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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경전

법화경(法華經)

by 파장波長 2024. 2. 14.

일불승 一佛乘

사리불이여, 부처님은 오로지 일불승(一佛乘)으로 중생들에게 법을 설하실 뿐, 다른 승인 이승(乘)이나 삼승(三乘)은 진실로 있는 것이 아니니라.…

사리불이여, 그대들은 마땅히 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믿으며 이해하고 받아 지니도록 하라. 모든 부처님의 말씀에는 허망함이 없느니라. 다른 승(乘)은 참된 것이 아니며 오직 일불승뿐이니라.

사리불이여, 과거의… 미래의… 현재의 백천만억 불국토의 모든 부처님께서 갖가지 방편과 인연과 비유로써 중생을 위하여 여러 가지 법을 설하셨으니, 이러한 법이 모두 일불승으로 이끌기 위한 것이었다. 중생들은 부처님으로부터 이러한 법을 듣고는 마침내 모든 지혜의 씨앗을 얻게 되었노라.

모든 중생이 수많은 욕심과 집착이 있음을 알기 때문에 그들 각자의 근기에 따라 알맞은 여러 가지 인연과 비유와 방편으로 법을 설한다. 사리불이여, 이렇게 함은 모두 일불승의 모든 지혜의 씨앗을 얻게 하려는 것이니라. 사리불아, 시방세계에는 이승도 없거늘 어찌 삼승이 있겠는가.

다만 여래는 방편의 힘을 빌려 일불승의 본래 가르침을 삼승으로 분별하여 연설하셨을 뿐이니라.

시방세계에는 오직 일승법만 있을 뿐 이승이나 삼승은 없느니라. 그러나 오직 부처님이 방편으로 설하신 것은 예외이니, 다만 삼승이라는 이름을 빌려서 중생들을 이끌고자 한 것이니 부처님의 지혜를 말씀하기 위한 까닭이니라.

불교의 가르침에는 수많은 방편이 있다. 아니, 말로 표현되고, 입만 열면 그것은 전부 다 방편 아닌 것이 없다. 참된 진실은 말로 표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그 말로 표현될 수 없는 참된 진실, 참된 하나의 부처 그것을 『법화경』에서는 일불승(一佛乘)이라고 표현한다.

그동안 불법에서는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 등 다양한 방편의 가르침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설해 왔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결국 일불승이라는 참된 진실로 이끌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이다.

염불, 절, 독경, 진언, 사경, 위빠사나, 간화선 등 수많은 수행법은 결국 부처가 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일 뿐, 그 방편이 진실인 것은 아니다. 방편은 전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지 달 그 자체는 아니지 않은가. 

수많은 방편이라는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킬 때 우리는 달 그 자체, 일불승 그 자체라는 낙처(落處)를 바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제 방편이 옳으니 그르니, 좋으니 나쁘니를 시비하던 수준을 넘어 그 모든 방편이 가리키는 귀결점(歸結點)이 어딘지를 보아야 할 때다. 그 하나의 낙처, 귀결점, 달이 바로 일불승이다.

개시오입(開示悟入)

사리불이여, 무엇을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으로 세상에 출현한다고 하는 것인가?

부처님께서는 중생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견을 열어서(聞) 청정함을 얻게 하고자 세상에 출현하시며, 중생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견을 보여주고자(示) 출현하시고, 중생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견을 깨닫게 하고자(悟) 출현하시며, 중생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견에 들어가게 하고자(入) 세상에 출현하신다. 

사리불아, 바로 이것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일대사인연으로 세상에 나오신다.

일체 모든 행하는 바는 항상 일대사인연으로 오직 부처님의 지견을 중생에게 열어 보이고 깨닫게 하는 것이니라.

부처님은 일대사인연으로 이 세상에 출현하셨다. 우리들 또한 이 공부를 일생일대에 가장 중요한 인연이요, 사건으로 알고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공부로 삼아야 한다.

부처님은 일체 모든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지견을 열어서 보여주고, 깨닫게 하고, 불지견에 직접 들어가 맛보게 하기 위해 일대사인연으로 세상에 나오신 것이다.

불지견, 법, 진리란 지금 여기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것이기에 초기경전에서부터 ‘이 법은 직접 와서 보라’고 설하고 있다. 이미 있는 법을 중생들이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부처님께서 개시오입의 뜻으로 법을 펴신 것이다.

부처님께서 출현하신 것은 오로지 이 법을 열어서 보여주고 깨닫게 하고 직접 법 안으로 들어가 법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인연으로 오 신 것이다.

법화경 사구게

눈앞에 보이는 일체 사물이 그대로 본래부터 열반의 모습이다. 불자가 삶 속에서 도를 실천하면 오는 세상에 부처를 이루리라.

일체 제법이 본래부터 항상 적멸상(寂滅相)이다. 눈앞에 보이는 일체 모든 것들이 그대로 본래부터 열반이요 깨달음의 모습이다. 다만 중생이 본래부터 드러나 있는 진리를 보지 않고, 생각과 망상 속에 허망한 꿈과 같은 세계를 구축해 놓고는 그 속에 빠져들어 자신이 만들어낸 허망한 식(識)의 세계를 살고 있기 때문에 불법을 보지 못할 뿐이다. 참된 불자라면 삶 속에서 이 불법의 도를 실천함으로써 오는 세상에서는 망상의 세계 대신 적멸한 부처님의 세계를 살아야 한다. 부처를 이루어야 한다.

