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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경전

유마경(維摩經)

by 파장波長 2024. 2. 13.

심청정 국토청정

보적아,
만약 보살이 청정한 국토를 얻으려거든 
먼저 그 마음을 청정히 가져야 한다.
그 마음이 청정하면 국토가 청정해지느니라. 
중생이 업장으로 인해 여래의 국토가 청정하게
장엄된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일 뿐,
그것이 여래의 허물은 아니다.
나의 국토는 청정하건만 다만 네가 보지 못할 뿐이다.

내 마음이 청정하면 온 국토가 청정하다. 내 마음이 오염될 때 국토도 오염된다. 내 마음이 청정하면 온 우주 일체만유가 일시에 청정하지만, 내 마음이 오염되면 온 우주법계 전체가 어둡다. 

이 우주법계는 본래 청정하여 한 치도 오염됨이 없지만, 중생이 스스로 망상분별이라는 오염된 필터로 세상과 국토를 바라보기에 국토가 오염된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러니 깨달은 자의 눈에 국토는 언제나 청정하다. 다만 중생이 보지 못할 뿐.

보살의 병 중생의 병

인간은 무명과 삶에 대한 욕망 때문에 병에 걸리는 것이며 나도 또한 그렇습니다. 만약 일체중생의 병이 없어진다면 내 병도 없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살은 중생을 위하여 생사에 들어 가는 것이요, 생사가 있으면 병도 있습니다. 만약 중생이 병을 여의면 보살도 병이 없을 것입니다.

마치 아들이 병을 얻으면 부모도 병이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보살도 이와 같이 모든 중생들을 아들처럼 사랑합니다.

중생에게는 생사가 있지만 보살에게는 생사가 없다. 언제나 무생법인(無生法忍)이며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다만 보살은 중생을 위한 자비심으로 인해 생사에 들어간다. 그러니 생사가 있는 까닭에 병도 있다. 중생이 있는 까닭에 보살이 있고, 중생이 병들어 있는 까닭에 보살도 병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중생과 보살은 둘이 아니다. 보살은 병에 걸렸지만 사실은 병에 걸리지 않았다. 다만 방편으로 중생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동사섭(同事攝)하여 중생의 모습, 아픈 모습을 나툴 뿐이다.

불이법문(不二法門)

유마가 여러 보살에게 물었다.
“보살이 어떻게 상대적 차별을 끊고 절대 평등한 불이법문 (不二法門)에 들어가는지 설해 주십시오.” 

법자재보살이 말했다.
“생겨나는 것(生)과 멸하는 것(滅)은 서로 둘로 대립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존재하는 것은 본래 생한 것이 아니므로 멸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체득하는 것이 불이 법문에 드는 것입니다.”

불사보살이 말했다.
“선(善)과 불선(不善)은 서로 대립합니다. 그러나 만약 선과 불선에 집착하지 않고 평등하며 진실한 공(초)의 도리를 깨닫는다면 바로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드는 것입니다.”

보수보살은 말했다.
“자아와 무아(無我)는 서로 대립합니다. 그러나 영원히 변치 않는 실체적 자아도 알 수 없는데 어찌 무아(無我)가 인지 될 수 있겠습니까? 자아의 본래 모습을 보는 사람은 이 2가지 생각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이것이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드는 것 입니다.”

희견보살은 말했다.
“색(色)과 그 색이 공함(色空)은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색 그대로가 공한 것으로써 색이 멸하여 공이 된 것이 아닙니다. 색의 본성이 공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느낌(受), 생각(想), 의지(行), 의식(識)도 그대로가 공합니다. 식(識) 그대로가 공한 것이지 식이 멸했기 때문에 공한 것은 아닙니다. 식의 본성이 그대로 공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체득하는 것이 불이법문에 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수많은 보살들이 제각기 자신의 견해를 설했다. 유마힐이 문수보살에게 다시 물었다.
“어떻게 하면 보살은 절대평등의 불이법문에 들 수 있습니까?”

