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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경전/금강경

금강경 4품 묘행무주분

by 파장波長 2022. 5. 10.

제4품 불법의 수행은 머무름이 없는 것이다.

 

第4品·妙行無住分 

復次, 須菩提! 菩薩於法, 應無所住, 行於布施, 所謂不住色布施, 不住聲香味觸法 布施, 
부차, 수보리! 보살어법, 응무소주, 행어보시, 소위부주색보시, 부주성향미촉법 보시,
須菩提! 菩薩應如是布施, 不住於相, 何以故? 若菩薩不住相布施, 其福德不可思量.
수보리! 보살응여시보시, 부주어상, 하이고? 약보살부주상보시, 기복덕불가사량
須菩提! 於意云何? 東方虛空, 可思量不?
수보리! 어의운하? 동방허공, 가사량부?
不也, 世尊!
불야, 세존!
須菩提! 南西北方, 四維上下,  虛空可思量不?
수보리! 남서북방, 사유상하, 허공가사량부?
不也, 世尊!
불야, 세존!
須菩提! 菩薩 無住相布施福德 亦復如是, 不可思量, 須菩提! 菩薩 但應如所敎住
수보리! 보살 무주상보시복덕 역부역시, 불가사량, 수보리! 보살 단응여소교주

소명태자는 이 품의 제목을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이라 했습니다. '묘행무주(妙行無住)'의 행(行)'은 길을 간다는 뜻이 아니라 수행을 말합니다. 따라서 '묘행' 이란 불법을 수행한다는 의미입니다.


바른 보시(布施)

“다음으로는, 수보리여! 보살은 법에 대해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한다. 이른바 형체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행하며, 소리 · 향기 · 맛 감촉 ·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행한다.”

復次, 須菩提! 菩薩於法, 應無所住, 行於布施. 所謂不住色布施, 不住聲香味觸法布施.
부차, 수보리! 보살어법, 응무소주, 행어보시. 소위부주색보시, 부주성향미촉법보시.

부처는 다시 보시에 관해 말합니다. 보시는 내보시와 외보시로 나뉩니다. 중국 선종에서는 ‘놓아 버리다〔방하착放下着〕’ 라는 말이 유행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보시입니다. 인생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 놓아 버리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놓아 버리는 것, 이것이 바로 내보시입니다. 내보시에 이르러야만 도를 이룰 수 있습니다. 여기서 부처는 수보리에게 내보시의 법문을 말하고 있습니다. 

“부차(復次)" 란?  '그 다음’ 이라는 뜻입니다. 그 다음 것을 그대에게 말하겠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수보리가 어떻게 머무르며 또 어떻게 마음을 항복시킬 수 있느냐고 물으니까, 부처는 바로 그렇게 머무르고 바로 그렇게 항복시키라고 했습니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것과 다름없는데, 바로 이것이 첫 번째 것이었습니다.

마음에 머무는 바가 없어야 합니다.
부처는 수보리에게 말합니다. “진정한 수행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보살은 법에 대해 머무는 바가 없다, 바로 이 한마디라네.”  이  마음은 어느 때 어느 곳이든 머무는 바가 없어야 합니다. 만약 마음이 항상 공(空)의 경계에 있다면 공이 마음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잘못된 겁니다. 마음이 빛이나 혹은 기맥(호흡, 숨)에 머물러 있는 것도 역시 잘못된 겁니다.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한다[응무소주 應無所住, 행어보시行於布施]”, 무엇을 수행이라 할까요? 한 생각 한 생각이 모두 공(空)이요 항시 던져 버려, 사물이 다가오면 응하고 지나가면 남기지 않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라 하더라도 행하고 나면 잊어버려 마음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좋은 일도 남아 있지 않으니 나쁜 일이야 당연히 남아 있지 않지요. 곳곳에 보시를 행하고 어느 때 어느 곳이든 머물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여러분을 비난하고 욕했다고 합시다. 이 때문에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라면, 이것이 바로 이기분에 머물러 있는 겁니다. 또 어떤 사람이 노려보는 바람에 밤잠을 설쳤다면,  마음은 바로 그 눈초리에 머물러 있는 겁니다. 어떤 경계에도 머물지 않으면, 이쪽을 보나 저쪽을 보나 모두 꿈처럼 지나가 버려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머리를 돌려 다른 쪽을 쳐다보아도 역시 꿈꾸듯 지나가 버립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머무는 바가 있으면 영원히 내던져 버릴 수 없습니다. 아직 강아지 밥을 주지 않았구나! 남편이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구나! 이런 일체의 것을 내던져야 합니다.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해야 합니다. 보시란 모두 내던자는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소위 색(色)에 머물지 않는 보시에 대해 말합니다.

