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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담소

붓다의 마음공부∴

by 파장波長 2022. 6. 24.

불자가 되고 불교공부를 한다는 것은 곧 마음공부, 마음수행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많은 선지식들은 팔만대장경을 마음 심(心)자, 한마디로 표현했습나다. 출가·재가 할 것 없이 또 경공부를 하든, 참선을 하든 수행방식이나 내용에 관계없이 우리는 “마음공부”, “마음수행”이라는 말로 불자가 되는 길을 대신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마음공부인가? 우리에게 익숙한 공부는 인식의 변화, 행동의 변화에 일차적 목표를 두지 않기 때문에 앎과 실천이 언제나 이원적입니다. 그러나 수행과 동의어로 사용되는 불교공부는 앎과 실천의 일원성을 강조합니다. 불교공부는 행동의 변화, 가치관의 변화가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앎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앎의 과정이 곧 실천의 과정이고 변화의 과정입니다.

변화, 실천이 수반되지 않는 앎을 불교는 “알음앓이”라는 말로 “깨달음”과 구분합니다. 전자는 알면 알수록 병이되고 불행해지며, 후자는 알면 알수록 건강해지고 행복해집니다. 왜냐하면 알음앓이는 고정관념이 되어 관계의 벽을 만들지만 깨달음은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막힌 관계를 소통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들 가운데 더러는 알음앓이와 깨달음의 진정한 의미를 오해합니다. 이론공부는 알음앓이라고, 심지어 경전공부마저 알음앓이라고, 더욱 심각하게는 몸을 조복 받는 것이 깨달음의 출발점인줄 알고 육신을 학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삶의 고통을 치유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놓고 가슴이 아닌 머리로, 치유가 아닌 논리와 분석으로 따져서 이해하려는 나머지 불교를 무미건조하고 무감동하게, 턱없이 어렵고 난해하게 만드는 현상에 대한 반작용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아예 부처님의 처방전을 무시하고 약부터 짓는 무모함도 서슴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공부가 알음앓이가 되어 병을 키울 것인가, 깨달음이 되어 병을 없앨 것인가는 이론이냐 실천이냐를 넘어서서 그들을 얼마만큼 마음병을 치유하는 처방전으로 이해하고 파악하는가에 달려있다고 봅니다.

처방전으로서의 불교이해는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경전을 읽고, 예불을 하며, 화두를 챙겨야 행위의 변화, 인간관계의 변화를 이룰 수 있을까?’ 하는 의문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또 어떻게 하면 우리가 참선을 하고 화두를 챙길수록, 경공부를 할수록, 또 법납이 높고 나이를 먹을수록 더 겸손해지고, 적게 화내며 더 배려하고 친절해 질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치유적 불교읽기’는 그와 같은 물음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 불교교리, 의식, 수행방법 등을 들여다 볼 것입니다. 불교의 이론과 실천들이 어떻게 우리들의 탐진치 삼독을 치유하고 ,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되도록 돕는지 알아 볼 것입니다. 국어책을 놓고 수학공식 풀듯이 이해하려 한다면 아무리 긴 세월을 씨름해도 소용없을 것입니다. 병든 생각을 바로잡고 아픈 마음, 아픈 세상을 치료하려는 부처님의 처방전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원래 질병의학에서 치유(healing)라는 말은 손상된 조직이 본래의 기능으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앞으로 ‘치유적 불교읽기’ 또한 우리의 본래 건강한 마음을 회복하는 마음치유과정으로서 일조할 수 있다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그리하여 보다 많이 사랑하고 감사하는 삶을 꿈꾸는 이들에게 조그마한 보탬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불교는 괴로움 벗어나 행복으로 가는 길