법사

약왕이여, 만약 법사(法師)가 여래가 열반한 뒤에 사부대중을 위해 이『법화경』을 설하고자 할 때는 어떻게 설해야 할 것인가? 

약왕이여, 법사는 여래(如來)의 방에 들어가 여래의 옷을 입고 여래의 자리에 앉아 사부대중을 위해 이 경을 설해야 할지니, 여래의 방은 대자비심이요, 여래의 옷은 인욕이며, 여래의 자리는 온갖 것이 공(空)하다는 도리이다. 이러함 가운데 게으름 없이 여러 보살과 사부대중을 위해 널리 이 『법화경』을 설법하라. 

약왕이여, 내가 다른 곳에 있는 사람들을 보내어 그를 위해 법을 청하는 대중을 모이게 할 것이고, 또한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들을 보내어 그 설법을 듣게 할 것이니, 이 모든 사람들은 이 법을 듣고 믿어 지니며 이를 거역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법사가 고요한 곳에 있더라도 내가 하늘, 용, 귀신, 건달바, 아수라 등을 보내어 그의 설법을 듣게 하리라.

법사를 가까이하면 보살도를 빨리 얻고, 법사를 따라 배우면 많은 부처를 가까이하게 되리라.

법을 설하는 선지식에 대한 중요성은 초기 경전 이래로 계속되어 오는 중요한 주제다. 바른 선지식은 곧 깨달음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법화경』에서는 이 경을 설하는 선지식을 법사로 표현한다.

법을 설하는 법사는 여래의 방에 들어가 여래의 옷을 입고 여래의 자리에 앉아 이 경을 설해야 한다. 중생을 향한 대자비심의 방에 들어가, 중생들이 설법을 듣던 듣지 않던, 깨닫던 깨닫지 못하던, 온갖 근기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참고 참으며 인욕의 옷을 입고 법을 설해야 한다. 

법을 설하는 법사는 언제나 여래의 자리에 굳건히 앉아 있어야 하니 여래의 자리는 곧 일체법이 전부 공하다는 도리다. 바른 법을 설하는 법사에게 여래는 법이 필요한 대중들을 모이게 한다. 바른 법이 있는 곳에는 유유상종으로 바른 가르침을 믿고 듣고자 하는 중생들이 모이기 마련이다. 법사를 가까이하면 보살도를 빨리 얻고, 법사를 따라 배우면 머지않아 부처를 가까이하게 되리라.

만선 성불사상

아이들이 장난으로 모래로 불탑을 만들더라도 그들 모두 성불 하였느니라.

만약 어떤 사람이 불상을 조성하거나 불상의 여러 모양들을 조각한 이들도 모두 성불하였느니라. 칠보나 황동, 함석이나 납, 주석, 철, 나무, 진흙, 아교, 옻칠, 천으로 불상을 조성한 이들도 모두 이미 성불하였느니라. 채색으로 불상을 그리거나, 장엄한 화를 만들 때 제가 스스로 하거나 남을 시켜 하더라도 이들 모두 이미 성불하였노라.

아이들이 소꿉장난으로 나뭇가지나 붓이나 손톱으로 불상을 그린다 해도 이 같은 공덕이 점차 쌓이고 큰 자비심이 갖추어져 결국 이들도 모두 성불하였으며, 보살이 되어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하였느니라.

어떤 사람이 탑이나 불상, 탱화에 꽃과 향과 깃발과 일산으로써 공양 공경하거나, 남을 시켜 풍악을 울리고 북치고 거문고와 징과 요령 등으로 아름다운 음악을 불전에 공양하였거나, 환희로운 마음으로 찬불의 노래를 불렀거나, 내지는 아주 작은 음성으로 공양하였더라도 이들은 모두 성불하였느니라.…
 
어떤 사람이 절을 한 번 하거나, 합장만 한 번 하거나, 머리만 조금 숙여 불전에 공양하더라도 천상의 도를 이루고 일체 중생을 제도하게 되느니라.

또 어떤 사람이 산란한 마음으로라도 탑에 들어가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南無佛)’ 하고 염불 한 번 하더라도 모두 다 이미 성불하였느니라.

또 어떤 사람이 산란한 마음으로라도 탑에 들어가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南無佛)’ 하고 염불 한 번 하더라도 모두 다 이미 성불하였느니라.

부처님이 생존해 계실 때나 열반에 드신 뒤에라도 부처님의 법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다 이미 성불하였느니라.

불법을 공부하다 보면 ‘과연 내가 깨달을 수 있을까?’, '너무 어려우니 내가 갈 길이 아니구나’ 하고 포기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이 공부는 훈습(薰習)하는 공부다. 아무리 작은 공부라고 할지라도 그 공부가 향내음처럼 은은하게 익숙해져 가다 보면 저절로 공부 근기가 높아지고, 자신의 본래의 면목을 보게 되는 깨달음의 인연이 생겨나게 된다. 『법화경』에서는 이를 만선성불사상(萬善成佛思想)이라고 하여, 아이들이 소꿉장난하듯이 부처님을 그리기만 해도, 불전에 공양올리기만 해도, 머리 숙여 합장하고, 절을 하기만 해도, ‘부처님께 귀의합니다’라고 말하기만 하더라도, 그 공덕이 쌓여 결국에는 성불하게 됨을 설하고 있다.

