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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담소

육바라밀-정진(精進)

by 파장波長 2022. 6. 21.

육바라밀의 네 번째는 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입니다. 정진은 게으르지 않게 부지런히,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테면 이미 생겨난 불건강한 행위는 재발되지 않도록 부지런히 노력하고, 아직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잠재된 불건강한 행위는 발생하지 않도록 미리 예방하고, 이미 생겨난 올바르고 건강한 행위는 더욱 발전시키고, 잠재된 건강한 행위는 잘 자라도록 부지런히 힘쓰는 ❶네 종류의 올바른 노력〔四正勤〕이 대표적인 정진의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정진바라밀도 지계나 인욕바라밀과 마찬가지로 삼륜청정의 보시바라밀을 완성하는데 필수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보시바라밀은 엄밀한 의미에서 자기중심에서 벗어나서 타자를 향한 관심과 관계 형성의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보시바라밀은 기대나 계산이 들어가지 않는 조건이 없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우리들은 누구나 특별한 사랑을 하고 또 사랑받고 싶어 하지만, 실제로 사랑을 주고받는 길에는 엄청난 장애물들이 놓여있습니다.

이유는 우리 모두가 각각의 삶의 이력을 가지고 욕망의 세계를 살고 있는 중생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면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가 진실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아집으로부터 자신을 개방하는 일, 바로 보시바라밀입니다. 제대로 된 보시바라밀의 실천에는 특별한 노력, 올바른 노력이 요구됩니다.

보시를 실천하면서 그 대가로 돌아올 다른 형태의 이익 · 명예 · 인정 · 사랑 등을 의도적으로 계산하고 기대했다면 그것은 이미 생겨난 그릇된 행위이므로 보시바라밀이 못됩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이 계산하고 뭔가를 기대해서 보시행을 반복하지 않도록 자신의 내면을 부지런히 살피고 자각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또한 드러나게 의식적으로 기대하고 계산하지 않았지만 무의식적으로라도 자신에게 되돌아 올 이익을 계산하고 기대하지 않도록 알아차리는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 두 번째 올바른 정진입니다.

만일 아무런 기대나 계산 없이 무심한 마음으로 오직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시행을 했다면 그러한 마음을 더욱 증장시키는 것이 세 번째 올바른 정진입니다. 더러는 사심 없이 보시할 마음이 있어도 선뜩 나설 용기가 부족하거나 행동으로 옮길 만큼의 추진력이 부족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선한 마음의 동기를 알아차리고 강한 의지를 발동시켜서 행동으로 옮기는 노력이 네 번째 올바른 정진입니다.

정진바라밀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중도적 노력입니다. 노력이 지나치면 반드시 그 보상을 기대하는 것이 우리들의 심리입니다. 무리하게 노력하는 사람은 자기처럼 무리해서 노력하지 않는 사람을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을 무시하고 판단하는 악업을 짓게 됩니다. 그래서 참선수행에 집착하는 사람은 주변의 정상적인 소리를 소음으로 지각하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무리하게 소식(小食)하는 사람에게는 정상적으로 필요한 자기 양만큼을 먹는 사람이 미련하고 과식하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잠자는 시간을 지나치게 아까워하고 애쓰는 사람의 눈에는 필요한 만큼 자는 사람이 공연히 게으르고 나태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모두 ➋제7 말나식(第七末那識)의 작용에 의지해 정진하기 때문에 자아를 중심으로 타자를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정진바라밀은 중도수행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마나식의 자아의식이 작동하고 강화되는 조건이 형성됩니다. 바라밀수행에 마나식이 작동하는 조건이 형성된다는 말은 항해하는 도중에 태풍과 토네이도를 만난다는 의미와도 같은 것입니다. 즉, 자아의식이 동반되는 정진은 아집을 살찌우고 아집에 휘둘리기 때문에 순탄하게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맑고 잔잔한 순풍의 항해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중도적 정진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Note :

❶사정단(四正斷)또는 사정승(四正勝)이라고도 합니다. 아직 생기지 않은 惡은 미리 방지하고(未生惡令不生), 이미 생긴 惡은 아주 끊어버리며(已生惡令永斷), 아직 생기지 않은 善은 생기도록 하고(未生善令生), 이미 생긴 善은 더욱 증대시킴(已生善令增長)을 말합니다.
➋재7 말라식은 팔식(八識)의 하나로 제칠식(第七識)을 말합니다. 사량식(思量識) 또는 오염식(汚染識)이라고도 말하며, 마음공부에서 가장 금기시하는 끊임없는 분별심을 뜻합니다. 제팔식(第八識)인 아뢰야식( 阿賴耶識)은 항상(恒常)하지만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으며, 제육식(第六識)은 분별심을 일으키나 항상 하지 않으며, 전오식(前五識)은 항상 하지도 않고 분별심을 일으키지도 않는습나다. 제칠식 (第七識)만이 항상 하면서 사량 분별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아뢰야식을 자아 (自我)라고 집착하는 것이 다른 식 識)들과 다름니다. 
이렇듯 사량 분별과 아상(我相)에 대한 집착은 제육식과 팔식에는 없는 오직 제칠식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며, 또 이는 모든 미망 (迷妄)의 근본 원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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