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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경전

열반경(涅槃經)

by 파장波長 2024. 2. 15.

석가모니 부처님의 열반(涅槃)을 설명하기 위해서 편찬한 경전(經典)이다. 소승(小乘)과 대승(大乘)의 두 경전이 있는데, 소승은 석가모니 붓다의 입멸(入滅) 전후의 역사적 사실을 주로 기록 하였으며, 대승은 붓다가 입멸 직전에 설한 교의를 담고있다.

상락아정(常樂我淨)

부처님께서는 법을 설하실 때 “‘실체적인 나’가 없으나 나에 대한 관념을 버려라. 아상(我相)을 버리면 아만심이 사라지고, 아만(我慢)이 없으면 곧 열반에 들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상락아정을 말씀하시니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매우 훌륭하다. 중요한 질문이다. 우유로 된 약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독이 되기도 하고, 약이 되기도 하는 것처럼 ‘나’가 해가 될 때와 이익이 될 때를 알아서 ‘나’를 설하는 것이다. 중생들은 ‘나’라는 것을 실체적인 것으로 알기 때문에 무아(無我)라고 설했다. 모든 법에 ‘나’가 없다고 하지만, 진실로 ‘나’가 없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이 ‘참나’(我)인지, 어떤 법이 깨끗하고 참되며(淨) 항상 하고(常) 즐거운지(樂)를 잘 알아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초기경전에서 무아(無我)를 설하셨다. ‘나’는 없다는 것이야말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고구정녕(苦口丁寧)한 법문이다. 그러나 대중불교에 오면 특히 『열반경(涅槃經)』에서는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이라고 하여, 모든 이들은 불성을 가지고 있고, 그 불성의 특징은 열반사덕(涅槃四德)이라고 하여 상락아정(常樂我淨), 즉 항상 하고, 즐겁고, 내가 있고, 번뇌 없이 깨끗하다고 설하고 있다. 

이것을 보고, 소승불교를 공부한 사람들은 대승불교와 『열반경』은 참된 불법과 다르다고 말하곤 한다. 이는 곧 『열반경』에서 말하는 ‘불성 혹은 참나’의 ‘나’를 실체적인 것으로 알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말, 언어의 한계다. 말이나 언어로는 내가 있다거나 없다고 밖에 할 수가 없다. 내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중도(中道)를 설명하기가 너무 어렵다. ‘나’는 고정된 실체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참나, 불성을 없다고만 할 수도 없다. 그래서 이것을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한다. 참으로 공하지만 묘하게 있다는 말이다.

참나니, 진아니, 불성이니 하는 것이 바로 그렇다. 아상의 나, 어리석은 나, 개체적인 나, 육체로써의 나, 오온인 나는 공하여 없다. 그러나 완전히 없는 극단적인 없음은 아니다. 분명히 없지만, 이렇게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할 때마다 이렇게 살아 있지 않은가. 내가 없다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할 수 있는가? 분명히 없지만 이렇게 분명하게 있다. 그래서 이것을 묘하게 있다고 한다.

『열반경』과 선에서 말하는 참나, 불성,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것은 이름을 붙여서 그렇게 설명했을 뿐 실체로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없다는 것도 아니다. 있지만 없고 없지만 묘하게 있는 이 말로 할 수 없는 이치 너머를 관조해 볼 수 있어야 한다. 말이 이를 수 없는 낙처를 곧장 확인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무량심(四無量心)

수행하는 보살은 모든 중생을 아들처럼 보호하며, 중생을 대할 때 사랑스런 마음을 내고(慈心), 그들이 고통스러워할 때 함께 슬퍼하며(悲心), 그들이 기뻐할 때 함께 즐기며 기뻐하고(喜心), 모든 이들을 평등한 마음으로(捨心) 대하여라.

일체 중생을 대할 때의 마음가짐, 첫째는 사랑하는 마음, 둘째는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에게는 함께 슬퍼해 주고, 셋째는 그들이 기뻐할 때는 함께 기뻐해 주며, 넷째는 일체 중생을 잘났다거나 못났다거나, 높다거나 낫다는 분별없이 평등하게 대하라.

