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종교에 대해 말할 때 ‘종교’ 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다양하다.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 ‘종교로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면 배부분은 머뭇거리다가 결국은 자신의 종교를 중심으로 이야기하곤 한다. 비종교인들의 경우도 종교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아니면 종교의 윤리적, 교화적 기능, 또는 사회봉사 할동 등에 대해 막연한 기대를 표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는 종교 개념이 정확하게 의미와 내용이 규정되지 않은 채 사용되고 있음에 연유한다.
1. 종교의 상식적 정의
종교에 대한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정의는 매우 다향하다. 대표적인 것으로 종교란 ‘하나의 믿음’ 이라는 정의가 있다. 이는 인간의 유한성과 자연의 불가항력에 따른, 절대적 존재에 대한 의지와 피난의 대상으로서 종교를 일컫는다. 그러나 이는 믿음 대상의 다양성뿐만 아니라 믿음의 방식의 차이를 설명해 주지 못한다는 한계를 안고 있다. 믿음은 종교적인 삶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크게 보아 우정, 권력, 예술, 윤리규범 등 인간 삶의 유지와 재생산을 위한 조건의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종교란 ‘인간이 위안받기 위해 또는 구원받기 위해 허위적으로 만들어낸 것’ 이라는 견해가 있는데, 이는 과학적 비판의 외형을 띠고 있다. 이에 의하면 과학이 발달하면 인간계와 자연계의 모든 현상들을 남김없이 다 설명할 수 있으므로 종교와 같은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인 태도는 결국 소멸할 것이고, 따라서 종교란 인간 능력에 대한 믿음의 유약함에서 비롯된 허구적 위안물에 불과하다는 주장으로 요악된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인간중심주의적 과학주의라 하여 이미 과학에 대한 맹신에 다름 아니며, 과학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인간 삶의 풍부하고 복잡한 측면들이 모두 해명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겸손함으로 대체되었다.
서구사회의 제국주의적 팽창 과정에서 기독교 선교사와 그들의 견문기에 의해 생성된 주장이 있는데, 이에 의하면 ‘기독교 외의 모든 종교는 충분히 진화하지 못한 가짜 종교이며, 기독교만이 유일한 진짜 종교’ 라고 한다. 이는 기독교 내부에서도 지극히 오만하고 배타적인 태도라고 비판하고 있으나 아직도 많은 나라, 심지어는 서구의 신민 지배를 경험한, 그래서 기독교화한 국가에서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사용하는 종교라는 범주는 가차판단적인 용어가 아니다. 현대사회의 성숙한 견해에 의하면 종교란 우리 눈앞에 보이는 여러 현상들 중에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진 기본적인 전제를 어기고 있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가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오류의 첫걸음이 될 수도 있다. 오히려 기독교는 종교에 대한 개방적인 정의를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다른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종교 중의 하나라고 여길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자기가 믿는 종교가 자기에게는 절대적이고 유일한 것이며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버릴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는 자기와 다른 종교, 자기와 다른 사람들, 내 곁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에 대해 개방된 것이어야 한다.
“믿음으로서 죄를 용서받는 것”,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 “알라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 등 종교별로 다양한 정의가 있다. 그러나 이는 문화권마다 종교에 해당되는 개념들이 서로 다르고 그 내용도 상당한 편차를 보이기 때문에 각 종교 신자들의 호교론적(護敎論的) 입장에 불과할 뿐이다. 따라서 일반적인 종교 이해를 위해서는 이러한 견해뭄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초연한 접근 (detached approch, Winston King) 또는 구조화된 감정이입(structured emphathy, Ninian Smart) 등의 태로를 견지해야 할 것이다.
