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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경전/금강경

금강경 제31품 지견불생분

by 파장波長 2022. 5. 26.

제31품 지견이 생기지 않는다.

 

第31品·知見不生分 

須菩提! 若人言, 佛說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須菩提! 於意云何? 是人解我所說義不? 
수보리! 약인언, 불설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 수보리! 어의운하? 시인해아소설의부?
不也, 世尊! 是人不解如來所說義. 
불야, 세존! 시인불해여래소설의.
何以故? 世尊說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卽非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하이고? 세존설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 즉비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 
是名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시명아견인견중생견 수자견.
須菩提!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 於一切法, 應如是知, 如是見, 如是信解, 不生法相.
수보리! 발아뇩다라삼막삼보리심자, 어일체법, 응여시지, 여시견, 여시신해, 불생법상.
須菩提! 所言法相者, 如來說卽非法相, 是名法相.
수보리! 소언법상자, 여래설즉비법상, 시명법상.

“수보리여! 만약 어떤 사람이 부처가 아견 · 인견 · 중생견 · 수자견을 말했다고 한다면, 수보리여! 그 사람은 내가 말한 뜻을 이해한 것이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 사람은 여래께서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수보리여! 아뇩다라삼막삼보리의 마음을 발한 자는 일체의 법에 대해 마땅히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며, 이렇게 믿고 이해해 법상이 생기지 않아야 한다.”
“수보리여! 법상이라는 것은 여래가 법상이 아니라고 하니, 이름이 법상이다.”


견(見)은 견(見)이 아니다.

“수보리여! 만약 어떤 사람이 부처가 아견 · 인견 · 중생견 · 수자견을 말했다고 한다면, 수보리여! 그 사람은 내가 말한 뜻을 이해한 것이겠는가?”

“須菩提! 若人言, 佛說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須菩提! 於意云何? 是人解我所說義不?
수보리! 약인언, 불설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 수보리! 어의운하? 시인해아소설의부?

수보리에게 묻습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부처께서 아견 · 인견 · 중생견· 수자견을 말씀하셨다고 한다면 과연 옳은 말이겠는가?" 불교경전에서는 사상(四相)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다시 방향을 돌려 ‘상(相)'이 아니라 ‘견(見)’을 끄집어냅니다. ‘상(相)' 이란 바로 현상입니다. '견(見)' 이란 자신의 견해로서 정신의 영역에 속합니다. 소위 견해란 요즘 말로 하면 관점에 해당하는 것으로 모두 '견(見)' 에 속합니다. 이 때문에 선종에서는 도를 깨친 것을 견지(見地)라 합니다. 도를 보고〔見〕거기에 이르러야 하는 것으로, 이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능엄경』에는 '도를 본다〔見道〕'고 할 때의 '견(見)' 에 대해 다음과 같은 네 구절이 있습니다.

"소견(所見)의 견(見)으로 능견(能見)의 견(見)을 볼 때, 능견의 견은 소견의 견이 아니나 능견의 견 또한 떠나야 하니, 능견의 견으로 미칠 수 있 는 바가 아니다〔見見之時, 見非是見, 見猶離見, 見不能及〕.” 이 불경을 한번 보십시오. 얼마나 지긋지긋하게 물고 늘어집니까! 온통 무슨 견이니 무슨 견이니 하는 소리입니다. 첫 번째 견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견입니다. 마음과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 견은 도를 보는〔見道〕견입니다. 달리 말하면 첫 번째 견은 소견(所見)의 견이요, 두 번째 견은 능견(能見)의 견입니다. 우리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이 소견으로서, 이것은 현상을 보는 것입니다. 소견을 돌이키면 스스로 도를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명심견성(明心見性)의 견으로서, 소견의 견이 아닙니다. 눈으로 하나의 현상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혹자는 하나의 경계를 보기도 하는데, 이것은 도(道)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견견지시(見見之時)”란 스스로 돌이켜 도를 보는 견도(見道) 의 견, 즉 명심견성의 견입니다. 이렇게 볼 때 “견비시견(見非是見)”이 됩니다. 이 능견, 즉 도를 보는 견은 눈으로 사물을 보는 소견의 견이 아닙니 다. 이 때문에 “견비시견(見非是見)”이라 합니다. 그렇다고 도를 보는 견이 또 하나의 경계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견유이견(見猶離見)” 입니다.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는, 일체가 모두 공이 된 이후 비로소 '도 를 보았다'고 말합니다. 어떤 존재를 보는 것은 아직 소견입니다. 이 견은 여전히 떨쳐 버려야 할 견입니다. “견유이견(見猶離見)”여전히 떨쳐 버려야 합니다. 공 또한 공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견불능급(見不能及)”, 진정한 명심견성의 견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요 심안(心眼)으로도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닌 능견의 견입니다. 이렇게 견이 무더기로 나와 있으니 얼마나 이해하기 어렵습니까!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명심견성의 견은, 어찌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다” 라는 경지가 아니겠습니까? 청개구리가 풍덩! 하고 물에 뛰어듭니다. 일체의 견(見)을 없애야 합니다. 일체의 산하(山河) 대지와 우주 만유(萬有)를 모두 허공 속에 분쇄하고 대지도 가라앉혀 버려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만 선종을 말할 수 있고, 명심견성의 그림자도 비칠 수 있습니 다. 기억하십시오! 그래 봐야 약간의 그림자만 비칠 뿐입니다!


