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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경전

해심밀경(解深密經)

by 파장波長 2024. 2. 18.

밀경(解深密經)은 유식사상의 근본이 되는 불교경전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신라와 고려시대에 널리 연구되였고, ‘해심밀’은 긴밀하고 깊게 얽힌 것을 푼다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입니다. 이 경은 마음에 의하여 세상의 만사가 얽힌 상태로 전개된 것임을 본질적인 측면에서 명쾌하게 해명하기 위하여 설하여진 것입니다.

여러 가지 한역본 가운데 우리 나라에서 가장 많이 유통되고 있는 것은 당나라 현장(玄奘)의 번역본입니다. 

① 서품(序品), 
② 승의제상품(勝義諦相品), 
③ 심의식상품(心意識相品), 
④ 일체법상품(一切法相品), 
⑤ 무자성상품(無自性相品), 
⑥ 분별유가품(分別瑜伽品), 
⑦ 지바라밀다품(地波羅蜜多品), 
⑧ 여래성소작사품(如來成所作事品),

8품 중 ②∼⑤의 4품은 유식(唯識)의 경을 밝힌 부분입니다. ⑥은 유식의 관법(觀法)을 설명하고 있으며, ⑦은 유식의 행(行)을, ⑧은 유식의 과(果)를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②∼⑤의 4품은 이 경의 핵심을 이루는 부분인데, ② 승의제상품은 승의제인 진여(眞如)의 경을 설명하였고, ③심의식상품은 세속제(世俗諦)의 경을 밝힌 것으로 서로 상대(相對)되는 것입니다.

이 승의제와 세속제는 다른 경에서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라고도 불리는 것으로, 승의제는 마음의 영원불멸한 실상(實相)을 깨닫는 일을 말하고, 세속제는 마음의 동요가 빚는 갖가지 생멸(生滅)의 상에 대한 이해를 말합니다.

승의제상품은 진여에 대한 설명을 네 가지 측면에서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진여는 명언(名言)과 유(有) · 무(無)의 두 가지 관념을 초월하여, 인간의 얕은 분별지(分別智)의 사의(思議)를 훨씬 넘어섰고, 결코 물건이나 관념이 아니므로 수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며, 모든 것에 두루 평등하게 관련되어 한결같은 맛〔一味〕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의식상품에서는 제8식(識)을 설하고 있는데, 제8식은 항상 제6식과 함께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갖가지 분별을 일삼는 근본이 됨을 밝혔습니다. 또 이렇게 분별된 것들에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과 의타기성(依他起性)의 것이 있으며, 이 두 가지에다 진여의 원성실성(圓成實性)을 포함하여 일체법(一切法)의 법상(法相)이라고 설한 것이 일체법상품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일체법의 이와 같은 삼성(三性)에는 그 자성이 무성이라는 성격〔自性無性性〕이 있으므로 이것을 강조한 것이 제5품입니다. ⑥분별유가품에서는 지관행(止觀行)을 상세하게 설명하였고, ⑦지바라밀다품에서는 부처님이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을 상대로 설한 십지(十地)와 십바라밀(十波羅蜜)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으며, ⑧여래성소작사품은 여래의 법신상(法身相), 그리고 화신(化身)의 작업(作業)은 어떠한가 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경에 대한 우리 나라 승려의 주석서로는 신라 원측(圓測)의 『해심밀경소 解深密經疏』10권, 원효(元曉)의 소(疏), 경흥(憬興)의 소 5권, 영인(靈因)의 소 11권 등이 있습니다.

이 중 원효의 것은 서문만 남아 있고, 원측의 것은 제10권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전하며, 경흥과 영인의 것은 현존하지 않습니다. 이 가운데 원측의 것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현존하면서 널리 읽히고 있는 대표적인 주석서입니다. 따라서 이 경과 이 경에 담겨 있는 유식사상 등을 연구하는 데는 원측의 소가 절대적인 지침서가 되고 있습니다.


