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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경전

대지도론(大智度論)

by 파장波長 2024. 2. 18.

법도 취하지 말라

세간 사람들은 자신의 견해에만 의지하고, 자신의 법에만 의지하며, 자신의 이론에만 의지해서 서로 다툼을 일으킨다. 희론(戱論)은 다툼의 근본이 되고, 희론은 모든 견해에 의해서 생기나니, 다음의 게송을 보라.
취한 법이 있기에 이렇거니 저렇거니 다투거니와
취한 법이 없다면 무슨 논쟁이 있으랴.
취하고 취하지 않는 모든 견해를
이 사람은 이미 모두 없애버렸네.
수행자가 이러한 이치를 여실하게 깨닫는다면
온갖 법과 온갖 희론을 모두 취하거나 집착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다투지 않음이니,
불법의 감로미(甘露米)가 그것이다.
만일 이렇지 못하다면 이는 곧 법을 비방하는 것이다.

불법에서는 취할 만한 특별한 견해가 없다. 일체 모든 견해라는 망상을 전부 쉬었을 때 참된 진실이 드러나는 것이지, ‘이것이 진리다’라고 말할 만한 특별한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 특별한 견해에 집착해 있다면 그것은 전부 희론일 뿐이다. 어떤 생각, 어떤 견해, 어떤 이론에도 의지하지 말라. 그 어떤 것도 취하거나 버리지 말라. ‘이것이 법이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곧 법을 비방하는 것이다. 이 법은 무유정법(無有定法), 정해진 바가 없는 법이다.

반야바라밀은 다툼이 없다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Prajnaparamita)은 모든 법이 끝끝내 공한 필경공(畢竟空)의 경지인 까닭에 다툴 곳이라고는 없다. 만약 필경공인 가운데에서 다툴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필경공이라 할 수 없다. 필경공이라 함은 있고 없는 양 변이 모두 멸한 까닭이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경을 다툼이 없는 곳이라고 한다.

모든 법이 끝끝내 하나도 남길 것 없이 필경공이다. 끝끝내 필경공이란 말은 최후에 하나조차, 심지어 깨달음조차 남길 것이 없다는 뜻이다.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은 다른 것은 전부 공이지만 오직 해탈, 열반, 불성, 깨달음만큼은 남아 있을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아공법공(我空法空)이라는 말에서도 보듯이, 진리라고 할 만한, 깨달음과 열반이라고 할 만한 그 무엇조차 남겨 두지 않는다. 해탈, 열반, 깨달음은 이름이 해탈이고 열반일 뿐 그 이름에 해당하는 무언가 알맹이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해탈은 있거나 없는 양변으로 해석되는 무언가가 아니다. 있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물론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그래서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한다. 이 필경공의 가르침에서는 ‘묘유’일 뿐이니, 진짜 있다고 여기지 말라는 의미다.

무아인데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고 하는 이유 

“불법에서는 ‘일체법(一切法)이 공하여 한 법도 나라고 할 것이 없다’고 했는데, 어찌하여 경전의 첫 머리에는 전부 ‘이와 같 이 내가 들었다’고 합니까?” 
“비록 부처님의 제자들이 나 없음을 알기는 하지만 세속의 법을 따라 나라고 말할 지언즉 그것이 실체적인 나인 것은 아니다. 무아의 법 가운데 나를 말함은 세속법을 따르는 까닭이니, 힐난할 것은 아니다.”

불교에서는 무아(無我)라고 하여 ‘나는 없다’라고 한다. 그럼에도 경전에서는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라고 하여 ‘나’라고 말한다. 아공법공(我空法空), 일체법이 다 공하다고 말하면서도 일체법을 설한다. 언어는 참된 진실을 말할 수 없다고 하여 언어와 개념을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언어로 경전을 설한다.

중생에게 출세간(出世間)의 법을 설하려면 세간 속에 사는 중생의 언어로, 중생의 수준에 맞는 방편(方便)으로 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방편의 역할이다. 모든 방편은 쓰고 버려야 할 것들이지만, 쓰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기도 하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지 않으면 사람들은 달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부처님께서 ‘나’를 내세우셨다거나, 아상이 있어서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나를 실체화한 것이 아니라, 인연 따라 무상하게 변해가는 무아의 존재를 중생들의 눈높이에서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나도 없고, 세상도 없고, 맛있는 음식도 안 먹고, 일도 안 하고, 돈도 안 벌고, 좋은 일이 있어도 좋아하지도 않고, 싫은 일이 있다고 인상을 찡그리지도 않고, 남들이 욕을 해도 전혀 대응도 안 하는 그런 돌부처 같은 것이 아니다.