아는 것이 무명의 근본이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 사람은 여래께서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不也, 世尊! 是人不解如來所說義.
불야, 세존! 시인불해여래소설의.

수보리가 말합니다. “그건 옳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비록 불법을 배웠지만 근본적으로 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불법의 이치를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존께서 말씀하신 아견 · 인견 · 중생견 · 수자견은 아견 · 인견 · 중생견 · 수자견이 아니라, 이름이 아견 · 인견 ·중생견 · 수자견이기 때문입니다.”

何以故? 世尊說我見人見眾生見壽者見, 卽非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하이고? 세존설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 즉비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
是名我見人見眾生見壽者見
시명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

"그렇다면, 부처(수보리)가 이어서 말합니다. “그대는 지금 하나의 가정적(假定的)인 문제를 제시해 나에게 물었는데, 아견 · 인견 · 중생견 · 수자견의 견(見)이나, '도를 본다〔見道〕'고 할 때의 견(見)은 단지 하나의 표달(表達) 방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를 드러내기 위한 명사일 뿐이다. 실제로는 밝다〔明〕고 해서 밝을 수 있는 곳이 있는 것이 아니며, 본다〔見〕고 해서 볼 수 있는 곳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이라 한다.”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본다.

“수보리여! 아누다라삼막삼보리의 마음을 발한 자는 일체의 법에 대해 마땅히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며, 이렇게 믿고 이해해 법상이 생기지 않아야 한다.”

須菩提!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 於一切法, 應如是知, 如是見. 如是信解, 不生法相.
수보리! 발아뇩다라삼막삼보리심자, 어일체법, 응여시지, 여시견. 여시신해, 불생법상.

부처는 최후로 수보리에게 결론을 말합니다. “그대는 주의해야 한다! 진정으로 대승불법을 배워 아뇩다라삼막삼보리의 마음을 얻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세간법과 출세간법을 포함한 일체의 법에 대해 마땅히 '이렇게 알아야 한다. 즉『금강경』의 한 층 한 층의 이치들을 잘 알아야 한다.”

지견(知見)이라는 두 글자에 대해 다시 한 번 설명합니다. 대승과 소승의 일체 불법은, 특히 소승의 불법은 계(戒) · 정(定) · 혜(慧) · 해탈(解脫) · 해탈지견(解脫知見)의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 순서대로 수행하면 먼저 계율을 지키고, 그다음 정(定)을 닦으며, 다시 정(定)으로부터 지혜를 계발하여 도를 깨닫습니다. 진정으로 도를 깨치고 일체의 고통으로부터 해탈 했다 하더라도, 해탈의 최고 정도는 여전히 물질세간의 일체 속박으로부터 해탈하는 것입니다. 욕계(欲界)와 색계(色界)의 일체 번뇌와 정감(情感) 을 남김없이 모두 해탈한 후, 그래도 아직 남아 있는 것이 바로 심성의 지(知)와 견(見)입니다. 이 지(知)와 견(見)마저 해탈한다면 최후에 철저한 공(空)에 이르게 됩니다. 조금 전에 “知見立, 知卽無明本, 知見無, 見斯卽涅樂”에 대해 언급했지만, 여기서도 다시 말합니다. 대승의 마음을 내어, 범부가 도를 닦아 성불하려면 일체의 법에 대해 마땅히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아야 한다〔如是知, 如是見〕”는 겁니다.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본다는 것은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본다는 것일까요?

소위 불법이란 불법이 아니며, 이름이 불법입니다. 그렇다면 소위 외도(外道)란 외도가 아니며, 이름이 외도입니다. 소위 마귀란 마귀가 아니며, 이름이 마귀입니다. 소위 나란 내가 아니며, 이름이 나입니다. 바로 이런 것 들입니다! '일체'를 귀납해 보면 공(空)에도 유(有)에도 머물지 않고, 머무름과 집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체법에 대해 마땅히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이해되면 “이렇게 믿고 이해한다〔如是信解〕”는 것의 이치도 파악 할 수 있을 겁니다. 이성으로 뚜렷이 알아야만 비로소 미신이 아닙니다. 만약 불법의 교리도 뚜렷이 알지 못하면서 정서적으로 뛰어들어 불법을 배운 답시고 참선을 한다면, 전체가 미신입니다! 그러므로 지견(知見)을 뚜렷이 해야 합니다. 이렇게 믿어야만 비로소 바른 믿음입니다. “여시해(如是解)”, 바른 믿음을 가진 후 그것으로 이해해야만 비로소 이성적입니다. 불법을 배우고 수도하는 것은 이성적인 것이지 정감적인 것이 아닙니다. 불법은 맹목적인 미신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믿고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법상

