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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경전/금강경

금강경 제28품 불수불탐분

by 파장波長 2022. 5. 25.

제28품·받지도 않고 탐하지도 않는다.

 

第28品·不受不貪分 불수불탐분

須菩提! 若菩薩以滿恒河沙等世界七寶, 持用布施, 若復有人, 知一切法無我, 
수보리! 약보살이만항하사등세계칠보, 지용보시, 약부유인, 지일제법무아,
得成於忍, 此菩薩勝前菩薩所得功德, 何以故?
득성어인, 차보살승전보살소득공덕, 하이고?
須菩提! 以諸菩薩不受福德故. 
수보리! 이제보살불수복덕고.
須菩提白佛言. 世尊! 云何菩薩不受福德? 
수보리백불언. 세존! 운하보살불수복덕?
須菩提! 菩薩所作福德, 不應貪著, 是故說不受福德.
수보리! 보살소작복덕, 불응탐착, 시고설불수복덕.


“수보리여! 만약 보살이 갠지스 강 모래 수만큼의 세계에 가득 찬 칠보로써 보시한다면, 만약 다시 어떤 사람이 있어 일체의 법이 무아라는 것을 알아 인 (忍)을 얻어 성취했다면, 이 보살의 공덕은 앞의 보살이 얻은 공덕보다 클 것이다.”

須菩提! 若菩薩以滿恒河沙等世界七寶, 持用布施, 若復有人, 
수보리! 약보살이만항하사등세계칠보, 지용보시, 약부유인 
知一切法無我, 得成於忍, 此菩薩勝前菩薩所得功德.
지일체법무아, 득성어인, 차보살승전보살소득공덕.

『금강경』에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습니다. 특이한 교수법 외에 또 하나의 특징이 있는데, 바로 부처가 세일즈를 아주 잘한다는 점입니다. 마치 백화점의 판매원처럼 떠들썩하게 소리쳐 가며 물건을 팝니다. 손에 사탕을 들고서 노래를 부릅니다. 애들이 이 사탕을 먹으면 공부도 잘 하고 시험도 잘 치며, 노인들이 먹으면 장생불로하고, 여자들이 먹으면 젊어지고 예뻐집니다! 『금강경』을 보면 마치 부처가 사탕을 파는 것 같습니다. 몇 마디로는 성에 차지 않아 이 공덕은 어떻고 저 공덕은 어떻다 말합니다. 그러다 여러분이 부처의 공덕을 믿기 시작하면 그는 다시 그 공덕을 뒤집습니다. 이것이 부처의 교수법 입니다.

이 경전은 중요한 곳에 이르러 수보리에게 이 경전의 공덕이 얼마나 큰지를 일러 줍니다. 앞에서도 몇 차례 이 경전의 공덕을 말했습니다. 수지(受持) 독송(讀誦)하면 그 공덕이 대단히 크다고 했습니다. 이 구절에 이르러 부처는 다시 수보리에게 대승보살들의 보시를 말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두 차례 말한 바 있는 일반인들이 칠보로 하는 보시가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보살입니다. 곧 '인보살(因菩薩)' 입니다. 헌법에서는 만 십팔 세 이상의 국민은 누구든 공무원에 선임될 자격이 있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일체 중생은 단지 영성(靈性)만 구비하고 있다면 모두 '인보 살입니다. 보살의 경지를 성취하면 '과보살(果菩薩)' 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바로 보살이라는 사실을 대담하게 승인할 수 있습니다. 보살계(菩薩戒)에서는 자살이 허락되지 않으며, 고의로 자신의 신체를 훼손하더라도 보살계를 범한 것이 됩니다. 그것은 부처의 몸에 피를 흐르게 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제 이야기가 보살도 보시를 해야 한다는데 이르렀는데, 보살이라도 여전히 보시를 해야 할까요? 사실 부처라 할지라도 여전히 보시를 행해야 합니다. 부처의 계율에서도 여러 곳에서 그에 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부처는 일반 제자들의 수행을 이끌었는데, 부처의 제자들 중에는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도 있어, 부처가 그들의 수행을 도왔습니다. 어떤 제자가 물었습니다. “부처께서는 어찌 아직 그렇게 손수 돕고 계시는 겁니까?” 부처의 대답은, 자신도 역시 공덕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행해야 할 공덕은 무궁무진하다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좋은 일을 행해야 하는 것은 지위의 높고 낮음과 상관없으며, 아무리 많이 행하더라도 충분하지 않다는 겁니다. 자신이 지고무상 하다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위대하고 숭고하며 원만한 공덕을 갖추어 이제는 부처가 되었기에 그 가치는 이미 돈으로 환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이런 종류의 부처라면 우리는 그를 끌어내릴 수 있습니다. 부처가 위대한 것도 바로 그에게 이런 생각이 없기 때문 입니다. 부처는 부단히 자신의 몸으로써 원칙을 만듭니다. 끊임없는 선행으로 공덕을 배양합니다. 일체의 보살은 선()의 열매를 수지(修持)하며, 공덕을 수지합니다. 이것은 영원히 다함이 없습니다.

선종의 어록을 보면 우두융선사(牛頭融禪師)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두융선사는 깨달음을 얻기 전에 우두산(牛頭山)에서 입정에 들어 있었는데, 그가 입정에 들 때면 천인(天人)이 먹을 것을 보내왔습니다. 손수 식을 준비할 필요도 없이 시간이 되면 자연 천녀(天女)가 그에게 음식을 공양했습니다. 또 온갖 새들도 꽃을 물어와 공양했습니다. 그는 당시까지 만 해도 아직 깨달음에 이르지는 못했으며, 단지 입정에 들어 있었을 뿐입니다. 후에 깨달음을 얻은 뒤에는 그 스스로 입정에 들지 않았는데, 사실 그때도 그는 언제나 정()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산속에 머물러 타좌하지 않고 내려와서 교육에 전념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을 데리고 있었는데, 통상 오백여 명이 그에게 배우고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 수십 리 길을 쌀 짐을 지거나 둘러메고 왕래해야 했습니다. 옛날에는 교통도 좋지 않았으니 쫓아다니며 제자들을 먹여 살려야 했습니다. 

