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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경전

화엄경(華嚴經)

by 파장波長 2024. 2. 14.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

만약 사람들이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를 알고자 하거든 마땅히 법계의 성품을 비추어 볼지니 일체 모든 것은 마음으로 지어졌음이라. 

마음은 화가와 같아서 능히 온갖 세간을 그려내나니 오온이 마음 따라 생기어서 만들어내지 못하는 법이 없네.

일체 모든 것은 마음으로 지어졌다. 마음은 화가와 같아 능히 온갖 세상을 그려낸다. 이 마음이라는 바다 위에 온갖 세상만사라는 파도가 치고 있는 것일 뿐이다.

마음이라는 도화지 위에 온갖 세간이 그려지고 있다. 일체 모든 것들은 전부 마음이라는 바탕 위에서 드러나고 그려지고 일어났다 사라지는 허망한 그림일 뿐이다.

세상만사가 전부 생겨났다가 사라진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은 결국 낱낱의 파도일 뿐, 그 모든 파도는 결국 바다가 그려낸 허망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일진법계 一眞法界

이 법계로부터 흘러나오지 않음이 없고, 
이 법계로 되돌아가지 않음이 없다.
오직 하나의 진실한 법계가 있을 뿐이다. 
마음, 부처,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
널리 일체 중생을 돌아보니 한 사람도 빠짐없이 
부처님의 지혜덕상을 갖췄건만
 다만 망상과 집착으로 인해서 증득하지 못할 뿐이다.

이 세상에는 2가지, 3가지의 세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중생의 세상이 따로 있고 부처의 세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예토(穢土)와 정토(淨土)가 따로 없고, 생사와 열반이 따로 없고, 중생심과 불심(佛心)이 따로 있지 않다. 오로지 하나의 진실한 법계가 있을 뿐이다.

이 하나의 법계, 일진법계(一眞法界)라는 바다로부터 일체 모든 삼라만상은 파도처럼 일어났다가 사라질 뿐이다. 이 바다가 바로 마음이고, 부처며, 그 마음이라는 바다 위에 인연 따라 잠시 일어났다 사라지는 존재가 바로 중생이다.

바다가 곧 파도이니, 부처와 마음과 중생은 셋이 아니다. 이처럼 일체 모든 중생들은 전부 바다 아님이 없고, 일진법계 아님이 없다.

일체 중생과 삼라만상이 전부 일진법계로써 부처님의 지혜덕상이 원만히 갖추어졌건만, 중생들이 다만 망상과 집착으로 인해 깨닫지 못할 뿐이다.

일즉일체다즉일 一卽一切多卽

부처님 몸, 온 법계 가득하시니
일체중생 앞에 두루 나타내신다. 
인연 따라 가지 않는 곳 없지만 
언제나 보리좌(菩提座)에 항상 계신다. 
하나에서 무한함을 알고 무한함 가운데서 하나를 알아 
그것이 서로 함께 일어남을 깨치면 마땅히 두려움 없으리라.
한 몸이 무한한 몸이 되고, 무한한 몸은 다시 한 몸이 되며, 
모든 세간을 밝게 알아 형상을 일체에 두루 나타내도다.
하나의 미세한 먼지 속에서 많은 세계들을 본다.
말로 할 수 없는 억겁이 곧 순식간이니 길거나 짧지 않다.
처음 발심할 때에 곧 정각을 얻을 것이며, 일체의 법이 곧 마음의 성품임을 알 것이다.

법신(法身)은 충만하여 일체 우주법계에 가득하다. 일체 중생 앞에, 옆에, 뒤에, 안에, 밖에 아니 중생 자체로써 두루 그 몸을 나타낸다. 법신은 인연이 생겨나면 인연에 응해 무엇이든 만들어내 나투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깨달음의 자리, 보리좌에 항상 앉아 계신다. 우리가 아무리 번뇌 망상에 시달리고, 괴로움 속에 빠져 있을 때라도 사실은 언제나 보리좌에서 한 발자국도 떠난 적이 없다.

