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승불교의 종교성
대승(大乘, Mahāyāna)이라는 말은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이라고 일컫는 불교의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자신의 편협한 시각이나 입장을 극복하는 개방적인 자세를 뜻하는 말로 ‘대승적 자세’ ‘대승적 견지’ ‘대승적 차원’ 등의 용법으로 자주 쓰인다. 그렇지만 대승(大乘)이란 무엇일까? 우선 대승이란 말부터 살펴보자. 대승이란 산스크리트 어로 마하야나(Mahāyāna)인데 ‘크다’ ‘광대(廣大)’ 를 의미하는 마하(Mahā)와 탈것을 의미하는 야나(yāna)가 합성된 것으로서 ‘크나큰 탈 것’ 이란 뜻이다.
불교는 그 가르침의 창시자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애에서 성취된 정신성과 윤리성의 구체적인 통일에서 시작된 종교다. 우리가 부처님의 생애를 심사숙고할 때 찾을 수 있는 이 두가지 개성은 바로 포교의 종교로서 불교가 지닌 본래의 휴머니즘을 보여주고 있으며 대승불교가 출연하게 된 본질적인 계기를 잘 보여준다.
첫째는 구도적 사상가로서 모습이다. 즉 부처님은 철저한 구도자, 인류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성 또는 부라흐마니즘의 제의주의(祭儀主義)와 숙명관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보편적 지성주의를 구현한 종교의 창시자로 역사의 무대에 나타났다.
둘째는 종교적 설법자로서 모습이다. 부처님은 인생의 고통과 불안에서 해탈의 가르침을 펴고 그 자신의 생애에서 구현해 보인 인류의 영적인 스승이며, 신(神)이나 전통적인 사상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윤리적 주체로 인간을 강조했다.
이상이 부처님의 생애에서 보여지는 두 가지 개성적인 모습이다. 여기서 종교적 설법자로서 부처님의 모습은 본래 포교의 종교인 불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일체중생과 함께 부처를 이루자고 강조하는 대승불교의 원형이다. 또한 부처님이 성도(成道) 한 후, 구도적 사상가였던 부처님이 처음 가르침을 설한 초전법륜(初轉法輪)을 통해서 비로소 종교적 설법자의 모습의 면모 했기 때문에 부처님의 초전법륜은 매우 중요하다.
정각자(正覺者)의 고독이라고 말해지고 있지만 깨달음을 얻은 직후의 부처님은 세상을 향해 자신의 가르침을 펴는 일에 갈등을 느끼고 있었다. 그 갈등은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언명에서도 나타난다.
“이 깨달음은 내가 곤고(困苦)해서 困 괴로울 苦고통 증득한 것이지만 이 진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탐욕과 분노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이 진리를 깨치기는 쉽지않다. 이 가르침은 세상의 흐름과는 다르며 지극히 심원하여 관찰하기 어려우므로 욕망에 집착하고 무지에 덮인 사람들은 이를 볼 수 없다.”
부처님 자신이 스스로 언명(言明) 했던 바와 같이 불교의 가르침은 지식욕이나, 욕망, 분노에 사로잡려 있는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가르침이다. 즉 현대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사려 깊은 안목과 순수한 신심으로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인생의 고통과 불안에 관한 불교의 성찰과 해탈의 가르침은 가까이하기 어려운 미지의 사상이나 철학일 뿐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이와 같은 갈등을 알아차린 한 범천(梵天)이 부처님께 세상을 향해 설법하기를 청했다고 경전은 기록한다.
세상에는 어떤 더러움에도
물들지 않는 순결한 마음들이
무척 많습니다.
이들은 진리의 목소리를
목마르게 찾습니다.
부디 감로의 문을 열어
행복한 분께서 깨치신 바를 설하소서
반드시 깨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신의 가르침을 세상에 전할 것을 결심하고 다음과 같이 외쳤다.
그들에게 감로(甘露)의 문은 열렸다.
귀 열린 자는 들으리라.
눈 있는 자는 볼 것이다.
자신의 낡은 사념(邪念)을 버리고
진리의 북소리를 들을지어다.
세상을 향한 설법을 결심한 부처님은 자신의 출가초기에 함께 수행하던 아야 교진여등 5명의 비구들에게 최초의 설법으로서 <율장, 律藏> 제1권은 부처님의 전도 선언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모든 속박(束縛)에서 해탈했노라.
비구들이여 편력하라,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의 안락을 위하여,
세간에 대한 자비를 위하여, 모든 신들과 인간들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 말라.
비구들이여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고 내용도 있고 문구도 갖춘 설법을 하라.
