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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경전

무량수경(無量壽經)

by 파장波長 2024. 2. 14.

불국토가 여기에 있다.

아난다여, 저 불국토(佛國土)는 부유하고 평안하며 풍요롭고 아름답다. 수많은 인간과 천인(天人)들로 가득하다. 저 세계에는 지옥이 없고, 동물이 없으며, 아귀(餓鬼)와 아수라(阿修羅)도 없다. 가르침을 들을 자격이나 태생의 차별도 없다. 그 불세계에는 착하지 않은 목소리, 장애와 죄악, 고통의 목소리도 없다. 본래 불국토는 이 세상에서 만들어진 것들과는 달리 무위(無爲)와 자연스러운 존재이며 깨달음의 경지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다.

불국토에는 불행이 없다. 모든 것이 풍요롭고 평안하며 아름답고 장엄하다. 지옥도 없고 동물도 없고 아귀나 아수라도 없다. 장애도 없고 고통도 없다.

바로 그러한 불국토가 지금 여기에 우리의 눈앞에 당장에 드러나 있다. 목전에 활짝 불국토가 드러나 있지만 우리가 보지 못할 뿐이다. 지옥, 아귀(餓鬼), 아수라(阿修羅) 등은 우리 의식이 만들어 낸 허망한 환상일 뿐이다.

지금 여기에 없는 것은 다른 때 다른 곳 어디에도 없다. 지금 있는 것만이 언제나 있다. 착하지 않은 목소리, 장애, 죄악, 고통의 소리는 오직 중생들의 환상, 분별, 꿈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허망한 착각 속에서만 존재한다.

바로 그러한 불국토는 인간 존재의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 무위(無爲)의 상태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든 것은 지금 이대로 완전하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모든 것은 지금 이대로 불국토다.

그냥 자연스럽게 내버려 두라. 분별을 가하지 말고, 생각으로 판단하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허용해 보라. 생각이 끊어지고, 분별이 멎는 순간, 깨달음의 세계, 불국정토가 목전(目前)에 활짝 드러나리라.

발원하면 성취된다.

비유컨대 비록 바닷물이라도 억겁의 세월 동안 퍼낸다면 그 안에 든 진귀한 보배를 얻을 수 있듯이, 만약 사람이 정진하여 도를 구하면 마땅히 원하는 결과를 얻고 말 것이니, 어떤 것이든 발원하면 성취된다.

제가 부처가 될 때 시방의 중생들이 불국토에 태어나고자 신심과 환희심을 내어 아미타불 명호를 열 번만 불러도 제 나라에 태어날 수 없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습니다.... (18원)

중생들이 보리심을 일으켜 불국토에 나길 원할 때 그들의 임종시에 제가 가서 그들을 마중할 수 없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습니다….(19원)

바닷물을 아무리 오랜 세월 퍼낸다고 할지라도 다 퍼낼 수는 없으리라. 그러나 억겁(億劫)이 걸리고 세세생생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퍼 내고 말리라고 발원한다면 언젠가는 원하는 결과를 성취하게 된다. 이 우주법계는 바로 그런 사람들의 간절한 발원이 모여 인연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간절한 발원은 곧 이 우주 전체가 일으킨 마음과 같다.

법장(法藏)비구는 시방의 모든 중생들이 불국토에 태어나고자 환희심과 신심으로 발원하며, 아미타불을 열 번만 부르더라도 극락국토에 태어날 수 있기를 발원하며, 그 발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노라고 발원했다. 또한 임종(臨終) 시에 발심하여 극락국토에 태어나길 발원하는 이들을 마중하겠노라고 발심하였으니, 이 2가지 원이 법장비구의 48대원 가운데에도 가장 잘 알려진 중요한 발원이다. 법장비구는 이러한 48대원을 다 성취하여 극락정토를 이룩 하였고 현재도 그 발원이 성취될 수 있도록 일체중생의 염불소리와 발심을 귀 기울여 듣는다. 한 사람이, 한 수행자가 극락세계라는 불국토를 개설하리라고 발원하면 그것은 가능해진다. 발심이 이 세상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지금 이 세계를 극락정토로 만들겠노라고 발심한다면, 그 발심으로 인해 언젠가는 이 세계가 그대로 극락이 될 것이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사실, 이미 그 발원은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대로 극락정토 아님이 없고, 깨달음의 땅 아님이 없기 때문이다. 중생이 망상심만 거두어 낸다면 고스란히 극락의 세계가 눈앞에 드러난다.

