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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교리

붓다의 인간관 ⑤ 죽음의 실상

by 파장波長 2022. 4. 13.

죽음의 실상과 불사(不死)의 가능성

 

인간은 종교적 동물이며 형이상학적 동물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은 의식주의 확보라고 하겠지만 동물과 달리 인간은 주어진 삶 자체가 지닌 종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문제성을 더욱 크게 의식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나는 여기에 있는가?
왜 나는 살아야 하는가?
나는 무엇인가?
왜 나는 결국 죽어야 하는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은 뒤에는 어떻게 되는가?

우리들은 이렇게 물으면서 고민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의문들 중에서 보다 심각하게 느껴지는 것은 역시 죽음의 문제일 것입니다. 나는 이미 태어나서 여기에 살고 있지만 죽음은 이제 닥쳐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란 무엇이며 죽고 나면 어떻게 될까? 이 의문이야말로 인간이 던지는 종교적 질문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질문이며 나아가 인간이 지닌 문제 중에서 가장 고뇌스러운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죽음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은 대개 두 가지의 기본적인 견해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죽음이란? 마음이 몸을 떠나는 것으로 죽어도 마음만의 불멸에 의해 사후 존재가 계속된다는 영혼불멸론입니다. 이에 반해 또 하나는 죽음이란? 몸을 이루는 요소의 흩어짐인데 마음이라는 것이 물질에 종속된 현상에 지나지 않아 죽고 나면 흩어지는 물질만 남을 뿐 사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멸론입니다.

 

이 두 견해는 역사적으로 면면히 맥을 이어오고 있는 사상들로서 피차간에 상당한 근거로 정립되어 있습니다. 그러데 그 근거들은 역으로 서로에게 치명적인 모순점을 일깨우고 있어서 어느 건해도 완벽한 진리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 죽음을 중심으로 마음과 몸을 연구하는 현대 사상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사실 불교에서도 삼법인설(三法印說)❶과 삼세윤회설(三世輪廻說)❷을 통해 두 견해를 일단 부정하고 지양하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여러 가르침 중에서 죽음의 문제와 관련해 먼저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삼세윤회설입니다. 삼세윤회설을 뒷받침하는 핵심적인 경문을 하나 살펴보면, “만일 고의로 지은 법이 있다면 반드시 그 과보를 받게 되니 혹은 현세에 받고 혹은 내세에 받는다." ⟪중함경 中阿含, 제3권 사경 思經⟫

 

"여기에서 현세와 내세는 죽음으로 갈라진다. 그러므로 이 경문은 죽은 뒤 내세에서는 어떤 방식에 의해서든 과보를 받을 존재가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할 것이다." 이것은 부처님이 사후 존재를 일단 긍정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삼세윤회설을 통해 불교가 죽음에 대해 지니는 기본 입장이 단멸론이 아님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삼세윤회설을 통해 단멸론적인 견해를 지양한 부처님은 삼법인설을 내세움으로써 이번에는 영혼불멸론적인 입장이 아님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후에 영속할 것이라고 상정되는 불멸의 마음이란 일체의 육체적 작용을 통솔하고 모든 인식 작용을 종합하는 하나의 주체로서 대개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주체를 자아(自我)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러한 주체를 육근(六根) 중에서 의근(意根)에 포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의근을 눈, 귀, 코, 혀, 몸과 함께 덧없고 괴로우며 무아(無我)라고 단정하고 있음을 또한 또한 볼 수 있습니다. <잡아함, 雜阿含 제13권> 현실 속에서 관찰해 볼 때 그 의지에는 영속성이란 없으며, 그러한 무상한 변화 앞에서는 주재성(主宰性)도 없기 때문에 참된 자아가 아니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영속하는 불멸의 마음이란 잘못된 견해임을 현실을 관찰로부터 자명한 사실로서 채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부처님은 삼법인설을 통해 영혼불멸론도 부정하고 삼세윤회설을 통해 단멸론도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죽음과 사후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은 어떠한 것일까?

 

우리는 앞에서 신비롭기 그지없던 인간 개체의 형성이 불행히도 일시적인 ‘형체’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됨을 살폈습니다. 한순간 성립된 어떤 ‘형체’ 위에 가해진 아집과 그것을 유지하려는 ‘느낌, 생각, 결합, 식별’이라는 일련의 작용이 덩달아 일어남으로써 인간 개체의 시원적인 부분이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종적으로 분리된 존재를 붙이는 결합 작용에 이어서 좌우 존재를 가기에게 병합하는 횡적인 결합이 일어난 끝에 현실과 같은 커다란 덩어리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 존재란 상하 좌우로 오르내리고 흩어지려는 기본 존재들을 한데 결합하고 있는 구조물이며 이 구조물을 이루는 핵심적인 원동력은 바로 ‘결합(행, 行)의 작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 개체의 ‘결합력’ 이란 기본 존재들이 보이는 분리의 성향을 언제까지나 막고 있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결합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앞서 잠시 언급했듯이 인간을 구성하는 기본 존재들은 주변 존재들과 민감한 작용 반응의 관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변 존재들은 수적인 면에서 인간을 구성하는 기본 존재의 합보다 월등히 많습니다. 작용력의 면에서도 인간 개체의 결합력보다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막강합니다.

