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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경전

능엄경(楞嚴經)

by 파장波長 2024. 2. 15.

 보는 성품

“아난아, 소경의 눈에는 어두운 것만 보이지만, 여기를 보는 것이야 무슨 결함이 있겠느냐?
소경이 눈이 멀어 어두운 것만 보이는 것과 눈 있는 사람이 깜깜한 방에 있는 것과 이 두 현상은 다르냐 다르지 않으냐?” 
“다르지 않습니다.”
눈은 능히 색을 나타낼지언정
보는 성품은 마음이요, 눈이 아니니라.
“ 아난아! 이 가깝고 먼데 있는 모든 물질의 성질이 비록 여러 가지로 다르지만 똑같이 너의 청정하게 보는 정기로 볼 수 있는 것이니, 여러 가지 사물의 모양은 차별이 있을 지언즉 그것을 보는 성품은 다름이 없으니, 이 보는 정기의 오묘하고 밝음이 진실로 너의 보는 성품이니라.”

『능엄경(楞嚴經)』은 선(禪)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경전이다. 소경은 볼 수 없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소경이 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소경은 오직 어두운 것 그 하나만을 볼 뿐이다.

눈이 멀지 않은 사람 또한 어두운 방에 들어가면 다른 것은 전혀 볼 수 없고 오직 어둠만 보일 뿐이다. 눈을 감아도 마찬가지다. 소경이 어두운 것을 보는 것이나, 눈 있는 사람이 어두운 것을 보는 것이나 양쪽 다 ‘본다’는 점은 동일하다. ‘보는 성품’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눈으로 무언가를 볼 때, 보는 대상에만 마음이 가 있다. 보이는 대상을 상대로 이렇거니 저렇거니 분별하고, 좋고 싫다고 해석한다. 볼 때 보이는 대상을 따라가지 않는다면 무엇이 있는가? ‘보는 성품’이 있다. ‘보는 성품’은 무엇을 보든 달라지지 않는다. 화려한 세상을 보든, 어두운 방 안에서 깜깜한 것을 보든, 좋은 것을 보든, 나쁜 것을 보든, 보이는 대상은 아무리 달라지더라도 ‘보는 성품’은 소경이나 눈 있는 자나 다르지 않다.

보이는 대상을 따라가며 분별하지 말고 보는 성품을 돌이켜 보라. 보고 있는 바로 그놈은 누구인가?

손가락을 구부리고 펴는 것

부처님은 손가락을 구부렸다 폈다 한 뒤 아난에게 물었다. 
“너는 내 손이 구부렸다 폈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너의 보는 성품이 구부렸다 폈다고 생각하느냐?”
“물건을 본 것은 보는 성품이다. 또 내 손이 움직였을 지언즉 아난의 보는 성품은 흔들리지 않은 것이다.
무슨 까닭으로 너희는 흔들리지 않는 근본 성품을 잃어버리고 경계에 매달려서 윤회하느냐?”

손가락을 구부렸다 폈다 하는 이것이 바로 부처다. 손가락을 구부렸다 폈다 할 때 보이는 대상만을 쫓아가면 손가락을 구부리고 펴는 손가락의 움직임만 보일 뿐이다. 상(相)만 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상에 얽매이고, 대상을 따라가는 분별일 뿐이다.

보이는 대상을 따라가지 말고, 보는 성품을 돌이켜 보라. 손가락은 아무리 움직이더라도 보는 성품은 움직이지 않는다. 두 눈으로 세상의 그 모든 것들을 볼지라도 보이는 대상은 항상 다르지만 늘 같은 것이 있다. 보는 성품은 그 어떤 대상을 보더라도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윤회의 고통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이유는 이 자신의 근본 성품을 회광반조(回光返照)해 보지는 않고 대상만을 쫓아가는 중생의 습성 때문이다.

바다와 물결의 비유

“대왕이시여, 대왕께서는 이 몸은 마침내 변화해 없어질 것이라고 하셨는데, 죽어 없어질 때도 죽어 없어지지 않는 것이 있음을 아십니까?”
“모릅니다.”
“대왕이여, 그대가 세 살 때 보았던 황하강의 물과 열세 살 때 보았던 물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다름이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대왕이여, 그대의 얼굴이 비록 늙어 쭈그러들었으나 그 보는 성품만은 본래의 그대로 일뿐 늙거나 쭈그러든 것이 아닙니다.”
비유하면 맑고 깨끗한 큰 바다는 버리고 오직 바다 위에 생겨난 물거품을 바다인 양 잘못 인식하여 눈앞의 물결과 조수를 보고 바다라 하며 바다를 다 알았다고 하는 것과 같으니, 너희들은 미혹한 속에서도 배나 더 미혹한 사람이구나.

