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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경전/금강경

금강경 제13품 의법수지분

by 파장波長 2022. 5. 17.

제13품 법대로 수지하다.

 

第13·如法受持分 

爾時須菩提白佛言, 世尊! 當何名此經, 我等云何奉持?
이시수보리백불언, 세존! 당하명차경, 아등운하봉지?
佛告須菩提, 是經名爲金剛般若波羅蜜, 以是名字, 汝當奉持! 所以者何? 
불고수보리, 시경명위금강반야바라밀, 이시명자, 여당봉지! 소이자하?
須菩提! 佛說般若波羅蜜, 即非般若波羅蜜, 是名般若波羅蜜
수보리! 불설반야바라밀, 즉비반야바라밀, 시명반야바라밀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所說法不?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설소설법부?
須菩提白佛言, 世尊! 如來無所說. 
수보리백불언 세존! 여래무소설.
須菩提! 於意云何? 三千大千世界, 所有微塵, 是爲多不?
수보리! 어의운하? 삼천대천세계, 소유미진. 시위다부?
須菩提言, 甚多,世尊! 
수보리언, 심다, 세존!
須菩提! 諸微塵, 如來說非微塵, 是名微塵, 如來說世界, 非世界, 是名世界 
수보리! 제미진, 여래설비미진, 시명미진, 여래설세계, 비세계, 시명세계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三十二相見如來不?
수보리! 어의운하? 가이삼십이상견여래부?
不也,世尊! 不可以三十二相得見如來, 何以故?
불야 세존! 불가이삼십이상득견여래, 하이고?
 如來說三十二相, 即是非相, 是名三十二相 
여래설삼십이상, 즉시비상, 시명삼십이상
須菩提! 若有善男子善女人, 以恒河沙等身命布施, 若復有人, 於此經中
수보리! 약유선남자선여인, 아항하사등신명보시, 약부유인, 어차경중
乃至受持四句偈等, 爲他人說, 其福甚多!
내지수지사구게증, 위타인설, 기복심다!

지금부터 금강경의 수행법이 시작됩니다. 제1품에서 10품까지가 한 단락으로서, 거기서 부처는 우리에게 하나의 수도(修道) 방법을 말해 주었습니다. 바로 일체의 것에 머물지 않는다[應無所住]는 것입니다. 만약 일체의 것에 머물지 않는 경지에 도달했다면, 바로 반야바라밀을 이해한 것입니다. 13품에서 수행 법을 말하기 전에 11품과 12품을 도입하여 수행의 중요성과, 또 수행을 어떻게 존중할 것인가를 설명했습니다. 설명이 끝난 후 부처는 새롭게 하나의 방법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때 수보리가 부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경전의 이름을 무어라 해야 할까요? 저희들이 어떻게 받들어 지녀야 할까요?”

爾時須菩提白佛言,“世尊! 當何名此經, 我等云何奉持?" 
이시수보리백불언, “세존! 당하명차경, 아등운하봉지”

당시 불교경전은 모두 제자들과 현장에서 상의하여 이름을 지었던거 같습니다. 여기서 수보리는 묻습니다. “장래 이 대화 기록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까요? 장래 우리가 이 불경을 볼 때, 어떻게 해야 당신의 가르침을 받들어 행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수행해야 합니까?” 수보리는 이렇듯 장래 사람들의 상황까지도 고려합니다.


부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경전의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이니, 이 이름으로 그대들은 받들어 지녀야 한다.”

佛告須菩提, 是經名爲金剛般若波羅蜜, 以是名字, 汝當奉持! 
불고수보리, 시경명위금강반야바라밀, 이시명자, 여당봉지!

"왜냐하면 수보리여! 부처가 반야바라밀이라 한 것은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이름이 반야바라밀이기 때문이다.”

