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붓다경전/금강경

금강경 3품 대승정종분

by 파장波長 2022. 5. 8.

제3품 대승의 바른 종지

 

第3品·大乘正宗分 

佛告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降伏其心, 所有一切衆生之類,
불고수보리, 제보살마하살, 응여시항복기심, 소유일체중생지류,
若卵生, 若胎生, 若濕生, 若化生, 若有色, 若無色, 若有想, 若無想, 若非有想, 非無想,
약난생, 약태성, 약습생, 약화생, 약유생, 약무생, 약유상, 약무상, 약비유상, 비무상,
我皆令入無餘涅槃而滅度之, 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眾生, 實無眾生得滅度者.
 아개영입무여열반 이멸도지 여시멸도 무량무수무변중생 실무중생즉멸도자.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有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卽非菩薩.
하이고? 수보리! 약보살유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즉비보살


일체 중생

부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렇게 마음을 항복시켜야 한다.”

佛告須菩提,“諸菩薩摩訶薩, 應如是降伏其心.” 
불고수보리, "제보살마하살 응여시항복기심."

부처는 2분에서 수보리에게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려면 마땅히 이와같이 머물 것이며, 이와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을 것이다."라는 대답을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수보리가 이해하지 못하자 어쩔 도리 없이 다시 한 번 설명합니다.

수보리가 일으킨 근본적인 문제는 "어떻게 하면 마음을 안정시키는 수행을 하며, 어떻게 하면 마음을 항복시켜야 합니까?" 하는 의문입니다. 마음의 내면을 안정시켜 유지하는 수행을 해서 '그 마음'을 항복시켜야 하는데, '그 마음'이라는 것은 이원화로 분리된 "내가 있다"는 근본적 존재의식을 가르킵니다.  그래서 그 움직이는 이원화 마음을 넘어서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인가를 지금 말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은 마음을 항복시키려면 무언가 그 이전에 어떤 행위가 시도되어야 하는데, 앞서 2분에서 "이와같이 항복시켜라"라는 말 밖에 하지 않았습니. 그래서 2분의 부처님 대답 중에 "이와같이"라는 말에서 의미하는 것이 바로 마음을 항복시키기 위해서 "생각으로는 전혀 헤아릴 수 없고 알 수 없는", 지금 그 의문의 상태에 머물러 그대로 있으라는 의미로 해석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에 대하여 제4분에서 부처님이 그대로 직접 실천적인 답변을 제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존재한 중생의 종류

“존재하는 모든 중생의 종류, 즉 난생 · 태생 · 습생 · 화생 · 유색 · 무색 · 유상 · 무상 · 비유상 ·비무상 들을 내가 모두 남김 없는 열반에 들게 하여 제도시키리라.”

“所有一切衆生之類, 若卵生, 若胎生, 若濕生, 若化生, 若有色, 若無色,
"소유일체중생지류, 약난생, 약태생, 약습생, 약화생, 약유색, 약무색, 
若有想, 若無想, 若非有想, 非無想, 我皆令入無餘涅樂而滅度之.” 
약유상, 약무상, 약비유상, 비무상, 아개영입무여열반이멸도지."

부처는 일체 중생, 즉 일체 생명의 종류를 열두 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 첫째가 난생입니다. 새나 닭, 거위 등이 모두 난생에 속합니다. 태생은 사람이나 말 등 태반 속에서 태어나는 각종 동물들입니다. 습생은 물고기 나 모기, 파리 등이며, 화생은 변화하는 것들입니다. 예를 들면 매미나 잠자리, 나비 등이 이에 속합니다.

유색(有色)은 형상이 있으며 물질적인 것으로서, 눈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무색(無色)은 우리가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지만 확실히 존재하는 일종의 생명입니다. 예를 들면 귀신 같은 것입니다. 다른 종류의 중생이 바로 생각과 감각을 지닌 약유상(若有想) 입니다. 또 생각도 없고 감각도 없는 약무상(若無想)이라는 중생도 있습니다. 어떤 생명은 생각도 없고 지각도 없지만 감각만은 갖고 있습니다.

또 다른 중생으로서 신의 경계에 있는 것도 있습니다. 불교의 분류에 따르면 신의 종류도 무척 많습니다. 적게는 삼십여 종, 많게는 육십여 종으로 나누어지며, 세분하면 수백여 종으로 나누어집니다. 신에도 여러 등급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비유상(非有想)” 입니다. 이것은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보기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타좌를 하고 있다면,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마치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 같지만 그는 알고 있습니다. 정말 알고 있을까요? 글쎄요. 사실 세상에는 이보다 더 많은 종류의 생명이 있지만 불교에서는 이를 열두 종류로 귀납시키고 있습니다.