색에도 머물지 않아야 합니다.
무엇을 '색(色)'이라 할까요? 색은 불교 이론에서 '유표색(有表色)' '무표색(無表色)' '극미색(極微色)' 극형색(極廻色)'으로 나뉩니다. 

‘유표색'은 빨강, 파랑, 노랑 등 세상의 온갖 색깔과, 길거나 짧고 크거나 작아 바깥으로 드러날 수 있는 모든 것입니다. 우리 육체를 비롯해 지 (地), 수(水), 화(火), 풍(風)의 물질세계에서 바깥으로 드러날 수 있는 모든 것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무표색'은 추상적인 것으로 바깥으로 드러낼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예 를 들면 원자력 같은 것입니다. 원자력에 대해서는 사실 일반인들은 잘 알 지 못합니다. 원자 에너지 자체는 원래 비어(空] 있습니다. 비어 있기 때문 에 그 힘은 비할 데 없이 큽니다. 이처럼 원자력이 존재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것을 바깥으로 드러내 보여 줄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 이것은 정 밀한 기계로도 포착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을 무표색이라 합니다.

‘극미색' 이란 원자 또는 원자핵과 같습니다. 이것은 너무 작아서 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과학적 도구를 사용하면 볼 수 있습니다.

'극형색' 에는 아주 먼 것, 은하계 저편의 것뿐 아니라 전 우주 속에 있는 어떤 것도 모두 포함됩니다. 

이들이 바로 색(色)인데, 간단히 말하자면 색이란 지 · 수 · 화 · 풍의 사대(四大)이며 우리의 신체이기도 합니다. “보살은 법에 대해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한다.”라는 것은 색에 머무른 상태에서, 또는 대상을 의식하는 상태에서 보시를 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공덕을 쌓기 위해 돈을 내거나 어떤 사람을 구하고서 그를 구했다고 내세우는 것은 모두 상(相)에 머문 보시입니다. 보살은 남을 돕거나 구한 뒤 마땅히 그 대상을 마음속에서 떨어 버려야 합니다. 

보시로 얻은 복덕을 인천복덕(人天福德)이라 하는데, 이것은 조그만 과보(果報)로서 불법을 공부하는 대복보(大福報)와는 비길 수가 없습니다. 복덕(福德)과 공덕(功德)은 서로 큰 차이가 있습니다. 『금강경』에서는 복 덕만을 말합니다. 중점이 복덕에 있지 공덕에 있지 않습니다. 인생에서 최 대의 복덕은 무엇일까요? 도를 깨닫고, 도를 이루는 것입니다. 바로 지혜의 성취가 인생의 가장 큰 복보(福報)입니다. 이때 지혜란 물론 보통의 지식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색신(色身)으로 불법을 공부합니다. 눈을 감고 앉아 염불을 하든, 참선을 하든, 주문을 외든, 모두 색에 머물러 보시를 행합니다. 입으로야 놓아 버린다, 놓아 버린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놓아 버리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틀고 앉은 다리가 저려 와서 견딜 수가 없지요. 왜 그렇게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괴로울까요? 색법(色法)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의식이 색신(色身)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의식이 색신에 머물러 있지 않다면 아무런 감각을 느끼지 못할 겁니다. 다리가 저린 걸 느낄 수가 없겠지요. 일체 중생은 이처럼 모두 색신상에서 수행을 하지만, 보살은 색신에 머물지 않고 색신을 포함한 일체의 것을 모두 던져 버립니다.