일천제(一闡提)

일천제(icchantika, 一闡提)는 정해진 것이 아니다. 그들도 결정적인 것이 아니므로 얼마든지 깨달을 수 있다. 즉, 4가지 계율을 범한 자, 대승경전을 비방한 자, 오역죄(五逆罪)를 지은 자일지라도 모두 불성을 지녔으므로 성불할 수 있다.

일천제(一闡提)란, 성불할 선근(善根)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현실적인 욕망만을 추구할 뿐 불법을 따르지 않는 무리들을 말한다. 단선근(斷善根), 대탐(大貪), 무종성(無種姓), 무참괴(無慙愧) 등으로 한역한다. 4가지 계율이란, 사중금계(四重禁戒)로써 스님들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계율로 ‘살생, 도둑질, 음행, 깨달았다고 하는 거짓말’을 뜻한다. 오역죄란, 대승과 소승에서 그 해석이 다소 다른데, 소승불교의 오역죄는 아버지와 어머니, 아라한을 죽이거나 해치는 죄, 승단의 화합을 깨뜨리는 죄, 부처님의 몸에 상처를 입히는 죄를 말한다.

대승불교의 오역죄는 절이나 탑을 파괴하고, 불상과 불경을 태우고, 삼보를 빼앗는 등의 죄, 불법을 비방하는 죄, 출가자를 죽이거나 수행을 방해하는 죄, 소승불교의 오역죄 중 하나를 범하는 죄, 십악업(十惡業)을 행하고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는 죄 등으로 그 범위가 다소 확장 된다. 이런 죄를 범한 일천제들은 성불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열반경』에서는 일천제 또한 정해진 것이 아니며, 결정적인 것이 아니므로 얼마든지 깨달을 수 있다고 설한다.

일천제가 성불할 선근이 없어서 결코 성불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정해진 법이 없다’라고 말하는 불법과 어긋나는 것이다. 불교는 언제나 고정된 실체를 부정한다. 고정되게 절대적으로 성불할 가능성이 없는 사람이란 있을 수 없다.

불신상주(佛身常住)

세존께서 가섭에게 이르셨다.

“선남자여 여래의 몸은 늘 상주불멸(常住不滅)하는 몸이며, 금강(金剛)의 몸이며, 음식으로 유지하는 육신이 아니니, 곧 법신(法身)이니라.”

가섭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그와 같다면 그 같은 몸을 저는 보지 못하였고, 오직 무상하고 무너지며 보잘 것 없는 음식으로 유지하는 몸만을 빼았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가섭이여, 그대는 여래의 몸이 견고하지 않아 무너지는 범부의 몸해 왔다고 말하지 말라. 여래의 몸은 무량한 억겁에 이르도록 견고하여 깨뜨릴 수 없으며, 인간이나 하늘의 몸이 아니며, 음식으로 유지하는 육신 또한 아님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여래의 몸은 청정 무구하며 머물 바 없는 곳에 머물며, 형상이 아니고 모양이 아니되, 또한 모든 모습으로 장엄하였나니, 여래의 법신은 이처럼 한없는 공덕을 모두 성취하였느니라. 그대는 이제부터 언제나 바르고 참된 마음으로 이 뜻을 사유하며, 마땅히 사람들을 위해 여래의 참 된 몸은 곧 법신임을 설하도록 하라.

내가 설하는 진아(眞我)는 바로 불성이다. ‘나’란 곧 여래장이며, 일체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는 것이 바로 참나다. 다만 이 참나는 많은 번뇌에 둘러싸여 있어 자신이 스스로 보지 못할 뿐이다. 마치 가난한 여인이 자기 집 창고에 황금보배가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 과 같다.”

부처님의 몸은 육신이 아닌 법신(法身)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다만 중생들을 위해 나투신 화신(化身)일 뿐, 참된 부처님의 몸은 법신이다. 법신은 항상 하여 무너지지 않아 금강(金剛)과도 같이 견고하며, 음식으로 유지하는 육체 같은 것이 아니다. 인간이나 하늘신의 몸도 아니며, 청정무구하여 티끌 하나 붙지 못하고, 어디에도 머물러 의지하지 않는다.