간절한 마음으로 일체 중생을 위해, 일체 중생이 고에서 벗어나 참된 행복의 길, 평화의 길, 깨달음에 이를 수 있기를 발원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공부인의 공통된 서원이요, 발원이다.

무상삼매와 무원삼매

아난아, 법장비구는 일체 모든 현상의 실상은 본래 비어 있으니, 무상(無想, 상이 없음)삼매와 무원(無願, 바랄 것 없음)삼매에 머물러 아예 차별심을 일으키지 않았으며, 모든 것은 다만 인연이 화합하여 이루어졌으니 허깨비와 같고 뜬구름과 같이 허망함을 관조(觀照)하였느니라.

일체법의 성품은 본래 공(空)하고 무아(無我)임을 통달하여 청정한 불국토를 힘써 구하면 반드시 극락정토 성취하리라.

법장비구가 극락정토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일체법이 곧 공함을 깨달았고, 상이 없는 무상삼매와 바랄 것 없는 무원삼매에 머물러 차별을 일으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법장비구가 만약 극락정토라는 어떤 시공을 점유하는 실체적인 극락세계를 건설하고자 했다면 그 원을 이루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것은 될 수도 있고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만들어진 모든 것은 무너진다는 제행무상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장비구는 실체적인 극락세계를 건설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일체법이 텅 비어 공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텅 비어 공한 극락세계를 이루길 서원한 것이다. 극락세계를 이루지만 이름이 없는 극락, 극락세계는 극락세계가 아니며 이름이 극락인 바로 그러한 공한 극락세계를 발원하였기 때문에 공한 극락세계를 이루었고, 그렇게 이룬 극락세계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법장비구가 상이 없는 무상삼매를 깨달아 극락세 계를 어떤 특별하고도 장엄한 상으로써, 모양으로써 그리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하다. 극락세계라는 특정한 상을 그려 놓았다면 그런 모양의 세계는 생사별, 생멸법의 유한한 세계이기에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다.

또한 법장비구는 무원삼매를 깨달았으므로 극락세계를 서원했지만 극락세계를 원하면서도 원함이 없는 삼매를 얻었다.

참된 서원은 그 서원에 집착해 그것을 이루기 위해, 그것을 얻기 위해 애쓰고 이루어지면 성공이고, 이루지 못하면 실패라고 여기는 그런 것이 아니다. 참된 서원은 원하지만 원하는 바가 텅 비어 공한 줄 아는 까닭에 원하지만 원함이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무원삼매다. 공의 도리와 무원삼매를 깨닫는다면 지금 이대로가 이미 극락정토다. 

이처럼 법장비구는 공함과 무아와 무원, 무상삼매를 깨달았으므로 극락을 구하지만 극락에 집착하거나 머물지 않고 극락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극락이란 하나의 방편일 뿐, 실체적인 세계가 아니다. 극락이 실체적인 어떤 세계였다면 그것은 무아도 아니요, 공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공한 극락, 텅 빈 극락, 실체가 없는 극락, 모양이 없는 극락, 극락에 도달한 내가 없는 극락, 그것이 바로 참된 극락이다.

손바닥 위의 세계

극락세계의 보살과 성문, 천인들은 모두 지혜와 신통이 통달 하여 그 위력이 자재하고 능히 손바닥 위에 일체 세계를 올려놓을 수도 있느니라.

이것이 바로 불보살님의 신통력이다. 어떻게 손바닥 위에 일체 세계를 올려놓을 수 있을까? 한 티끌 속에 온 우주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한 티끌이 곧 우주이고, 우주가 곧 한 티끌이기 때문이다. 이 한마음이 곧 우주법계 전체이며, 내가 곧 부처이고, 여기가 곧 극락이고, 여기에 온 우주가 함께하기 때문이다. 이 우주에는 그 어떤 존재도 둘로 쪼개지는 것은 없다. 일체법이 곧 불법이며, 일체법이 곧 불이법이다. 참된 진실의 세계에서 둘은 없다.