2. 학문적 정의
종교관에 대한 학문적인 정의는 다양하게 존재한다. 종교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는 “종교를 정의하는 것, 종교란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은 연구의 첫 단계에서는 불가능하다. 만약 필요하다면 정의는 연구의 결론에서만 시도될 수 있다. 종교의 본질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며, 사회적 행위의 특수한 상황들과 결과들을 연구하는 것이 과제다." ‘종교’ 라 불리는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의가 필요하다. 이는 어디까지 현재의 작업을 전개하기 위한 잠정적, 전략적, 방편적인 정의일 뿐이다. 보편적으로 옳은 종교의 정의란 없다. 우선 종교기원론과 이후의 다양한 종교 정의의 방식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1) 종교기원론
먼저 종교에 대한 학문적 관심은 종교에 대한 정의보다는 그 기원 규명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대표적인 종교기원론은 다음과 같다.
막스 뮐러 (Max Müller, 언어학, 종교학자 1823-1900)
“종교란 언어의 질병이다” 라고 정의한 뭘러는 종교학의 창시자로 불리며, 신학에서 종교학을 독립시켰다. 그의 종교 기원에 대한 탐구는 “무한으로 경험된 죽어 있는 객체인 자연현상(하늘, 땅, 물 등)을 을 살아있는 주체(의인화)로 언어 표현한 경험이 바로 종교 경험이다. 이는 언어의 굴절 현상 속에서 벌어진다. 종교는 사실을 비사실로 표현한 비현실 속에서 사는 것이다. 결국 종교는 질병이며 비현실적인 산물이다.” 라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그는 인간의 언어가 실재 혹은 인식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규명함으로써 언어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에드워드 타일러(Edward B, Tylor, 인류학 1832-1917)
종교는 “잘못된 추론의 결과” 라고 정의한 그는 진화론적 입장을 갖고 현존하는 원시부족의 종교를 연구하여 종교의 기원과 본질을 규명하려고 노력했다. 결국 그는 원시인이 ‘죽음과 삶’ 그리고 ‘꿈속의 비현실적인 세계’ 라는 두 가지 문제에 직면하여 삶도 죽음도 아닌 제3의 실재가 존재한다고 여기게 되었고, 그것이 몸에 붙으면 살고 떠나면 죽는 것이며 잠자는 대 붙으면 꿈이 된다고 생각했다고 결론지었다. 이런 제3의 실체가 바로 아니마(anima, 영적존재)로 애니미즘(animism) 이론으로 전개 되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S. Freud, 심리학 1856-1939)
종교는 “유아기적 강박 노이로제의 표상화이며 망상이다.” 라고 정의한 프로이트는 인간 심성의 무의식 영역을 발견하여 마르크스나 니체와 함께 현대 서구사상의 대전환을 이룬 심리학자로서 에고(ego)와 슈퍼에고(superego) 개념을 통해 종교의 기원을 규명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자라면서 에고를 형성하는데, 슈퍼에고인 부모가 늘 자기 존재를 얽어매는 짐이 되고, 이에 부모 살해의 충동을 지니나. 결국 자신도 어느새 슈퍼에고가 됨을 발견하고 이에 대한 죄의식을 갖게 된다고 한다. 결국 인간은 영원한 슈퍼에고의 존재를 상정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신이고, 그 신적 존재에 의해 죄의식을 용서받는다. 그러나 “슈퍼에고로의 변화를 삶의 당연한 원칙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를 신적 존재에 의탁하는 것은 미성숙의 표시로서 정신분열적 증세이며, 따라서 종교는 유아기적 강박 노이로제 현상의 표상화, 즉 망상에 불과하가.” 고 그는 주장했다.