법신은 곧 이 우주법계, 일체 삼라만상이 드러나고 사라지는 그 배경과도 같으며, 이 우주 전체와 둘이 아니고, 모양도 없고 크기도 없으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기에, 우리의 생각과 사량 분별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법신이야말로 참된 부처이며, 진리이고, 그것이 바로 불성이며, 진아(眞我)다.

다만 중생들이 번뇌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참나인 법신을 스스로 보지 못할 뿐, 법신이 없는 것이 아니다. 법신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마음의 눈, 법신 그 자체의 눈 없는 눈으로 볼 뿐이다. 본래마음이 본래마음 스스로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악업(惡業)을 끊을 수 있다.

수발타가 부처님께 말했다.

“사람 중에는 평소 악행을 하는데도 부자로 잘살기도 하고, 착하게 사는데도 가난한 사람도 있습니다. 자비롭고 살생하지 않아도 빨리 죽는 사람도 있고, 살생만 하고도 장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중생이 과보를 받는 것은 전생 업(業) 때문이 아닌가요?

그대는 업에 대해 잘 모르는구나. 그대는 오직 과거 업만 있을 뿐, 현재의 업은 없는 것 같고, 현재 수행으로 과거의 악업을 제거할 수 있는 길이 없는 것 같구나. 불법에서는 현재 방편으로 정진하고 참회하면 얼마든 악업을 끊을 수 있다. 과거의 업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릇된 견해다.

과거의 업만 있다고 여기는 것은 잘못된 견해다. 과거의 업은 실체적인 것이기에 한 번 지은 과거의 악업은 반드시 받아야 한다고 여길 것도 없다. 과거의 죄의식에 시달리며, 괴로워할 필요도 없다. 사실 과거는 없다. 죄업도 죄의식도 없다. 과거의 죄업이 붙을 곳이 없지 않은가. 그것이 내 몸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어느 장소에 있는가? 그것은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과거 죄업에 얽매여 현재를 괴롭힐 필요는 없다.

과거에 악행을 많이 했더라도 현재에 부자로 살 수도 있고, 착하게 살았지만 현재가 가난한 사람도 있다. 만약 그 모든 것이 과거로부터 가져온 절대적인 업장 때문이라면 선인선과 악인악과(善因果惡 惡因惡果)가 납득할 만한 논리로써 현실에서 드러나야 할 것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죄업이란 정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얼마든 바꿀 수 있고, 참회할 수도 있으며, 깨달음을 통해 천 년간 어두웠던 동굴이 한 번의 불로 환해지듯 일체 모든 업장이 한꺼번에 소멸될 수도 있다. 그것은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업장이나 악업, 과거의 죄의식에 끌려다니는 존재가 아니다. 그 모든 업장의 주인이 되어 얼마든 끊어낼 수도 있다.

공덕천(功德天)과 흑암녀(黑暗女)