삼성(三性)

모든 법상(相)에는 3가지가 있다. 
첫째는 변계소집상(遍計所執相)이요, 
둘째는 의타기상(依他起相)이요, 
셋째는 원성실상(圓成實相)이니라.
변계소집상이란, 이른바 이름으로 거짓되이 세운 일체법은 자성과 차별되며, 말을 마음대로 일으키게 하는 까닭이다.
의타기상이란, 일체법의 인연으로 생기는 자성이니, 즉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기는 것이니라, 무명(無明)은 행(行)의 연이 되고 내지 순전히 큰 괴로움의 뭉치를 부르고 모은다.
원성실상이란, 이른바 일체법의 평등한 진여이다. 이 진여에서 모든 보살들이 용맹 정진으로 인연을 삼는 까닭에 능히 통달한다. 이러한 통달에서 점점 닦고 모아서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원만히 끼친다.

변계소집상(遍計所執相)이란, 중생이 번뇌망상과 분별심을 일으켜 상을 짓는 것을 말한다. 변계(遍計)란 의식으로써 두루 헤아리고 분별한다는 말이고, 소집(所執)이란, 그렇게 스스로 분별해서 만들어 놓은 상을 있다고 여겨 제 스스로 거기에 집착하는 것이다. 중생은 이처럼 없는 것을 자신의 의식으로 분별하고 헤아려 있다는 상을 만들어 놓고 스스로 거기에 얽매여 집착한다. 이렇게 만들어 놓은 상이 변계소집상이다.

의타기상(依他起相)이란, 인연이 모여서 이루어진 모든 것들을 말한다. 우리가 ‘있다’고 여기는 일체 모든 존재, 일체제법, 삼라만상은 전부 인연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인연 따라 만들어진 모양을 대상으로 변계소집상이 자기만의 모양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직장에 취직하여 일하는 인연으로 인연 따라 월급 300만원이 내게 들어왔다. 이 300만원은 의타기상이다. 인연 따라 만들어진 모양이다. 그런데 이 의타기상을 대상으로 중생은 자기 생각으로 헤아리고 분별하여 ‘많다거나 적다’고 분별한다. 박봉이라거나 많은 월급이라거나 하며 제 스스로 분별한 뒤에 그것을 사실이라고 여겨 작다고 여기면 ‘박봉의 월급을 받는 가난한 자’라는 상을 세우는 것이다. 이것이 제 스스로 만든 변계소집상이다.

그런데 참된 진실에서는 어떨까? 인연 따라 생겨난 300만원은 많거나 적은 금액이 아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중립적인 300일 뿐이다. 그 300만원이라는데 변계소집의 상을 세우지 않으면 그저 300만원은 아무 문제가 없다. 많은 것도 아니고 적은 것도 아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분별없는 실상일 뿐이다. 그저 평등한 진여일 뿐이고, 여여(如如)한 원성실상일 뿐이다.

삼무자성(三無自性)

승의생이여, 마땅히 알라. 나는 3가지 자성이 없는 성품[無自性性]에 의해 밀의(密意)로써 말하여 일체법이 모두 자성이 없다고 말하노라.
이른바 모습의 자성 없는 성품[相無自性性]이며,
생의 자성 없는 성품[生無自性性]이며,
승의의 자성 없는 성품[勝義無自性性]이니라.
상무사상(相無自性)이란, 이른바 변계소집이라, 이는 분별하여 거짓된 이름을 말미암아 세워져서 모양이 된 것이기에 그렇게 세워진 상이란 자성이 없다고 말한다.
생무자성(生無自性)이란, 이른바 법의 의타기상이니, 이는 다른 인연을 말미암아 있는 것이요 자연으로 있는 것이 아니기에 생의 무자성이라 말한다.
승의무자성(勝義無自性)이란, 일체법의 법무아의 성품을 승의라 하며 이는 자성 없는 성품이라 부른다.
나는 이러한 3가지 자성이 없는 성품에 의하여 일체법은 모두 자성이 없다고 말한다.