所以者何? 須菩提! 佛說般若波羅蜜, 卽非般若波羅蜜, 是名般若波羅蜜.
소이자하? 수보리! 불설반야바라밀, 즉비반야바라밀, 시명반야바라밀

사람들은 부처에게 예배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합니다. 티베트의 밀교에서는 향이 있는 채소를 먹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고, 중국의 현교에서는 소식〔食〕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는 안되고, 저렇게 해서도 안된다는 것은 모두 정해진 법으로서 불법이 아닙니다. 이런 설법들은 단지 가르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일 뿐이지 궁극적인 것이 아닙니다. 부처는 여기서 우리에게 충분히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의 법만이 불법이라 생각해 거기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요. 이런 것들은 모두 잘 못된 겁니다. 이들은 모두 부처를 비방하는 겁니다. 부처에게는 정해진 법이 없습니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 형식이 곧 불교라고 말할 수 없다. 저 형식 또한 불교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들은 부처라는 말을 한 번도 언급 하지 않고서도 불법을 널리 펼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이치에 따라 다른 사람을 교도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불법입니다! 하필 꼭 '부처' 라는 말이 들어가야 하겠습니까? 그런 것들은 단지 외피에 지나지 않습니다! 외피는 벗어던질 수도 있습니다. 

이 때문에 진정한 불법은 일체의 종교나 철학을 초월해 있으며, 일체의 형식을 벗어나 있습니다. 바로 부처가 말하듯, 진정한 지혜의 성취는 반야바라밀이 아닙니다. 지혜가 최고의 단계에 이르면 지혜의 경계가 없어지며, 그래야만 비로소 진정한 지혜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노자 또한 말했던 바입니다. “크게 지혜로운 사람은 마치 어리석은 사람 같다〔大智若愚〕”, 지혜가 진정으로 극에 이르면 대단히 평범해집니다. 세상에서 제일 고명한 사람은 제일 평범한 법입니다. 달리 말하면 제일 평범한 것이야말로 제일 위대합니다.

깨달음의 지혜는 어디에 있을까요? 답은 바로 우리들이 사용하는 “조심해!” 라는 말 속에 있습니다. 이 한마디가 바로 도(道)입니다. “조심해!” 라는 이 한마디가 바로 도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드러나되 거기에 머물지 않기〔不住〕 때문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바로 득도한 겁니다. “조심해!”, 여러분은 조심할 수 없습니다. 조심할 수 있다면 바로 득도한 겁니다. 세상의 것들을 모두 통속적인 것이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들은 모두 금강반야바라밀입니다. 제일 평범한 한마디라도 우리들이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바로 성인의 설법입니다.  “조심해!”, 누가 능히 조심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할 수 있다면 바로 득도한 겁니다.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닙니다.

반야는 어디에 있을까요? 도처에 있는 것이 모두 반야입니다. 중국의 선종은 오직 『금강경』을 주체로 삼는데, 이것으로 깨달은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금강경』을 읽어야만 깨달을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도처에서 수시로 개오(開悟)합니다. 이것은 깨닫고 난 뒤에 한 말입니다. 

내려다보는 도로의 차량 행렬은 흐르는 물과 같고 용(龍)과도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반야입니다. 내려다보고 알아낼 수 만 있다면 곧 깨달을 수 있습니다. 바로 푸르디푸른 취죽이 모두 법신입니다. 도처가 모두 불생불사의 법신입니다. 향기롭고 노랗다는 것은 형용하는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피어 있는 꽃이라면 부추꽃 역시 마찬가지입니 다. 모두 반야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꽃을 바라보면서도 능히 깨달을 수 있으며, 풍경을 바라보면서도 능히 깨달아 성불할 수 있 다.” 이런 것들이 바로 선종의 공안(公案) 입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떤가? 여래가 법을 말한 바가 있는가?” 수보리가 부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말씀하신 바가 없습니다.”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所說法不?”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소설법부?” 
須菩提白佛言,“世尊! 如來無所說.”
수보리백불언, “세존! 여래무소설.”

"그대에게 다시 묻노니, 부처는 진정 설법을 했는가?” 수보리는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부처를 향해 대답합니다. “제가 알기로 부처께서는 설법하시지 않았습니다! 불법을 전하신 적이 없습니다.” 