한결같이 완전하고 정결한, 깨끗한 수행을 알리도록 하라.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서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 말라” 는 부처님의 전도선언은 불교가 처음부터 몇몇 종교적 엘리트만의 종교가 아니라 세상을 향해, 민족과 계급의 차별을 넘어서 개방된 종교임을 잘 보여준다. 무엇보다는 부처님은 한 인간으로서 동료 인간들에게 무한한 선의와 자비심을 갖고 있는 휴머니스트였다. 그것은 <응일아함경? 권 27에서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인간선언으로 정리되어 있다.
나는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고
인간으로 성장하였으며
인간으로 붓다를 이루었다.
我身生于人間 長于人間 于人間得佛
신의 아들도 아니고, 스스로 신이라고 주장한 일도 없으며, 어떠한 신적(神的)인 권위나 강제된 교리도 설한 일이 없는 한 인간의 삶과 사상에서 불교와 같이 장대하고 깊이 있는 가르침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다. 한 인간으로서 부처님 개인의 삶에서 성취된 해탈의 가르침과 숭고한 인류애는 바로 불교의 변치 않는 척도를 나타내고 있다.
불교의 가르침에 귀의했던 모든 시대의 사람들은 대승불교의 사상과 실천을 통해서 한층 성숙한 안목으로 자신들의 인생을 바라보게 되었고, 수많은 구원과 신앙의 보살상을 완성해냈다. 관세음보살도, 보현보살도, 지장보살도, 문수보살도, 대세지보살도, 인로왕보살도 모두 대승불교의 영원한 인간상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동아시아 대승불교의 깊은 직관과 신앙, 찬연한 불교문화는 대승불교의 실천자인 보살의 비원(悲願)이 이룩한 보살불교가 그 본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마저도 보살도의 완성자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2. 보살신앙의 종교적 의미
보살 신앙은 고차적인 불교교학의 하향적인 단순화가 아니라 불교의 가르침이 대중의 삶 속에 투영되어 걸러지고 의례 화하면서 세련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보살 신앙의 근저를 이루는 대중의 종교적 희구는 다음과 같다.
① 불교특유 업과 윤회의 신앙
② 정토에의 염원
③ 지옥고(地獄苦)의 공포에서의 해방
④ 자연재해, 질병과 전란에서의 구원
⑤ 부와 수명에 대한 기원
⑥ 자비의 윤리적 실천에 의해서 생성되었으며 점차 고차적 대승불교의 실천의지
고에서의 해탈은 물론 모든 생명체가 부처님의 진리를 구현하도록 서로 이끌고 헌신해야 한다는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위로는 부처님의 진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이라는 대승불교 본래의 운동과 목표가 대승경전과 사상 보살 신앙과 실천 역사화라는 과정으로 실천되는 모습이다. 이상의 설명을 간략히 도시(圖示)하면 다음과 같다.
이와 같은 보살신앙의 성립과 전개는 대승불교 교학의 하향적인 대중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보살 신앙은 대승불교의 고원한 이념이 대중의 삶 속에서 걸러지고 의례 화하는 과정을 보여주며 결국 보살 신앙과 영험이 주동력이 된 대승불교를 발전시키게 된다. 따라서 초기불교 및 아함에 대한 지나친 열망 때문에 대승불교나 선(禪)과 같은 깨달음의 불교를 진정한 불교의 모습이 아니라고 도외시하고 비판하는 최근 불교학 연구의 동향은 재점검해야 할 필요가 충분하다. 왜냐하면 초기불교의 교리나 수행법만으로는 지구적 규모로 불교가 전파되는 오늘날 대승불교의 유연한 문화 적응력과 깊은 종교성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기복신앙이라고 불릴 정도로 보살신앙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우리나라 불교의 경우 보살 신앙은 불교 형성의 주동력이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기복신앙을 무조건 비판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기복신앙의 에너지를 개인적인 차원의 기복(祈福)이 아니라 대승불교 본래의 빛나는 불교 정신이 투영되는 대중적인 실천으로 이끌어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새로운 대승 문화의 모색과 실천을 전망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보살도를 실천하는 대승적 삶의 준칙을 ‘상구보리 하화중생, 즉 위로는 부처님의 진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새을 교화 한다’ 고 하면서도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도리를 수승한 근거를 갖춘 대보살들만이 실천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정작 일상의 현실과는 관계없는 가르침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보살의 