물거품과 물결은 거세게 치기도 하고 잔잔하게 치기도 한다. 끊임없이 크고 작은 물결이 바다 위에서 생겨나고 사라진다. 그러나 아무리 수없이 많은 물결이 생겨나고 사라질지라도 바다는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우리 몸이 태어나고 죽어간다고 할지라도 나고 죽는 이 육신은 하나의 파도일 뿐이다. 자성의 바다는 언제나 고요하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다. 어릴 때 보았던 강물과 나이가 들고 나서 보는 강물은 달라졌을지라도, 그 보는 성품만은 그대로일 뿐 늙거나 젊은 것이 아니다. 태어 나서 죽을 때까지 육신은 끊임없이 변해가지만, 보는 성품, 듣는 성품, 생각하는 성품은 변하지 않는다. 물결은 아무리 변하더라도 바다는 언제나 여여한 것처럼…

진여(眞)의 성품(性品)

허망한 허깨비 같은 물질이 그 성품은 오묘한 깨달음의 본체이다. 이처럼 오온, 육입, 십이처, 십팔계도 허망하게 생겼다 사라지는 것이지만, 본래는 여래장이어서 밝고 원만하고 참다운 성품이다. 성품 가운데는 가고 옴, 미혹과 깨달음, 생사를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느니라.

아난아! 어찌 육입(六入)이 본래 여래장인 오묘한 진여(眞如)의 성품이라고 하는가? 가령 어떤 사람이 눈동자를 움직이지 않고 오래 보다가 피로해지면 허공에서 허깨비 같은 꽃(허공꽃)이 보일 것이니 그 눈과 피로는 다 같은 보리로써 똑바로 보다가 다만 피로해져서 생긴 것일 뿐이니라.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수상행식(受想行識) 역부여시(亦復如是),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 오온(五蘊)이 곧 깨달음의 본체요, 육입(六入)이 곧 여래장(如來藏)인 진여(眞如)의 성품. 지금 이대로의 나를 떠나 따로 부처를 찾지 말라. 

지금 여기의 이것을 떠나 따로 불세계가 있다고 여기지 말라. 지금 이 자리가 바로 그 자리다. 이것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 이 평범함 속에 가장 위대한 깨달음이 깃들어 있다. 평상심이 곧장 도다.

듣는 성품

여래께서 라훌라를 시켜 종을 치게 하시고 아난에게 물으셨다.
“지금 종소리가 들리느냐?”
“들립니다.”
잠시 후 소리가 없어지자 부처님께서 또 물으셨다.
“지금은 소리가 나느냐 안 나느냐?”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너희들은 어찌하여 이랬다 저랬다 하느냐?
소리가 있고 없음을 아는 것은 그 대상인 소리가 있었다 없었다 하는 것이지 어찌 저 ‘듣는 성품’이야 있었다 없었다 하겠느냐.”
듣는 놈이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라 소리로 인하여 그 이름이 있게 되었네. 듣는 놈을 돌이켜 소리에서 벗어나면 해탈한 놈을 무엇이라 이름하겠는가. 하나의 근(根)이 본원으로 돌아가면 여섯 개의 근이 해탈을 이루게 되리라.
그 들음을 버리고 듣는 놈을 돌리게 된 다음이라야 지극히 요긴함이 된다. 무릇 들음을 버리고 듣는 놈을 돌리게 되면 부처님의 광명과 보리수와 무설시(無說示)와 중향처(衆香處)에 다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종소리가 날 때 종소리를 듣는 것처럼, 사실은 종소리가 나지 않을 때 아무것도 듣지 않는 것이 아니다. 침묵을 듣고 있다. 소리 없음을 듣고있다. 온갖 소리가 나더라도 그 소리를 따라가면 다 분별되어 다르게 들리겠지만, 그 소리를 듣는 성품을 돌이켜 회광반조(回光返照)해 보면 그것은 전혀 있고 없는 것도 아니고, 변하는 것도 아니다.

관세음보살의 이근원통(耳根圓通), 즉 소위 관음법문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들음을 버리고 듣는 놈을 돌리게 된다는 것은 듣는 그 소리의 뜻을 따라가 분별하던 습관을 버리고, 듣는 놈이 누구인지를 돌이켜 회광반조하여 비추게 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듣는 놈을 돌리는 반문문성(反聞聞性)의 수행이다.