 문수사리가 대답했다.
“제가 생각하건대 모든 것에 있어서 말이 없고, 설함도 없으며, 가리키는 일도, 인지(認知)하는 일도 없으며, 모든 질문과 대답을 떠나는 것이 절대 평등한 경지에 드는 것입니다.”

그때 문수사리가 유마힐에게 말했다.
“지금까지 여러 보살들이 자기의 견해를 말했습니다. 거사께서 말씀해주실 차례입니다. 어떻게 하면 보살은 절대 평등한 경지에 드는 것입니까?”

그러나 유마힐은 오직 묵연(默然)하여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문수사리는 감탄하여 말했다.
“참으로 훌륭합니다. 문자도 언어도 없는 것이야말로 진실로 불이법문에 드는 길입니다.”
이와 같이 절대평등의 불이법문에 드는 가르침이 설해졌을 때 이곳에 모인 5천의 보살이 모두 불이법문에 들었으며 무생법인 (無生法忍)을 얻었다.

참된 불이법(不二法)은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 말로 표현되는 순간 그것은 둘로 셋으로 쪼개어지고, 개념화되기 때문이다. 둘이 아닐 때는 그 어떤 것도 생겨나지 않고, 붙을 것이 없다. 그저 텅 비어 고요할 뿐.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라고 말하더라도 이미 거기에는 생사와 열반을 전제로 그것이 없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니 벌써 그 말은 둘로 나뉘어져 있다.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야.’라는 말 안에 이미 생사가 있고 열반이 있다. 참으로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님을 설하려면 ‘생사’ 라는 말, ‘열반’이란 말조차 붙을 자리가 없어야 한다. 그저 침묵할 뿐. 개념 지어 말로써 설명하게 되면 이미 둘로 나뉘는 것이다. 

문자도 언어도 없는 것이야말로 진실로 불이에 드는 길이다.

직심이 보살정토

보적아, 마땅히 알라. 곧은 마음(直心)이 곧 보살의 정토이니 보살이 성불하였을 때 굽은 마음이 없는 중생이 그 나라에 와서 태어나며, 깊은 마음(深心)이 보살의 정토이니 보살이 성불하였을 때 공덕을 구족한 중생이 그 나라에 와서 태어난다. 보리심(菩提心)이 보살정토이니 보살이 성불하였을 때 대승의 중생들이 와서 태어난다.

생각으로 헤아려서 한 번 걸러서 이해된 마음은 직심이 아니다. 직심(直心), 즉 곧은 마음이란 생각과 분별로 걸러지지 않은, 곧장 바로 이 마음이다. 분별하지 않을 때 곧장 바로 이 마음이다.

곧장 바로 이 마음이면 곧 보살의 마음이요, 보살의 정토요, 본래 청정한 깨달음의 자리다. 생각과 분별망상은 얕은 마음이지만, 생각과 분별의 파도가 잔잔해지면 그 안의 깊은 마음, 본래 청정한 마음이 드러 난다. 보리심, 깨달음에 대한 간절한 발심이야말로 보살의 정토요, 본래 청정한 마음이다.

본래 죄가 없다

세존께서 우파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유마힐을 찾아가서 문병하라.” 
그때 우파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기억하건대, 과거 한때에 두 명의 비구가 계(戒)를 어기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깊어 감히 부처님을 찾아뵙지 못하고, 저에게 찾아와 저의 발에 머리를 조아리고는 말했습니다.
“우파리시여, 지금 저희들은 계율을 많이 어겨 참으로 부끄러워 부처님을 감히 찾아뵙지 못하겠습니다. 원컨대 우파리님께서 저희의 근심과 후회를 풀어 주셔서 이 허물에서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이에 저는 곧 그들에게 여법하게 설명해주어 근심과 후회를 제거하고 허물을 깨끗이 없애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때 유마힐이 그곳으로 와서 저의 발에 머리 숙여 절하고는 말했습니다.