다비드 에밀 뒤르켐(David Émile Durkheim, 사회학 1858-1917)
“종교는 사회 그 자체다.”, 종교은 성스러운 것(격리되고 금지된 것)과 관계된 신앙과 실천의 독특한 체계다.”, “신앙과 실철은 그것은 신봉하는 사람들을 교회라 불리는 유일한 공동체 속으로 통합한다.” 등으로 정의한 귀르켐은 현대 사회학의 비조로서 사회는 단지 개인의 집합이 아니라, 그 자체가 유기적 구조를 가진 단위체임을 규명했다. 또한 사회는 사회 자체가 형성한 자기 이념의 결과이며, 이러한 사회의 형성에는 사회를 묶을 수 있는 자기 이념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집단 구성원들은 저마다 다른 욕구와 이해관계를 갖고 있기에 사회는 언제나 해체될 위기에 직면해 있다. 따라서 개별 구성원들의 차이를 상쇄시키고 이들을 묶어줄 수 있는 초개적인 준거가 필요하다. 그것은 개인을 넘어서는 보편적인 것으로 상정된다. 여기서 개인의 욕망의 차이를 누르고 사회를 통합하는 기능을 한다. 속에서 성으로 올라간 차원을 뒤르켐은 터테미즘(totemism)이라고 했다. 사회는 이 성에 의해 현실의 상충을 해결하고 신화를 형성하고 제의를 실행함으로써 사회를 유지한다. 결국 종교란 사회를 존재케 하는 기본요건이지, 따로 존재하는 실재가 아니다. 사회가 있기에 종교가 있는 것이다. 즉 종교는 사회 그 자체다. 뒤르켐은 사회 자체가 형성한 자기 이념이 곧 종교라고 보는 것이다.
유물론(Materialism)
루트비히 포이어바흐(Ludwing Feuerbach) 독일 철학자 1804-1872
종교는 인간 자신의 투사물이며, 인간과 인간 자신의 관계이며, 그 자신에 대한 관계이다. 신적인 존재는 단지 인간 존재일 뿐이며, 오히려 개개의 인간이 가진 한계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정화된 인간 본성이 객관화되어 다른 존재처럼 직관되고 존경받는 것이다. 따라서 신적인 본성의 속성은 인간 본성의 속성에 불과하다.
종교는 무한에 대한 의식(意識)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의식의 무한에 대한 의식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무한에 대한 의식에 대해서는, 의식하는 주체는 자신의 객관에 따라 자기 본성의 무한성을 지니고 있다.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Karl Marx, Fridricch Engels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인간이 종교를 만들지, 종교가 인간을 만들지 않는다. 종교는 아직 그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거나 자신을 상실한 사람들의 자의식이며 자기 감정이다. 그러나 인간은 세상 밖에서 웅크리고 있는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그 자신이 인간 세계요, 국가이며 사회다. 종교는 인간 본질의 환상적인 인식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참 실재라고 할 만한 것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종교의 기원을 찾으려는 노력들은 종교의 중요한 측면에 대해 밝혀주고 있다. 그리고 이는 종교를 이해하는 폭을 넓혀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종교의 기원에 대한 물음은 종교 특정 측면을 보편적 기원으로 상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기원에 대한 물음은 종교의 풍부한 측면을 특정한 한 요소로 환원한으로써 종교를 다 설명했다는 착각을 일으킨다. 그러나 종교는 기원에 대한 한두 마디의 언급으로 모두 다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종교에 대한 정의는 기원에 대한 이해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
(2) 종교에 대한 두 가지 정의방식
종교을 정의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종교를 이해하기 위한 잠정적인 수단일 뿐이다. 따라서 모든 종교의 정의는 방법론적(heuristic휴리스틱) 차원과 전략적(strategic스트러티직) 차원에서 요청된는 것을 뿐이다. 이러한 종교정의의 방식으로는 ‘본질적 정의’ 와 ‘기능적 정의’ 두 가지가 있다.
본질적 정의 : 이 정의 방식은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란 이런 것이다’ 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멜포드 스피로(Melfford Spiro, 미국 인류학자 1929-2014) : 종교는 문화적으로 당연시되는 초자연적 존재와 상호작용하고 있는 문화적으로 이루어진 제도이다.
˙루돌프 오토(Rudolf Otto, 독일 철학자 1869-1937) : 종교란 궁극적 실재와의 만남의 경험이다. 궁극적 실재는 두려움과 매혹의 대상이다.
˙프레데릭 스트렝(F. Streng, 미국 작가 1933-1993) : 종교란 궁극적인 변형을 위한 실천적 수단이다.