보십시오! 두 사람이 얼굴을 맞대고 거짓말을 해대고 있습니다. 석가모니부처는 서른한 살에 도를 깨달아서 서른두 살 때부터 교화를 시작한 이후 사십구 년간을 설법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이 스승과 제자 사이의 대화 속에서 부처는 도리어 설법한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떤가?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티끌이 많지 않은가?” 
수보리가 말했다. “아주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須菩提! 於意云何? 三千大千世界, 所有微塵, 是爲多不?”
수보리! 어의운하? 삼천대천세계, 소유미진, 시위다부?”
須菩提言, “甚多, 世尊!" 
수보리언, “심다, 세존!”

두 번째 물음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앞의 내용과 이어지지 않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수보리가 부처께서는 설법한 적이 없다고 대답하자, 부처는 다시 묻습니다. “그대가 보기엔 어떤가? 이 삼천 대천세계, 이 물질적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티끌의 수를 합친다면 많겠는가 많지 않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합니다. “아주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여! 모든 티끌은 여래가 티끌이 아니라 말하니, 그것의 이름이 티끌 이다. 여래는 세계를 세계가 아니라 말하니, 그것의 이름이 세계이다.”

“須菩提! 諸微塵, 如來說非微塵, 是名微塵, 如來說世界, 非世界, 是名世界.”
수보리! 제미진, 여래설비미진, 시명미진, 여래설세계, 비세계, 시명세계.”

미진(微塵)이란? 먼지와 완전히 동일 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먼저 그것을 먼지라 가정하고 말해 봅시다. 부처는 일체의 미진은 미진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먼지란 없다. 먼지가 아니라 잠시 그것을 먼지라 이름 붙인 것이다.” 라고 부처는 말합니다. “삼천대천 세계, 세계는 없다. 잠시 그것을 세계라 한다.” 이게 대체 무엇을 말한 것 일까요? 유가에서 『금강경』을 두고 말하기를 도대체 알아들을 수가 없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고 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요, 삼천대천세계 또한 삼천대천세계가 아니다. 말을 했는가, 하지 않았는가? 말하지 않았다. 이러니 도대체 무얼 말하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미진이란 불교 용어입니다. 미진은 달리 외색진(外色塵)이라고도 합니다. 외색진, 즉 미진에 대해 다시 분석해 보면, 이것은 다시 일곱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바로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 (觸), 법(法), 공(空)이 그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입니다! 과거 이천여 년 동안 불학(佛學)은 설명하기가 아주 어려웠습니다. 불교 학자나 대법사들 조차 이야기가 여기에 이르면 대부분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설명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과학이 날로 발전하고 있어 다소 무리를 해서나마 한번 해석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부처는 이미 이천 년도 훨씬 전에 알고 있었던 겁니다.

핵자나 원자가 폭발하면 완전히 공(空)이 되며, 공으로 된 후 능히 빛을 발할 수 있고 소리로 진동할 수 있으며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원자 폭탄이 한번 폭발하면, 그 공의 역량이 한번 드러나면 사람들이 모두 변형되고, 방사능 낙진에 노출되면 설사 죽지는 않더라도 치료할 수가 없습니다. 원자나 핵자는 최후로 나뉘어 공이 되는데, 이 때문에 미진이 색 · 성 · 향 · 미 · 촉 ·법· 공의 일곱 가지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표현을 바꾸어 보면, 부처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 세계는 하나 하나의 먼지가, 한 알갱이 한 알갱이의 먼지가, 하나의 분자와 분자가 조합되어 구성된 물리세계라는 겁니다. 지구상의 이 물리세계를 아무리 속속들이 분석한다 해도 본래가 공이므로 세계가 존재하지 않고 미진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일체가 원래 공입니다. 이 물질세계의 공은 반야바라밀이나 지혜 또는 심념(心念) 최후의 공과 만나게 되니, 바로 심물일원(心物一元) 입니다.