“여보세요, 우파리님. 이 두 비구의 죄를 더욱 두텁게 만들지 마십시오. 마땅히 곧장 근심과 후회를 제거하여, 계율을 범한 허물이 그들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죄의 자성은 안에 있지 않고 밖에도 있지 않으며 그 둘 사이에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처럼 마음에 때가 끼었기에 중생이 때가 있는 것이고, 마음이 깨끗하면 중생이 깨끗 합니다. 이처럼 마음 역시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있는 것도 아니고 중간에 있는 것도 아닌 것처럼 죄의 본성도 그러합니다. 또한 모든 법이 그러하여 진여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우파리님, 망상이 바로 때이고, 망상 없는 것이 깨끗한 것이며, 제정신을 바로 갖지 못한 것이 때이고, 나에 집착하지 않으면 깨끗한 것입니다.

우파리님, 모든 법이 나고 없어지고 하여 잠깐도 머물지 않는 것이 요술과 같고 번개와 같고, 모든 법이 모두 허망한 것이어서 마치 꿈과 거울 속에 나타나는 형상과 같으니 다 허망한 생각으로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줄 바로 아는 것이 바로 계율을 잘 지니는 것이며, 이런 줄을 아는 이가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나이다.”

죄가 있으니 참회해야 한다고? 죄가 있다는 것은 하나의 생각일 뿐이다.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마음의 분별일 뿐이다. 죄가 있다면 그 죄는 내 안에 있을까? 밖에 있을까? 도대체 죄는 어디에 숨어 있단 말인가?

죄의 본성은 어디에도 없다. 죄의식이란 허망한 착각이 사라지면 죄 또한 본래 없다. 죄는 스스로의 자성이 없어 마음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허망한 생각으로 인해 생기는 것일 뿐이다.

이처럼 죄의 참된 본성을 바로 보는 것이 참된 참회이지, 절을 하고, 염불하고, 독경하면서 죄목을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참회하려고 애쓰는 것이 참된 참회가 아니다.

악도가 곧 최상의 길

문수사리가 유마힐에게 물었다.
“보살은 어떻게 모든 불법에서 최상의 길에 도달합니까?”

유마힐이 말했다.
“만약 모든 보살이 악도(惡道)로 간다면, 곧 불법에서 최상의 길에 도달합니다.”

문수사리가 말했다.
“보살은 어떻게 악도로 갑니까?”

유마힐이 말했다.
“만약 모든 보살이 설사 오무간(五無間)의 길을 가더라도, 분노하거나 고뇌하거나 해를 끼치려는 악독한 마음이 없다면, 
설사 지옥의 길을 가더라도, 모든 더러운 티끌 같은 번뇌로 부터 벗어나 있다면, 

설사 모든 축생(畜生)의 길을 가더라도, 모든 깜깜한 무명(無明)에서 벗어나 있다면,

설사 탐내는 행위와 욕심내는 행위의 길을 가는 모습을 보여 주더라도 물질에 대한 모든 욕심 속에서 모든 오염과 집착에서 벗어나 있다면,

설사 성내고 화내는 행위의 길을 가는 모습을 보여 주더라도 모든 중생의 경계 속에서 모든 분노와 성냄을 벗어나 손해를 끼치려는 마음이 없다면,

설사 어리석은 행위의 길을 가는 모습을 보여주더라도, 모든 법에서 모든 깜깜한 무명(無明)에서 멀리 벗어나 지혜의 밝음을 가지고 스스로 조복시킨다면…

설사 눈을 부릅뜨고 분노하는 행위의 길을 가는 모습을 보여 주더라도, 마침내 자비심 (慈悲心)에 편안히 머물러 성내는 번뇌가 없을 수 있다면,

설사 게으른 행위의 길을 가는 모습을 보여 주더라도, 온갖 선근(善根)을 부지런히 익히며 정진(精進)하여 쉬지 않을 수 있다면, 설사 육근(六根)이 혼란한 행위의 길을 가는 모습을 보여주더라도, 늘 고요히 침묵하면서 선정(禪定)에 편안히 머물러 있다면…

설사 세간의 온갖 번뇌에 싸인 행위의 길을 가는 모습을 보여 주더라도, 본성이 깨끗하여 마침내 더럽게 물듦이 없다면,

설사 여러 가지 마구니의 삿된 행위의 길을 가는 모습을 보여 주더라도, 모든 불법에서 지혜를 깨달아 스스로의 깨달음으로 알아서 다른 인연을 따라가지 않는다면…