탤컷 파슨즈(Talcott Parsons, 미국 사회학자 1902-1979) : 종교는 인간들이 다양한 사회에서 진화시켜 온 일련의 신앙과 실천 제도다.
˙로버트 벨라(Robert Bellah, 미국 사회학자 1927-2013) : 종교는 일련의 상징적 형태와 인간을 그 존재의 궁극적 조건과 연관시키는 행위다.
˙존 밀턴 잉거(John Milton Yinfer, 미국 사회학자 1916-2011) : 종교는 인간 공동체가 그들 삶의 궁극적 문제와 투쟁하는 수단인 신앙과 실천의 체계다.
˙롤랜드 로버트슨(Roland Robertson, 영국 사회학자 1938-) : 종교 문화는 경험적인 실재와 초경험적이고 초월적인 실재 사이의 구분에 관계된 일련의 신앙과 상징들이다. 경험적인 것의 중요성은 비경험적인 것에 종속된다.
본질적 정의들은 종교에 대해 깔끔하고 분명한 이해를 제공한다. 이들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종교라 규정되었던 것에 기초하기 때문에 역사적, 문화적으로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본질적 정의 들은 종교의 추상적 본질을 절대적인 것으로 상정함으로써 종교의 형성과정과 변형, 즉 역사적 전개과정을 설명하는 데 한계를 가진다. 본질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힘과 관계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2) 기능적 기능
종교의 기능적 기능은 ‘종교는 무엇을 하는가’. ‘종교의 기능은 무엇인가’ 라는 설명 방식을 취하는데, 뒤르켐의 정의가 대표적인 것이다. 그 외에도 많은 심리학자와 사회학자들이 이러한 정의를 계속 시도하고 있다.
토마스 루크만(Thomas Luckmann, 미국 사회학자 1927-2016 ) :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사회적 실재로서의 세계관은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따라서 세계관은 종교의 기본적 사회적 형태다. 세계관은 포괄적 의미의 체계다. 그 의미 체계 안에서 사회적으로 상관관계가 있는 시간과 공간, 인과관계, 목적이 더욱 구체적인 해석적 틀에 종속되어 있는데, 그 틀 속에서 실재는 구분되고, 구분된 것들은 서로 관계를 맺는다.
피터 버거(Peter Berger, 오스트리아 사회학자 1929-2017) : 사회적으로 성립된 규범(nomos)이 당연시될 때마다 우주(cosmos)에 내재한 근본적인 의미라고 생각되는 것과 노모스의 의미가 결합된다. 노모스와 코스모스는 동시에 연장된다. 종교란 성스러운 노모스를 설립하려는 인간의 한 기획디다. 다시 말해서 종교란 성스러운 방식으로 우주화하는 것이다.
클리포드 기어츠(Clifford Geertz, 미국 인류학자 1926-2006) : 인간은 드러난 세계뿐(속) 아니라, 드러나지 않는 세계(성)를 경험하며 산다. 드러난 세계는 드러나지 않는 세계에 의해 의미를 얻는다. 종교는 이 드러나지 않은 세계를 드러내는 상징체계다. 이 상징 체계는 강력하고, 깊이 스며들며, 지속적인 분위기(mood)와 동기(motivation)를 인간 안에 형성해 준다. 이 분위기와 동기는 인간의 실존이 일발적인 질서를 지니고 있다는 개념들을 형성한다. 이 개념드른 사실성의 후광을 지니고 나타난다.(여전히 존재하는 혼돈 속에서 나타나는 삶의 의미와 질서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사실성의 후광을 지닌 것이다. 그 사실성은 신앙에 의해서 확보된다.) 이 현실성은 독특하게 현실적이다.(그러나 이는 사실적 의미에서의 현실이 아니라 신앙에 의해 의미 있게 되는 매우 독특한 현실이다.) 결국 이러한 상징체계는 인간의 삶을 변화하게 하는 기능을 한다.