백장스님 문하에서 한 스님이 종소리를 듣고 깨달았는데 백장선사는 곧 “뛰어나구나. 이것이 곧 관세음보살님께서 도에 이르는 방법이다.” 라고 하셨다.

머리를 찾는 연야달다

“실라벌성(室羅筏城)의 연야달다(演若達多)는 홀연히 어느날 거울을 보다가 자기 머리와 얼굴, 눈이 보이지 않자 도깨비라 고성을 내며 미쳐서 머리를 찾아 뛰어다녔다고 한다. 너는 연야 달다가 왜 미쳐서 달아났다고 생각하느냐?”

“예, 그는 그저 제 마음이 미친 것일 뿐, 더 이상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진여(眞如) 묘각(妙覺)은 시방세계를 밝게 비추고 법계에 두루 하며 본래 원만하고 밝고 미묘하다. 사람들은 그것이 없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니, 어찌 원인이 있겠느냐?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꿈에서 깬 사람이 꿈속의 일을 말함과 같으니, 꿈속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할지라도 무슨 이유로 꿈속의 물건에 집착하겠느냐?

저 실라벌성의 연야달다는 무슨 이유로 스스로 머리를 찾아 뛰어다니겠느냐? 홀연히 미친 마음만 쉬어버리면 머리를 밖으로 찾아 나서지 않을 것이다. 미친 마음 때문이 아니라면 어찌 제가 달고 있는 머리를 잃어버렸겠느냐?

미친 마음만 쉬고 나면 깨달음의 청정하고 밝은 마음이 본래 법계에 두루 원만하여 다른 사람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어찌 수고스럽게 갈고 닦아 수행이라는 방법을 통해 깨닫고자 하는가?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자기의 옷 안에 여의주가 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곤궁하게 걸식하면서 다른 곳을 돌아다니는 것과 같다. 비록 가난할지라도 사실은 여의주를 잃은 적이 없으니, 지혜 있는 이가 여의주를 가르쳐 주기만 한다면 그는 소원을 이루고 큰 부자가 된다. 비로소 신비한 여의주가 밖에 있던 것이 님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연달다는 정신이 혼미해지고 미쳐서 머리가 없다는 착각과 망상을 일으키고는 머리를 찾아 밖으로 뛰어다닌다. 머리를 달고서 머리를 찾아다니는 그 이유는 오로지 미친 마음, 미혹한 마음 때문이다. 머리가 없다는 미혹한 마음, 미친 마음만 사라진다면 어찌 제 머리를 달고 제 머리를 찾아 나서겠는가?

『능엄경』에서는 이처럼 우리의 본래 성품, 진여묘각은 언제나 시방세계에 두루 밝고 원만하며 밝고 미묘하게 드러나 있지만 중생이 미혹하여 다만 보지 못할 뿐임을 설하고 있다. 사람들은 어리석고 미혹하며, 제 스스로 일으킨 망상분별에 가로막혀 있어서 눈앞에 드러나 있는 진여묘각의 본래성품을 보지 못할 뿐이다. 그러한 미혹함만 쉬어버린다면 머리는 언제나 없어진 적이 없다. 머리를 달고 머리를 찾을 아무 이유가 없다.

이처럼 머리가 이미 있지만 없다고 망상한 것처럼, 이미 드러나 있는 깨달음을 없다고 착각하는 것일 뿐이니, 이미 드러나 있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애써 수고스럽게 갈고 닦고 수행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저 미혹함만 쉬어버리면 될 뿐이다. 따로 수행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다만, 참된 수행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특정한 방법으로 앉아서 특별한 수행을 애써 갈고 닦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미혹을 깨버리는, 분별 망상을 녹여 없애주는 꿈 깬 자의 법문을 지속적으로 듣는 것이다. 바른 법을 가까이하고, 법문을 듣고, 언제나 드러나 있다고 하는 이 법이 왜 나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일까 하고 간절히 법을 그리워하는 것, 그 것이 바로 참된 수행이다.

『법화경』의 비유처럼, 옷 안에 값비싼 여의주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모르면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는 것과 같다. 이미 있는 여의주를 확인하는 것, 그것이 불법이고 수행이지, 없는 것을 애써 갈고 닦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법상스님 - 불교 경전과 마음공부 글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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