설사 비천하게 태어나는 길에 머무는 모습을 보여 주더라도, 부처님 집안에 태어난 것처럼 존귀하고 뛰어난 복과 지혜의 양식을 쌓아 올린다면…

설사 모든 늙음과 질병의 길에 머무는 모습을 보여주더라도, 마침내 늙음과 질병의 뿌리를 제거하고 모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뛰어넘을 수 있다면,

설사 재물과 지위를 구하는 길에 머무는 모습을 보여 주더라도, 무상(無常)을 관찰하는 것을 많이 실천하여 익숙하게 되고 모든 희망과 구함을 쉴 것을 생각한다면,

설사 궁실에서 기녀들과 온갖 즐거움을 즐기는 길에 머무는 모습을 보여 주더라도, 늘 온갖 애욕의 진흙탕에서 빠져나와 끝내 멀리 벗어나는 행위를 익힌다면,

설사 온갖 우매하고 간사한 길에 머무는 모습을 보여 주더라도, 여러 가지 재치 있는 말솜씨로 꾸미고서 다라니(陀羅尼)를 염송(念誦)하는 지혜를 얻어 잃지 않는다면,

설사 온갖 사도(邪道)의 길에 머무는 모습을 보여 주더라도, 모든 육도사생의 삶을 진실로 영원히 끊었다면,

설사 반열반(般涅槃)의 길에 머무는 모습을 보여주더라도, 이어지는 생사윤회(生死輪廻)를 늘 버리지 않는다면,

설사 묘한 깨달음을 얻어 큰 법의 바퀴를 굴리고 열반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 주더라도, 다시 모든 보살의 행위를 부지런히 닦음이 끊임없이 이어진다면,

여보세요, 문수사리시여.
보살이 이와 같이 악도(惡道)로 간다면, 모든 불법에서 마지막 길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악도가 따로 있고 선도가 따로 있지 않다. 선악 자체가 공하여 따로 있지 않다. 깨달음, 불성, 참성품은 지옥에는 없고 천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지옥에만 가거나 천상에만 갈 수는 없다. 그런 어떤 ‘곳’은 따로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로지 있는 곳이라고는 ‘여기’밖에 없다. 지금 이 자리를 분별하면 어떤 이는 천상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지옥이라고 여길 뿐이다. 그러니 보살은 중생이 악도라고 여기는 곳에 도달할지라도 보살에게 그곳은 더 이상 악도가 아니다. 중생에게만 악도일 뿐, 보살에게는 평등한 법계일 뿐이다. 이처럼 악도와 선도가 차별이 없어진다면 그 자리가 모든 불법에서 최상의 길이요, 마지막 길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선불교 관련 경구들

사리불이여, 앉아 있다고 해서 좌선이라 하지는 않습니다. 무릇 좌선이란 삼계에 몸과 마음을 나타내지 않는 것입니다.... 도법(道法)을 버리지 않고 범부의 일을 나타내는 것이 좌선입니다. 마음이 안에도 머물지 않고 밖에도 머물지 않는 것이 좌선입니다. 온갖 소견에도 움직이지 않고 37조도품(三十七助道品)을 수행하는 것이 좌선입니다. 번뇌를 끊지 않고 열반에 드는 것이 좌선입니다. 이처럼 좌선하는 사람이라야 부처님이 인가할 것입니다….

번뇌의 바다에 들어가지 않으면 일체지의 보물을 얻을 수 없다.

이 『유마경』의 가르침은 이후 중국 선불교에서 매우 주목받았다. 육조 혜능은 ‘만약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 것을 옳다고 여긴다면, 이것은 숲속에서 좌선하고 있던 사리불이 유마힐에게 받은 질책과 마찬가지 일 것이다’라고 했다.

또한 번뇌의 바다에 들어가지 않으면 일체지의 보물을 얻을 수 없다는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의 가르침은 중국 남조선과 대혜의 간화선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법상스님 불교 경전과 마음공부 글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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