법신은 둘로 나뉘지 않는 일진법계이기에, 아무리 많은 파도가 낱낱이 치더라도 그것이 결국 하나의 바다이듯, 하나가 곧 전체고 전체가 하나다. 한 띠끌 속에 우주 전체가 드러나 있다. 말로 할 수 없는 억겁의 시간이 곧 지금 이 순간일 뿐이다. 과거나 미래, 이쪽과 저쪽은 없다. 다만 불이법의 일진법계 하나가 있을뿐.

이 참된 ‘하나임’의 진리를 깨닫고 나면 두려울 것이 없다. 둘로 나뉘어져야 두려울 상대가 있는데, 하나일 때는 두려울 상대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바다와 파도

“불법은 오직 한 법인데 어찌 온갖 법을 말씀하시고, 갖가지 경계를 나타내 보이십니까?”
“큰 바다는 하나이듯, 파도는 천만 가지로 다르지만 하나의 물임은 다르지 않네. 모든 불법도 이와 같다. 우리의 마음은 갖가지 번뇌망상으로 물들어 있어 마치 파도치는 물결과 같다. 물결이 출렁일 때는 우리의 얼굴이나 모습도 일렁이고 왜곡되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물결이 고요해지면 모든 것이 제 모습을 나타낸다. 저 연못이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하고 맑으면 물 밑까지 훤히 보이는 것 처럼.…”

인연 따라 천만 가지로 파도가 치더라도 큰 바도는 하나일 뿐이듯, 불법도 이와 같다. 색수상행식이라는 오온과 삼라만상이 전부 하나의 파도일뿐이다. 인연 따라 생기고 사라지는 유위법(有爲法),  일체 모든 존재는 생멸법(生滅法)으로써 파도일 뿐이다. 몸도 생각도 느낌도 의지도 의식도 전부 잠시 일어났다가 사라질 뿐이다. 그섯은 내가 아니다. 다만 파도일 뿐이다.

그러나 파도는 곧 바다와 다르지 않으니, 오온이 곧 부처요 참성품이다. 일체중생이 그대로 부처요 일진법계다. 파도가 곧 바다이듯이 마음이 온갖 번뇌 망상으로 물들어 끊임없이 파도치더라도 바다라는 마음의 바탕은 언제나 고요하다.

정진과 믿음

믿음은 도의 으뜸이요, 공덕의 어머니라 온갖 선한 법을 기르며 의심을 끊고 애착을 벗어나 열반의 위없는 길 열어 보이네.
무수한 중생들 처소에 일겁 동안 생필품을 베풀어도 그 복덕보다 이 법을 믿음이 가장 뛰어나네.
온갖 법 관찰하면 자성이 없어 생멸하는 겉모습만 있을 뿐, 단지 헛이름으로만 설하네. 모든 법이 불생불멸임을 알면 항상 부처님께서 나타나시리.
불국토는 분별이 없고, 미움도 사랑도 없으나 다만 중생들이 마음을 따라서 서로 다른 것을 볼 뿐이다.
불법은 하나인데 중생들은 왜 바로 온갖 속박과 번뇌를 끊지 못합니까?
“나무를 비벼 불을 구할 때 불이 나기도 전에 자주 쉬면 불기운도 따라 꺼지듯 게으른 자도 마찬가지네.”

이 진리의 가르침을 굳게 믿는 것이 모든 수행의 출발이다. 믿음이야말로 도의 으뜸이고 공덕의 어머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생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진실은 불생불멸이다. 그러나 중생의 눈에는 여전히 불생불멸로 보이지 않고 생멸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 국토는 그대로가 불국토이기에 이대로 깨달음의 세계이지만 중생들은 분별함으로써 중생의 세계를 볼 뿐이다. 그러니 어찌해야 하는가? 굳게 믿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진실에 대한 가르침, 분별 너머의 가르침, 출세간의 진실에 대한 가르침은 오로지 믿는 것으로써만 첫발을 내딛을 수 있다. 굳게 믿고 나면 보리심을 내어 끊임없이 정진할 수 있다.

