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붓다경전/금강경

금강경 제14품 이상적멸분

by 파장波長 2022. 5. 18.

제14품 상을 떠난 적멸

 

第14·離相寂滅分 이상적멸분

爾時須菩提, 聞說是經, 深解義趣, 涕淚悲泣, 而白佛言,
이시수보리 문설시경 심해의취 체루비음 이백불언
希有世尊! 佛說如是甚深經典, 我從昔來, 所得慧眼, 未曾得聞如是之經, 
희유세존 불설여시심심경전 아종석래 소득혜안 미증득문여시지경
世尊! 若復有人, 得聞是經, 信心清淨, 卽生實相, 當知是人, 成就第一希有功德
세존 약부유인 득문시경 신심청정  즉생실상 당지시인 성취제일희유공덕
世尊! 是實相者, 卽是非相, 是故如來, 說名實相, 
세존 시실상자 즉시비상 시고여래 설명실상
世尊! 我今得聞如是經典, 信解受持, 不足爲難,
세존 아금득문여시경전 신해수지 부족위난
若當來世, 後五百歲, 其有象生, 得聞是經, 信解受持, 是人卽爲第一希有!
약당래세 후오백세 기유중생 득문시경 신해수지 시인즉위제일희유 
何以故? 此人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하이고 차인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
所以者何? 我相卽是非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卽是非相, 何以故?
소이자하 아상즉시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즉시비상 하이고
離一切諸相, 卽明諸佛,
이일체저상 즉명제불 
佛告須菩提,“如是! 如是! 若復有人, 得聞是經, 不驚, 不怖, 不畏,
불고수보리 여시 여시 약부유인 득문시경 불경 불포 불의
當知是人, 甚爲希有!
당지시인 심위희유 
何以故? 須菩提! 如來說第一波羅蜜, 卽非第一波羅蜜, 是名第一波羅蜜, 
하이고 수보리 여래설제일바라밀 즉비제일바라민 시명제일바라밀
須菩提! 忍辱波羅蜜, 如來說非忍辱波羅蜜, 是名忍辱波羅蜜,
수보리 인욕바라밀 여래설비비인욕바라밀 시명인욕바라밀
何以故? 須菩提! 如我昔爲歌利王割截身體, 我於爾時, 無我相, 無人相,
하이고 수보리 여아석위가리왕할절신체 아어이시 무아상 무인상
無衆生相, 無壽者相,
무중생상 무수자상
何以故? 我於往昔節節支解時, 若有我相人相衆生相, 壽者相, 應生瞋恨 
하이고 아어왕석절절지해시 약유아상인상중생상 수자상 응생진한
須菩提! 又念過去於五百世, 作忍辱仙人, 於爾所世,  無我相, 無人相
수보리 우념과거어오백세 작인욕선인 어이소해 무아상 무인상
無衆生相, 無壽者相
무중생상 무수자상
是故, 須菩提! 菩薩應離一切相,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시고 수보리 보살응리일체상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生無所住心! 若心有住, 卽爲非住,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응생무소주성 약심유주 즉위비주
是故佛說菩薩心, 不應住色布施,
시고불설보살심 불응주색보시
須菩提! 菩薩爲利益一切衆生, 故應如是布施, 如來說一切諸相,
수보리 보살위이익일체중생 고응여시보시 여래설일체제상
卽是非相, 又說一切衆生, 卽非衆生,
즉시비상 우설일체중생 즉비중생
須菩提! 如來是眞語者, 實語者, 如語者, 不評語者,不異語者, 
수보리 여래시진어자 실어자 여어자 불광어자 불이어자
須菩提! 如來所得法, 此法無實無虛, 
수보리 여래소득법 차법무실무허
須菩提! 若菩薩心住於法, 而行布施, 如人入暗, 卽無所見,
수보리 약보살심주어법 이행보시 여인입암 즉무소견
若菩薩心不住法, 而行布施, 如人有日,日光明照, 見種種色, 
약보살심부주법 이행보시 여인유일 일광명조 견종종색
須菩提! 當來之世, 若有善男子, 善女人, 能於此經, 受持讀誦, 卽爲如來,
수보리 당래지세 약유선남자 선여인 능어차경 수지독송 즉위여래
以佛智慧, 悉知是人, 悉見是人, 皆得成就無量無邊功德” 
이불지혜 실지시인 실견시인 개득성취무량무변공덕


깨달음 후 기쁨의 눈물을 흐르다.

