공통점〔自性〕, 겉으로 드러난 현상적 차이〔差別〕를 분석하고 자각하는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반복적 과정을 통해 우리의 감각/인식기관이 그 대상들로부터 보다 자유롭고, 덜 집착하도록 만듦으로서 고통의 순환고리를 약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사심사관(四尋伺觀) 수행은 유식 5위 수행에서 두 번째 단계로 첫 번째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6바라밀과 37조도법, 그리고 사섭법과 사무량심 훈련을 바탕으로 깨달음을 향해 본격적으로 노력하는 단계다. 이를테면 사심사관 훈련은 말이나 행동으로는 모든 것으로부터 초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무의식 수준에서는 마음이 계속해 대상에 메이고 집착하는 경우나, 아니면 말로만 부질없다고 하면서 행동과 생각으로는 대상을 쫓고 있기 때문에 내면이 불안정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훈련이다. 쉽게 말해 말로는 물질이나 명예, 돈이 진정한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정작 마음 한 구석에서는 끊임없이 돈과 명예를 꿈꾸고 추구할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또 겉으로 드러난 행동으로는 돈과 명예를 무시하고 함부로 하지만 마음의 무의식 수준에서는 계속해서 돈을 원하고 인정과 사랑을 원하기 때문에 신구의(身口意) 삼업의 부조화와 불협화음으로 인해 마음의 갈등으로 정서적 불안정에 시달리고 거친 불선심소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돈이나 명예가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막연히 알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러한 앎이 아직 충분히 내재화되거나 체화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심사관의 구체적 예로서 프라다가방을 생각해봅시다. ‘프라다’라는 이름(名)은 소위 우리가 알고 있는 명품 브랜드입니다. 그 이름과 연합된 의미〔義〕는 우리 사회에서 고급, 신분, 부자, 그리고 그것으로 인한 인정과 관심, 지위, 프라이드 등 갖가지 의식·무의식적인 개념과 관념들이 붙어있습니다.

그래서 이름과 의미의 이 두 수준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명품을 쫓게 되고, 그것이 잣대가 되어 모든 것을 평가하고 판단하는데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짝퉁과 가짜가 성행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또 이 수준의 사람들은 똑같이 나무로 만들어진 십자가와 불상을 보고 좋아하거나 혐오하는 반응을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름과 그 이름에 붙여진 의미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음공부를 시작한 사람들은 대상의 이름과 그 이름에 붙여진 의미의 허망함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대상이 가지고 있는 보다 본질적인 성질(自性)을 사유하게 되고, 이름이 다를 뿐, 그 본질(體性)이 동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유식에서는 이를 무분별지(無分別智)라고 부릅나다. 그러나 자성을 깨달은 정신수준에 고착하게 되면, 이름-인플레이션을 미워하고 혐오하게 되어, 돈과 명예, 명품 등을 지나치게 싫어하고 공격하는 신구의 삼업을 짓게 됩니다. 어떤 경우는 실제로 자성을 깨달은 것이 아니더라도 그냥 그 뜻만 새겨 내 것과 네 것이 따로 없다고 주장하면서 소유개념이 흐려져서 함부로 타자의 영역과 소유물을 침범하기도 합니다.

사심사관의 마지막 훈련은 대상의 차별(差別)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비록 본질은 동일하나 환경과 조건에 따라서 그 작용에서 차이가 있음을 알기 때문에 유식에서는 이를 분별지(分別智)라고 부릅니다. 절대적 차이가 아니지만 상대적, 현상적으로는 차이가 있음을 알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앞의 단계가 공(空)에 치우쳐 있다면 이 단계에서는 공이 조건과 어우러져 색(色)으로 드러나는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무분별지와는 달리 분별지는 공과 색이 하나임을 아는 단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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