깨달음을 얻은 이라고 할지라도 우리와 똑같이 먹고 마시고 자고 일하고 웃고 울고 좋아하고 싫어하고 화도 내고 특별한 음식을 좋아하기도 한다. 모든 것은 그대로다. ‘평상심이 바로 도(平常心是道)’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다만, 그것을 함에도 한 바가 없다. 머물러 집착하는 바 없이 그 모든 것을 다 하는 것이다. 다 하면서도 한 바가 없기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뒤끝이 없다. 마음에 잔재를 남기지 않고, 번뇌를 남기지 않는다.

말 그대로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중생과 똑같이 마음은 다 내고 살지만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낼 뿐이다. 무위행(無爲行), 해도 한 바가 없지만 그럼에도 할 것은 다 한다.

듣는 자가 없으나 인연 따라 듣는다

듣는다는 것은 어떻게 듣는가? 귀[耳根]로 듣는가? 귀의 의식[耳識]으로 듣는가? 뜻의 의식(意識)으로 듣는가?
귀로 소리를 듣는 것도 아니요, 귀의 의식이나 뜻의 의식으로 소리를 듣는 것도 아니다. 다만 여러 가지 인연이 화합함으로써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지, 어떤 한 법이 소리를 듣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귀는 감각이 없기 때문에 소리를 듣지 못하고, 식은 색깔도 없고, 상대도 없고, 처소(處所)도 없는 까닭에 역시 소리를 듣지 못하고, 소리 자체도 감각이나 감관이 없기 때문에 소리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귀가 망가지지 않았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에 이르렀으며, 뜻으로 듣고자 한다면 육근(六根)과 육경(六境)과 육식(六識)이 화합하였기 때문에 이식(耳識)이 생기며, 이식이 생기면 의식이 갖가지 인연을 분별하여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누가 소리를 듣는가?’ 하고 힐난할 것 은 아니다.
불법에는 어느 한 법이 짓거나 보거나 아는 일은 없나니, 다음의 게송을 보라.
업(業)도 있고 과(果)도 있지만
업과 과를 짓는 자(作者)는 없다.
이는 가장 높고 심히 깊은 법이니 
오직 부처님만이 밝게 아신다.
공하지만 단멸(斷)하는 것은 아니요. 
상속하지만 항상(常)하는 것도 아니다. 
죄와 복 또한 이와 같으니
이런 법을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연기법이다. 귀가 제 혼자서 듣는 것도 아니고, 소리가 제 혼자서 듣는 것도 아니며, 귀의 의식이 듣는 것도 아니고, 뜻의 의식이 듣는 것도 아니다. 그 모든 것이 인연 따라 화합할 때만 비로소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근경식(根境識)의 삼사화합(三事和合)이다.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이 화합하여 접촉할 때 의식이 생겨나고 그 의식에서 느낌과 애욕과 집착 등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것 이 십팔계(十八界) 십이연기다.

육근 혼자서 보고 듣고 말하고 느끼는 것도 아니고, 육경 혼자서도 아니며, 육식 혼자서 하는 것도 아니다. 이 모든 것이 인연 따라 잘 모였을 때만 비로소 소리도, 빛깔도, 냄새도, 감촉도 느끼고 인식할 수 있는 것일 뿐이다. 어느 한 법만이 저 홀로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다. 인연 법에는 저 홀로 하는 것이 없다. 인과 연이 서로를 받쳐 주고 도와주고 맺어주어야지만 과보를 낼 수 있는 것이다.

원인도 있고 조건도 있고, 결과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생멸법일 뿐이지 실체적인 것은 어디에도 없다. 실체가 없는 것들이 수많은 조건과 인연화합으로 모이면 잠시 꿈과 같은 결과를 만들어 낼 뿐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인도 있고 연도 있고 조건도 있고 결과도 있지만 그 모든 것의 주관자는 없다. 업을 짓기도 하고 받기도 하지만 업을 짓거나 받는 ‘자’는 없다. 초기경전에서 ‘업보(業報)는 있되 작자(作者)는 없다’는 것이 이를 말한 것이다. 업도 있고 과보도 있지만 그 업을 짓고 받는 ‘자’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아이고 공이다. 실체가 없음에도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이렇듯 공하지만 단멸하는 것이 아니고 상속하지만 그렇다고 상주하는 것도 아니다. 텅 빈 가운데 있지만, 있는 가운데 없다. 마치 촛불과 같이 처음 탈 때의 불꽃과 나중의 불꽃이 같지만 다르고 다르지만 같은 것과 같다.

죄와 복도 그와 같다. 죄도 있고 죄의 과보도 있고, 복도 있고 복의 결과도 있지만 죄를 ‘짓는 자’나, 복을 ‘받는 자’는 없다. 죄나 복도 중도(中道)이기에, 상주하는 것도 아니고 단멸하는 것도 아니니, 한 번 죄를 지으면 절대적인 죄인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죄가 완전히 없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한 가능성인 것이다.