 

여기서 만일 주변 존재들의 작용이 인간을 구성하는 기본 존재들에 상응하는 방향으로 주어지면 별문제 없습니다. 하지만 주변의 작용은 거의 언제나 인간에게 반하는 방향으로 가해집니다. 그래서 인간 개체를 유지하는 근간적인 결합력과 주변 존재의 반대 작용이 서로 대치되는 상황이 필연적으로 조성됩니다.

 

여기에 주의 존재들의 세력이 월등히 강하므로, 인간의 결합력은 견딜 수 있는 데까지 지탱하다 끝내 한계에 이르고 붕괴해 버리고 맙니다. 이러한 결합 작용의 종식과 더불어 인간을 구성하던 무수한 기본 존재들도 상하 좌우의 본래적인 위치로 주변 존재의 작용에 따라 오르내리고 흩어지기 시작합니다.

 

이와 같이 결합력의 종식과 함께 큰 덩어리를 이루던 기본 요소들이 본래의 자리로 흩어져 버리는 것이 죽음의 실상이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흩어진 기본 존재들이 다시 육계의 모습을 띨 것을 예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육계 중에 일시적으로 정지한 한 ‘형체’ 위에 다시 아집이 가해집니다. 아울러 그 ‘형체’를 지속시키려는 ‘느낌, 생각, 결합, 식별’의 작용이 연이어 일어나고, 이들이 근간적인 부분이 되면 그것을 중심으로 다시 횡적인 결합 작용이 진행되고 마침내 또 하나의 개체가 형성됩니다. 그 개체는 다시 주위 존재와의 대치를 견디다 못해 언제가 개체가 형성됩니다. 그 개체는 다시 주위 존재와의 대치를 견디다 못해 언젠가 또 붕괴되고 맙니다. 이렇게 계속하여 생사의 바퀴는 돌고 돌아가고, 이것을 생사윤회라고 합니다.

 

인간을 비롯한 일체 생명체의 삶과 죽음이 이처럼 도식화될 때 우리의 가슴은 무겁기만 합니다. 이 생에 닥칠 한 번의 죽음도 그토록 두려웠는데 끝없이 받아야 할 나고 죽음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나아가 오온을 근간으로 삼은 인간은 나고 죽는 것 외에는 병듦과 늙음 및 대인관계, 사회생활을 통하여 언제나 숱한 ‘괴로움’을 받습니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 볼 때 인간의 괴로움은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형체’를 나라고 집착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아집의 존속을 위해 떨어진 기본 존재를 하나의 개체로 ‘합쳐서 쌓아 놓은 것(잡기 集起)에서 기인함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합쳐 올라 하나의 개체를 고수하여 괴로움을 야기하는 형체(色), 느낌(受), 생각(想), 결합(行), 식별(識) 등의 다섯 가지 근간(오온 五蘊)❸을 ‘멸함’ 으로써 괴로움의 근원적 극복은 가능할 것입니다.

 