이런 정신을 보면서 우리는 진정으로 불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행동으로 배워야 합니다. 불법을 배우는 사람들의 생각은 잘 못된 것입니다. 그들은 불법을 배우면서 게으를 수도 있고 세상에서 도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불법을 배우는 것이 온갖 일을 거들떠보지 않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건 완전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비단 소승에도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사람됨의 기본적인 측면에서도 올바르지 못합니다. 이 점은 금강경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금강경』에서는 보살이 갠지스강의 모래 수만큼이나 많은 칠보로써 보시를 행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대승보살의 발심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살이 갠지스 강을 가득 채운 모래 수만큼이나 많은 진귀한 보배로써 보시를 하니 그 공덕은 당연히 아주 클 겁니다. 자신이 이미 보살인데도 여전히 공덕을 행하려고 합니다. 가령 어떤 사람의 행함이 이런 보살의 공덕보다도 더 크다면, 그것은 어떤 것일까요? "만약 다시 어떤 사람이 있어 일체의 법이 무아라는 것을 알아 인()을 얻어 성취했다면, 이 보살의 공덕은 앞의 보살이 얻은 공덕보다 클 것이다〔若復有人, 知一切法無我, 得成於忍, 此菩薩勝前菩薩所得功德.〕” 진정한 과위(果位)에 이른 보살은 일체의 법이 본래 무아라는 것을 알고 또 거기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일체의 법이 무아라는 것은 『반야경(槃若經)』에서 말하는 유식(唯識), 즉 "일체의 법에는 자성이 없다〔一切法無自性〕”라는 데서 유래한 것입니다.


구하는 것은 곧 머무는 것인가

“왜냐하면, 수보리여! 모든 보살은 복덕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부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왜 보살이 복덕을 받지 않는가요?”
“수보리여! 보살은 자신의 복덕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복덕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

何以故? 須菩提! 以諸菩薩不受福德故,
하이고? 수보리! 이제보살불수복덕고,
須菩提白佛言, 世尊! 云何菩薩不受福德?
수보리백불언, 세존! 운하보살불수복덕?
須菩提! 菩薩所作福德, 不應貪著, 是故說不受福德.
수보리! 보살소작복덕, 불응탐착, 시고설불수복덕.

"모든 보살은 복덕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以諸菩薩不受福德故〕.” 이 구절에서 다시 요약합니다. 진정으로 대승보살도를 행하는 사람은 선한 일을 행하면서도 복덕의 과보(果報)를 구하지 않습니다. 일체의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행하는 것일 뿐입니다! 가령 우리가 세상을 구하고 사람을 구하는 선(善)을 행하고 나서 내가 복보(福報)를 쌓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건 역시 틀린 생각입니다. 이는 범부의 경계이지 보살의 심성이 아닙니다. 일체의 보살은 복덕을 받지 않으며, 과보를 구하지도 않습니다.

수보리가 여기까지 듣고서 다시 의혹이 생깁니다. 그가 묻습니다. 왜 보살이 복덕을 받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지요? 방금 우리가 언급했던 것이 아닙니까? 보살은 결코 복덕을 구할 마음으로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요, 본분(本分)입니다. 하면 한 것이요, 거기에 머물거나 집착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무슨 문제 될 것이 있겠습니까? 수보리가 우리보다 더 어리석은 것일까요? 그는 다시 묻습니다. 왜 보살은 복덕을 받아들이지 않는가요? 

여러분! 수보리의 질문이 옳은 것일까요? 당연히 옳습니다. 아주 고명한 질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보살이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은 결코 복덕을 구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미 아무것에도 머물지 않고 집착하지도 않는데 구한다고 한들 또 무슨 장애가 있겠습니까? 그가 물은 것은 바로 이 이치입니다. 여러분은 이 문제를 작은 것이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수보리의 물음은 대단히 엄중한 문제입니다! 이미 보살이라면 마음이 머물지 않습니다. 일체의 선을 행하고서도 마음에 구하는 바가 없으니, 이것이 바로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하는 바가 있다면 머무름이 있는 것일까요? 이런 보살이라면 아직 철저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것일까요? 아직 제대로 되지 못한 것일까요? 수보리가 물었던 것은 바로 이 이 치입니다. 그러므로 부처 또한 수보리가 묻자 지체 없이 대답합니다.

“수보리여! 보살은 자신의 복덕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복덕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須菩提!菩薩所作福德, 不應貪著,是故說不受福德〕.” 여러 부처나 보살은 공덕을 행하면서 당연히 거기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복덕이 있더라도 스스로 집착하지 않고, 좋은 것이 있더라도 스스로 결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대신에 그것을 세계의 일체 중생에게 돌리고, 세계의 일체 중생이 그 좋은 것을 받도록 기원합니다. 자신은 그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소위 대보시, 보시법문, 보시바라밀다라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즉 진정으로 깨달음을 증득하여 반야를 얻은 사람은 사사로움이 없기에 소승의 길을 걷지 않으며, 보시를 제일 우선시합니다. 보시에는 법보시(法布施), 재보시(財布施), 무외 보시(無畏布施)가 있으나, 일체의 보시 속에 바로 보살도가 있습니다. 

 

 

글은 남회근 선생의 '금강경 강의'에서 참조하고, 인용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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