죄를 지었더라도 죄라는 것이 상주하는 것은 아니니 절대적인 ‘죄인’ 으로 낙인찍힐 것도 없고, 죄의식에 시달릴 것도 없다. 그렇다고 단멸 하는 것은 아니니 참회하고 용서를 구해야 하며, 복도 지어야 한다.

상주나 단멸이 아니라, 인연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니 마음으로 어떤 마음을 가지느냐에 따라 복을 받을지, 죄의 업보를 받을지가 결정되는 것이다. 죄를 지었더라도 어떤 마음으로 어떤 인연을 짓느냐에 따라 죄업을 비껴갈 수도 있고, 복을 지었더라도 그 이후에 다시 나쁜 마음으로 산다면 복의 결과를 못 받게 될 수도 있다.

언제나 연기법과 중도의 가르침에서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다. 내 마음이 주인이 되어 어떤 결과를 맺을지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라는 존재, ‘짓는 자’가 없으니, 스스로를 죄인으로 낙인찍을 것도 없고, 죄의식에 시달릴 것도 없고, 복 짓는 사람이라고 자랑할 것도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일 뿐이고, 우리는 다만 그 모든 것을 그저 지켜볼 뿐이다.

사리불도 부처님에 비하면 어린이 수준

『반야경』
사리불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보살마하살이 일체법을 알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행해야만 하는지요?”
『논(論)』
사리불은 일체지자(一切智者)가 아니었기에, 부처님의 지혜에 비한다면 마치 어린아이와도 같았다.
『아바단나경(可檀那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머무실 때 해 질 무렵 경행(經行)하고 계셨는데 사리불이 뒤를 따랐다. 이때 매가 비둘기를 쫒으니 비둘기는 부처님 곁으로 날아와서 숨었다. 부처님의 그늘 아래에서 비둘기는 편안해지고 두려움이 제거되었다. 나중에 사리불이 가까이와 사리불의 그림자가 비둘기 위에 닿으니 비둘기는 다시 소리를 지르며 처음과 같이 두려움에 떨었다. 이에 사라불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과 저의 몸이 모두 삼독심이 없거늘 어찌하여 부처님 곁에서는 두려움이 없더니 제가 가까이 가면 비둘기가 소리를 내고 두려워하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는 삼독심의 습기(習氣)가 아직 다하지 못한 까닭이다. 그러므로 그대의 그림자가 비둘기를 덮을 때는 두려움이 제거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 이후의 수행이 중요한 이유다. 돈오(頓惡) 이후의 점수(漸修), 혹은 견성(見成) 이후의 보임(保任)이 필요한 이유다.

부처님의 으뜸가는 아라한의 제자들이 그렇게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두 부처님께 언제나 법문을 듣고 자신의 공부를 점검하였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견성, 돈오라는 깨달음의 체험은 깨달음의 완성이 아니라, 이제 불법에 발을 들여 놓은 불교 공부의 입문이라고 할 수 있다. 깨달음 이후에 진짜 공부는 시작되는 것이다.

깨달음 이전에는 공부라고 할 수도 없고, 그저 오직 모를 뿐이다. 모르고 모르다가 툭 터져 진실을 보고 나더라도, 그때부터는 업습(業習)의 조복이라는 공부를 닦아가야 한다. 삼독심의 습기가 아직 남아 있는 까닭에 그 습을 조복시키는 공부, 깨달음이 익숙해지는 공부가 남아 있는 것이다.

아무리 지혜제일의 사리불이라 할지라도 부처님처럼 완전히 깨달음을 얻으신 분 앞에 간다면 아직도 법에 있어서는 어린아이에 불과한 것이다.

법의 실상

“어떤 것이 제법실상(諸法實相)인가?”
“…실상이란 파괴할 수도 없고, 항상 머물러 변치 않으며, 능히 만들어내는 이도 없다. 이 이치는 일체의 관점을 버리고, 일체의 언어를 멸하며, 모든 심행(心行)을 여의면 본래 불생불멸이어서 마치 열반의 모습 같으니, 일체의 법 모습이 역시 그와 같다는 것이다. 이것을 제법실상이라 부른다.
허공과 같아 물듦이 없고, 희론도 없고, 문자도 없나니, 이렇게 능히 관찰하면 곧 부처를 보리라. 여법하게 관한다면 부처와 반야와 열반 이 셋은 곧 하나라서 실로 다를 바가 없네… 반야는 곧 한 법이지만 부처님은 갖가지 이름으로 말씀하시어 중생들의 근기에 맞춰 그들을 위해 다른 말을 세우실 뿐.
어떤 이가 반야를 얻으면 따지고 헤아리는 마음이 모두 멸하니 마치 태양이 뜨면 아침 이슬이 일시에 없어지는 것과 같다. 반야는 오는 바도 없고 가는 바도 없으니 지혜로운 이는 온갖 곳에서 반야를 구하나 얻을 수 없다. 어떤 이가 반야를 보면 곧 해탈을 얻는 것이지만, 반야를 보지 못한다 해도 이 또한 해탈을 얻는 것이네… 언설은 세속을 위한 것이지만 일체를 가엾이 여기는 까닭에 거짓된 이름으로 법을 설하시니 비록 말했으나 말 한 바가 없다네.

