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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경전/금강경

금강경 제27품 무단무멸분

by 파장波長 2022. 5. 25.

제27품 끊음도 없고 멸함도 없다.

 

第27品·無斷無滅分 무단무멸분

須菩提! 汝若作是念, 如來不以具足相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수보리! 여약작시념, 여래불이구족상고, 득아뇩다라삼막삼보리.
須菩提! 莫作是念, 如來不以具足相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수보리! 막작시념, 여래불이구족상고, 득아뇩다라삼막삼보리.
須菩提! 汝若作是念,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 說諸法斷滅. 莫作是念! 
수보리! 여약작시념, 발아뇩다라삼막삼보리심자, 설제법단멸, 막작시념!
何以故?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 於法不說斷滅相.
하이고? 발아뇩다라삼막삼보리심자, 어법불설단멸상.


삼계 육도의 바깥

“수보리여! 그대가 만약 이렇게 생각한다면, 여래는 상을 두루 갖추지 않아서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얻었다고. 수보리여! 이렇게 생각하지 마라. 여래는 상을 두루 갖추지 않아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얻었다고.”

須菩提! 汝若作是念, 如來不以具足相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수보리! 여약작시념, 여래불이구족상고, 득아뇩다라삼막삼보리. 
須菩提! 莫作是念, 如來不以具足相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수보리! 막작시념, 여래불이구족상고, 득아뇩다라삼막삼보리.

부처가 수보리를 부릅니다. “가령 그대가 이런 생각을 한다면〔汝若作是念〕, 즉 상에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부처를 볼 수 있고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如來不以具足相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부처는 말합니다. “수보리여! 그대는 결코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공덕의 성취가 없어도 도를 깨달아 성불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런 생각은 잘 못된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수보리가 하는 말을 똑똑히 들었습니다!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보아서는 안 된다고요. 거기에 대해 부처가 말했습니다. "만약 형체로써 나를 보고자 하거나 소리로써 나를 구하려는 자는 삿된 도를 행하는 자로서 여래를 볼 수 없다.” 그런데 부처는 이제 다시 말합니다. “수보리여! 잘못 생각해서는 안된다. 가령 그대가 일체의 공덕을 원만히 갖추지 않고서도 능히 아뇩다라삼막삼보리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수보리여! 그대는 주의해야 한다. 그대는 결코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된다〔莫作是念〕! 결코 공덕을 두루 갖추지 않아야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수보리여! 그대가 만약 이렇게 생각한다면, 아뇩다라삼막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모든 법을 단멸하는 것이라고, 이렇게 생각하지 마라.” 

須菩提! 汝若作是念,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 說諸法斷滅, 莫作是念!
수보리! 여약작시념, 발아뇩다라삼막삼보리심자, 설제법단멸, 막작시념!

만약 도를 깨달은 뒤에는 모든 것이 좋고 모든 것이 공(空)이 되리라 생각한다면, 이것은 아주 엄중한 착오입니다! 부처는 수보리에게 이것을 명백히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불법을 배우면서 이런 생각을 갖습니다. 불법을 배워 도를 깨달으면, 두 다리를 틀고 앉아 생사를 초월해 버려서 다시 이 세상에 와서도 고통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착각입니 다. 수행을 하거나 불법을 배우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최대의 착각입니다.


단멸견

어떤 사람이 도를 깨닫고 난 뒤 마치 숨어 있을 만한 곳이라도 있듯 다시 오지 않으리라 생각한다면, 이건 잘못된 생각 입니다. 이 잘못된 생각을 불법에서는 견지(見地)상의 착오라고 말합니다. 불법을 배우는 사람은 재가(在家)는 출가(出家)는 결과를 증득할 수 있는데,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견사(見思)의 두 미혹을 단절하는 일입니다. 견혹(見感)과 사혹(思惑)에 대해서는 앞의 제품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습니다. 견지(見地)가 뚜렷하지 못하면 편차가 생겨 편견에 떨어지게 됩니다. 다섯 종류의 잘못된 견해는 곧 신견(身見), 변견(邊見), 사견(邪見), 견취견 (見取見), 계금취견(戒禁取見) 입니다. 이 다섯 견해는 수도에 장애가 되고, 도를 깨치지 못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사혹(思感)이란 곧 번뇌혹(煩惱感)으로서, 마음속의 탐진치만의(貪眞癡慢疑) 입니다. 

현재 인류의 유물론은 바로 단견(斷見)에 떨어진 논리로, 사람이 죽는 것이 마치 등불이 꺼지는 것과 같다고 봅니다. 즉 삼세(三世)의 인과도, 육도(六道)의 윤회도 없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을 증명할 수 없는 것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단멸견(斷滅見)에 속하는 것으로 역시 사견(邪見)의 일종입니다. 이 때문에 부처는 수보리에게 말합니다. 결코 잘못된 생각, 즉 단멸견에 떨어져서는 안 된다고요.

바로 앞에서 상(相)에 집착해서는 부처를 볼 수 없다고 하고서 이제 다 시 수보리에게 말하기를, 상에 집착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빠져서도 부처를 볼 수 없다고 합니다. 상에 집착하는 것도 잘못이요. 상에 집착하지 않는 것도 잘못이라는 겁니다. 가령 상에 집착하지 않으려는데 빠져 부처를 보고자 한다면, 일체가 본래 공(空)인데 꼭 선한 일을 해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부처도 공이요, 선 또한 공입니다! 일체가 모두 공이니, 내가 살인을 하더라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살인 역시 공입니다! 훔치고 속이고 빼앗고 나쁜 일을 하는 것도 모두 공입니다.