세상의 생명은 이처럼 많지만 사람이 가장 나쁩니다. 그렇지만 사람만큼 일체를 다 갖춘 생명도 드뭅니다. 우리는 인간이 태생이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제가 볼 때 인류는 열두 종류의 특성을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인류는 태반 속에서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여 생성되는데, 이런 점에서 본 다면 태생이자 난생입니다. 어머니 배속은 습생이고, 그리고 채소, 나물, 쇠고기, 양파 등을 먹어야만 자랄 수 있는데, 이런 점에서는 화생입니다. 사람은 또 “유색(有色)” 입니다. 신체의 기능은 모두 물질적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생명은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눈으로 볼 수도 없는 것이기에 “무색(無色)” 입니다. 우리에게는 당연히 생각이 있기에 “유상(有想)” 이며, 어떤 때는 바보처럼 멍하니 아무 생각도 없기 때문에 “무상(無想)” 입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사람이 수행을 통해 “비유상(非有想)” “비무상(非無想)”의 경계에 들어서기도 합니다.

이제 부처는 수보리에게 말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중생의 종류[所有一切衆生之類]”, 여기서 종류에 주의해야 합니다. 부처는 이것을 열두 가지 종류의 생명으로 요약합니다. 이어서 말합니다. “내가 모두 남김 없는 열반에 들게 하여 제도시키리라[我皆令入無餘涅樂而滅度之].”

불법을 공부하는 사람은 먼저 발원(發願)을 해야 합니다. 세상의 일체 중생을 구하겠다는 염원을 세워야 합니다. 중생은 모두 고통과 번뇌 속에 있습니다. 부귀공명을 누리는 사람에게는 부귀공명의 번뇌와 고통이 있습니다. 빈곤과 생로병사 등도 역시 모두 번뇌입니다. 연애할 때는 연애의 번뇌가 따르며, 결혼에는 결혼의 번뇌가, 출생에는 출생의 번뇌가 따릅니다. 한마디로 인생은 어느 때든 수시로 고통과 번뇌 속에 있습니다. 여기서 번뇌란 고통보다 조금 가벼운 것을 말합니다. 대승불법을 공부하는 사람은 자신을 생각하기에 앞서 먼저 불법을 성취하여 중생을 돕고 구제하 고자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번뇌도 고통도 없는 절대적 쾌락과 청정의 경계로 접어듭니다. 이 경계가 바로 남김이 없는 열반[無餘涅] 니다. 열반은 “남김이 있는 열반[有餘依涅]”과 “남김이 없는 열반[無餘依涅樂]” 으로 나뉩니다. 나한이 득도하여 증득하는 것이 “남김이 있는 열반으로, 믿기 어렵겠지만 대아라한(大阿羅漢)은 팔만 사천 겁 동안이나 입정에 들 수 있습니다.

남김이 있는 열반”은 나한의 경계로서 철저하지 못한 것이며, “남김이 없는 열반”은 부처의 경계로서 아주 철저한 것입니다. 부처는 불법을 배우 는 사람의 제일 큰 발원은 일체 중생이 모두 성불할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모두 '내가 성취한 “남김이 없는 열반[無餘依涅]에 들 수 있도록 염원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대승불법에서는 만약 이런 발원이 없다면 불법을 배워도 성취하는 바가 없을 것이라 합니다. 자신이 아주 고통스럽고 번뇌에 시달리면서도 대승적 발원이 없다면 이것은 진정한 불법의 정신이 아닙니다. 이런 소극적이고 도피적인 태도라면 나한의 경계조차도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부처의 원력(願力)은, 불법을 배우는 것이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일체 중생을 위함입니다.


부처의 열반

이렇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을 제도시키더라도 실로 제도를 받은 중생은 하나도 없다. 왜 그런가?”

"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衆生, 實無衆生得滅度者, 何以故?" 
"여시멸도무량무수무변중생, 실무중생득멸도자, 하이고?"

불법을 공부하는 사람은, 일체 중생을 모두 구제하여 그들이 번뇌와 고통으로부터 해탈할 수 있도록 한다는 큰 원력을 가져야 합니다. 번뇌와 고통으로부터 해탈하기는 무척이나 어렵습니다. 부처는 단지 우리에게 번뇌와 고통으로부터 해탈하는 방법만을 말해 줍니다. 해탈은 스스로에 달린 것이지 외부의 힘에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는 그것을 성취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일러 주고 있는 것에 불과하니, 스스로 수행해야 비로 소 해탈에 이를 수 있습니다. 

부처는 무수히 많은 중생〔無量無數無邊衆生〕을 교화하고 구제했지만, 마음속으로 자신이 중생을 구제했다는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이것이 부처의 원력이요 흉금입니다. 불법을 배우는 사람은 먼저 이 흉금을 배워야 합니다.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을 돕지만 마음속으로 그것이 자신의 공로라는 새각이 조금도 없어야 합니다. 부처의 경계는 겸허함의 극치입니다. 그는 일체의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면서도, 마음속으로 자신이 다른 사람을 교화하고 제도한다는 생각은 털끝만치도 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부처는 다른 종교의 교주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부처는 권위 의식이 없고 지극히 평범합니다. 단지 여러분의 성취는 여러분 자신의 노력 때문이라고 말할 뿐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상과 아(我)의 관념

“수보리여! 만약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갖는다면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須菩提! 若菩薩有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卽非菩薩. 
수보리! 약보살유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즉비보살.