참된 법의 실상은 파괴될 수 없다. 생겨난 것은 사라지겠지만 이것은 생겨나는 것도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중생이 제법실상을 깨달을 수 있을까? 생각이 꽉 막혀야 한다. 분별심을 조복 받아야 한다. 일체의 견해, 관점이 다 사라지고, 일체의 언어와 개념을 멸하며, 마음이 그 어디로도 가지 못해 꼼짝 못하게 되었을 때, 아무런 분별망상도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곧바로 불생불멸의 열반이 드러날 뿐이다. 제법의 실상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제법실상이란 열반은 허공과 같고, 물듦도 없고, 희론이나 문자도 없다. 이 제법의 실상을 열반이라고도 하고, 반야라고도 하며, 열반이라고도 부를 뿐, 그것은 말만 다를 뿐 같은 것을 가리킨다.

헤아리는 마음만 모두 멸하면 곧장 반야지혜가 드러난다. 반야를 얻는다는 것은 곧 헤아리는 마음이 멸했다는 것이다. 반야를 보면 곧장 해탈을 얻는다.

그러나 신비로운 사실은 반야를 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이 또한 해탈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언제나 완전한 해탈의 즐거움 속에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제법실상은 드러나 있다. 다만 우리의 허망한 의식이 알음알이로 헤아리기 때문에 해탈하고도 해탈했음을 자각하지 못할 뿐이다.

수희찬탄(隨喜贊嘆)의 공덕

더불어 기뻐한다 함은 어떤 사람이 공덕을 지을 때 그것을 보는 이가 마음으로 더불어 기뻐하면서 ‘참으로 장하구나’ 하고 칭찬하는 마음을 내는 것이다.
비유컨대 한 사람이 갖가지 묘한 향을 팔고 다른 사람이 그것을 살 때, 그 곁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그 향기를 맡지만 그 향에는 전혀 손상이 없고 그 사고파는 두 사람도 잃는 것이 없는 것과 같다.
보살은 수희찬탄(隨喜讚嘆)하는 마음으로써 복덕과 과보를 내어 회향하며, 수희찬탄은 곧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이 되므로 성문(聲聞)이나 벽지불(辟支佛=獨覺)을 구하는 이의 보시보다도 더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비유하건대 마치 사람이 작은 물건을 국왕에게 바치더라도 아주 많은 대가를 얻는 것과 같다. 또한 소라를 불 때 기운은 아주 작게 써서 불었는데도 그 소리는 매우 큰 것과 같다.

누군가가 공덕을 지을 때, 혹은 누군가에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 기쁜 일이 생겼을 때, 시기와 질투를 하지 않고, 내일처럼 기뻐하면서 더불어 기뻐하고 칭찬, 찬탄하는 마음을 내어 준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지은 공덕이지만 나에게도 똑같은 복덕이 쌓인다. 이 세상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요, 마음공부의 장이기 때문이다.

물질적으로 누군가가 크게 보시를 했다면 내일처럼 기뻐해주라. 수희찬탄만 했을 뿐인데, 그 사람이 한 보시의 공덕을 나도 똑같이 받게 된다. 왜 그럴까? 보시의 참된 공덕은 마음에서 오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보시를 했지만 마음속에 흔연하지 않은 마음이나 아깝다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참된 공덕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하지 않고 남이 하는 것을 찬탄만 하더라도 내일처럼 진심으로 더불어 기뻐한다면 내게 더 큰 공덕이 쌓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은 물질세계인 것 같지만 사실은 마음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유식무경(唯識無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을 수희찬탄하고, 불법을 수희찬탄하고, 불법을 공부하는 사람을 수희찬탄한다면 그것은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이 된다. 수희찬탄할 때 내게도 그런 일이 생긴다. 부처님과 법을 수희찬탄하면 내가 법을 깨달을 인연을 짓는 것이 된다.

소위 대박이 나서 갑자기 부자가 된 사람이 있다면 시기질투를 하기 보다 진심으로 기뻐해주라. 내게도 그런 복이 올 것이다. 특정한 공덕에 대해 수희찬탄해 준다는 것은 곧 그 특정한 공덕을 내가 받게 되는 결과를 끌어오는 것이다. 마음에서 영글고 연습이 되면 그것은 머지않아 현실이 된다. 

 

법상스님-불교 경전과 마음공부 글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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