모르더라도 꾸준히 법당에 나가 법문을 들어 보라. 어렵더라도 꾸준 경전이며 불서를 가까이해 보라. 도반과 스님과 불법을 찬탄하고, 존귀하게 늘 가까이하라. 그것이 쌓이고 쌓여 만선공덕이 무르익으면 깨달음의 시절인연이 도래할 것이다.

구원실성의 본래부처

선남자들아, 나는 백천만억 나유타 아승지겁 전에 이미 성불 했느니라.…

성불한 이후로부터 나는 이 사바세계에 항상 있으면서 중생들에게 법을 설하여 교화했느니라. 또 다른 세계의 백천만억 나유타 아승지 국토에서도 중생을 교화하였느니라.

선남자들이여, 이렇게 교화하는 중에 나는 연등불에게서 법을 얻었다고도 말하였고 또 거기에서 열반에 들었다고도 말하였으나 이런 것은 다 방편으로 분별하여 설한 것일 뿐이었다.…

선남자들아, 나는 중생들이 낮은 수준의 방편법을 좋아하여 박복하고 업이 무거운 이들을 위하여 방편으로 '나는 젊어서 출가해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성불한 것은 매우 오래전의 일이다. 다만 방편으로 중생들을 위하여 교화하고, 불법에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한 것일 뿐이다.…

이처럼 내가 성불한 지는 매우 오래되어 수명이 한량없는 아승지겁 동안 항상 머물러 있어서 멸함이 없다. 선남자들아, 나의 수명은 아직도 다하지 아니하여 앞에서 설명한 수명의 몇 배가 되느니라. 그러니 부처는 근원에서 열반하는 것이 아니지만, 짐짓 말하기를 마땅히 열반한다고 하는 것은 여래가 방편으로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함이다.

왜 그런가 하면, 만약 부처님께서 세상에 오래 머문다고 하면 박복한 사람들은 선근을 심지도 않고, 빈궁하고 하천하면서도 오욕락을 탐하고, 생각과 허망한 소견의 그물에 얽매일 것이기 때문이다. 여래가 항상 머물러 있고 열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 문득 교만하고 방자한 마음을 내고, 싫증과 게으른 생각을 품기 때문이다. 부처님 만나기가 어렵다는 생각과 공경하는 마음을 내지 않기 때문에 여래가 방편으로 말한 것이니라.

비구들이여 마땅히 알라.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시는 일은 참으로 만나기 어려운 일이다.…

중생들이 이런 말을 들으면 만나기 어렵다는 생각을 내기 때문에 부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품고, 부처님을 갈망하며 불법에 선근을 심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래는 참으로 열반 하는 것이 아니지만 열반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선남자들이여, 모든 부처님의 법이 이처럼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므로 이는 모두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은 것이다.

2500여 년 전에 석가모니 부처님은 한 인간으로 태어나 6년간의 고행 끝에 결국 깨달음을 얻으셨다는 것은 하나의 방편이라는 뜻이다. 참된 부처님은 그렇게 인간으로 태어나서 수행해서 깨닫고 결국 열반하게 되시는 그런 한 인간이라는 개체 속에 갇히는 것이 아니다. 육신은 생멸할 수밖에 없지만 참 부처인 법신은 생멸이라는 모습을 보일지라도, 사실 그 이면의 진실은 불생불멸이라, 태어나지도 열반하시지도 않는 것이다.

구원실성(久遠實成)의 본래 부처라는 것은, 이미 시간으로 표현할 수도 없는 오래전부터 이미 부처였다는 것이다. 백천만억 나유타 아승지겁이라는 말은 하나의 상징일 뿐, 시간이란 본래 없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부처님이 오래전부터 깨달아 있었다는 것은 곧 이 우주 전체가, 일체 중생이 전부 시간을 초월해 언제나 깨달아 있음을 뜻한다. 다만 방편으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생멸하는 인간 존재가 수행을 통해 깨닫고 열반하는 모습을 보였을 뿐이다.

상불경보살 常不輕菩薩

태초의 위음왕(威音王)여래께서 열반하신 뒤, 정법(正法)이 사라지고 상법(像法) 동안에 뛰어난 척하는 비구들이 큰 세력을 가졌다. 그때 한 보살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상불경(常不輕)이었느니라.

득대세보살이여, 어떤 인연으로 이름을 상불경이라 하였는가? 이 비구는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그가 비구이든 비구니이든 우바새든 우바이든 간에 상관없이 만나는 이들마다 예배하고 찬탄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그대들을 깊이 공경하고 감히 업신여기거나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대들은 모두 보살도를 행하여 반드시 성불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비구는 오로지 경전을 읽거나 외우지도 않고 오직 예배만 행하였다. 멀리서 사부대중을 보거나, 혹은 일부러라도 따라가면서까지 예배하고 찬탄하면서 ‘나는 그대들을 깊이 공경하고 감히 업신여기거나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대들은 모두 보살도를 행하여 반드시 성불할 분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사부대중 가운데 화를 내거나 마음이 더러운 이가 나쁜 말로 욕설하면서 ‘이 무지한 비구야, 어디서 왔기에 우리를 경멸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반드시 성불하리라고 수기를 주느냐? 우리는 그런 헛된 수기가 필요없다.’라고 하였느니라. 그렇게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욕설과 꾸짖음을 당하더라도 화도 내지 않고 늘 말하기를 ‘그대들은 반드시 성불하리라’라고 하였느니라. 

