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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담소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

by 파장波長 2024. 2. 21.

지금부터 2500여년 전, 석가모니 부처님은 인도의 룸비니 동산에서 탄생하셨습니다. 그리고 태어나자마자 한 손으로는 하늘을, 한 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영원한 진리의 일성(一聲) 을 터뜨렸습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하늘 위 하늘 아래를 통틀어 나만이 홀로 높다고 하신 것입니다.

유아독존… 어쩌면 이것은 지극히 건방진 말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꼼꼼히 새겨보면 이것 이상 솔직한 말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들 자신에게 있어 ‘나’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요? ‘나’는 오직 하나뿐인 유아독존입니다. 유아독존이기에 ‘나’는 가장 소중하고 절대적인 존재요,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 또한 ‘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주위를 한번 돌아보십시오.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존재가 있는까요? 아마 없을 것입니다. ‘나’보다 더 사랑할 수 있는 ‘남’이 있을까요? 분명히 없을 것입니다.

분명 어떠한 존재에 대한 사랑도 나를 절대의 자리에 둔 다음 서열을 정합니다. 배우자도 자식도, 부모도 부처님도 ‘나’ 다음에 놓일 뿐입니다. 오히려 나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부모에게 연인에게, 부처님에게까지도 ‘나’를 가장 사랑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사랑은 살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스스로를 올바로 살리고 살려가야 합니다. 나아가 올바로 살리고 살려가기 위해서는 참된 ‘나’를 찾아야 하고, 참된 ‘나’를 찾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맑혀가야 합니다.

그러나 중생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중생의 ‘나’에 대한 사랑은 곧 나에 대한 집착이며, 집착은 순(順)과 역(逆)을 불러 일어납니다. ‘나’에게 맞으면 탐(貪)하고 ‘나’에게 맞지 않으면 시기하고 질투하고 배척하고 분노합니다.

‘나’라는 집착의 울타리를 쳐서 스스로 갇히고, ‘내 사랑’ 의 고무풍선을 불며 불며 풍선이 터질 그날까지 무엇인가를 잊고 살아갑니다. 이처럼 어리석은 ‘나’의 굴레에 빠져 헤어날 줄 모르는 존재가 중생인 것입니다.

불교는 ‘나’를 찾는 일에서부터

그렇다면 이러한 ‘나’를 유아독존의 ‘나’라고 할 수 있을까요? 참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삶이라 할 수 있을까요? 틀림없이 아닐 것입니다.

‘나’에 대한 물음과 ‘아니다’라는 대답. 이 속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시작됩니다. ‘나’를 찾는 사색과 ‘나’를 찾는 일. 바로 여기에서부터 불교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녹야원(鹿野園)에서 최초의 다섯 비구를 탄생시킨 석가모니불은 갠지스강 건너에 있는 마가다국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도중에 부처님은 밀림 속으로 들어가 큰 나무 아래에서 좌선을 하고 계셨는데, 마침 이 고장의 상류층 젊은이 서른 명이 그 숲으로 놀러왔습니다. 저마다 아내를 데리고 왔지만 결혼을 하지 않은 한 젊은이는 기생을 데려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생이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다들 놀이에 정신이 팔려 있는 틈을 타, 사람들의 옷가지와 패물 등을 훔쳐 도망쳐버린 것입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젊은이들은 기생을 찾기 위해 숲속을 뒤졌고, 마침내 부처님께서 좌선을 하고 있는 장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화장을 짙게 하고 옷가지와 패물을 들고 가는 여자를 보지 못하셨습니까?” 
“젊은이들이여, 왜 그 여인을 찾는가?”

젊은이들이 자초지종을 아뢰자 부처님은 그들을 돌아보며 말씀하셨다.

“젊은이들이여, 여자를 찾는 일과 자신을 찾는 일 중에서 어느 쪽이 더 급한가? 여자를 찾는 일과 자기 자신을 찾는 일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부처님의 한마디 말씀은 젊은이들의 깊은 잠을 깨워 놓았습니다.

“자기를 찾는 일이 더 급하고, 자기를 찾는 일이 더 중요 합니다.”
“좋다. 그렇다면 거기들 앉아라.”

젊은이들이 예배를 하고 자리에 앉자 부처님은 참된 자기를 찾는 법과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법을 일러주었고, 설법을 들은 서른 명의 젊은이들은 참된 삶의 길을 깨닫고 그자리에서 모두 출가하였습니다.

나에게 있어 가장 급한 일은 유아독존의 ‘나’를 찾는 일이요, ‘나’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불길 속에 갇힌 ‘나’는 유아독존일 수가 없습니다. 적어도 가장 소중한 ‘나’라면 영원하고 행복하고 자유자재롭고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난 ‘나’이어야 합니다. 모든 중생은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나’에 대한 애착에서 벗어나 참된 ‘나’를 되찾을 때 그것은 가능해지고, 유아독존의 ‘나’를 회복해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부처님은 우리 모두가 이렇게 될 수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홀로 가장 높은 ‘나’를 찾기 위해 석가모니는 모진 수행 을 하였고, 그 결과 35세의 나이로 부처(Buddha, 覺者)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깨달음의 환희 속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 기특하다. 모든 중생이 다 이와같은 지혜와 덕상(德相)을 갖추었건만, 망상(妄想)에 집착하여 스스로 체득하지 못하는구나. 만일 이 망상의 집착만 여읜다면 바로 일체지(一切智) · 무사지(無師智)를 얻게 되는 것을!”

부처님은 진아(眞我)를 찾은 분입니다. 그 어느 곳에서나 어느 때에나 한번도 ‘나’를 떠나지 않았던 ‘나’, 누구나 다 갖 추고 있는 유아독존의 ‘나’를 깨달아 부처가 되신 것입니다.

이때에 이르러서야 석가모니는 참으로 자기를 올바로 사랑할 수 있게 되었고, 열반의 그날까지 중생들과 함께 하며 참된 ‘나’를 찾는 방법과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일타 큰스님 법문 모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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