불교에서의 마음공부는 크게 교리편과 수행편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교리는 이론적 측면으로서 주로 마음에 대한 이해, 즉 마음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작용하는지, 건강한 마음과 불건강한 마음, 괴로움의 사바세계와 깨달음의 세계에 대한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수행편은 실천적 측면으로서 괴로움을 벗어나서 행복을 얻는 길, 괴로움을 유발하는 불건강한 마음을 치유하는 과정, 건강한 마음을 성취하고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수행방법들을 일상에서 실천하고 실현해 가는 과정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론과 실천은 상보적, 역동적 관계로서 항상 함께 작용합니다. 가르침의 편의상 이 둘의 특성을 구분하고는 있지만 실제로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입니다. 이론은 실천을 즉발시키고, 실천은 이론을 명료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이 둘을 별개의 것으로 취급하는 오류를 범합니다. 이를테면 먼저 이론을 공부한 다음 실천을 해야 한다든지 아니면 아예 이론은 앓음알이에 불과하므로 무조건 실천부터 하고본다는 것입니다. 이 둘을 분리된 각각으로 이해하는 마음공부는 자칫, 이론은 머리에 치중하고 실천은 몸에 치중하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이론과 실천이 분리된 마음공부는 행동변화, 인격변화를 유발하는데 장애가 됩니다. 좀처럼 치유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가슴이 움직여야 마음이 움직이고 인격이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머리나 몸을 훈련시키거나 혹사한다고 해서 반드시 탐진치 삼독심이 치유되어 상대방을 배려하고 친절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이론이든 실천이든 가슴으로 할 때 삼독심이 치유되고 자비로워집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는 것이 가슴으로 하는 공부인가? 나는 그것을 “치유적 불교읽기” 라고 이름붙여 보았습니다. 이는 치유적 관점에서 이론을 공부하고, 경전을 읽고, 치유적 방식으로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교의 핵심개념 가운데 하나인 ‘무아(無我)’를 예로 들어봅시다. 이론공부는 ‘무아’가 무엇인지 언어를 통해 개념적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반면, 실천은 몸으로 이해하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이론과 실천이 이원화되면 공부하는 목적이 상실되어 이론은 개념, 관념으로 표류하고 실천은 일없이 몸을 학대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치유적 불교읽기에서는 무아가 뭔가라는 물음보다는 무아의 가르침이 왜, 어떻게 우리들의 괴로움을 치유하고 탐진치 삼독을 제거하는 해독제로 작용하는지를 이해하는데 초점을 둡니다. 또 일상에서 겪는 괴로움과 인간관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무아의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하고 활용할 것인지에 관심을 둡니다.

치유적 불교읽기에서는 이론을 이해하는 과정이 실천수행을 촉발하고 실천수행의 과정은 이론의 체험, 명료함을 돕습니다. 치유적 불교읽기는 머리나 몸의 훈련 보다는 가슴을 터치하는데 초점을 맞춥니다. 가슴을 터치함으로서 감동을 유발하고 그 감동이 선한 심리상태〔善心所〕를 촉진시키고 유지하도록 돕습니다.

이를테면 무아가 어떻게, 왜 우리들의 괴로움을 소멸시키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실제로 무아에 바탕을 둔 인간관계와 그렇지 않은 인간관계가 어떻게 다른지, 그 차이를 자각하고 인식할 수 있도록 노력함으로서 무아에 대한 가르침을 삶속에서 실천하고 가슴으로 이해하고 깨닫도록 돕습니다. 나아가서 괴로움의 순간, 갈등의 관계에서 무아(無我)가 아닌 유아(有我)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살피고 알아차리도록 도움으로서 이론적 앎과 실천적 앎이 일원적이고 유기적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유도합니다.