불교적인 이상(理想)은 바로 일상의 현실 속에서만 실천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상구보리 하화중생’ 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룡하고 능동적인 처세의 도리이며 화목과 자기 수행의 자기 수행의 도리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상구(上求)’ 와 ‘하화(下化)’라는 명제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상구(上求)란 부처님과 윗사람에게는 항상 바른 삶의 길을 묻고 배워서 행하며 항상 새로운 지혜를 탐구하는 개인적인 영역이며, ‘화화’ 란 가르침을 베풀어 이끌어야 할 사람에게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의 육바라밀행으로 섭수(攝受)하는 사회적인 영역이다. 이것이 바로 일상속에서 실천하는 ‘상구보리 하황중생’ 이다. 그런 만큼 이 ‘상구’를 통한 개인적인 완성은 물론 ‘하화’가 가능할 정도로 높은 인간적 성숙과 지혜가 필요하다. ‘하화’ 그 자체 역시 개인적인 ‘상구’ 보다 얼마나 지난하고 어려운 것인지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현대의 우리는 ‘상구보리 하화중생’ 의 창조적인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첨예한 갈등을 겪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불교가 보여줘야 할 대승적 화합과 그 모범적인 실천에서 선두적 역할을 다해야 한다. 즉 현대의 우리는 ‘상구보리’의 실천으로 우리들의 불교수행을 더욱 튼튼히 다지고 ‘하화중생’의 실천으로 인간존중의 사회를 향해 노력하고 나날이 악화되어 가는 환경과 생태에 대한 불교적 인식과 삶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
3. 오늘날의 종교로서 대승불교
우리는 보통 대승불교에 관한 진지한 성찰도 없이 ‘대승불교는 대중의 불교’ 라고 말하고. 또 정치, 사회적으로 ‘대승적 입장’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같은 현상은 수많은 흉내내기 중의 하나일 쁀이다. 우리는 보통 불교에 대한 아무런 고민이나 자기 점검도 없이 책에서 읽은 얕은 지식으로 불교의 근본 문제에 관해 이리저리 말하는 경우가 많지만 불교에 관한 생명력 있는 성찰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엄밀한 자기 점검을 통하여 불교에 관한 통속적인 언설을 그대로 답습하기보다는 시대정신과 부단한 내면을 통해서 불교의 진실을 탐구해야 한다.
대승불교는 그 자체가 과연 대중의 불교인가? 역설적으로 대승불교는 그 사상 자체만으로는 대중들의 불교가 될 수 없다. 대승불교는 대중을 부처의 세계로 이끌겠다고 보리심을 발한 사람들의 불교이며 따라서 보통사람의 불교가 아니다. <화엄경>의 보현행원(普賢行願)은 자기자신의 삶을 꾸러 가기에 급급한 범인(凡人)들이 흉내는 낼 수는 있지만, 할 수 있는 수행이 아니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인간의 고통과 불안에 맞서 투쟁하는 정렬로 불타는 사람들의 불교이다. 이런 의미에서 불교적인 것과 연결되지 않았더라도 불교적인 결실을 맺고 있는 모든 인간의 삶이 말과 교리를 앞세우는 것보다 훨씬 대승적이다. 우리는 말로만 통념상의 대승불교를 외칠 것이 아니라 ‘대승불교란 진정 무엇인가?’라는 진지한 고민과 연찬(硏鑽)을 거듭 쌓아가야 할 것이다. 대승불교는 이름과 이념만으로 이루어진 불교가 아니라 진정 대승이고자 하는 보살들의 의지가 실천되고 일체중생에게 헌신하는 지혜와 자비의 행이 수반될 때 비로소 대승불교가 되는 것이다.
우리 한국불교는 대승불교라고 자부하면서 으쓱거리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진정 우리 시대의 한국불교를 대승불교라고 자부할 만한 불교를 이루어 왔는지 반성해야 한다. 현대 한국의 대승불교는 대중소비사회의 오염을 종말 처리하는 하수처리장이나 오염의 매립장이 되지 않도록 현실의 상대성을 깊이 통찰하고 대승불교 그 자체의 전망과 역사 생성력을 회복해야 한다. 물론 사회적 오염의 정화는 종교의 본연적인 소임이지만 ‘이것도 저것도 모두 대승적’이라는 전제하에 무한정 현실을 긍정하는 방임에 기울어져 아무런 장치나 이념도 없이 현대 한국사회의 오염에 물들어서는 안된다.
대승불교가 아무리 ‘자신의 편협한 시각이나 입장을 극복한 개방적인 가르침’이라고 하더라도 이 대승불교의 입장과 시야를 지나치게 확대하고 아무런 불교적 자각이나 실천 없이 대승이라는 용어를 임의대로 사용한다면 대승불교 스스로 정체성을 상실할 수도 있다. 그 결과 대승불교의 “일체 중생은 모두 부처님의 성품을 지니고 있다, 一切衆生 悉有佛性 일체중생 실위불성” 는 인간 긍정의 테제를 부조리하고 모순 많은 현실에 임의적으로 적용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안이한 우중화(寓衆化)와 악평등(惡平等)의 빠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으며 ‘인간은 모두 부처’라고 말하는 안이한 우중화에 만족하는 불교가 결코 아니다.