이러한 기능적 설명은 종교의 사회적 기능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사회의 다양한 현상들을 종교와 연관지워 설명할 수 있게 한다.(마르크스주의, 휴머니즘, 스포츠, 예술, 섹스, 현대 대중소비사회…). 그러나 사회가 어떤 기능적 필요요건을 가지고 있는지는 종교에 대한 이해의 합당한 출발점이 될 수 없다. 기능적 정의는 종교의 사회적 기능을 요구하며 그 기능 중 일부는 특별히 종교에 의해 완성된다는 순환논법에 기초하고 있다. 즉 종교라고 정의된 것으로 종교의 사회적 기능을 설명하는 것일 뿐이다. 기능적인 종교 정의는 본질적 종교 정의가 설명하는 바 종교의 속성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한다.
결국 본질적 정의와 기능적 정의는 종교에 대한 이해를 위한 하나의 출발점이 될 뿐이며 그 어떤 정의도 완전한 것은 없다. 모든 정의는 종교를 묻기 위한 잠정적인 출발점일 뿐이다. 하지만 그것이 없이는 종교를 물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따라서 종교 정의는 특정한 종교 현상에 대해 묻고 이해하고자 할 때 나름대로 구성해야 하는 것이지, 이것이 정답이라고 따를 만한 어떤 모범이 있는 것은 아니다.
3. 종교 개념의 역사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는 어떤 기능을 하는가?’ 라는 질문이 종교를 이해하는 적절한 물음이 될 수 없다면, 질문의 방식을 바꿔야 한다. 이 경우 질문은 첫째, 지금 사용하는 ‘종교’ 라는 단어가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쓰이기 시작했는가, 둘째, ‘종교란 무엇인가’ 가 아니라 ‘도대체 사람들이 무엇을 일컬어 종교라 하는가’ 로 바꾸어야 할 것이자.
(1) 종교개념의 기원과 역사
‘종교(religion 릴리전)’ 라는 단어는 확장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주체들에 의해 끊임없이 재규정되고 폐기되고 변화해 온 것이다. 또 이는 다양한 집단들이 나름대로의 분류 기준을 대상들에게 적용함으로써 이루어져 온 것이다. 따라서 ‘종교’ 자체를 이해하고자 할 때는 ‘종교’ 라는 단어가 출현한 역사적 맥락을 밝히고 그 의미가 젼해온 역사적 과정을 살펴보아야 한다.
종교라는 단어의 어원은 라틴어 ‘religio’ 유래한다. 인도와 유럽에서 사용되는 언어에는 해당하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데, 이는 고대에 종교가 사회의 다른 영역과 분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religio’ 의 어원은
① 신에 대한 숭배행위에서 나타나는 ‘망설임, 삼가함’, 두려움’ 을 의하는 religere 릴라이거(반복, 음미, 정돈, 신앙심 깊은)
➁ 인간을 신에게 묶어 주는 경건한 결함을 의미하는 religare 릴리거(다시 결합하다, 종교상의)
이 두가지로 나뉜다. 이를 종교경험에서의 주체와 객체의 관계에서 보면. ②는 대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서 경건의 객관성을 강조하며, ①은 대상을 숭배하는 신자의 주관적 태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지금 우리가 상용하고 있는 종교 개념의 역사는 C.E. 4세기 이후 서구에서 제도 기독교가 성립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4세기 로마의 황제국가와 기독교가 결합하여 로마카톨릭이 형성되고, 이는 바로 초기의 지하 신앙공동체로부터 공식적이고 집단적인, 심지어는 국가적인 기독교 공동체(ecclesia 에클레시아, 부름받은 자들의 모인, 교회) 로의 전이를 의미했다. 이로부터 ‘religio’ 라는 개념은 기독교 신앙공동체 내부의 종교적 규율, 제의적 실천방식, 신자의 준수 사항을 가르키는 것이 되었다. 이렇게 규정된 religio는 참된 가르침의 의미를 갖게 되며 여기에는 기독교만이 포함된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 이해를 뒷받침하는 권위는 나름 아닌 로마 가톨릭 교회였다. 여기서 다름 종교들은 이교도(異敎, paganism 퍼이거니즘)로 규정되고 ‘religio’ 의 영역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이러한 종교 이해는 로마 카톨릭이 지배하던 종세 내내 유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는 지리상의 발견에 따른 ‘타자의 발견’ 과 르레상스에서의 합리주의, 그리고 이의 한 결과물인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17,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러 근본적으로 수정된다.
