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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경전

반야경(般若經)

by 파장波長 2024. 2. 13.

공(空), 본래 없다

본질적으로는 허물을 범하고 범하지 않는 것이 없다.…

남들이 괴롭히더라도 거기에 움직일 마음이라는 것은 본래 없다.…

세상에서는 가설로 이름 붙인 것을 그 이름에 얽매여 망상 분별을 일으키고 말을 일으키고 집착을 일으킨다. 나라거나 남이라거나 다 실체가 없는 이름뿐인 공인데 거기에 어찌 집착하겠는가.

모든 존재는 공해서 얻을 수 없고 항상 청정하다.

청정하다는 것은 모든 존재가 나지도 없어지지도 않고,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고 얻는 것도 짓는 것도 없음이다. 이것을 모르는 것이 무명(無明)이다. 중생은 이 무명과 갈애(渴愛) 때문에 망상 분별하여 유와 무의 양극단에 얽매인다.

사람들은 흔히 깨끗하고 더러움에 차별을 둔다. 그러나 사물의 본성은 깨끗한 것도 더러운 것도 없다. 우리 마음이 집착하기 때문에 깨끗한 것을 가까이하고 더러운 것을 멀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집착하는 마음, 편견을 떠나면 모든 존재는 깨끗하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이 어떻게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닦아야 합니까?

“일체의 정신적, 육체적인 것을 전부 공이라고 하면 그것이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다.” 

『반야경』의 핵심 사상은 공()이다. 일체제법을 전부 공이라고 관하는 것이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다. 일체가 공하여 텅 비었다면 거기에 집착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반야의 공(空) 사상에서는 언제나 무집착, 무소득(無所得)을 설한다. 집착할 것이 없고 얻을 것이 없다. 이것을 모르고 집착하고 얻으려 하는 것이 중생의 어리석음 곧 무명(無明)이다.

선지식

보살의 선지식이란 무엇인가? 모든 것은 그 자체가 공해서 얻을 수 없고, 여러 가지 선한 수행도 공하기 때문에 얻을 수 없다고 가르쳐, 조그마한 깨달음의 안일에 빠지지 않고 밝은 지혜로 나아가게 하는 사람이 곧 선지식이다.

『반야경』에는 선지식이 등장한다. 참된 선지식이란 무언가를 얻을 수 있게 해준다고 확신을 주거나, 배울 수 있게 해준다고 하지 않는다. 참된 선지식은 본래 얻을 것 없다는 공의 가르침을 깨닫게 해주기에, 가지고 있던 분별망상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빼앗아 버리는 역할을 한다. 참된 선지식은 주는 자가 아니라 빼앗는 자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참된 성품을 확인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조차 얻을 수 없음을 일깨워 줌으로써 깨달았다는 착각과 안일에 빠지지 않고 보다 더 밝고 원만한 지혜로 나아가도록 이끄는 사람이다.

선에서는 이러한 선지식을 첫째, 견성(見性)으로 잘 이끌어 주는 분이며, 둘째, 깨달음 이후의 보임(保任)을 잘 이끌어 주는 분이라고 표현한다.

이름과 모양(名相)

일체법은 단지 이름과 모양(名相)만 있을 뿐이다. 이 같은 명상(名相)은 다만 가짜로 시설된 것이고, 명상의 본성은 공이다. 모든 중생들은 명상에 집착하여 생사에 빠져 흘러가 해탈하지 못한다. 명상은 생도 멸도 없고 머묾도 달라짐도 없지만 다만 시설할 수는 있다.…

일체법은 공하지만 중생들은 공하다는 진실을 깨닫지 못했기에 세상 모든 것이 진실로 존재한다고 여긴다. 공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을 공으로 보지 않고 명과 상으로 해석해서 보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것들을 대상으로 특정한 모양()에 특별한 이름()을 부여하고는 그것을 실재라고 믿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안다고 할 때, 인식한다고 할 때는 언제나 이름과 모양을 통해 아는 것이다. 그러나 이름과 모양은 참된 진실이 아닌 가설이다. 가짜로 시설된 것일 뿐이다. 이름과 모양으로 이루어진 모든 것은 그 본성이 공하다. 중생들은 명상에 집착하기에 해탈하지 못한다.

반야바라밀

보살이 고행이란 생각으로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이는 보살이 아니다. 고행이란 생각이 있으면 중생을 건질 수 없다.

사리자여, 모든 것은 얻을 수 없다. 이렇다고도 저렇다고도 할 수 없는 것임을 알아 반야바라밀을 행하라.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수행할 때 ‘나는 반야바라밀을 행한다.’ 고 생각한다면 그는 모양에 집착하여 반야바라밀을 잃어버릴 것이다.… 반야바라밀은 모든 법의 근본이므로 여래와 다를 것이 없다. 사리자여, 반야바라밀을 수행하여 모든 번뇌를 떠나고 바른 깨달음을 열어 한량없는 중생들을 깨우쳐 주리라고 원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존재는 본성이 없는 그것이 본성이므로 그 본성은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취하지 않는다.… 취하지 않는다는 생각도 집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은 그 자성이 없어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일체법이 공()이라고 관()하는 것이 곧 반야바라밀이다. 공하기에 그 어떤 것도 얻을 수 없다. 본성이라고 하든, 지혜라고 하든, 깨달음이나 해탈이라고 하든 그 모든 것은 하나의 이름일 뿐, 그 말속에는 참된 것이 없다.

반야바라밀을 수행한다는 것도 하나의 견해이고 개념일 뿐, 반야바라밀을 수행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반야바라밀이라는 수행을 취하는 것이 아니다. 반야바라밀이라는 자성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혜, 본성, 반야바라밀을 설하지만 그것은 방편일 뿐, 결국 그 어떤 것도 내세울 수 없고 얻을 수 없다.

다만 참된 반야바라밀을 얻음 없이 얻어 일체 중생에게 설해줌 없이 설해주고자 한다면, 마음속에 간절한 발심, 서원, 발보리심을 세워야 한다. 바로 그 마음, 발심의 마음이 깨달음을 가능하게 한다. 그래서 이 공부를 마음공부라고 부른다. 간절한 발심, 그것이 곧 반야바라밀의 수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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