최후로 만나게 되는 진정한 공, 이 공의 경계가 바로 부처의 경계로서 이것이 바로 오도(悟道) 입니다. 이때의 오도란 닦아서 실제로 얻는 것이지 이로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를 통해 증득하는 것입니다. 이 경계를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온종일 말해 봐야 모두 아닙니다. 이 때문에 부처는 겨우 한다는 말이 자신은 설법한 적이 없다고 했던 겁니다. 수보리는 말합니다. “그렇고말고요! 부처께서는 법을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사실 말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말이 되어 나올 수 없는 겁 니다. 공(空)이라 말해도 이미 그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유(有)라고 해도, 세상에 존재하는 유는 결국 다시 공으로 돌아갑니다. 이 때문에 공이라고도 유라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즉공즉유(卽空卽有)요, 비공비유 (非空非有)입니다. 

『금강경』의 문장은 대단히 명쾌해서 이해하기가 아주 쉽습니다. 이론상으로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지만 이것을 닦아서 증득하기란 참으로 어렵고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증득의 경계에 이르러야만 비로소 진정으로 불법을 배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을 말하고 난 뒤, 부처는 또 다른 문제에 대해 말합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떤가?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三十二相見如來不?”
수보리! 어의운하? 가이삼십이상견여래부?” 
“不也, 世尊! 不可以三十二相得見如來, 何以故?" 
“불야, 세존! 불가이삼십이상득견여래, 하이고?”

우리는 불교를 공부하면서 상(相)에 집착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다른 종교에서 우상 숭배에 반대하는 이치와도 같습니다. 무엇이 우상일까요? 불경에서 말하는 부처의 모습은 정말 대단합니다. 성불한 사람에게는 삼십이상(三十二相)이 나타납니다. 말하자면 다른 사람과 차이 나는 서른두 가지 모습입니다. 이에 따르는 팔십 종의 훌륭한 형태도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대한 문제로서, 바로 화두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조각해 놓은 부처의 모습을 보면 미간에는 구슬이 박혀 있으며, 머리에는 보글보글한 것이 솟아 있고, 미간에 흰 털이 나 있습니다. 이 흰 털은 굉장히 길지만 늘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평상시에는 잘 갈무리되어 오른쪽으로 원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흰 털은 얼마나 길까요? 히말라야 산의 다섯 배나 될 만큼 그렇게 깁니다[白毫倇轉五須彌], 두 눈동자는 남색 빛을 발하고, 흰자위는 벽청(碧靑)색 빛을 띠는데, 사대양의 물보다도 더 깨끗합니다[紺目澄淸四大海].사대양의 물이 결코 맑은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맑다는 것을 비유한 겁니다.

사람들은 모두 삼십이 종의 좋은 상을 갖고 있습니다. 당신이 가진 상은 절대 나에게는 없으며, 내가 가진 상은 절대 당신에게 없습니다. 만약 당신이 성장해서내 상을 갖게 된다면 당신 역시 당신이 아닐 겁니다. 그런 후에 일체 중생을 살펴보면 모두가 각자의 삼십이상과 팔십 종의 좋은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만약 진정으로 삼십이상에 집착한다면 그것은 종교적 신앙으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진정한 불법을 망쳐 버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불법을 배우면서 상에 집착해서는 안됩니다. 이 때문에 부처는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여 수보리에게 묻습니다. 삼십이상과 팔십 종의 좋은 모습으로 부처를 판단할 수 있느냐고요. 수보리는 불가능하다고 대답합니다. 삼십이상으로는 부처 를 판단할 수 없다는 겁니다. 

만약 수행을 하던 중 부처가 빛을 뿜는 것을 보았다면,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은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판단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 꿈에서 보았다는 것이 과연 진실일까요, 아니면 헛된 것일까요? 꿈속에서 본 것일지라도 역시 진실입니다. 그것은 아뢰야식(阿賴耶識)이 변한 것으로서 헛된 것이 아닙니다. 자신과 타인이 다르지 않으니[自他不二] 역시 진실된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여래께서 말씀하신 삼십이상은 상이 아니라 그것의 이름이 삼십이상이기 때문입니다.”