C.E(common era)/ B.C.E(bofore common era)
이 연대 표기법은 세계종교사를 서술하는 서구 종교학자들 사이에 널리 쓰이고 있다. 이는 이전의 B.C (before Christ), A.D (anno Domini, in the year od our Load) 라는 기독교 중심적인이라는 자각과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기독교적인 틀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 아니기에 보다 전세계적인 연대 표기법인 세계의 모든 역법(calenda)에 대한 객관적인 검토 이후 다시 정립되어야 할 것이다.
우선 타자(신대륙과 종족, 문화, 종교)와 만남으로 인해 ‘종교’는 기독교 공동체의 교리나 규울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좀더 보편적인 개념으로 확장한다. 이제 ‘religio’ 는 그에 속하는 많은 현상들을 포괄하는 보편적 범주가 된다. 그리고 기독교는 그 일부에 불과하게 된다. 이는 ‘religio’ 가 기독교적으로가 아니라 ‘인간적’ 으로 이해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즉 이제 기독교는 새롭게 출현한 ‘religio’ 이라는 유(類무리유) 속의 한 종(種)이 된 것이다. 타자의 발견은 유럽 인의 종교인 기독교를 보편적인 종교의 일부로 재편성하게 했던 것이다.
다음으로 합리성의 개념은 이성, 합리성의 잣대로 ‘종교’를 인간의 합리성이 전개되어 가는 과정의 한 단계에 위치한 것으로 보게 만들었으며,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들을 합리에 반대되는 ‘비합리의 영역’으로 묶게 만들었다. 즉 합리성은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형성된 종교의 범주를 더욱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이렇게 종교가 보편적인 범주로 설정된 후에, 이제 거기에 다시금 ‘진보’의 개념이 결합한다. 그리하여 인종 간에 진보의 정도에 따라 위계질서가 매겨지듯이 종교 간에도 이른바 진보의 원칙에 따라 위계질서가 매겨진다.
많은 종교 기원론들은 이러한 시각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런한 위계질서 아래서 결국 기독교, 특히 개신교는 또다시 정점에 배치된다. 이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서구인들이 생각하는 진보의 기준에 가장 접근한 것이 바로 그들의 종교인 기독교(개신교)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기독교야말로 합리적이며 진보한 사회의 상징인 근대 자본주의에 가장 적합한 종교라고 여겼다. 두 번째는 개신교가 발견한 개인의 내면을 가장 적합하게 발현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라는 생각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근대의 대표적 신학자인 슈라이허마허(Schleiermacher) 같은 신학자가 종교의 본질을 인간의 내적 경험에서 찾으려 한 시도 등에 의해 더욱 힘을 얻었다.
17, 18세기의 ‘종교’ 개념은 이전 시기의 기독교 중심적인 이해에서 벗어나 보편적인 종교 범주로서 재형성되었지만, 이는 결국 서구 중심적이고 백인남성 우월주의적인 타자 인식에 의해 종교 간의 서열화를 동반하는 것이다. 이 과장에서 기독교는 비록 인간의 합리적 영역에서 배제되기는 했지만, 이른바 ‘비합리와 감정의 영역’ 에 그 토대를 든든히 두면서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우월한 종교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계몽주의보다 더 긴 뿌리를 갖는 기독교의 유일신로적 전통이 결합되어 지금의 서구적 종교 개념이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종교 이해는 사실상 오늘날까지도 서구 사회의 지배적인 틀거리로 작동하고 있으며, 이것은 서구 제국주의의 팽창을 타고, 기독교의 세계 선교붐을 타고 수많은 비서구 사회로 퍼져 나갔다. 19세기 중반 이후 서구에게 문호를 개방한 일본, 중국, 한국에도 스며들었던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종교라는 개념은 이러한 서구 역사와 그 팽창사의 맥락 속에서 형성되고 우리에게 받아들여진 것이다.