그때 수보리가 이 경전을 듣고 그 뜻을 깊이 깨닫고는 눈물을 흘리고 슬피 울며 부처께 아뢰었다. “드무신 세존이시여! 부처께서 이렇게 깊고도 깊은 경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저는 옛적부터 얻은 혜안으로도 이런 경전을 얻어 들은 적이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다시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경전을 얻어듣고 신심이 청정하여 실상(實相)이 생졌다면, 마땅히 이 사람이 제일 드문 공덕을 성취했음을 알겠습니다.

爾時須菩提, 聞說是經, 深解義趣, 消淚悲泣,而白佛言. 
이시수보리 문설시경 심해의취 체루비읍 이백불언
希有世尊! 佛說如是, 甚深經典, 我從昔來, 所得慧眼, 未會得聞如是之經
희유세존 불설여시 심심경전 아종석래, 소득혜안, 미증득문, 여시지경
世會! 若須有人, 得聞是經, 信心淸淨, 卽生實相: 當知是人。成就第一希有功德. 
세존 약부유인 득문시경 신심청정 즉생실상 당지시인。성취제일희유공덕.


세상에 드문 공덕

“세존이시여! 이 실상은 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래께서 실상이라 이르셨습니다.”

世尊! 是實相者, 卽是非相, 是故如來, 說名實相.
세존 시실상자 즉시비상 시고여래 설명실상.

“세존이시여! 저는 이제 이 경전을 얻어들어 믿고 이해하고 수지하는 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世尊! 我今得聞如是經典, 信解受持,不足為難. 
세존 아금득문여시경전 신해수지 부족위난.

시()’자는 고문의 용법으로서 현대어로 말하자면 ‘이’에 해당합니다. 소위 이 실상이라고 하는 것은 “상이 아니다〔非相〕” 라는 겁니다. 우리는 앞서 『금강경』에서 부처가 언급했던, "만약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본다면 여래를 보리라〔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는 구절을 마땅히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일체의 상에 집착하지 않는 것, 즉 무아상(無我相) · 무인상(無人相) · 무중생상(無衆生相) · 무수자상(無壽者相) 등이 모두 상에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밖에 부처의 상에 집착해서도 안되고, 부처의 상을 부정하는데 집착해서도 안되며, 어떤 상에도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심지어 상에 집착해서는 안 된 다는 사실에 집착해서도 안됩니다. 

실상이란 어떤 것일까요? “상이 아닌 것” 입니다. 더 자세히 말한다면 무아상, 무인상 등입니다. 귀납해서 말한다면 “만약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본다면 여래를 보리라" 입니다. 수보리는 자기가 마음으로 얻은 바를 이렇게 말합니다. 소위 실상이란 일체의 상이 없는 것이라고요. 아무런 상도 없는 이 성취를 일러 부처가 굳이 실상이라 했다는 겁니다.


오백  년  후 세상의 드문 사람은 누구인가

"만약 이후 오백 년 뒤에 중생이 있어 이 경전을 얻어듣고 믿고 이해하고 수지한다면, 이 사람은 제일 드문 사람입니다.”

若當來世, 後五百歲, 其有衆生, 得聞是經, 信解受持, 是人卽爲第一希有!
약당래세 후오백세 기유중생 득문시경 신해수지 시인즉위제일회유

부처는 천년이나 삼백 년 이라해도 될 텐데 굳이 오백년 이라고 했을까요? 이것은 부처 스스로가 불교에 대해 행한 설법입니다. 부처가 세상에 있던 시기를 정법주세(正法住世)라 하지만, 부처가 열반에 든 후 몇몇 대제자들이 살아 있을 때까지도 역시 정법주세라 할 수 있습니다. 오백 년 이후는 상법주세(像法住世)입니다. 이때가 되면 부처의 대제자 중 제일 오래 산 사람이라 해도 모두 열반에 들어 세상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이 이후로는 단지 경전이나 불상만 세상에 머무르기 때문에 이 시기를 상법시대라 합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상법시대 역시 오백 년에서부터 천 년 정도까지이고, 이후는 말법(末法) 시대가 됩니다. 말법이라 해서 결코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진정한 불법의 수지(受持)가 이제 막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서 끝나려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각종 계율이나 우화 속에 나오는 부처의 말입니다.