이런 견해는 인과(因果)를 배제시킨 것으로서 공견(空見)에 떨어진 것입니다. 공견(空見)의 착오는 유물론의 관점과도 같은 것으로, 이 점에 대해 여러분은 특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남방으로 전해진 불교, 즉 동남아 일대의 소승불교는 바로 공견(空見)의 관점에 떨어진 것으로, 결국 유물론에 잠식당하고 말았습니다.

인과를 배제시킨다는 것은 곧 인과의 이치를 밀쳐 버린 것으로, 인과의 존재를 승인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재 인류의 사상 조류 가운데 가장 무서운 일면으로서, 바로 부처가 말한 단멸견의 사상이기도 합니다. 부처는 수보리의 견해가 잘못될까 두려워, 앞에서 먼저 상에 집착해서 여래를 보려 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다시 수보리의 견해가 상에 집착하지 않으려는데 떨어질까 두려워합니다. 상에 집착하지 않으려고 하면 결과적으로 단멸견이 되어 인과를 배제시켜 버립니다. 이 때문에 부처는 재삼 경고합니다. 잘못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요〔莫作是念〕.


단멸상을 말하지 않다.

"왜냐하면 아뇩다라삼막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킨 자는 법에 대해 단멸상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何以故?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 於法不說斷滅相.
하이고? 발아뇩다라삼막삼보리심자, 어법불설단멸상.

그러므로 진정으로 불법을 배우는 사람, 즉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구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먼저 단멸상(斷滅相)에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단멸상이란 무엇일까요? 단멸상이란 공(空)에 떨어진 것입니다. 즉 공과(空果)를 보는 것이 불법의 구경(究竟)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단멸입니다. 이제 『금강경』이 막바지에 이르렀는데, 지금까지 『금강경』에서 여러분에게 공(空)을 말한 적이 있었습니까? 우리 후세의 주해(註解)는 『금강경』이 공을 설한 것이라 말합니다. 그렇지만 이건 우리의 주해일뿐 부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부처는 단지 이렇게만 말했습니다. 과거의 마음은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고요. 그리고 형체로써 나를 보려 하거나 소리로써 나를 구하고자 하는 자는 삿된 도를 행하는 자로서 여래를 볼 수 없다고요. 이것은 교육 방법입니다. 곳곳에서 우리가 착오를 일으킬 만한 것을 미리 막고자 한 것입니다. 부처는 우리에게 결코 '어떤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어떤 것이 아니다' 라고만 말했습니다. 『반야심경』에서도 단지 “오온 이 모두 공〔五蘊皆空〕”이라고만 말하고, 최후에는 진실하며 허망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결코 공(空)을 설하지는 않았습니다! 오온이 모두 공 이라는 것이지, 결코 반야바라밀다가 모두 공이라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불학이나 불경, 불법을 연구할 때 각별히 주의해야 할 부분 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사견(邪見)에 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空)과 단멸견(斷滅見)은 서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불법을 배우는 많은 사람들은 어떤 것을 보더라도 모두 공(空)으로 보인다고 자인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공이라 할 수 없습니다.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낙담한 경우이거나, 혹은 나이가 많거나, 혹은 환경상 어쩔 수 없거나, 혹은 지독하게 운이 없거나 한 경우에 흔히 이런 말을 합니다. 자신이 보기에 온갖 것이 공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낙담한 경우라면 그건 공이 아니라 낙담이 아주 심한 것일 뿐입니다. 이 밖에도 철학적으로 불법을 공부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주 공(空)을 보았다느니, 통(通)을 보았다느니 하며 큰소리를 칩니다. 그들은 입만 열면 이런 말들을 하지만, 그것은 조금도 통(通)을 보지 못했다는 증거에 불과합니다. 진정으로 통했다면 통이니 공이니 하는 말조차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이로다! 공이로다! 그들은 스스로 감탄합니다. 이렇게 감탄하는 것은 분명 마음에 어떤 느낌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느낌은 단지 어떤 것에 불과할 뿐, 거기에 공이라곤 조금도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이건 수박을 먹지 않고 엉뚱하게 호박을 먹은 것입니다. 어쨌든 박은 박 아닙니까! 

재삼 여러분께 주의를 환기시키는 바이지만, '공(空)' 은 하나의 방편적 설법입니다. 공(空)은 어떤 것을 형용한 것입니다. 만약 이것을 진정으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공견(空見)이 아니라 단멸견(斷滅見)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이 때문에 부처는 분부합니다. “아뇩다라삼막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킨 자는 법에 대해 단멸상을 말하지 않는다〔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 於法不說斷滅相〕”고요. 너무도 엄중한 말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단멸을 말한 것이 아니며, 공을 설한 것은 더욱 아닙니다. 이 품의 제목은 “무단무멸(無斷無滅)”인데, 양(梁)의 소명태자가 붙인 이 제목은 아주 뛰어납니다. ‘무단무멸' 이란 단절되지도 않고 없어지 지도 않는 것으로 단멸상이 아닙니다. 현대 과학에서는 물질이 에너지의 변화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물질은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 점을 뚜렷이 인식해야 합니다.

 

글은 남회근 선생의 '금강경 강의'에서 참조하고, 인용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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