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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경전/금강경

금강경 제29품 위의적정분

by 파장波長 2022. 5. 25.

제29품 위의가 고요하다.

 

第29品· 威儀寂靜分

須菩提! 若有人言, 如來若來若去, 若坐若以, 是人不解我所說義.
수보리! 약유인언, 여래약래약거, 약좌약와, 시인불해아소설의.
何以故? 如來者, 無所從來, 亦無所去, 故名如來.
하이고? 여래자, 무소종래, 역무소거, 고명여래.

“수보리여! 만약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는 오는 것 같기도 하고 가는 것 같기도 하며, 앉아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누워 있는 것 같기도 하다고 한다면, 이 사람은 내가 말한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여래란 오는 곳이 없고 가는 곳도 없어 여래라 하기 때문이다.”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다.

“수보리여! 만약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는 오는 것 같기도 하고 가는 것 같기도 하며, 앉아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누워 있는 것 같기도 하다고 한다면, 이 사람은 내가 말한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여래란 오는 곳이 없고 가는 곳도 없어 여래라 하기 때문이다.”

須菩提! 若有人言, 如來若來若去, 若坐若臥, 是人不解我所說義. 何以故?
수보리! 약유인언, 여래약래약거, 약좌약와, 시인불해아소설의, 하이고? 
如來者, 無所從來, 亦無所去, 故名如來.
여래자, 무소종래, 역무소거, 고명여래.

이 경전은 지혜의 성취, 반야바라밀의 대지혜의 성취와 성불(成佛)의 방법 및 노선을 말하고 있습니다. 수보리에 의해 문제가 제기되어 부처는 하나의 입문 방법, 즉 선호념(善護念)을 설명하는데, 이것이 바로『금강경』의 요점입니다. 진정한 수양은, 출가든 재가든 단지 선호념(善護念)'이라는 세 글자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성불하면 모두 열 개의 이름이 붙습니다. 예를 들면 부처나 세존, 여래, 선서(善逝), 무상사(無上士) 등인데. 모두 그 이름의 하나입니다. '여래'는 통칭으로서 어떤 사람이든 성불하면 모두 여래라 칭합니다. 불교가 중국에 들어와서는 우리의 일반적 관념이 덧붙여져서 여래불(如來佛)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여래가 본래 부처〔〕이고, 부처가 곧 여래입니다. 단지 명칭만 다를 뿐입니다.

왜 도()를 이룬 사람을 여래라 부를까요? 먼저 문자적 측면에서 보면, ‘여()’란 무엇과 같다는 뜻이요, '래()'는 온다는 뜻이니, 여래란 마치 올것 같다'는 뜻입니다. 여래는 실제로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습니다. 인세간(人世間)의 오고 가는 현상으로써 본체인 도체(道體)의 작용을 설명 하다 보니 ‘마치 올 것 같다'는 표현이 되었지만, 오지는 않습니다.

여래라는 이 명칭은 심성(心性) 본래의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현상은 바로 불경에서 말하는 상()입니다. 바로 심상(心相)입니다. 심성이 작용을 일으킨 일종의 현상입니다. 다시 범위를 좁혀서 말해 봅시다. 첫 일 분간 한 사람이 이야기를 시작한다고 합시다. 여러분은 들 었습니까? 마치 온 것 같습니다〔若來〕, 매 한 구절의 말이 들려오면 다시 사라져 버립니다. 마치 사라져 버린 것 같습니다〔若去〕. 그가 다시 말하면 또 옵니다. 그러나 그 본체는 항시 움직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如如不動〕. 그러므로 불경에서는 우리의 수양이 그 경계에 이르렀을 때, 거의 청정한 공상(空相)에 근접했을 때를 “여여부동(如如不動)”이라 묘사합니다. 마치 움직이지 않는 것 같지만 진정으로 움직이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진정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법신은 어떻게 올까요? 여러분은 지금 화두를 들고 있습니다. 이 생각이 어디에서 올까요? 어디로 갈까요? "오는 곳이 없고 가는 곳도 없어 여래라 한다〔無所從來, 亦無所去, 故名如來〕.” 여러분은 왜 생각에 관여하려 합니까? 생각이 올 때는 불쑥 오고, 갈 때도 불쑥 갑니다. 명상을 할 때는 한사코 망상을 공()으로 만들고자 하는데,  그게 얼마나 바보 같은 짓입니까! 바보 같기가 다이아몬드 같습니다. 사람들은 금강반야바라밀다를 구하지만, 이들은 모두 바보 같기가 반야바라밀의 금강 같습니다.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망상을 떨쳐 버리려 합니까? 망상은 본래 공() 입니다. 오는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어 여래라 합니다. 머물고자 해도 머물게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생각을 머물게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자신이 고통과 번뇌를 느낀다고 말하지만, 그건 정말 바보 같은 소리 입니다. 어제는 이미 지나가 버려서 어제의 번뇌는 그림자조차 없습니다. 지금 현재는 번뇌를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가 현재 심한 번뇌를 느낀다면, 조금 지나면 번뇌가 없어질 겁니다! 번뇌를 영원히 느낄 수는 없으며, 그것을 결코 붙잡아 둘 수도 없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청정한 경계도 역시 붙들어 둘 수 없습니다. 오는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어 여래라 합니다. 청정은 근본적으로 달아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이해가 불충분하기 때문에 그동안의 공부가 달아났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공부를 해서 자기를 찾겠다고 합니다. 무슨 공부요? 오는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어 여래라 합니다. 이것을 이해한다면 어느 때든 청정 가운데 있지 않는 때가 없습니다. 

 

글은 남회근 선생의 '금강경 강의'에서 참조하고, 인용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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