불법은 진리이며, 진리는 영원합니다. 진리란 단지 하나 밖에 없으며, 변할 수도 없고, 생겨나지도 없어지지도 않으며, 늘어나거나 줄어들지도 않습니다. "만약 불법이 다하는 날이 있다면, 현재 이미 오백 년이 훨씬 지났건만 어찌 더 번성하고 있겠습니까?" 라고 수보리는 말합니다. 가령 오백 년 후, 즉 상법 혹은 말법 시대에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보거나 연구하여 옛사람 또는 수보리를 비롯한 부처의 대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신해수지(信解受持)”에 이를 수 있다면, 이런 사람은 “세상에서 제일 드문〔第一希有〕” 사람이라는 겁 니다. “세상에서 제일 드문” 이라는 표현은 『금강경』에서 특별히 제시된 것 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드물다는 것은, 아주 훌륭하여 범인을 초월한 성인 의 경지에 들어섰음을 말합니다. 즉 부처와 거의 같다는 것입니다.


나는 왜 내가 아닌가

"왜 그러냐 하면, 아상은 상이 아니며 인상 · 중생상 · 수자상도 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일체의 상을 떠난 것을 부처라 하기 때문입니다.”

所以者何? 我相卽是非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卽是非相, 何以故?
소이자하 아상즉시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즉시비상 하이고
一切諸相, 卽名諸佛
이일체제상 즉명제불

이 구절은 특히 중요합니다!  “왜 그런가? 〔所以者何〕" 소위 아상이라는 것은 본래 상이 아닌 가상(假相)이기 때문입니다. 이 아상에 따르는 인상, 중생상도 모두 가상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나〔〕'는 다음과 같이 분석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지금 분명 '내'가 있고 신체가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이 신체를 사대(四大)가 가합(假合)한 것이라 말합니다. 즉 이 신체는 뼈니 근육이니 하는 것들이 하나로 합쳐져 구성된 잠시의 '나' 입니다. 그러므로 태어난 이튿날에는 전날의 '나'는 이미 쇠퇴하며, 한 달이 지나면 태어난 첫날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열 살 때와 열한 살이 되었을 때도 역시 완전히 다릅니다. 총괄적으로 말하면, 지금 여기에 앉아 있는 우리는 십이 년 후가 되면 전신이, 뼈까지도 모두 바뀌어 버립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 육체는 '내'가 아니라 가아(假我)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잠시 빌리서 사용하는 하나의 도구로서, 우리가 잠시 빌려 쓰고 있는 이 전구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이 몸은 진짜 내가 아니며, 비상(非相)이요 가상(假相) 입니다. 이 가짜를 진짜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부처를 배우고자 한다면 어디로 가야 부처를 만날 수 있을까요? 일체의 상을 모두 떠나 버리면 그 것이 곧 부처입니다〔離一切諸相, 卽名諸佛〕, 그것이 진정한 부처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아마도 여러분은, 그렇다면 대웅전에 있는 부처께 절할 필요도 없겠구나 하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절을 해야 합니다! 가짜 이면서 진짜이기 때문입니다. 상()이란 허망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허망한 상에 예배를 하면서도 스스로의 마음속에 진정한 성실함과 간구함이 있어서 이 진실한 성의와 경건함(誠敬)이 드러나면 그것이 바로 “신심(信心)의 청정” 이요, 그것을 통해 실상(實相)이 생겨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실상의 경계가 바로 일체의 상을 떠난 것이요, 일체의 상에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상에 집착하지 않고서도 예불을 드리는데, 이것 은 일념의 순간입니다. 합장을 할 필요도, 무릎을 꿇을 필요도 없습니다. 일념의 순간에 이미 시방삼세(十方三世)의 모든 부처께 절을 한 겁니다.


얻기 힘든 사람

부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다! 바로 그렇다! 다시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경전을 얻어듣고 놀라지 않고, 공포에 젖지 않으며, 두려움이 지속되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아주 드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佛告須菩提, 如是! 如是! 若復有人, 得聞是經, 不驚, 不作, 不畏, 
불고수보리 여시 여시 약부유인 득문시경 불경 불포 불외 
當知是人, 甚爲希有! 
당지시인 심위희유

부처가 말합니다. “옳다. 바로 그렇다! 아주 옳은 말이다. 바로 그렇다! 미래 세계의 중생 중 『금강경의 이치를 듣고서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아주 드문 사람이다!” 경() 이란 두려워하는 것이며, '포 ()'는 너무도 두려워 정신이 온통 두려움에 휩싸이는 것입니다. 예를 들 어 우리가 밤길을 걷다가 시커먼 그림자와 마주치면 깜짝 놀라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경' 입니다. '포' 란 아주 심한 두려움이 심리적으로 지속되는 것이며, 외()'란 이보다 더 긴 시간 동안 끊임없이 두려움에 휩싸여 있 는 것입니다. 여기 있는 우리 같은 사람은 모두가 “세상에 제일 드문 사 람들입니다. 『금강경』을 듣고서도 '경’ ‘포’ ‘외’ 하지 않고, 어느 누구도 그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여래가 말한 제1바라밀은 제1바라밀이 아니라, 그것의 이름이 제1바라밀이기 때문이다.”