심지어 이런 말을 할 때 여러 사람들이 몽둥이로 때리거나 돌을 던지면 멀리 피해 달아나면서도 오히려 목소리는 크게 외치며 ‘나는 그대들을 경멸하지 않습니다. 그대들은 모두 다 반드시 성불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느니라.

그가 항상 이렇게 말하므로 뛰어난 척하는 비구, 비구니와 우바새, 우바이들이 별명을 지어 부르길 ‘상불경’이라 하였느니라.

일체 모든 이들의 본성은 본래 부처다. 지금 이대로 여지없이 본래불(本來佛)이다. 언젠가 다 성불할 분이라는 말은 곧 지금 이대로 부처이지만, 부처임을 모르고 자기 분별심 속의 헛된 망상의 세계 속에서 스스로 중생인 줄 착각하고 있으니, 언젠가 그 착각이 끝날 것이라는 의미다. 그 착각만 놓아버리면 누구나 지금 이대로 부처다. 그러니 그 어떤 사람이 때리고 무시하고 화를 내고 욕을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본성은 부처다. 그를 존중하고, 업신여기지 말아야 한다. 욕하고 화를 내더라도 그는 욕하고 화내는 부처다. 이것이 바로 참된 수행자가 이 세상 모든 이들을 대하는 마음가짐이다.

상불경 보살처럼 일체 모든 이들을,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부처님으로써 공경히 여기고 결코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 그들 모두는 부처이며, 부처가 될 분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으로 공경하고 찬탄할 때 내 안에 부처가 훈습되고, 나의 공부도 더 빠른 진척이 있을 것이다. 상대방을 공경, 찬탄하는 것이 바로 내가 나 자신을 위해 하는 최상의 축원이다.

불타는 집의 비유

한 마을에 늙었으나 재물과 시종이 많은 장자가 살았다. 집은 매우 컸지만 대문은 하나뿐이었다. 집과 누각은 낡았고 담과 기둥은 썩었다. 어느 날 큰불이 났다. 장자는 이를 보고 생각했다. 

‘나는 비록 불난 집에서 나왔지만 자식들은 불이 난 줄도 모르고 놀고만 있구나.…

아무리 타이르고 불러 봐도 나오지를 않자… 아버지는 장난감을 보면 좋아할 것이라고 여겨서 말했다.

“너희들이 좋아하는 장난감인 양이 끄는 수레(羊車), 사슴이 끄는 수레(鹿車), 소가 끄는 수레(牛車)가 지금 문밖에 있으니 나오면 주겠다.”

아이들은 기뻐하면서 앞다투어 불타는 집을 뛰쳐나왔다.… 그때 장자는 아이들에게 다 같이 더 좋은 큰 수레를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모든 중생을 보니 생노병사(生老病死)와 우비고뇌(憂悲苦惱)의 불에 태워지고, 또 오욕(五慾)으로 재물과 이익을 구하므로 갖가지 괴로움을 받으며, 또 탐내고 애착하여 구하므로 현세에는 여러 가지 고통을 받다가 후세에는 지옥, 축생, 아귀의 고통을 받으며, 혹은 천상에 나거나 인간계에 날지라도 가난하고 궁색하며, 사랑하는 자와의 이별과 미워하는 자를 만나는 등의 갖가지 고통이 있느니라.

중생은 이 가운데 빠져 기뻐해 노닐며 그 고통을 깨닫지도 알지도 못하며, 놀라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또 싫증도 내지 아니하고, 해탈을 구하지도 아니하며, 불타는 집 같은 이 삼계(三界)에서 동분서주 마구 달려 큰 고통을 당할지라도 이를 근심하지 않느니라.

너희는 삼계의 불난 집에 머무르기를 즐기지 말라. 쓰레기 같은 색성향미촉을 탐내지 말라. 만약 탐내고 사랑하는 마음을 내어 집착하면 그 불에 타고 말리라. 그러나 너희가 속히 삼계에서 나오면 마땅히 성문승(聲聞乘), 벽지불승(辟支佛乘), 불승(佛乘)의 깨달음을 얻으리라.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이 일을 책임지 고 보증하노라. 결코 헛되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다만 부지런히 공부하라.

중생들은 이 세상이 불타고 있는 줄도 모르고, 오욕락을 즐기고, 돈과 명예와 권력 등을 쟁취하려는 허망한 욕망 놀이만을 즐기며 탐진치 삼독의 불타는 집속에 살고 있다. 불타는 집은 언젠가 다 타고 사라지고 말듯, 우리가 이 한 생이라는 짧은 놀이에서 만들어내는 그 어떤 성공과 성취들도 결국에는 모두 불타고 무너질 것들일 뿐이다. 그렇기에 부처님은 언제나 그 불타는 삼계의 집 속에서 중생들을 꺼내주기 위해 법을 설하신다. 불타는 집을 빠져 나오라고. 그러나 중생들은 그 말을 들은 척도 안 한다. 이 집착과 성취, 자아확장 놀이의 재미에 푹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이에 부처님은 방편으로 우리가 좋아하는 장난감 수레들이 여기 있으니 이것을 가지라고 말씀하신다.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이라는 즉 수 없이 많은 다양한 방편의 가르침이라는 장난감을 준비해 주신 것이다. 간절히 기도하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는 기복의 가르침도 방편이요, 장난감이다.