치유적 이해는 가슴을 터치함으로서 온 몸, 온 마음으로의 이해를 돕고자 합니다. 가슴의 터치는 진실된 행동과 인격의 변화를 동반합니다. 마음치유는 바로 이론적 앎과 실천적 앎이 서로의 불완전한 앎을 끝없이 탁마하는 반복적 노력, 자각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마음공부도 배움과 가르침에 대한 평가 필요

불교공부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공부와는 달리 이론과 실천이 반복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머리로 하는 이론적 앎과 몸으로 하는 실천적 앎이 하나가 되어 가슴에서 만나는 마음공부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공부가 얼마나 잘 되고 있는지를 평가하는 기준, 잣대 또한 일반 학습평가 방식과는 당연히 달라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달라야 한다는 그 사실을 공감하는 사람은 많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라야하는지, 왜 달라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일에 관심을 두는 이는 흔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마음공부도 배우는 자와 가르치는 자의 관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일정부분의 평가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 마음공부를 제대로 가르치고, 배우고 있는지에 대한 평가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마음공부가 얼마나 제대로 되고 있는지에 대한 평가가 타당하고 신뢰롭기 위해서는 이론과 실천이 함께 고려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중물”이라고 하는 말을 얼마나 출가수행자다운가를 평가하는 잣대로 사용합니다. 여기서 “중물”은 실천적 측면이기 때문에 이론적 측면인 경전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출가수행의 목적에 부합하는 개념으로서의 “중물”을 분명하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수행자다움을 평가하는 잣대로서의 “중물”은 이론과 실천적 측면을 동시에 내포하게 됩니다.

치유적 불교읽기에서는 평가의 기준을 마음공부를 통해서 얼마나 그릇된 생각이 치유되고, 안정되고 조화로운 정서상태를 회복했는가에 초점을 맞춥니다. 또 대인관계 속에서 얼마나 말과 행동과 생각이 조화롭고 균형있게 드러나는가에 관심을 둡니다. 우리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크게 개인적 수준과 전문영역 수준의 두 측면으로 구분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개인적 수준에서는 마음공부를 함으로서 얼마나 적게 화내고 정서적으로 조화롭고 일관된 인격으로 변화했느냐를 평가하는 것입니다.

인지적으로는 자신의 마음구조와 반응행동, 인간관계 패턴에 대해 얼마나 많이 이해하게 되었는가를 평가하는 것입니다. 또한 내면의 정서적 조화로움과 자신에 대한 이해가 타인과의 관계를 얼마나 더 유연하게 하고 관계의 갈등을 줄여주는지에 초점을 맞춥니다. 전문영역 수준에서는 마음공부가 얼마나 현재 자신이 하고 있는 전문적인 일과 경력에 도움을 주고 유익한가에 초점을 맞추어 평가합니다.

마음공부에서는 이론과 실천수행이 서로의 불안전한 앎을 탁마하면서 함께 녹아져 있지 않다면,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는 그것을 올바른 앎, 공부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마음공부는 알다시피 신구의(身口意) 삼업을 함께 닦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공부를 하기 전과 마음공부를 하고 난 후에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모습이 달라야 합니다. 대인관계에 있어서 뭔가 그만큼 더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하며 너그러운 말, 행동, 생각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치유적 불교읽기는 바로 이와 같은 전제를 바탕으로 말과 행동과 생각을 치유하는데 그 일차적 목표를 둡니다.

마음공부를 하는데 왜 평가가 필요한가? 사실 어떤 의미에서 평가자체는 중요하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다만 평가의 기준이 공부의 방향을 유도한다는 측면에서 평가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대학입시의 시험출제 방향이 학교공부의 내용과 방향을 좌우하듯이 마음공부 또한 바로 공부와 수행의 방향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치유적 불교읽기에서의 평가는 마음공부가 나와 이웃들, 그리고 주변환경을 병들게 하는 해로운 말, 행동, 생각들을 얼마나 유익한 말, 생각, 행동으로 전환시키는가에 초점을 맞춘다는 사실을 한 번 더 밝혀둡니다. 학습하는 자의 입장에서 볼 때 사전에 무엇을 평가하는지를 안다면 학습자는 무엇을 공부하고 어떻게 공부해야 되는지를 보다 자연스럽고 쉽게 파악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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