앞에서 설한 삼성(三性)은 그 성품이 본래 무자성(無自性)이다. 변계 소집성은 상무자성으로, 허망한 분별망상으로 인해 생겨난 일체 모든 상은 사실 자성이 없다. 분별하여 모양을 거짓으로 만든 것이니 상의 자성이 있을리 만무하다.

의타기성은 생무자성으로, 여러 인연이 모여 이루어진 모든 것은 그것 자체의 실체가 없다. 인연 따라 생겨난 것은 인연이 사라지고 나면 흩어지는 무상하고 무아인 존재일 뿐이다. 인연생(因緣生)은 곧 인연멸(因緣滅)이다. 그러니 의타기성으로 생겨난 모든 존재는 진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생무자성이다. 생겨났지만 생겨난 바가 없다. 인연 따라 생긴 모든 것들은 무아이고 공한 것이다.

원성실성은 어떨까? 원만한 법의 참된 성품을 불성이라 하든, 여래장이라 하든, 자성이나, 주인공이나, 본래면목, 열반, 해탈, 반야, 승의, 무엇이라 부르든 간에 그 또한 실체일 수는 없다. 아무리 참된 진리의 성품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것이 따로 절대적으로 실존한다고 여기면 거기에 집착하게 된다.

승의(勝義)란 열반, 해탈을 말하는데, 결국에는 원성실성이란 승의도 무자성이란 뜻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열반에도 집착하지 말라, 법에도 사로잡히지 말라고 한다. 법에도 집착해서는 안 될진대, 하물며 비법(非法)에 집착하겠는가 하는 『금강경』의 구절도 이것을 설하는 것이다.

승의제(勝義諦)

자내증(自內證)의 내적인 깨달음과 상 없이 행하는 바는 말할 수 없으며, 표시가 끊어졌네. 모든 시비가 쉬어진 승의제(勝義諦)에는 일체의 생각과 사유가 설 자리가 없네.

깨달음, 숭의제에는 일체의 시비가 끊어졌다. 상이 없으며, 말할 수도 없고, 그 어떤 언어로도 표시로도 가리킬 수 없다. 생각으로 헤아려 알고자 하면 깨달음과는 어긋난다. 생각이 딱 멎는 순간, 사유와 알음알이가 멈추는 순간, ‘나’라는 상이 사라지는 순간, 바로 그때 자내증의 내적인 깨달음과 승의제는 몰록 드러날 뿐.

아타나식(阿陀那識) 

아타나식(阿陀那識)은 심히 깊고 미세하여 어리석은 범부들에게는 말하지 않나니 일체의 종자는 끊임없는 폭포의 흐름 같아서 그들이 분별하여 ‘나’라고 할까 두렵다.
모든 생명이 이 세상에 출현하는 것은 일체종자식(一切種子識)이 생겨나고 자라 육체적인 여러 기관(根)을 유지하며, 분별의 언어에서 기인된 훈습을 유지함을 근본으로 한다. 이 점에서 아타나식이라 하며 혹은 개인 존재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므로 아뢰야식이라고 한다.

『해심밀경(解深密)』의 아타나식은 곧 업과 윤회의 주체인 종자식 즉 아뢰야식과 같은 의미다. 수많은 업의 종자는 끊임없이 폭포처럼 홀러 아타나식을 이루다보니, 중생들은 그것을 ‘나’라고 여긴다.

착한 말과 생각과 행동을 많이 하면 착한 업을 짓게 되고, 그러면 선업이 쌓여서 스스로를 ‘착한 사람’이라고 여긴다. 업의 종자가 모여 그것을 ‘나’라고 믿는 것이다. 그런 착한 업이나 나쁜 업이 쌓이고 모인 것을 일체종자식이라고 하고, 그로 인해 육체적인 여러 기관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업과 윤회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법상스님 - 불교 경전과 마음공부 글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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