何以故? 須菩提! 如來說第一波羅蜜, 卽非第一波羅蜜, 是名第一波羅蜜
하이고 수보리 여래설제일바라밀 즉비제일바라밀 시명제일바라밀

"무슨 이유 때문인가?” 『금강경』의 특징은 우리로 하여금 무주(無住), 무상(無相), 무원(無願)을 알게 하는 데 있습니다. 바로 대승의 심인(心印) 입니다. 이 마음은 언제나 머물지 않고(無住), 상에 집착하지 않으며〔無相〕,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 염원이 없어야〔無願〕 합니다. 큰 염원을 가져야 한다고 말해 놓고서 어찌 또 염원이 없어야 한다고 할까요? 대자비(大慈悲)는 당연히 염원의 힘이지만, 자비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온 종일 그 자리에 앉아 울고만 있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대상이 사라지면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염원을 갖지만 염원에 머물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제1바라밀(第一波羅蜜)은 대지혜의 성취입니다. 대철대오해서 성불하는 것으로, 바로 반야실상(般若實相) 입니다.


무엇이 인욕인가

“수보리여! 인욕바라밀은 여래가 인욕바라밀이 아니라 말하니, 그것의 이름이 인욕바라밀이다.”

須菩提! 忍辱波羅蜜, 如來說非忍辱波羅蜜, 是名忍辱波羅蜜 
수보리 인욕바라밀 여래설비인욕바라밀 시명인욕바라밀

보살의 육도(六度)는 보시(布施), 지계( ),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반야(般若)입니다. 이것은  불법을 배우는 하나의 순서라 할 수 있습니다. 불법을 배우려면 먼저 보시를 배워야 합니다. 보시란 바로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버린다는 것은 단지 주머니 속의 돈을 내놓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일체의 습기(習氣)를 모두 버리는 것, 즉 그것을 변화시켜 없애 버림으로써 인생 전반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 역시 버리는 것입니다. 온갖 인연을 내버려 두는 것도 보시로서, 바로 내보시(內布施)입니다. 진정으로 보시를 행한 후 마음이 청정해져야만 비로소 지계가 가능합니다. 마음이 청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행하는 지계는 소승의 경계로서, 이것은 의지로써 조작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정한 상태에 이르면 한 생각 한 생각이 모두 청정해져서 구태여 지계를 행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자체가 바로 계()이기 때문입니다. 계란 일체의 나쁜 행위나 악한 행위를 경계하는 것입니다. 한 마음 한 마음이 청정한 상태에서는 악도 없고 선도 없는데, 이를 일러 지선(至善)이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계로서, 지계는 그래도 행하기가 쉽지만 인욕은 제일 행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들은 자신의 마음은 청정하며 계율도 잘 지키고 있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외부로부터 공격을 받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일단 공격을 받으면 울화가 팔 장()이나 치밀어 올라서 청정하는 청정하지 않든 온갖 병폐가 모두 쏟아져 나오기 마련입니다. 이런 까닭에 인욕은 육도의 중심입니다. 제일 어렵고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대승의 보살은 반드시 “무생법인(無生法忍)”에 들어서야만 보살의 경지에 이를 수 있습니다.