이러한 오온의 멸함을 위해서는 올바른 수행의 길이 필요합니다. 그 길은 우선 인간의 성립과 죽음에 대한 ①바른 견해(正見)를 가질 것을 요구한다. 그런 뒤 이를 바탕으로 ②바른 생각(正思惟) ③바른 언어(正語) ④바른 행동(正業) ⑤바른 삶(正命) ⑥바른 정진(正精進), ⑦바른 기억(正念) 등의 일련의 행위를 수습하고 끝으로 ⑧바른 삼매(正定)에 듦으로써 오온의 멸함을 체함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이 도처에서 설하셨던 사성제(四聖諦)❹ 및 팔정도(八正道)❺의 가르침입니다. 사성제의 참뜻을 철저히 파악하고 그에 입각해서 완벽하게 수행할 때 비로소 우리는 영겁의 생사고를 뛰어넘을 수 있으며, 그럴 때 또한 생사의 바퀴 대신 불사의 법의 바퀴가 돌아가게 될 가능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상과 같이 육계설(六界說), 오온설(五蘊說) 및 사제설(四諦說)을 살피면 인간을 철저히 의지적 존재로 규정하는 불교의 참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죽음마저도 인간 스스로의 선택의 결과라고 했는데 죽음이란 오로지 인간 스스로의 아집에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곧 상하 좌우로 움직임이 자유로운 육계(六界說)의 한 부분에 ‘나’라는 아집이 발생함으로써 일련의 과정을 거쳐(五蘊說), 죽음에 이르게 되고 나아가 윤회를 겪게 되는데[四諦說의 苦・集聖諦], 그 최초의 집착은 철저히 인간에게 귀속되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결코 외적인 어떤 요인에 의해서도 결정되지 않는 사건 이기도 합니다. 나아가 수행을 통하여 죽음 및 윤회의 한계 상황도 극복할 수 있으니[四諦說의 滅・道聖諦], 이때의 수행도 인간 스스로에 귀속되는 의지적 활동일뿐 어떤 외적인 결정 요인도 지니지 않는 사건입니다. 따라서 불교의 인간관이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을 철저히 ‘자유의지적 존재’ 로 규정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Note :
❶삼법인(三法印)이란, 불교의 근본 교리로, 남방불교에서는 열반 대신 고 苦를 삼법인의 하나로 꼽는다. 인 印은 일정불변 一定不變의 진리라는 뜻. 1) 제행무상 (諸行無常) 일체 현상계가 무상하며, 2) 제법무아 (諸法無我) 일체 현상은 자성이 없으며, 3) 열반적정 (涅槃寂靜) 생사에 윤회하는 고통을 벗어난 이상향
❷삼세윤회 (三世輪廻)는, 과거의 원인에 의하여 현재의 과보 (果報)를 받고, 현재의 원인에 의하여 미래의 과보를 받는 것을 말한다. 삼세윤회 (三世輪廻)에 의하면, 숙세 (宿世)의 악업에 의한 현세의 고통도, 선업 (善業)을 쌓으면 내세에 좋은 과보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기독교에는 이러한 재생의 기회가 없다는 것이 특징. 인간의 죄는 각자의 의지와 관계없이 원죄에 의해 이미 결정이 낳기 때문에, 기독교에서 문제되는 것은 오히려 선악의 문제보다 창조주인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문제가 된다. 곧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 믿지 않으면 영원한 지옥이 라는 것이다.
❸오온(五蘊)이란, 오음 (五陰)이라고도 말하며, ‘온 (蘊’)은 ‘집합’ 또는 ‘뭉친 덩어리’라는 뜻으로, 색수상행식 (色受想行識)을 말하는 동시에 불교의 근본 철학중의 하나로, 우리가 말하는 ‘나’라는 것을 구성하고 있는 다섯 가지 물질적 또는 정신적 오음소 (五陰素). 여기에서 일체의 번뇌 망상이 전개 된다. 그러나 ‘나’라는 것을 구성하고 있는 이 다섯 가지 기본 구성 요소를 반야심경의 첫 머리에서 관자재보살은 ‘오온개공 (五蘊皆空)’이라는 한 마디로 부정하고 있으며, 이것이 곧 깨침의 첫 관문인 동시에 이것은 또 무아와 연기 또는 공과 열반으로 이어지게 된다. 1) 색온 (色蘊) 생멸변화 (生滅變化)하는 육신 또는 물질세계. 나머지 수상행식은 정신세계 2) 수온 (受蘊) 감정 (感情), 곧 경계 (境界)에 대하여 사물을 받아들이는 작용이니, 고락사 (苦樂捨)의 삼수 (三受), 곧 세 가지 감각이 있다. 3) 상온 (想蘊) 지각 (知覺), 곧 사물을 알아차리는 작용. 4) 행온 (行蘊) 선악 (善惡)에 관한 일체의 의지적 작용 5) 식온 (識薀) 이것은 눈, 코, 귀 등 육근 (六根)의 감각 그리고 마음 자체를 통하여 알아차린 대상을 분별, 인식하는 마음 작용. 그러나 이 마음이란 잠시도 머무는바가 없음을 또 알아야 한다.
❹사성제(四聖諦)란, 네 가지 영원히 변지 않는 진리. 사제 (四諦)라고도 말함.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후 처음 가르치신 교리 중의 하나다. 1) 고성제 (苦聖諦) 미계 (迷界)의 과보 (果報)를 모두 고 (苦)로 돌리는 것 2) 집성제 (集聖諦) 고 (苦)는 집착에서 온다는 것 3) 멸성제 (滅聖諦) 아집 (我執)과 현상에 대한 집착의 소멸 (消滅) 4) 도성제 (道聖諦) 깨달음에 이르는 길, 곧 팔정도 (八正道)
❺팔정도(八正道))란 깨달음과 열반 (涅槃)을 위해 지켜야 할 여덟 가지 길.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도덕적인 윤리체계가 아니라 깨달음과 열반에 이르는 정도 (正道)인 동시에 확실한 지침서 (指針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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