옛날 궁궐 같은 집을 짓고 사는 부잣집에 하늘에서 금방 내려 온 선녀같이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온몸에 진주, 보석들을 치장하고 찾아왔다. 미모와 향기에 취한 주인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신지요?”
“저는 공덕천(功德天)입니다.”
주인이 다시 물었다.
“당신은 왜 우리 집에 왔나요?”
공덕천은 말했다.
“나는 이 세상의 모든 복과 행운들을 모두 모아 당신의 집에 깃들게 하고자 찾아온 천사입니다.” 
주인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래요, 어서 안으로 들어갑시다.” 
주인은 진수성찬으로 대접하며 들떠 있었다. 
바로 그때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은 기쁜 마음으로 대문으로 나갔더니 거기에는 때가 잔득 끼고 더러운 넝마를 걸치고, 얼굴은 새까맣고 밉상인데다 주근깨, 기미까지 낀 작은 여자가 서 있었다. 불쾌해진 주인은 얼굴을 찡그리며 당장에 그 여자를 물리쳐 버리려고 했다.”
“당신은 누구시오?”
“저는 흑암녀(黑暗女)라는 여자입니다.”
“도대체 우리 집에는 왜 온 것이요?”
“저는 당신 집으로 수없이 많은 불행과 불화, 재앙과 질병, 가난과 나쁜 운수를 깃들게 하러 온 여신입니다.”
이 말을 듣고 주인은 버럭 화를 내면서 내쫓았다. 그러나 흑암녀는 주근깨 가득한 얼굴로 까만 눈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가라고 하면 나가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신 집 안에 들어 와 있는 공덕천이란 여인이 나와 쌍둥이 형제인데 우리 둘은 보이지 않는 끈이 달려 있어서 어디를 가든지 함께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떨어져서는 절대 못 사는 운명이니 내가 쫓겨난다면 언니도 나를 따라 나올 것이고, 언니가 집에 있는 한 나도 따라 집에 있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주인이 공덕천을 바라보니 공덕천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언제나 공덕천과 흑암녀는 함께 다닌다. 선과 악은 언제나 서로를 인연으로 생겨난다. 동전의 앞면만 있을 수는 없다. 앞면은 언제나 뒷면과 함께 생겨나고 함께 사라진다. 선한 사람은 악한 사람을 인연으로 선한 사람이 될 뿐이다. 크다는 것은 작은 것을 인연으로 큰 것이다. 이 모두가 인연이고, 인연은 언제나 동시생 동시멸이다. 대소, 장단, 선악, 생멸, 행복과 불행 등은 언제나 서로를 비추어 주는 거울이다. 언제나 다른 것을 인연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것이기에 둘이 아닌 하나이다. 그러니 좋은 것만 취하려고 애쓰거나, 싫은 것은 버리려 애쓰지 말라. 그 2가지는 사실 하나다. 좋은 것이든 싫은 것이든 있는 그대로, 오는 대로 내버려두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허용해 주라. 좋은 건 취하고 싫은 건 버리는 2가지 양변의 취사선택을 놓아버리면, 비로소 중도(中道)의 실천이 열린다. 받아들임이 시작된다.

열반경 사구게(四句偈)

모든 것은 무상하게 변화하니 이는 생멸법이다. 
생멸이 멸해 마치면, 바로 열반의 즐거움이다.

일제 모든 것은 무상하게 변화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생겨나는 모든 것들은 소멸하게 마련이다.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일체법은 곧 생멸법(生滅法)이다. 그러나 생멸법의 바탕, 배경, 근원에는 불생불멸법(不生不滅法)이 있다. 생멸법은 겉으로 드러난 모양의 세계가 가진 특정일 뿐, 근원의 세계에서는 무생법인의 불생불멸이 있다. 그것이 바로 열반의 즐거움이다.

중생들은 생멸하는 존재이지만, 부처는 불생불멸하는 열반의 존재다. 우리의 육신이나 오온(五蘊)은 태어났다가 죽어가는 무상한 존재 이지만, 우리의 근원은 불생불멸한 법신으로 영원하다.

살펴볼 경구들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어 본래 부처인 것이나, 집착에 의하여 모든 속박과 번뇌를 받는다. 한 생각 집착을 놓아버리고 본래부처 자리로 돌아갈 때, 모든 부처님과 똑같이 해탈하여 차별이 없게 된다.

한 가지 선한 행을 하면 백 가지 악을 깨는 것과 같다. 마치 작은 금강석이 수미산을 무너뜨리는 것 같고, 적은 불이 온갖 것을 태우는 것 같고, 소량의 독약이 중생을 해치는 것과 같다. 이처럼 비록 작은 선이라 할지라도 실제는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작은 선이 큰 악을 깨뜨리는 까닭이다.

일단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것은 죽음으로 돌아간다. 반드시 생명은 다할 때가 있다. 이루어진 것은 반드시 없어지고 모아진 것은 반드시 흩어지게 마련이다. 젊음은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고, 주색(酒色)은 병을 불러들인다. 고통의 수레바퀴는 끝없이 구르고 굴러서 쉬지 않는다. 이 세상은 덧없는 것이므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존재에게 영원한 즐거움은 없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물에 떠내려가면 작은 선도 닦아 익힐 틈이 없는 것처럼, 중생도 또한 그러하여 거친 번뇌의 흐름에 떠내려가다 보면 선법을 닦아 익히지 못한다.

집착하는 까닭에 탐욕이 생기고, 탐욕이 생기는 까닭에 얽매이게 되며, 얽매이는 까닭에 생로병사와 근심, 슬픔, 괴로움과 같은 갖가지 번뇌가 뒤따르는 것이다.

 

-법상 스님 불교 경전과 마음공부 글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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