소리와 향기에도 머물지 말아야 합니다.
"소리 · 향기 · 맛 · 감촉 ·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행한다[不住聲香味觸法 布施]”, 수행에 열중하다 보면 염불 소리가 들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때 어떤 사람은 자신이 마침내 득도했구나 느끼지만 사실 그가 얻은 것은 도가 아니라 정신병입니다. 정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런 이유로 음국(陰國)으로 가 버리곤 합니다. 소리에 머물지 않아야 한다는 이치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염불이나 기도에 빠져있을때  갑자기 주위에서 향기로운 냄새가 날 때가 있습니다. 실제로 향기가 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은 뚜렷이 그것을 느낍니다. 향기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정경(定境)이 극에 이르면 인체 내부가 깨끗해지고 빛나며 또 향기가 납니다. 사실 어떤 사람도 냄새가 나지는 않습니다. 진정으로 건강한 사람이라면 침에서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종류가 다른 사람이 라면 예외입니다. 예를 들어 『서유기』에 나오는 요괴 같으면 사람 냄새를 단박에 압니다. 우리가 돼지우리나 개집 근처에 가면 돼지 냄새나 개 냄새 를 맡을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만약 신선이 우리가 있는 이곳으로 온다면 아마도 사람 냄새 때문에 견디기 힘들 겁니다. 

사람 그림자조차 구경 할 수 없는 곳에서 오래동안 혼자 살다가 사람 사는 곳으로 오면, 사람 냄새가 코를 찔러 견디기 힘들다고 합니다. 그 후 사람 냄새가 익숙해지기 까지는 꽤 시간이 걸립니다. 의학을 배운 사람이라면 알고 있겠지만 사실 인체 내부는 더럽지 않습니다. 단지 인체 내부의 것이 외부 공기나 세균과 접촉하면서 냄새가 나는 것일 뿐입니다. 수행을 시작하여 인체 내부에서 향기가 뿜어져 나올 때, 만약 자신의 공덕이 무량 해서 보살의 향기를 맡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면 이는 향기에 머무른 것입 니다. 이건 잘못된 것입니다! 머무는 바가 없어야 합니다. 즉시 내던져 버려야 합니다.

보살의 경계에서는 내적으로 오묘한 쾌감에 접합니다. 접한다는 것은 신체로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대승불법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내적 쾌감에 머물지 않을 겁니다.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할 겁니다.

‘법(法)’ 이란 의식의 경계로서 관념이나 생각 또는 정신적 측면의 것입니다. 만약 마음속이 텅 비어 깨끗하다는 의식이 있다면 이미 법(法)에 떨어진 것입니다. 외적인 신체를 일체 떨쳐 버려서 완전히 비워야 할 뿐 아니라 의식의 방면까지도 완전히 떨쳐 버려야 비로소 불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바로 색(色)에 머물지 않는 보시요, 소리와 향기, 쾌감과 법(法)에 머물지 않는 보시입니다. 부처는 이렇게 되어야만 비로소 옳다고 말합니다.


“수보리여! 보살은 마땅히 이렇게 보시하며 상에 머물지 않는다. 왜 그런가?? 만약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須菩提! 菩薩應如是布施, 不住於相, 何以故? 若菩薩不住相布施, 其福德不可思量.” 
"수보리! 보살응여시보시, 부주어상, 하이고? 약보살부주상보시, 기복덕불가사량."


대승보살도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이렇게 보시하고 또 수행해야 합니다. 상(相)에 머물지 않아야 하고[不住於相], 일체의 현상을 마음에 남기지 않아야 합니다. 마음속에 어떤 것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것은 이미 불법을 공부하는 경계가 아닙니다. 이런 경계를 표현한 시가 있습니다. “바람이 대나무 잎을 스치고, 기러기가 긴 허공을 가른다[풍래죽면 風來竹面, 안과장공 雁過長空].” 바람이 불어오면 대나무 숲이 쏴 하고 소리를 냅니다. 그러나 지나가고 나면 대나무 이파리에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습니다. 한 번 지나가 버리면 그만입니다. 수행자의 흉금(가슴에 품은 생각)도 바로 이래야 합니다. 하늘을 나는 새는 하늘에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습니다. 기러기는 허공을 길게 가르며 날지만 지나가고 나면 그것으로 그만입니다. 수행자의 흉금은 바로 이래야만 합니다. 이래야만 비로소 내보시라 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부처는 다시 말합니다. “왜 그런가? 만약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하 何以故? 若菩薩不住相布施, 其福德不可思量]” 이제 부처는 '복덕'에 관해 말합니다. 가령 대승보살도를 닦는 사람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할 수 있다면 그의 복덕은 헤아릴 수 없이 크다는 것입니다. 복덕이란 공덕과는 다릅니다. 공덕은 공(功)을 쌓고 덕(德) 을 누적시키는 것입니다. 마치 어떤 공정을 하루에 조금씩 쌓아 가듯 공부를 통해 조금씩 조금씩 쌓아 가는 것이 공(功)이며, 이 공력(功力)이 어떤 구체적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덕(德) 입니다.