(2) 동아시아에서의 종교 개념의 수용
동아시아에서는 ‘종교’라는 개념의 단어가 없었다. 단지 교(敎), 학(學), 도(道), 법(法), 예(禮) 등의 언어가 이에 상응하는 의미로 쓰여왔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서구문물의 유입과정에서 ‘정교분리(政敎分離)’ 등의 단어를 번역하면서 종교라는 말이 만들어졌다. 동아시아 한・중・일 3국 중에서 가장 먼저 ‘종교’라는 단어를 만든 곳은 일본이다. 일본 학자들은 1860년대 후반 명치기에 독일 헌벚 중의 정교분리 조항을 번역하면서 ‘religion’ 이라는 용어를 불교경전인 <능가경> 중의 한 구절을 따서 ‘종교(宗敎)’ 라는 단어로 번역했다.
처음에는 ‘기독교’ 만을 가리키는 것이었지만 점차 어떤 한 종교만이 ‘참된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가 동질적인 것’ 이라는 관념이 성립되면서 보편적인 ‘종교’ 라는 개념이 성립되어ㅛ다. 중국도 19세기 말까지 ‘종교’ 라는 단어도 개념도 없었으나 서구의 근대적 지식체계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일본의 ‘종교’ 라는 단어를 수입하여 같은 맥락으로 사용되었다.
우리 나라의 경우도 일본을 통해 서구의 새로운 근대 학문과 지식체계가 들어오면서 종교라는 일본식 조어를 받아들여 사용하기 시작했다. 종교라는 단어가 처음 쓰인 사례는 1883년 <한성일보> 기사로 알려졌다. 여기서는 기독교, 도교, 유교, 불교. 유대교, 회교 등을 언급하기 위해 종교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이후 ‘종교’ 라는 단어는 다양한 종교 현상들을 지칭하는 보편적인 개념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형성된 ‘종교’ 개념은 당시 한국 사회가 직면하고 있던 두가지 과제 즉 서구의 모델을 따라 문명화를 이룩하는 것 그리고 민족의 독립을 유지하는 것, 이 두 원칙에 따라 그 사용방식이나 함의도 달랐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 중 대표적인 4가지 사례를 보면,
① 서구가 발달한 것은 비합리적인 종교의 속박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므로 종교를 없애야 한다는 반종교적 개념.
② 종교의 보편적 존재 근거를 인정하지만 이를 공적 영역이 아니라 사적인 영역, 즉 비합리적인 측면에 해당하는 간주하는 이신론적 개념(理神論的)
③ 서구의 부강의 원인을 종교, 특히 기독교에서 찾음으로써 기독교 이외의 다른 종교들을 미신이나 우상숭배로 간주하는 문명기호적(文明記號的)개념(이는 대부분 개신교 선교사들의 입장이며, 이의 세례를 받은 국내 기독교 신자나 학자 및 근대화론자들의 경우에도 해당한다.)
④ 기독교 이외의 종교들도 포함하여, 사회를 유지하고 사람들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존재로서 종교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인민교화적 개념(그러나 이미 매우 세력이 미미했으며, 현대의 문화적 다원주의나 종교다원주의와도 맥락을 달리 한다.
이런한 입장들은 서로 뒤섞이면서 개항기 우리 사회의 ‘종교’ 이해를 형성해 왔다. 그러나 개항 이래 현재까지 우리 사회에서는 세번째의 문명기호적 입장이 가장 성행했으며, 오늘날도 종교 간의 갈등이나 분쟁을 낳은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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