그러나 나무를 비벼 불을 내고자 할 때 불이 붙기도 전에 비비는 노력을 쉰다면 불을 얻을 수 없듯, 공부하는 수행자도 마음공부에 정진함에 게으르다면 끝내 깨달음을 얻지 못하리라.

보리심

온갖 불법을 알고자 하면 마땅히 빨리 보리심을 낼지니 이 마음은 공덕 중에 최고 수승하여 반드시 부처님 지혜 얻으리.

보리심(菩提心)은 마치 종자(種)와 같아 능히 모든 불법을 내며, 기름진 논밭과 같아 깨끗한 법을 자라게 하고, 대지와 같아 모든 세간을 유지하며, 청정수와 같아 모든 번뇌의 더러움을 씻고, 태풍과 같아 세간에 두루해 막힘없으며, 타는 불과 같아 온갖 소견의 땔나무를 불사르고, 밝은 해와 같아 세간을 널리 비추며, 동산과 같아 그 가운데 노닐면서 법의 즐거움을 받는다.

또한 집과 같아 중생을 안락하게 하고, 자비로운 아버지와 같아 여러 보살을 가르치고, 인자한 어머니 같아 보살을 키우고, 연꽃 같아 세간에 물들지 않고, 잘 길들인 코끼리 같아 유순하고, 특효약 같아 번뇌의 병을 치료하며, 예리한 톱과 같아 무명의 나무를 절단하고, 보배와 같아 가난을 없애고, 대도사와 같아 생사를 벗어나는 길을 잘 알고, 때맞게 오는 비와 같아 번뇌의 먼지를 없앤다.

보리심은 이처럼 무한 공덕이니, 일체 불법의 공덕과 같다. 보리심으로 인해 온갖 보살행이 나오며, 삼세 부처님도 보리심으로부터 나타나신다.

처음 보리심을 낸 보살의 공덕은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동등하니, 삼세 부처님 경지와 같고, 삼세 부처님 공덕과 같으며, 한 부처님 몸과 무한한 몸이 궁극적으로 같아, 진실한 지혜를 얻을 것이요, 처음 발심할 때 시방의 부처님께서 함께 칭찬하실 것이며, 내지 온갖 세계를 진동하고 성불하심을 나타내 보일 것이다.

보리(菩提)는 깨달음을 뜻하고, 보리심이란 깨달음을 얻고자 마음을 내는 것을 의미한다. 깨달음은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만약 깨달음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지 않다면 그것은 노력을 통해 얻거나, 갈고 닦음을 통해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깨달음은 본래부터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기에 본성, 본래의 성품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깨달음에 이르는 특별한 방법은 없다. 이미 깨달음 아닌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중생은 번뇌망상에 가려 스스로 보지 못할 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미 있는 깨달음, 본성을 확인할 수 있을까? 간절한 발심, 간절하게 이 본래 성품을 확인하고야 말겠노라는 보리심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보리심뿐 이다. 일체유심조,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드는 것이니, 깨달음을 얻고자 마음을 내야지만 깨달음이 깃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공부를 마음 공부라고 한다.

보리심은 마치 종자와 같아서 보리심의 씨앗을 마음 밭에 뿌리면 깨달음의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보리심은 무한 공덕이 있으며, 삼세의 모든 부처님 또한 보리심으로부터 나오셨다. 그렇기에 처음 발심하여 보리심을 낸 보살의 공덕은 곧 삼세의 모든 부처님의 공덕과 다르지 않다.

법성, 깨달음

법성(法性)은 말에 있지 않으니, 말이 없고 말을 떠나 항상 적멸(寂滅)하다. 부처님의 깨달음도 마찬가지이니 온갖 문장이나 말로도 변론하지 못하네.