착한 업을 많이 쌓고 보시를 많이 하면, 그 결과 천상세계에 태어날 수 있다는 말도 하나의 가르침이요, 중생을 유인하는 장난감이다. 염불수행, 독경수행, 참선수행 등 다양한 수행법들도 다 하나의 방편이요 장난감일 뿐이다. 온갖 불교 교리와 수행법들이 전부 다 중생들을 불타는 집에서 구해내기 위해 고안한 부처님의 방편이며 장난감들이다. 

그러나 그 방편을 통해 중생들이 불타는 집에서 나오게 되면 부처님은 유인했던 장난감을 주지 않는다. 모두에게 단 하나의 대백우거(大白牛車), 즉 일불승이라는, 참된 불이법의 하나의 깨달음을 나누어 주실 뿐이다. 즉, 그 모든 방편들은 중생을 유인하기 위한 가짜의 방편일 뿐,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진정 주고자 했던 낙처, 귀결점은 오로지 일불승, 하나의 부처다.

장자궁자의 비유

어떤 사람이 어릴 적에 집을 나가서 다른 지방에서 수십 년을 살았다. 나이는 많아졌지만 가난하게 헤매면서 돌아다니다 우연히 고향집 앞에 다다랐다. 그 집은 매우 부유하고 재물이 한량 없고 노비들도 많았다. 가난한 아들은 큰 세력을 가진 집과 주인을 보고는 두려운 생각을 품고는 빨리 그곳을 떠났다. 그때 멀리서 부호였던 장자는 그가 바로 자신의 아들인 것을 알고는 크게 기뻐하며 아들을 데려오게 하였지만, 아들은 크게 놀라며 ‘나에게 잘못도 없는데 왜 붙잡느냐’며 놀라 기절하였다. 그 까닭에 아버지는 자신의 호화로움이 아들에게 두려움이 되는 줄 깨닫고는 방편으로 행색이 초라한 심부름꾼을 시켜 아들에게 품팔이를 시키는 조건으로 데려오도록 하였다. 훗날 아버지는 허름한 옷으로 갈아입고 아들에게 다가가 ‘이제는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여기서 일하거라. 그러면 품삯도 차츰 올려주고 필요한 것을 주겠다. 네가 착하게 일하는 점이 마음에 드는구나. 너를 내 친아들처럼 생각하겠다’라고 하며 이름을 지어주고 아들이라 불렀다. 그러던 중 장자가 병이나 죽을 때가 되었기에, 친척과 국왕과 대신 등을 다 모이게 하여 ‘이 사람이 곧 내 아들이라고 선언하고는 모든 재산을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세존이시여, 거부 장자는 곧 여래이시고, 저희들은 부처님의 아들과 같습니다.…

저희는 괴로움으로 생사를 헤매며 온갖 고통을 받으면서도 미혹하여 방편인 소승법만을 좋아하였습니다.…

세존께서는 저희 마음이 욕심에 집착하여 소승법만을 좋아하는 줄 아시고는 ‘너희들에게 여래의 지견인 보배 창고가 이미 있느니라’라고 알려주시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만약 저희들이 큰 법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었더라면 부처님께서 저희들에게 대승법을 설해주셨을 것입니다. 이 경전에서는 오로지 일불승만을 말씀하십니다.

불교 신자를 불자(佛子)라고 부른다. 부처님의 아들, 곧 장자의 아들이다. 장자의 아들이 집을 떠나 곤궁하고 불쌍하게 세상을 떠돌아다닌 것처럼, 중생들은 본래 부처임을 잊고 머릿속 관념의 세계, 의식과 분별의 세계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생각으로 구축한 관념의 꿈과 같은 세계속을 떠돌아다니고 있다. 고해(苦海) 바다라고 불리는 이 허망한 생각 속의 세계를 평생 떠돌아다니다가, 다양한 인연으로 인해 장자의 집에 다다른다. 저마다의 시절인연을 통해 불교와의 인연을 맺게 되는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에서는 ‘네가 바로 부처다’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중생들은 믿으려 하지 않는다. 나 같은 사람이 부처라니 하며 이 가르침을 도저히 믿지 못한다. 또 누구나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하니,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을까 하고 포기해 버린다. 그래서 부처님은 방편으로 부처라는 얘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얘기는 하지 않고, 복을 지으라는 방편 설법, 계율을 지키라는 법문, 삼업(三業)을 청정히 하고, 죄업을 참회하고, 절에 와서 기도하고, 절도 하고, 염불도 하고, 수행도 하라고 이끌면서 조금씩 조금씩 더 깊은 진리로 이끌고 있다.

앞서 초기경전에서 설명했듯이, 시론(施論), 계론(戒), 생천론(生天論)의 가르침을 시작으로 제욕(諸欲)의 과환(過患), 출리(出離)의 공덕을, 그리고 결국에는 고에서 벗어나 해탈에 이르는 사성제(四聖諦)를 가르치시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 성숙해지고 지혜로워질 때 즈음, 부처님께서는 ‘네가 바로 부처다’, ‘네가 바로 나의 아들이며, 이 집의 주인이다’, ‘이 집의 모든 진리의 보배가 전부 네 것이다’라고 설하신다. 우리가 바로 부처이며, 깨달음의 보배가 지금 이 자리에 충만해 으니, 그저 부처로 살면 된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하신다.