복덕은 이와는 다른 것으로, 앞에서 살펴보았듯 대략 두 종류로 대별됩니다. 하나는 세상의 복덕으로서 흔히 이것을 홍복(鴻福)이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청복(淸福)으로서 세간을 초월한 복덕입니다. 청복은 홍복에 비해 얻기 어렵고, 그것을 누리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세상 사람들은 만년에 이르러 청복을 누릴 수 있는 기회가 오더라도 도리어 적막함과 처량함을 두려워합니다. 정말 가련하지 않습니까? 상에 집착하기 때문에, 아상(我相)과 인상(人相)에 집착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모든 것을 끝내고 은퇴하고 물러나 있을때 적막감과 처량함에 안절부절 못합니다. 사실 이때야말로 가장 좋은 청정의 시기인데도 말입니다. 상에 머물기 때문에 세상의 온갖 변화무쌍한 현상을 마치 절대적인 것인 양 붙들고 늘어 지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현상이 변화할 때는 모든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진정으로 청복을 누릴 수 있는 때가 찾아와도 왕왕 진정한 복이 도래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평안 무사하고 청정한 것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복보(福報)입니다.

세상에서 어떤 복이 가장 큰 복일까요? 당연한 얘기이지만 그것은 바로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즉 성인의 경계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에 의지해서 초범입성(超凡入聖)할 수 있을까요? 지혜의 성취란 단지 공덕을 쌓는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미신은 더더욱 아닙니다. 모든 것을 던져 버릴 때에야 비로소 지혜의 성취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부처는 수보리에게,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행할 수 있다면 이런 사람의 복덕은 상상할 수 없이 크다고 한 것입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떤가? 동쪽 허공을 다 헤아려볼 수 있겠는가?”  “불가능합니다, 세존이시여!” 

“須菩提 於意云何? 東方虛空, 可思量不?” “不也, 世尊!" 
"수보리 어의운하? 동방허공, 가사량부?" "불야 세존!"

“수보리여! 남쪽 서쪽 북쪽, 사방과 위아래의 허공을 다 헤아려볼 수 있겠는가?” "불가능합니다. 세존이시여!” 

“須菩提! 南西北方, 四維上下, 虛空可思量不?”  “不也, 世尊!"
"수보리! 남서북방, 사유상하, 허공가사량부?"  "불야, 세존!"


부처는 수보리에게, "그대 생각은 어떤가? 동쪽으로 나 있는 허공은 그 크기가 얼 마나 되는지 측량할 수 있겠는가?” 물었습니다. 수보리는 동방으로 나 있는 전체 허공은 너무도 커서 측량할 방법이 없어서 불가능하다고 대답합니다. 

이어서 남방, 서방, 북방의 세 방향을 앞의 동방에 덧붙입니다. 동남서북을 사유(四維)라 하는데, 사유 외에도 상하가 있습니다. 부처는 수보리에게 남방 서방 북방, 사유 상하 허공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측량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수보리는 불가능하다고 대답합니다.

가령 중국의 경전이라면 이렇게 묻지 않을 겁니다. “상하와 사방의 허공을 측량할 수 있는가? (육합허공 六合虛空, 가사량부 可思量不)”라고 한마디로 물을 겁니다. 그러면 "불가능합니다, 세존이시여 [不也, 世尊]”라고 대답하고는 그것으로 끝낼 겁니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두 번으로 나누어 묻고 대답하는데, 이것도 사실은 구마라습이 번역하면서 간단히 한 것입니다. 이전의 번역은 이랬습니다. “그대 생각은 어떤가? 동방의 허공은 측량할 수 있는가? 불가능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대 생각은 어떤가? 남방의 허공은 측량할 수 있는가? 불가능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대 생각은 어떤가? 서방의 허공은 측량할 수 있는가? 불가능합니다. 세존이시여!....”