누군가 부처님의 경계를 알고자 한다면, 그 뜻을 허공처럼 청정하게 할지니 모든 망상과 삿된 견해를 멀리 여의고 마음 향하는 곳마다 막힘이 없게 하라.

법의 성품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말이란 세속의 도구이지 출세간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말로 표현됨과 동시에 참된 법의 성품은 그 말의 뜻 속에 갇히고, 우리는 말로 표현된 법성을 마음속으로 그려내게 될 것이다. 아무리 정교하고 그럴듯한 말로 법성을, 깨달음을 표현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일 뿐이며, 근사치일 뿐, 법성 자체는 아니다. 온갖 문장이나 말로도 법성과 깨달음은 변론할 수 없다. 부처님의 참된 경계를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말이나 생각으로 접근 하려는 마음을 버려라. 그 뜻을 허공처럼 청정하게 하며, 모든 망상과 삿된 견해를 멀리 여의어 마음 가는 곳마다 막힘이 없어야 하리라.

보현행원

보현보살마하살은 부처님의 수승하신 공덕을 찬탄하고 나서 모든 보살과 선재동자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여래의 공덕은 시방에 계시는 일체 모든 부처님께서 셀 수 없는 불찰미진수겁(佛刹微塵數劫)을 지내면서 계속하여 말씀하시더라도 다 말씀하지 못하느니라.

만약 이러한 공덕을 성취하고자 하거든 마땅히 10가지 넓고 큰 행원(行願)을 닦아야 하나니 10가지라 함은 무엇인가?

① 예경제불원(禮敬諸佛願)이라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경하는 것이요, 
② 칭찬여래원(稱讚如來願)이라 모든 부처님을 칭찬 찬탄하는 것이며, 
③ 광수공양원(廣修供養願)으로 널리 공양하는 것이며,
④ 참회업장원(懺諸業障願)으로 업장을 참회하는 것이고,
⑤ 수희공덕원(隨喜功德願)으로 남의 공덕을 따라 기뻐해 주는 것이고, 
⑥ 청전법륜원(請轉法輪願)으로 법을 설해주시기를 청하는 것이고,
⑦ 청불주세원(請佛住世願)으로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래 머무시기를 청하는 것이고,
⑧ 상수불학원(常隨佛學願)으로 부처님의 수행을 따라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며,
⑨ 항순중생원(恒順衆生願)으로 항상 중생의 뜻에 따라 수순하는 것이고,
⑩ 보개회향원(普皆廻向願)으로 지은 일체 모든 공덕을 일체 중생에게 회향하는 것이니라.”

여래의 공덕을 성취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10가지 보현행원을 실천하라. 부처님을 예배, 공경하고 여래를 칭찬하며, 널리 공양하라. 마음속에 부처님을 담고 있으면 부처님을 닮아간다. 부처님이 훈습되기 때문이다. 업장을 참회하라. 마음이 깨끗이 비어 있을 때 무한 가능성과 자성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다. 남의 공덕을 수희찬탄하라. 수희찬탄할 그의 공덕이 내게도 생겨날 것이다. 법을 설해주시기를 청하고, 붓다가 또 바른 법이 이 세상에 오래 머물기를 청하라. 법을 청하고 법을 원 해야 바른 법이 내게 깃들고 드러난다. 또한 부처님의 수행과 가르침을 따라 배우고 실천하며, 항상 중생의 뜻에 따라 수순하여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고, 이렇게 지은 일체 모든 공덕을 일체중생에게 널리 회향하는 마음을 지니라.