초목의 비유(三草二木)

가섭아, 비유하면 삼천대천세계의 산과 계곡과 평지에서 자라는 초목과 숲의 온갖 약초들이 종류도 많고 그 모양도 제각각 다르니라. 이 큰 구름이 일어 큰 비가 두루 내리면, 모든 초목과 숲의 약초들이 작은 뿌리나 줄기와 잎이든 중간 것이든 큰 것이든 상관없이 제각기 비를 받느니라. 한 구름에서 내리지만 각각 초목의 성질에 따라 알맞게 싹트고 자라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 비록 한 땅에서 나고 자라고 같은 하나의 비로 적셔 주었지만 각각의 초목에 따라 차별이 있느니라. 

가섭아, 여래도 또한 그와 같아 세상에 출현하는 것은 큰 구름이 일어나는 것과 같고, 큰 음성으로 온 세계의 천신과 사람과 아수라에게 설법하는 것은 저 큰 구름이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덮는 것과 같다. 나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본다. 도를 알며, 도를 열어 보이고, 도를 설하느니라. 

이때 무수한 천만억 종류의 중생들이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 와서 법을 들었다. 부처님은 중생들의 근기가 영리하고 우둔함이 있고, 정진함과 게으름이 있음을 살피시고, 그들이 감당할 수 있을 만한 법을 설하여 갖가지 한량없는 이들을 모두 환희케 하며 좋은 이익을 얻게 하였느니라.…

마치 저 큰 구름이 모든 초목과 숲과 약초에 비를 뿌리면 그 종류와 성질이 달라도 똑같이 적셔주어 각각 싹이 나고 자라나는 것과 같느니라.…

여래가 설하는 법은 한 모양, 한 맛이다.…

여래의 출현은 곧 큰 구름이 몰려오는 것과 같고, 여래의 법문은 비가 삼천대천세계를 적시는 것과 같다. 부처님은 오로지 한 맛으로, 즉 일체중생을 깨닫게 하고자 하는 하나의 낙처를 가지고 법을 설하신다. 비를 내리신다. 그러면 삼천대천세계의 일체 모든 초목들이 갖가지 다른 종류와 성질을 가졌을지라도 저마다의 인연 따라 알맞은 이익을 얻는다. 부처님의 법문은 오로지 한 법이지만, 중생들은 자신의 근기에 따라 제각기 얻어갈 수 있는 만큼만 알맞게 얻어 가는 것이다.

10년 전에 똑같은 법문을 들었을지라도, 그때는 깨닫지 못했던 것을 10년 후에는 같은 법문에서도 깨닫게 된다. 5년 전에 읽으며 그저 지나쳐 버렸던 책이 5년 후에 다시금 돌이켜 보면서 ‘아! 그때는 왜 깨닫지 못했을까’ 하며 가르침의 이익을 가져가기도 한다. 부처님은 한 맛으로 설하시지만, 중생들은 자신의 근기에 맞게 가져갈 뿐이다. 그럼에도 그 모든 이들에게 불법이라는 법비는 골고루 양분이 된다. 중생들은 저마다의 근기에 따라 알맞은 양분을 얻게 되지만, 결국 이 법비를 꾸준히 맞다 보면 누구나 결국에는 부처님의 한 맛인 일불승의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된다.

화성의 비유(化城寶處)

많은 사람들이 오백 유순이나 되는 험난한 길, 인적도 없는 무서운 길을 지나 보물이 있는 곳으로 가고자 하였느니라.

이때 이들을 인솔하는 지혜롭고 길을 잘 아는 이가 있었다. 가는 사람들이 극도로 피곤하고 무서워서 더는 나아가지 못하고 중도에서 물러설 마음이 생기자 인솔하는 이는 방편을 펴서 말하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기 큰 성이 있으니 그 안에서 마음대로 즐길 수 있습니다. 그 성까지만 가면 편안히 쉴 수 있고, 쉬었다가 다시 가면 보물 있는 곳까지 갈 수 있습니다.’

이때 피로하던 사람들은 매우 기뻐하면서 찬탄하고 나아가 변화하여 만든 성(城)에 들어가 편하게 쉴 수 있었다.

이때 인솔하는 이는 사람들이 충분히 쉰 것을 알고는 화성을 없애버리고는 말했다.

‘이제 다시 출발합시다. 보물 있는 곳이 멀지 않습니다. 방금 그 성은 내가 조작하여 만든 것으로 임시로 쉴 수 있게 한 것일 뿐입니다.’

여러 비구들이여, 여래도 또한 그와 같다. 여래는 그대들의 인솔자다. 죽고 사는 악도는 험난하고 멀다.… 중생들이 오직 일불승만을 들으면 부처님을 보려고 하지도 않고 가까이하려고 하지도 않으며, ‘부처님이 되려면 너무 멀고 오랜 길이라 오랫동안 애쓰고 닦아야만 이룰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느니라.

부처님은 그들의 마음을 알고 방편을 써서 중간에서 쉬게 한다.… 다만 여래는 방편으로 일불승에서 나누어 중간의 쉴 곳으로 삼승을 설한 것일 뿐이다. 이미 다 쉰 다음에는 ‘보물이 있는 곳이 멀지 않다. 화성은 실재가 아닌 조작하여 만든 것일 뿐이다’ 라고 하느니라.