육백 권의 『대반야경(大樂若經)』은 모두 이런 식입니다. 그렇지만 『금강경』은 구마라습에 의해 농축되었기 때문에 또 다른 문학적 맛이 있습니다.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여기서 왜 동방의 허공을 제일 먼저 지적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왜  『아미타경(阿彌陀經)』처럼 서쪽을 먼저 말하지 않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약사경(藥師經)』과 『금강경』이 모두 동쪽을 앞세우는 것과는 달리 밀종(密宗)의 즉신성취법(卽身成就法)에서는 북쪽을 먼저 언급하며, 대광명법(大光明法)에서는 북방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단지 남방만을 언급합니다. 불법을 배우거나 연구할 때는 이것들이 모 두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동방은 소위 생기가 일어나는 방향입니다. 그러므로 장생(長生)을 원한다면 동방 유리광명세계의 약사여래를 찾아야 합니다. 약사불은 동방 세계의 불국입니다. 서방 세계는 되돌아가는 곳이며, 동방 세계는 “끊임없이 태어나는[生生不已] 삶의 법[生法]을 말하는 곳입니다. 그렇기에 동방의 문화는 “생생불이” 합니다. 현교(敎)의 경전에는 많은 비밀이 내재되어 있는데, 여러분 스스로 한번 연구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이 선종의 화두를 들고 공부하고 싶다면 이것들이 모두 화두가 될 수 있습니다. 화두는 모두 경전 속에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것을 이해한다면 왜 '남동북서'라 하지 않고 '동남서북' 이라 했는가, 왜 동방을 먼저 말한 뒤 다시 남방 서방 북방을 말했는가, 그리고 상하는 왜 제일 나중에 말했는가 등 온갖 문제가 화두가 될 수 있으며, 이것들은 모두 우리가 수행하는 이치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 불법을 닦는 사람들은 먼저 동방의 생기, 즉 생명의 기미를 알아채야 합니다. 기맥이 발동하고 색신(色身)이 변화해야만 비로소 정(定)을 얻을 수 있고, 그래야만 오묘한 즐거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동방은 생기의 방향입니다. 태양이 동쪽으로부터 떠오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왜 『아미타경』에서는 서방을 말할까요? 해는 서산을 향해 지며, 석양은 너무도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황혼이 가까우니 곧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자는 뜻에서 서방을 외는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우연하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불학에서는 이런 것들 하나하나가 다 그 나름 의 이치를 갖고 있다고 봅니다.


“수보리여! 보살은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행하여 그 복덕도 이처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수보리여! 보살은 마땅히 가르침을 받은 대로 머물러야한다.”

“須菩提! 菩薩無住相布施, 福德亦復如是, 不可思量, 須菩提! 菩薩 但應如所敎住." 
"수보리! 보살무주상보시, 복덕역부여시, 불가사량, 수보리! 보살 단응여소교주 


부처는 수보리에게 불법을 공부하는 사람은 반드시 무상(無相) 보시에 이르러 일체의 상에 머물지 않아야 한다고 당부 합니다. 왜 사람은 보시를 행해야 하며 자비로워야 할까요? 한문의 표현을 빌리면 “당연한 이치(義所當爲)”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이롭게 하고 도우며 자비를 베푼다면, 이렇듯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를 행한다면 그 복덕과 과보(果報)는 마치 허공과도 같이 무궁무진합니다.

선종의 오조(五祖)는 육조(六祖)에게 먼저 『금강경』을 읽도록 했습니다. 일체의 것에 머물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대승불법의 기초적인 수행법으로서 궁극적인 성취에 이르는 길 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금강경』의 반야를 말할 때 우리는 흔히 『금강경』이 공(空)을 설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건 아주 엄중한 문제입니다. 『금강경』에서는 공을 언급한 구절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단지 허공을 들어 공에 비유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럼에도 이를 공법(空法)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한다면 중대한 착오를 범하는 것입니다.  『금강경』은 단지 우리에게 머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할 뿐입니다. 머물지 않는 것이 곧 공인 것은 아닙니다. 머물지 않는 것이란 흐르는 구름이나 물과 같다는 것입니다. 흐르는 물은 영원히 멈추지 않고 흘러갑니다. 그렇지만 다시 멈추지 않고 오는 것이 있으니 일체가 머물지 않습니다. 이것을 공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제4품에서 부처는 우리에게 하나의 수행법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 은, 진정한 불법을 얻기 위해서는 머무는 바가 없으면서도 모든 것을 내던 져 버리지 않는, “보살은 마땅히 배운 바대로 머무는[菩薩但應如所敎住]” 그런 방법에 따라 수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의 요점은, 수행이 진 정으로 머무는 바가 없는 단계에 이르면 비로소 복덕을 성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 참고 : 남회근 선생 『금강경』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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