살펴볼 경구들 

마른 풀이 수미산같이 쌓여도 
겨자만 한 불로 다 태우듯,
부처님께 공양한 적은 공덕도 
반드시 번뇌를 끊어 열반에 이르게 한다. 
이같이 비밀하고 매우 깊은 법 
백천만겁에도 듣기 어려우니 
정진과 지혜로써 조복한 자라야 
심오한 이치를 들으리.
온갖 공덕행 전부 원(願)으로 나거늘, 
선재동자 밝게 깨달아 늘 부지런히 정진하네. 
보살은 축생에게 한 술의 밥과 한 톨의 낟알을 줄 때에도 
이렇게 발원한다.

‘이들이 축생의 길에서 벗어나고 마침내 해탈하여지이다. 고통의 바다를 건너 영원히 고통의 더미를 끊으며, 영원히 고통의 근본과 괴로운 곳을 모두 떠나게 하여지이다.’

보살은 평등한 마음으로 자기의 모든 물건을 보시한다. 
보시하고 나서도 아깝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며,
좋은 결과를 바라지도 않고, 알아주기를 바라지도 않으며, 
천상에 태어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일체 중생을 구하고 진리의 행을 실천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고자 할 뿐.

만일 갠지스 강의 모래알과 같이
많은 수의 금은보화로 칠보탑을 쌓을지라도
잠시 동안 제 마음을 관(觀)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칠보탑은 결국 부서져 티끌이 되지만
마음을 관하는 것은 마침내 부처가 되기 때문이다.

중생들 가운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서도
번뇌를 끊지 못하는 이가 있다.
법을 듣고도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듣는 것만으로는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을 알 수 없으니, 
그것은 남의 약은 잘 지어주면서도 제 병은 못 고치는 것 같고, 
남의 보물을 세면서 자신에게는 반 푼의 소득도 없는 것 같으며, 
귀머거리가 음악을 연주해도 자신은 못 듣는 것과 같고, 
소경이 그림을 그려 보이지만 자신은 못 보는 것과 같다. 
이처럼 가르침을 배우고도 실천수행하지 않으면 
아무리 똑똑해도 소용이 없다.

고통의 원인은 탐욕이다.
세상의 즐거움이란 결국 고통 아닌 것이 없다.
탐욕은 어리석은 사람이나 하는 것,
모든 고통과 근심은 바로 탐욕에서 생기는 것이다.

내 것이라고 집착하는 마음이
갖가지 괴로움을 일으키는 근본이 된다.
온갖 것에 대해 취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훗날 마음이 편안하여 마침내 근심이 없어진다.

보살은 모든 보살행을 갖추고 익히지만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다.
진리에 집착하지 않고, 
소망에 집착하지 않고,
선정(禪定)에 집착하지 않는다.
적정(寂靜)에 집착하지 않고
깊은 진리의 세계에 들어가는 일에 집착하지 않고
중생을 교화하여 그 덕을 성취시키는 일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 몸은 공적(空寂)하여
‘나’도 없고 ‘내 것’도 없으며,
진실한 것도 없다.

모든 현상은 꿈과 같고 바람과 같아서 진실하지 못하다.
중생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미혹의 세계를 배회하는 것이다.

•선정(禪定): 육바라밀의 하나. 산스크리트어 dhyana의 음역인 선나(禪那)의 선(禪)과, 이것을 의역한 정(定)을 합친 말.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통일하여 번뇌를 끊고 진리를 깊이 생각하여 마음을 안락자재(安樂自在)한 경계(境界)에 머물게 하는 수행. 간단히 정(定)이라고도 말하며, 가끔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에 비유되기도 함.

•적정(寂靜): 우리의 마음 가운데 일어나는 망념을 쉬고 마음을 한 곳에 머무는 것. 곧 번뇌를 떠나 고(苦)를 멸한 편안한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

•공적(空寂): 공공적적(空空寂寂)의 준말. 우주에 형상이 있는 것이나 형상이 없는 것이나 모두 그 실체가 공무(空無)하여 아무것도 생각하고 분별할 것이 없음을 말함. 

 

-법상 스님 - 불교 경전과 마음공부 글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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