무생(無生)이란 본래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는 것으로, 신심(信心)이 청 정하여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것은 억지로 눌러서 그런 것도 아니요, 아무런 생각이나 지각이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일체의 잡념이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신심이 청정하여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욕의 . ‘욕()’ 자를 보면 우리는 남으로부터 받는 모욕을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다른 사람이 자신을 욕하거나 때리거나 혹은 갖가지 바람직하지 않은 자극을 가하는 것을 '욕'이라 합니다. 이것은 문자상의 이해입니다. 이와는 달리 불교에서는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는 일체의 것, 즉 자신이 당하는 일체의 고통을 '욕'이라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늙고 병드는 것도 바로 '욕' 입니다. 늙고 병드는 것은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역시 큰 번뇌를 가져다줍니다. 이는 사람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동물도 마찬가지입니다. 개미를 한번 자세히 관찰해 보십시오. 젊은 개미가 늙은 개미 곁을 지날 때면 거리를 두면서 약간 돌아서 지나갑니다. 이런 욕은 참으로 감내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결함투성이 사바세계도 참으로 감내하기가 어렵습니다. 원만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일체 중생들은 이것을 감내하고 받아 들입니다. 그래서 이 세계를 사바세계라 합니다. 감내의 세계입니다. 그렇지만 바로 이 때문에 사바세계의 중생이 가장 쉽게 성불할 수 있습니다. 천당에 태어나면 고통도 없고 자극도 없어 날마다 행복을 누립니다. 그러니 자연 중생이 수도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또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지옥에 태어나면 고통과 수난을 견디지 못해 수도를 생각할 겨를조차 없습니다. 오로지 이 사바세계에서만 고통도 있고 즐거움도 있으며, 선도 있고 악도 있기에 해탈의 지혜에 대한 자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사바세계야말로 성불의 지름길인 것입니다.

인욕이 곧 모욕인 것만은 아닙니다. 이 점에 대해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견뎌 낼 수 있는 고통이라면 모두 '욕' 입니다. 이 세상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이든 기업을 하는 사람이든 혹은 돈이 많은 사람이든 한번 그들에 게 물어보십시오. 요즘 지내기가 어떠냐고요. 대부분 별로 좋지 않다고 대답할 겁니다. 과연 견뎌 낼 수 있을까요?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견뎌 낼 수 있든 없든 간에 그저 견디고 살아야 합니다.

부처와 수보리의 대화가 여기에 이르면, 만약 경전을 자세히 보지 않으면 갑자기 인욕바라밀이 불쑥 튀어나와 이상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래서 방금 여러분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킨 겁니다.이 경전에서 육도(六度)를 전부 말하고 난 후 왜 지금 인욕바라밀을 다시 끄집어내고 있을까요?

 


참다운 인욕(忍辱)

“왜 그런가? 수보리여! 내가 이전에 가리왕에게 신체를 갈가리 찢길 때 나에게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었다.”

何以故? 須菩提! 如我昔爲歌利王割截身體, 我於爾時, 無我相, 無人相, 
하이고 수보리 여아석위가리왕할절신체 아어이시 무아상, 무인상 
無衆生相, 無壽者相.
무중생상 무수자상

『금강경』의 중심에는 인욕(忍辱)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부처는 자신의 수지(修持) 경험을 하나의 표본으로 제시합니다. 부처는 말합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철저히 도를 깨달았다면 인욕바라밀 자체에 '인()' 이라 할 만한 것이 없다고요. 만약 굳게 참는다는 생각이나 감각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바라밀이 아니며 피안에 도달한 것도 아니므로 아무 성취가 없다는 것입니다.

부처는 수보리에게 자신의 경우를 표본으로 삼아 말합니다. 자신이 이전에 가리왕(歌利王)으로부터 사지를 절단당했던 사건입니다. 가리왕은 과거 인도의 이름 있는 왕이지만, 인도인들이 역사를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 까닭에 이런 역사적 사건에 관한 자료들이 단지 불경 속에만 남아 있습니다.

가리왕은 아주 잔혹하고 포악했습니다. 당시 석가모니는 수도자로서 상당한 성취를 얻어 보살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습니다. 석가모니는 연각(緣覺)의 몸으로 부처가 세상에 오지 않아도 스스로 도를 깨칠 수 있을 정도 였습니다. 후에 가리왕이 적개심을 품고 석가모니를 죽이려 했습니다. 가리왕이 말했습니다. "네가 비록 수도자라고는 하나 내가 너를 죽여도 과연 아무런 원한을 갖지 않을 수 있을까?” 석가모니가 대답했습니다. “이 마 음은 절대 청정하다. 만약 나에게 한순간이라도 노여워하는 마음이 일어 난다면, 그대가 내 사지를 절단한 후 나는 복원되지 못할 것이다.” 마침내 가리왕은 석가모니의 몸을 한 조각 한 조각 잘라 내었습니다. 그 사이 석가모니는 비명 한마디 지르지 않았고, 한순간도 가리왕을 원망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단지 자비심밖에 없었습니다. 사지를 절단한 뒤 가리왕이 증명해 보일 것을 요구하자 석가모니가 말했습니다. “만약 보살의 자비심이 진짜라면 내 몸은 곧 복원될 것이다.” 결국 석가모니는 복원 되어 다시 살아 일어났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의 부활보다도 훨씬 극적입니다. 부처는 말합니다. 옛적에 가리왕이 자신의 신체를 절단할 때, 당시 그에게는 아상 · 인상 · 중생상 · 수자상이 없었다고 합니다. 부처는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함으로써 우리 수행자에게 하나의 표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이 자기 신체를 절단하도록 원하라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요즘이야 신체를 절단 당하는 이야기는 할 필요도 없습니다. 입을 다물고 있으라고만 해도, 혹은 우직이지 말고 앉아 있으라고만 해도 견디지 못할 겁니다. 사실 이것이 바로 인욕과 선정(禪定), 반야의 이치입니다. 지혜가 부족하고 오도(悟道) 또 한 투철하지 못해 견딜 수가 없는 겁니다.