대승불교는 스스로의 전망을 확보하고 부단히 현실과 대면하지 않으면 존립할 수 없는 위기의 불교이다. 대승불교는 필연적으로 실천으로 그 정신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될 준엄한 위기를 처음부터 갖고 있다. 역사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대승불교의 방대한 교학 체계가 내압과 외압에 의해서 무너 저 내린 뒤 선(禪)은 비로소 자신의 독자적인 궤도를 찾았던 것이다.
화엄사상은 삶과 죽음이 반복하는 윤회의 연속적 사이클을 토대로 불교의 궁극적 이상인 부처님의 법계를 지향한다. 대승 불교의 웅대한 설계도로서 화엄은 불성의 전재가 무한히 지속되는 부처님의 법계가 중중무진, 무한히 개방되어 있다고 설한다. 그래서 화엄은 순일(純一)한 진리, 세계관에 서서 불교적 이상(理想)의 광휘에 이끌린 보살도 실천자의 진리의 생성력과 역동성에 주목하는 대승불교의 궁극적인 전망을 상징한다.
화엄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화엄경>의 성립과 사상, 경학을 수련한 끝에 언어와 사유면에서 화엄적 체계를 갖게 된다. 문제는 이처럼 고도의 불교학이 화엄적 사유의 자기만족, 자기 확대에만 머물면 그 사상은 현학과 사변을 피할 수 없다. 즉 사상이 사망한 것이다. 반야, 중관, 유식, 화엄과 같은 대승의 교리를 술어와 인용의 나열만으로 연찬하는 오늘의 불교학이 당면한 위기 또한 이와 같다. 방대한 연구자료와 현대의 인문과학이 제공한 방법론을 구사하고 있지만 그 틀은 여전히 사변의 근친적인 자기 복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론이 이론을 낳고 사변이 사변을 재생산하여 결국 언어의 유전자를 복제하는 것일 뿐 실천으로 직진하는 것은 아니다. 선이 필연적으로 화엄의 정교한 언어들을 과격하게 부정하고 등장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점에 유의해야 한다. 오늘의 불교학이 생동하는 언어로 불교의 심층을 보여줄 수 없는 한계도 바로 여기에 있다.
경전을 공부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불교에 대한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이 경전의 사상과 언어의 북제에 침 물 해 버린 나머지 경전공부가 바로 수행이며, 보살이며, 화엄의 실천이라고 만족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아니다. 그 사람의 보현행원은 머릿속에만 있다. 머릿속의 보살도인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가장 직접적이고 실존적인 종교로서 선의 입장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여기에 선이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을 내세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물론 실지의 분상에서 견성과 성불의 거리는 멀다. 그러나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불교의 언어와 논리적 유전자를 복제하는 불교 교학에 생명력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불교가 진정 대승불교이기 위해서 지금 한국불교 교학이 시급히 짚어가야 할 문제는 교학의 영적인 발전이 아니다. 경학의 언어를 그대로 복제한 언어가 그대로 포교에 연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대 불교학은 교리의 가장 간단한 원칙에서 종교적 생명력을 되찾아야 한다.
8 정도(八正道) 가운데 하나라도 바름이 있어야 하며, 실천과 참여에 무슨 콤플렉스가 있는 것처럼 구호로만 실천을 공허하게 강조할 것이 아니라 더욱 불교적인 삶의 틀을 복원해야 한다. 아무리 대승불교라고 할지라도 불교도 스스로의 인간적인 성숙이 우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불교적 인간상, 즉 보살이 추구하는 대승적 해탈은 단순히 개인적인 신앙이나 깨달음의 표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세계상과 역동적으로 상호 확인 관계에 있어야 한다. 즉 현대의 해탈은 현대적인 세계상의 핵심 속에 현대적 해탈과 자유를 구현하고 실증해 보임으로써 불교는 시대를 뛰어넘는 강력한 호소력을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경전의 언어와 의미의 복제에서 벗어나 마침내는 영원히 살아있으며 항상 언어를 앞서가고 있는 자신의 직관을 체득하기 위한 선의 화두처럼 하나의 질문에 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이미 경전의 언어로서 완결된 한 경지에 대한 자기만족이나 복제가 아니라 ‘대승불교의 교리, 종교적 이성을 어떻게 하나의 인간상으로 구현하는가? 또는 어떻게 사상에서 인간관으로 이행하는가?’라고 묻는 질문이다. 우리의 불교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때 비로소 대중들이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 알아듣도록 이야기할 수 있고, 삶의 불교적인 보범을 보이는 실천을 통해서 대승불교라는 뜨거운 용광로 속에 대중들의 다양한 삶의 전망에 용해시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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