“如來說三十二相, 卽是非相, 是名三十二相." 
“여래설삼십이상, 즉시비상, 시명삼십이상.”

부처는 어떤 사람도 성불해서 공덕이 원만해지면 모두 삼십이상을 갖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법신의 상이 아닙니다. 법신은 상이 없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그것을 삼십이상이라 해도 좋고, 육십사상(六十四相)이라 해도 역시 무방합니다. 『금강경』의 이런 이치를 이해한다면 『역경』의 이치 또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역경』에는 육십사괘(六十四卦)가 있는데, 이는 바로 육십사상으로서 『금강경』의 이치와 완전히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역경』의 육십사괘는 사실 어느 한 괘도 모두 괘가 아닙니다. 패란 머물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패는 변하는 것으로서 모두 변화의 상(相)입니다. 이야기가 여기에 이르니 선종의 고사 하나 가 생각납니다. 이 고사를 이해한다면, 여러분 가운데 젊고 지혜 있는 분이 라면 능히 개오(開悟)할 수 있을 겁니다.

세상에서 최고의 것은 절대 물질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이때의 마음이란 심물일원(心物一元)의 마음입니다. 이것은 유물론의 상대 개념인 유심론에서 말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심물일원의 마음은 보이지도 않고, 상에 집착하지도 않으며, 또 집착할 수도 없습니다. 진정한 불법은 미신을 타파 합니다. 상에 집착하지 않고 바른 믿음을 일으킵니다. 법신은 상이 없습니 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앞에서 말한 두 가지 중점입니다.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부처는 수보리에게 묻습니다.


“수보리여!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갠지스 강의 모래 수만큼이나 많은 목숨을 바쳐 보시하더라도,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경전의 사주게라도 수지하여 다른 사람을 위해 말해 준다면, 이 복이 훨씬 더 많다.”

“須菩提! 若有善男子善女人, 以恒河沙等身命布施, 若復有人, 於此經中,
수보리! 약유선남자선여인, 이항하사등신명보시, 약부유인, 어차경중, 
乃至受持四句偈, 爲他人說, 其福甚多!" 
내지수지사구게, 등위타인설, 기복심다!”

가령 이 세계에 어떤 사람이 있어서 갠지스 강의 모래 수와도 같은 수많은 생명으로 다른 사람에게 보시한다면, 그 공덕은 우주를 가득 채운 재화 로써 보시하는 것보다 훨씬 클 겁니다.

인생에서 제일 떨쳐 버리기 힘든 것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재물이요, 다른 하나는 생명입니다. 생명이 붙어 있을 때에는 돈이나 재물이 가장 떨쳐 버리기 힘들 겁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사람이 돈과 재물로 보시하는 것을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강에 빠져 이제 막 죽음에 임박했을 때라면, 자신의 생명을 구해 주기만 한다면 어떤 것이라도 모두 줄 수 있습니다! 이때에는 생명이 가장 떨쳐 버리기 힘들 겁니다. 이렇게 본다면 생명이 돈이나 재물보다 더 중요하겠지요.

앞의 제11품에서는 우주를 가득 채운 많은 재화로써 보시한다면 복덕이 아주 클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 품에서는 더욱 엄중합니다. 갠지스 강의 모래 수만큼이나 많은 생명으로써 보시한다면 그 복보가 크겠느냐 작겠느나는 겁니다. 당연히 아주 크지요. 그렇지만 그것은 『금강경』의 사구게를 이해하여 능히 수지(受持)하고 증득하며, 더 나아가 타인을 제도하고 깨닫게 하며, 타인을 위해 설법하는 이 대복덕을 능가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어떤 대복덕일까요? 바로 무위의 복이요, 바른 믿음의 복입니다.

 

∴ 이 글은 남회근 선생의 '금강경 강의'에서 참조하고, 인용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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