“왜 그런가? 내가 옛적에 신체를 갈가리 찢길 때 만약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었더라면 응당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이 생겼을 것이다.”

何以故? 我於往昔節節支解時, 若有我相人相衆生相, 壽者相, 應生瞋恨 
하이고 아어왕석절절지해시 약유아상인상중생상 수자상 응생진한

인욕바라밀이란, 인간 세상의 일체 고통과 번뇌를 포괄하는 것으로서 참는다는 생각조차도 없는, 아무것도 참을 것이 없는 그런 단계에 이르러야만 비로소 인욕바라밀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부처는, 그가 가리왕에게 신체를 갈가리 찢길 때 그에게는 아상 · 인상 · 중생상 · 수자상이 없었다고 한겁니다. 먼저 그는 이 생명이 '나'에게 속한다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이 점을 특히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체는 우리가 잠시 소유하는 겁니다. 잠시 나에게 속한 것이지 결코 영원히 점유할 수는 없습니다. 이 몸은 본래 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치를 단지 분명히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증득할 때에만 비로소 신심이 청정해지며, 반야실상을 성취할 희망이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공부입니다. 그렇다면 공부는 어디서 온 것일까요? 반야의 견지(見地)에서 옵니다. 지혜가 투절하지 못하면 대철대오할 수 없습니다. 깨달음은 깨끗하고 맑은 것으로, 지혜로써 일체의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 낸 경계입니다.


인욕의 공부

“수보리여! 또 과거 오백 생애 동안 인욕선인이었을 때, 그때도 아상 · 인상 · 중생상 · 수자상이 없었다.”

須菩提! 又念過去於五百世, 作忍辱仙人, 於爾所世, 無我相, 無人相, 
수보리 우념과거어오백세 작인욕선인 어이소세 무아상 무인상 
無衆生相, 無壽者相.
무중생상 무수자상

부처는 다시 수보리에게 과거 오백 생애 동안 오직 인욕만을 수행하던 때를 회상하며 말합니다. 당시의 생애에 자신은 오직 인욕 공부에만 전념 했지만 분명히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의 경지에, 즉 상에 집착하지 않는 경지에 도달했다는 겁니다. 이 때문에 부처는 한마디 강조합니다. “어떻게 불법을 배워야 하는가?”

“그러므로 수보리여! 보살은 마땅히 일체의 상을 떠나 아누다라삼막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키고,”

是故, 須菩提! 菩薩應離一切相,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시고 수보리 보살응리일체상 발아두다라삼막삼보리심

이것이 바로 불법을 배우는 정신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일체의 현상에 기만되거나 미혹되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사찰이니 건물이니 의복이니 지역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상(相) 입니다. 이 마음은 절이나 건물 및 재산 명예 같은 것들에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앞에서도 말한 바 있습니다. 일체의 상을 떠난 것, 그것을 일러 부처라 한다고요. 대승보살은 대승의 길을 걸으며, 마땅히 일체의 상에서 벗어나 대철대오의 보리심을 구 해야 합니다.


어떻게 보시할 것인가

"이런 까닭에 부처는 보살심을 형체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것이라 말한다.”