부처님은 이 고해바다의 세상에서 온갖 괴로움속에 허덕이는 일체 중생들을 전부 일불승인 부처님의 세계로 이끌고 가는 도사(導師)다. 그러나 중생들은 일불승인 부처가 되려면 너무 힘들고 험난하다고 여기며 쉽게 지친다. 불법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조금 듣고, 조금 수행 하다가도 금방 지쳐 포기한다.

그때 부처님은 방편으로 아름다운 성을 꾸며내어 중생들을 잠시 쉬게 해주신다. 중생들에게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고, 꼭 부처가 되어야 한다고만 하면 따라올 사람들이 매우 적다. 그러니 부처님은 저쪽으로 조금만 가면 아름답고 풍요로운 성이 있고 그곳에 가면 충분히 쉬며 먹고 마실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처음 불교를 믿는 초심자들은 불법을 믿고 공부하고 기도하니, 마음도 편안해지고, 일도 잘 풀리고, 가정도 화목해지고, 원망하던 마음도 사라지고, 대인관계도 좋아지고, 원하던 꿈도 성취하게 되었다고 하면 환희심을 낸다. 이것이 바로 화성이다. 그 정도의 환희심과 평안해진 마음을 가지고 불법을 깨달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마치 일불승을 향해 가는 목적지에서 구경할 수 있는 좋은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화성은 결국 무너질 것이고, 가짜다.

불법을 처음 믿으면 행복해지고 환희심이 나고 원하는 대로 다 이룰 것 같지만, 계속 공부하다보면 결국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영원히 지속적으로 성공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즐거움은 화성과도 같아, 결국에는 무너지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무너지는 것 속에서는 잠시 쉴 수 있을 뿐,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러면서 중생들은 영원한 즐거움을 찾게 된다. 바로 이때 부처님께서는 참된 영원한 즐거움인 해탈 열반의 세계, 일불승의 세계로 이끄시는 것이다.

그러니 삼승이라는 수많은 방편의 가르침,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강을 건너게 해주는 뗏목에만 만족해서는 안 된다. 결국에는 그 모든 방편을 다 버려야지만 참된 진실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계주의 비유(貧人繫珠)

세존이시여,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친구의 집에 갔다가 술에 취해 누워 자다가 관청 일로 먼저 집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값으로 헤아릴 수 없는 보배를 친구 옷 속에 매어주고 갔습니다. 그 사람은 술에 취해 자고 있었기에 이를 알지 못했습니다.…

오랜 시간 후에 그를 다시 만나 말했습니다.

‘안타깝구나. 이 친구야, 어찌 이리 곤궁하게 사느냐. 내가 옛날에 네가 편안히 살 수 있도록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배를 네 옷 속에 매어주었는데도 그것도 모른 채 이렇게 고생하며 가난하게 살고 있으니 참으로 어리석구나. 이제라도 그 보배를 확인해서 쓴다면 마음껏 부족함 없이 생활할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도 그와 같아서 보살이시던 때 저희들을 위해 일체지혜를 구하는 마음을 내게 하셨으나 저희는 곧 잊어버리고 깨닫지 도 못하였습니다...

세존께서는 저희들을 연민히 여기시고 교화하시어 가장 뛰어난 서원을 세우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지혜가 없어서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해서 열반의 일부분만 조금 얻고는 스스로 만족하여 더 구할 줄 몰 랐습니다.

주머니 속에 이루 헤아릴 수 없이 값진 보배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모르면 그것을 알 때까지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다. 내 안에 여래장이 있고, 불성이 있고, 본래면목, 주인공, 자성, 반야 열반이라는 참된 보배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산다면 이미 참된 자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고통 받으며 중생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는 깨달음, 자성, 불성이 없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이미 가지고 있다. 다만 확인하지 못했을 뿐이다. 확인하지 못하니 그것이 없다고 여겨 스스로를 가난하 다고 착각할 뿐인 것이다. 우리는 결코 가난하지 않다. 내 안에 깃든 보배를 보지 못했을 뿐

왕계의 비유(契中)

문수사리여, 비유하면 마치 어떤 힘 센 전륜성왕이 위력으로 여러 나라에게 항복을 받을 때 작은 왕들이 그 명령을 순종하지 않으면 전륜성왕은 여러 군대를 보내 그들을 토벌한다. 전륜성왕이 군인 중에 공이 있는 이를 보고는 그 공에 따라 상을 주는데, 때로는 집과 전답과 마을과 고을을 주기도 하고, 의복과 몸을 장엄할 것을 주기도 한다. 혹은 온갖 보물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상투에 꽂아 놓은 밝은 구슬만은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오직 전륜성왕의 정수리에만 왕의 자리를 상징하는 이 밝은 구슬이 있는데, 만약 이것을 주면 왕의 권속들이 놀라고 괴이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문수사리여, 여래도 그와 같아… 온갖 경전을 설해주고, 모든 불법이라는 재물을 주느니라… 그처럼 중생들의 마음을 인도하여 모두를 기쁘게 하면서도 정작 『법화경』은 설하여 주지 않는니라. 그러나 문수사리여, 전륜성왕이 함부로 주지 않던 상투 속의 명주를 이제 비로소 상으로 주느니라.… 이 『법화경』은 모든 여래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훌륭한 말씀이다.… 오랫동안 가지고 있으며 망령되이 설하지 않던 것을 오늘에야 비로소 그대들에게 널리 펴서 설하여 주는 것이다.