왜 “불생법상(不生法相)”이라 했을까요? 왜 '불용법상(不用法相)' 이나 '부주법상(不住法相)', 또는 '불착법상(不著法相)'이나 '불락법상(不落法 相)' 이라 하지 않았을까요? 이런 표현들을 모두 쓰지 않고 “불생법상(不生法相)” 이라 한 것은, 이들과는 의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먼저 우리는 무엇이 법상(法相)인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일체의 현상이나 관념은 모두 현상으로서, 의식이나 견해가 구성한 하나의 형태입니다.

모든 사람의 의식 속에는 스스로의 구상이나 환상이 있습니다. 환상이 오래되면 깨뜨릴 수 없는 하나의 전형(典型)으로 변해 스스로 거기에 갇혀 버리고 맙니다. 이것은 바로 의식이나 사상의 경계 속에 있는 형태로서, 불교 용어로는 법(法)이라 합니다. 법(法)은 일체의 일, 일체의 이치, 일체 의 사물, 일체의 견해나 관념을 포괄합니다. 

이제 『금강경』은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데, 우리에게 하나의 이치, 지극히 엄중한 이치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부처가 수보리에게 말합니다. “그대가 무상의 지혜를 증득하여 성불하려면 마땅히 이렇게 알아야 하며, 마땅히 이렇게 보아야 한다. 뚜렷이 이해되면 마땅히 이렇게 믿어야 하며, 이렇게 이해해야 한다.” 어떻게 이해한다는 것일까요? 한마디로 “불생법상(不生法相)” 입니다. 마음속으로 어떤 것을 조작해서는 안 됩니다. 잠재 의식 속에서 어떤 부처의 모양이 생겨나서는 안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이해하고 있는 부처와 도(道), 열반의 경계는 다 같지 않습니다. 왜 같지 않을까요? 그것은 마음이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만들어 낸 것으로, 이 마음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생법상(自生法相)”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찾으려 해 서는 안 됩니다. 자아의식을 만들어 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똑같은 강의를 들으면서도 백 명의 학생 모두 이해 심도는 각자 다릅니다. 이것은 각자가 마음속에 자생법인을 갖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구성한 하나의 현상은 궁극적인 것이 아닙니다. 바로 불경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못 장님이 코끼리를 더듬고는 각자 한 측면만을 고집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비록 장님이 코끼리를 더듬고서 한 측면을 고집한 것일지라도, 그 측면 역시 모두 코끼리의 한 부분인 점에서는 결코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만약 코끼리의 전체 모습을 이해하려 한다면 일체의 것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부처가 우리에게 일러 준 “불생법상(不生法相)”입니다. 아래에서 부처는 다시 뒤집습니다.


“수보리여! 법상이라는 것은 여래가 법상이 아니라고 하니, 이름이 법상이다.”

須菩提! 所言法相者, 如來說卽非法相, 是名法相.
수보리! 소언법상자, 여래설즉비법상, 시명법상.

불교경전에서 말하는 법상은 근본적으로 법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법상이라 합니다. 이 말은 『금강경』에서 자주 나옵니다. 그 이치가 어디에 있을까요? 이건 모두 교육상의 방법입니다. 강을 건너는 배와 같습니다. 목적은 강을 건너는 데 있습니다. 이미 건넜다면 배를 둘러메고 갈 필요가 없습니다. 서둘러 배를 버리고 자기 길을 가야 합니다.

부처는 최후로 우리에게 말합니다. 소위 법상이란 “법상이 아니다〔卽非法相〕.” 그건 단지 말하기 위한 방편, 기회의 방편, 교육상의 방편으로서 목적은 그대들로 하여금 알게 하는데 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후세 사람들은 부처의 교육 방법이 기록되어 전해진 후, 부처가 말한 공(空)을 죽어 라 붙들거나 혹은 한사코 유(有)를 붙들어 영원히 뚜렷이 알지 못합니다. 사실상 부처는 아주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일체 법상에 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법상에 떨어지지 않은 뒤에는 사람들은 도리어 『금강경』, 이 공(空)을 말한 것이라 주장할 겁니다. 앞에서 이미 말했지만 『금강경』, 에는 우리에게 공을 보라고 가르친 부분이 없습니다. 『금강경』은 모두 차단하는 법입니다. 정확하지 못한 설법을 막고 있습니다. 정확한 것이 어떤 것인지는 스스로 찾을 것을 요구합니다.

 

글은 남회근 선생의 '금강경 강의'에서 참조하고, 인용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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