부처는 말합니다. “수보리여! 대승보살도를 공부하는 사람이 마음속에 아직 나와 너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한 구별이 남아 있고, 심지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베풀면서 그 사람이 고맙게 받아들여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세속의 법이다. 불법은 그렇지 않다. 한번 베풀고 나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마치 봄날의 꿈이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것처럼 깨끗이 잊어버린다. 만약 일부러 그것을 잊고자 한다면 보살이 아니다〔卽非菩薩〕. 아직 작위적인 마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천지는 만물을 만들어 내지만 그것을 사적으로 소유하지 않습니다. 도()란 천하의 것으로, 공적인 것입니다. 누구에게도 속해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그것을 가지십시오!

부처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말해 줍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부처의 경계에 도달하지 못할까요? 『금강경』은 사상(四相)을 말합니다. 상()이란 현상으로서 심리적인 측면에서는 '관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일종의 관념을 갖고 있습니다. 인상(人相)은 한마디로 너와 나에 대한 관념입니다. 아상(我相)은 '나'에 대한 관념으로서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을 지닌 개체로서의 인간입니다. 나는 나요, 너는 너이며, 그는 그입니다. 사람은 모두 각기 다른 개체입니다. 다른 하나는 정신적 측면입니다. 보통 학문이 뛰어나고 지위가 높거나 나이가 많으면 다른 사람을 모두 어린애처럼 얕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도 자주 이런 잘못을 범하곤 합니다. 너희 젊은 사람들이 이해를 하면 얼마나 하겠어?' 라고 생각하지요. 이것이 바로 아 상입니다. 나이를 내세우며 '나'를 주장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나이를 내세워 자신을 주장하는 것은 틀림없이 아상입니다. 그런데 많은 젊은이들은 또 젊다는 것을 내세워 자신을 주장합니다. 이것 역시 아상입니다. 젊은 여자들은 여자라는 것을 내세워 자신을 주장 하며, 남자 아이들은 남자라는 것을 내세워 자신을 주장합니다. 이들은 모두 주관적인 선입견으로서, 관념 속에 존재하는 '나' 입니다. 또 문장은 자신이 최고라 생각해서 다른 사람이 손대는 걸 질색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것 역시 모두 아상입니다.

중생상(衆生相)에는 우리가 흔히 사회니 인류니 하는 것들이 모두 포함 됩니다. 이 자리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앞줄에 앉은 사람과 뒷줄에 앉은 사람은 일단 자리에 앉기만 하면 아상과 인상이 동시에 나타납니다. 키가 작은 사람은 자기 앞에 키가 큰 사람이 앉아 있어서 앞을 가리면 앞사람이 원망스럽습니다. 이렇게 아상과 인상이 나타나면 곧 중생상이 뒤따릅니다. 좌석을 이렇게 앞뒤 똑같은 높이로 배열해 놓으면 어떡해? 좌석이 이 모양이면 관리하는 사람이라도 있어서 키를 좀 고려해서 앉혀야 될 것 아니야?' 곧이어 수자상(壽者相)이 나타납니다. 어휴! 공기는 또 이게 뭐람? 전염병이 돌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 

이처럼 사상(四相)은 한 뿌리에서 나옵니다. 사람의 번뇌는 모두 이 사상으로부터 일어납니다. 구마라습은 이를 사상으로 귀납시켰는데, 현장법사가 번역하면서 여기에 다시 세 개를 추가하여 일곱 상으로 정리했습니다. 구마라습은 이 세 가지 상을 모두 수자상으로 묶었습니다. 수자상은 무척 엄중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오래 살고 싶어 하지 않습니까? 당신 올 해 얼마나 됐소? 겨우 쉰여덟이라고? 나는 올해 예순이라오! 나보다 두 살이 적군! 몇 살이라고요? 여든둘? 나보다 몇 살 많군요. 이런 것들이 모두 수자상입니다. 내가 오래 살기를, '내가 무병장수하기를 희망합니다. 타좌나 참선을 공부하는 사람이라 해도 아마 십중팔구는 수자상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어쩌면 전부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유의해야 할 것은, 『금강경』에서도 말하지만 이 사상을 완전히 벗어나지 않는 한 진정한 불법의 경계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들 사상은 말하자면 인류나 중생에 공통된 것으로 여간해서는 깨뜨리기 힘든 완고한 주관적 관념 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관념만 벗어던질 수 있다면 불법을 배우기는 문제없을 겁니다. 

부처는 지금 수보리에게 말합니다. “불법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먼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중생을 위해서 노력하겠다는 발원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중생을 제도하고 싶어도 제도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노력해야 한다.” 또 말합니다. “불법을 공부하는 목적, 즉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발원을 세웠을 때라도 자신이 중생을 제도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금강경의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란?

 

∴ 출처 : 남회근 선생 '금강경 강의'

'붓다경전 > 금강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금강경 5품 여래실견분  (0) 2022.05.10
금강경 4품 묘행무주분  (0) 2022.05.10
금강경 2품 선현기청분  (0) 2022.05.08
금강경 1품 법회인유품  (0) 2022.05.08
금강경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0) 2022.05.07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