왕이 전쟁에서 승리한 장수에게 무한한 포상을 주고, 상을 내리지만 정작 왕의 자리를 상징하는 전륜성왕의 정수리에 있는 밝은 구슬은 줄 수 없는 것처럼, 중생들에게 그동안 수많은 경전이나 가르침에서는 수 없이 많은 보배스런 가르침을 주었다. 수없이 많은 깨달음으로 이끄는 다양한 방편의 가르침을 준 것이다.

그러나 왕의 자리까지 내어줄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주기 싫어 안 준 것이 아니라, 그것은 도저히 장수가 감당하기에는 벅찼던 것이다. 중생들에게 곧바로 불법의 진수를 전해주면 중생들은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화경』에서는 바로 그 왕의 자리, 왕의 상징인 정수리의 밝은 구슬까지를 내어준다는 것이다. 삼승의 방편의 가르침이 아닌 일불승이란 불법의 진수를, 골수를 여지없이 드러내 보여준다는 것이다. 일체 중생은 구원실성의 본래부처였으며, 제법실상, 즉 일체 모든 존재가 그대로 참된 부처였음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 『법화경』이란 바로 불법 중에도 왕의 자리임을 의미한다.

의사의 비유(良醫病子)

비유하자면 마치 훌륭한 의사가 있는데 지혜가 총명하고 약을 잘 알고 지어 모든 병을 잘 치료한다. 그에게는 아들이 많이 있었는데 볼일이 있어 다른 나라로 간 사이, 아들들이 잘못하여 독약을 먹고 발작하여 정신이 혼미해져 쓰러져 뒹굴었느니라. 아버지가 돌아와 온갖 약재를 구하여 아들들에게 주고 먹으라고 하였다. 아들들 가운데 일부는 본심을 잃지 않아 약을 먹고 병이 나은 이들도 있었지만, 독기로 인해 본심을 잃어버려 약을 먹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아버지는 어떻게든 약을 먹게 하려고 방편으로 말했다.

‘나는 이제 늙어서 죽을 때가 되었다. 죽기에 앞서 이 좋은 약을 여기 둘 터이니 꼭 가져다 먹고 낫기를 바란다’

이렇게 일러두고 다른 나라에 가서 사람을 보내어 ‘아버지가 죽었다’고 말했느니라. 아들들은 크게 괴로워하면서… 비통한 감정을 품고 있다가 드디어 정신이 조금씩 깨어났다. 그래서 아버지가 생전에 해주신 약을 먹고는 중독된 병이 모두 나았다.

아버지는 아들들이 모두 나았다는 말을 듣고는 돌아왔느니라. “선남자들이여, 이 훌륭한 의사가 거짓말한 것을 죄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나도 그와 같아서 성불한 지가 한량없고 그지없어 백천만억 나유타 아승지겁이지만, 중생들을 위하여 방편으로 열반하리라고 말하였느니라.…

‘나는 성불한 때로부터 지내온 겁의 수효가 한량없는 백천만억년의 아승지니라. 항상 법을 설해 수많은 중생들을 교화해서 불도에 들게 한 지가 한량없는 억겁이다. 중생들을 제도키 위해 방편으로 열반을 나타냈지만, 참으로 열반한 것이 아니고 항상 여기에 머물면서 법을 설하느니라. 나는 늘 여기에 있지만 전도된 중생들은 비록 가까이 있어도 보지 못하느니라.

나의 정토는 변함이 없으나 중생들은 불타버린다고 보고 근심과 두려움과 고통에 가득 차 있다.

아버지가 독약을 먹고 혼미한 아들에게 귀한 약을 먹여 낫게 하듯, 부처님은 분별심과 삼독, 번뇌망상으로 어리석고 고통 받는 중생들에게 불법이라는 응병여약(應病與藥)의 가르침을 주어 낫게 하신다. 그러나 중생들 중에는 그 약을 잘 받아먹는 이들도 있지만, 정신이 혼미하여, 즉 참된 진리에 관심이 없거나, 욕망과 집착의 삶, 성취의 삶에만 관심이 많아서 이 불법의 약에는 관심조차 없는 이들이 많다. 아버지가 아들을 살리기 위해 약을 두고 떠나며 내가 죽으면서까지 당부하니 부디 아버지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거든 이 약을 먹으라고 말씀하신다. 부처님 또한 중생들에게 열반이라는 모습을 보이셨지만, 사실 부처님은 구원실성(久遠實成)의 본불(本佛)이기에 태어나는 것도 아니요 죽는 것도 아니다. 불생불멸이며, 무생법인(無生法忍) 이다. 그러나 열반을 보임으로써 중생들에게 불법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도록 하신 것이다.

한 거룩한 스승이 있다. 그분만이 나를 깨달음에 이르게 해줄 수 있다. 스승이 젊어 내가 배울 수 있는 시간이 충분하다면, 우리는 열심히 공부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스승이 머지않아 돌아가시게 되거나, 연세가 너무 많으셔서 가르침을 배울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면, 제자는 어떻게든 그 스승이 계실 때 조금이라도 더 배우려고 기를 쓰고 공부하게 될 것이다. 부처님께서 열반을 드러내 보이심 또한 이와 같다. 공부인에게 어떻게든 간절한 발심을 돈발케 하기 위함이니, 부디 참된 불법 만났을 때 시간이 귀한 줄 알고 간절하게 공부하라.

 

법상 스님  - 불교 경전과 마음공부 글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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