是故 佛說菩薩心, 不應住色布施.
시고 불설보살심 불응주색보시

『금강경』의 보시, 지계, 인욕은 일관되게 이어지는 것으로서 조리 있고 과학적인 현대의 문장과는 다릅니다. 과거의 문장은 흐르는 구름이나 물과 같았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아무런 순서가 없어 일정한 규율이 없는 듯 보이지만, 그 속에는 불규칙적인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보살은 형체에 머물러 보시하지 않는다. 〔菩薩心不應住色布施〕”라는 것은 상에 집착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색()이나 법()에 머문 보시는 유형의 것으로, 지극히 상에 집착한 것입니다. 현대어로 표현해 본다면, 물리적 환경적 영향을 받는 일체의 것을 모두 떨쳐버리고 온갖 인연을 놓아 버린 것이 바로 색에 머물지 않는 보시입니다.

“수보리여! 보살은 일체 중생의 이익을 위해 마땅히 이렇게 보시해야 한다. 여래는 일체의 상이 상이 아니며, 또 일체의 중생이 중생이 아니라고 말한다.”

須菩提! 菩薩爲利益一切衆生, 故應如是布施, 如來說一切諸相 
수보리 보살위이익일체중생 고응여시보시 여래설일체제상 
卽是非相, 又說一切衆生, 卽非衆生
즉시비상 우설일체중생 즉비중생 

부처는 다시 수보리에게 말합니다. 불법의 대승보살도의 정신은 일체 중생의 이익을 위해 행위하는 것으로, 하나 하나의 모든 행위가 빠짐없이 자신을 희생시켜 남을 성취케 하는 것이므로 마땅히 이렇게 보시하고, 마땅히 온갖 인연을 떨쳐 버리며,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을 이롭게 해야 한다고. 그런데 사람들은 왜 떨쳐 버리지 못할까요? 진정한 보시를 수긍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 중생은 상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여래는 일체의 상이 상이 아니라고 말한다〔如來說一切諸相, 卽是非相”, 상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상에도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이들은 모두 그릇된 상〔非相〕 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는 다시 “일체의 중생은 중생이 아니다. 〔一切衆生, 卽衆生〕” 라고 말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말한다면 단지 아상뿐 아니라 인상, 중생상도 없어야 한다는 겁니다.


머무름이 없는 마음

“형체에 머물러 마음이 생겨서는 안 되며, 소리 · 향기 · 맛 · 촉감 · 법에 머물러 마음이 생겨서는 안 되며, 마땅히 머무름이 없는 마음이 생져야 한다. 만약 마 음에 머무름이 있다면 그것은 머무름이 아니니,”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生無所住心! 若心有住, 卽爲非住.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응생무소주심 약심유주 즉위비주

불법을 공부하는 것은 마치 색(), 성(), 향(), 미(), 촉(), 법() 속에서 있는 것과 같습니다. 바로 육근(六根), 육진(六塵) 속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과 같습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사물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不應住色生心〕”는 것입니다. 일체의 경계와 일체의 현상은 모두 우리가 후천적 으로 갖게 된 심리적, 생리적, 정신적 환상에 불과합니다. 어떤 소리를 듣 그것을 부처의 소리라 생각해서, 사실 가장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이런 소리들입니다만, 계속 쫓아가다 보면 부처라도 여러분을 구분할 수 없습니다.

계율 부분을 한번 보십시오. 부처가 세상에 있을 때에도 많은 사람이 이런 길을 걸었지만, 그 또한 이들을 어찌할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러무로 바로 핵심적인 구절은 “형체, 소리, 향기, 맛, 촉감, 법에 머물러 마음이 생겨서는 안 된다〔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는 것입니다. 불법을 배우려는 사람은 일체의 상을 떠나야 합니다. “어떤 곳에도 머물지 않는 마음이 생겨나야〔應生無所住心〕” 합니다. 수시로 자신을 관찰하고 마음을 살펴서 마음 이 머무름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마음이 오직 한 가지 것에만 머물러 있다거나, 혹은 어떤 습기(習氣)에 머물러 있어 시종 해탈할 수 없다면 이미 마도(魔道)로 접어든 것입니다. 중국에 처음 불교가 들어올 때는 '마 ()'를 '마()'라 했는데, 이것은 자신을 갈고 닦는다는 뜻이었습니다. 후 에 제량(齊梁) 시대에 이르러 '마귀' 라는 뜻의 마()'자로 변했는데, 마귀처럼 두려워하고 조심하라는 의미에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천만 주의할 것은, 일체의 상을 떠나 마음에 머무는 바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처는 어떻게 말하는가

“수보리여! 여래는 참된 말을 하는 자이고, 알찬 말을 하는 자이며, 여어(如語)를 말하는 자이며, 허황한 말을 하지 않는 자이고,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자이다.”