그러니 손바닥 위에 일체세계를 올려놓고, 한 모금으로 한강의 물을 다 마시고, 유마거사는 좁은 방 안에 수많은 보살들을 초대하고도 충분히 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법문을 듣고 부처 되어 중생을 구제하라 

세계에 불길이 가득하여도 반드시 뚫고 나가 법문을 듣고 모두 다 마땅히 부처가 되어 생사 헤매는 중생 구제하리라.

모든 수행자의 발원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온 세계가 삼독(三毒)의 불에 가득하고, 일체 중생이 불길 속에서 고통받고 있지만, 반드시 그 불길 속, 중생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그 속에 뛰어들어 부처가 되어 고통 속에 헤매는 일체 중생을 구제해야 한다. 그런데 그러려면 먼저 부처가 되어야 하니, 어떻게 하면 부처가 될 수 있을까? 법문을 들어야 한다. 법문을 들을 때 스승의 가르침이 내 온 존재를 울리고, 파동 치고, 하나로 공명하며, 이심전심의 깨달음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저 법을 가까이하고, 법문을 듣고, 법문 듣기를 즐거워하면 된다. 그것이 참된 수행이다.

사홍서원(四弘誓願)에서도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가 있고, 세 번째로 법문을 다 들으오리다가 있은 연후에 불도를 다 이루겠노라는 발원이 있다. 중생을 건지려면 번뇌를 끊어야 하고, 번뇌를 끊어 부처가 되려면 법문을 다 들어야만 하는 것이다.

있어도 걱정 없어도 걱정

세상 사람들은 재물 때문에 잠시도 편히 쉴 때가 없다. 논밭이 있으면 땅 걱정, 농사 걱정, 집이 있으면 가축 걱정, 의식 걱정, 돈 걱정, 집 걱정 등 소유하면 소유로 인해 걱정거리가 끊이지 않는다. 이렇듯 부자라고 하더라도 근심 걱정이 끊이지 않는다. 또한 빈궁하고 못난 사람들도 늘 가난에 찌들려 걱정한다. 논밭이 없으면 땅이 있었으면 하고 걱정하고, 집이 없으면 집이 었으면 하고 걱정하고, 가축이나 재물, 노비가 없으면 그것이 있었으면 하고 걱정한다.

이렇듯 하나가 있으면 다른 하나가 결여되고,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결여하여, 이같이 살아가므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고 온갖 재물과 욕망만을 탐하고 있다.

사람들의 근심 걱정은 끝이 없다. 있으면 있어서 걱정이고, 없으면 없어서 걱정이다. 많으면 많아서 걱정이고 없으면 또 없어서 걱정이다. 땅이나 집이나 돈이나 자식이 있으면 있어서 걱정이다. 땅값, 집값 떨어질까봐 걱정이고, 돈이 사라질까봐 걱정이며, 자식이 말썽을 피울까 봐, 내 뜻대로 따라주지 않을까봐, 잘 살지 못할까봐 걱정이 끊이지 않는다. 소유하는 모든 것은 곧 근심거리일 뿐이다.

그러나 없어도 걱정은 계속된다. 집이 없으면 집이 있기를 바라며 걱정하고, 땅이 없으면 땅이 있었으면 하고 걱정한다. 자식이 없으면 자식이 있었으면 하고 걱정하고, 결혼을 못했으면 결혼을 했으면 하고 걱정한다.

있어도 걱정 없어도 걱정이다. 왜 그럴까? 있고 없다는 조건에서 행복이나 불행이 달려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행한 사람은 있어도 걱정 없어도 걱정이지만, 행복한 사람은 있으면 있어서 행복하고 없으면 없어서 행복하다.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결여된 것이 문제가 아니라, 결여되었다고 느끼는 내 마음이 문제인 것이다.

법상 스님 불교 경전과 마음공부 글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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