須菩提! 如來是眞語者, 實話者, 如語者, 不狂語者, 不異語者.
수보리 여래시진어자 실어자 여어자 불광어자 불이어자

모두 다섯 종류의 말입니다. 부처의 설법은 진실합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말하는 것이 솔직합니다. 있는 그대로를 꾸미지 않고 말합니다. 진어(眞語)와 실어(實語)는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여어(如語)란 무얼 말하는 것일까요? “말할 수 없도다, 말할 수 없도다!〔不可說, 不可說〕”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다〔閉口不言〕” “그 소리가 우레와 같다〔其聲如雷〕”, 이런 것들이 바로 여어입니다. ‘여()' 란 실상반야와도 같습니다. 생명의 본래 모습은 필경 청정한 것인데, 이 청정은 어떤 언어로도 설명할 수가 없습니 다. 바로 여어입니다. 그래서 부처는 여어를 말합니다.

“수보리여! 여래가 얻은 법은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지만 공허한 것은 아니다.”

須菩提! 如來所得法, 此法無實無虛
수보리 여래소득법 차법무실무허

진정한 불법은 바로 이 한 구절입니다. 부처는 철저한 소식(消息)을 우리에게 모두 일러 주고 있습니다. 어떤 것이라도 하나 얻을 수 있을까요? 얻은 것이 어떤 것인가요? 만약 무 하나를 사거나 호박 하나를 샀다면 그래도 가지고 돌아갈 만한 것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도()는 어떤 것 하나 도 얻을 것이 없습니다! ‘무실(無實)’,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고, '무허(無虛)', 그렇다고 헛된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형이상의 이치나 진정한 불법은 진실도 아니요, 헛된 것도 아닙니다.

“수보리여! 만약 보살의 마음이 법에 머물러 보시를 행한다면, 마치 사람이 어두운 데로 들어가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만약 보살의 마음이 법 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행한다면, 마치 사람이 눈이 있어 밝은 햇빛 아래 온 갖 형체를 보는 것과 같다.”

須菩提! 若菩薩心住於法, 而行布施, 如人入暗, 卽無所見, 
수보리 약보살심주어법 이행보시 여인입암 즉무소견 
若菩薩心不住法, 而行布施, 如人有目, 日光明照, 見種種色.
약보살심부주법 이행보시 여인유목 일광명조 견종종색

부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수보리에게 말합니다. 보살도를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얻을 수 있는 하나의 불법 또는 수행할 수 있는 하나의 불법에 마음이 집착되거나, 불법 중 하나의 법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량무변의 공덕

“수보리여! 미래에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있어 능히 이 경전을 수지 독송할 수 있다면 곧 여래가 될 것이다. 부처의 지혜로 이 사람을 모두 알고 모두 보니, 모두 한없는 공덕을 성취할 것이다.”

須菩提! 當來之世, 若有善男子, 善女人, 能於此經, 受持讀誦, 卽爲如來. 
수보리 당래지세 약유선남자 선여인 등어차경 수지독송 즉위여래 
以佛智慧, 悉知是人, 悉見是人, 皆得成就無量無邊功德.
이불지혜 실지시인 실견시인 개득성취 량무변공덕

부처는 수보리에게 말합니다. 장래에 한 선남자 혹은 한 선여인이 있어서 이 경전에서 말하는 반야의 핵심을 받아들여 이를 좇아 수행하고, 심지어 그 의미를 깊이 깨달아 독송 할 수 있다면, 이 사람은 부처에 버금가는 사람일 것이라고 합니다. 이 얼마나 엄중 한 구절입니까? 그래서 수보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부처시여, 말씀이 너무 무거워 차마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까지 읽고서 우리는 마땅히 몇 마디를 더 해야 합니다. 부처시여, 죄송합니다만 사실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는 말합니다. “진정으로 이 정도에 이를 수 있다면 여래와 다를 바 없다〔卽爲如來〕."

 

 글은 남회근 선생의 '금강경 강의'에서 참조하고, 인용 했습니다.

'붓다경전 > 금강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금강경 제16품 능청업장분  (0) 2022.05.20
금강경 제15품 지경공덕분  (0) 2022.05.20
금강경 제13품 의법수지분  (0) 2022.05.17
금강경 제12품 존중정교분  (0) 2022.05.16
금강경 제11품 무의복승분  (0) 2022.05.16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