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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경전

능가경(楞伽經)

by 파장波長 2024. 2. 15.

장식(藏識)과 여래장(如來藏)

대혜여, 시작 없는 헛된 악습에 훈습된 것을 장식(藏識)이라고 한다.
이 장식에서 ‘나’라는 생각을 일으키는 제7식을 내고, 무명이 머무는 것이다. 비유하면 큰 바다에 파도가 이는 것과 같아서 그 체는 항상 계속되어 끊이지 않는다.
만일 여래장에 장식이 없으면 곧 생사가 없다. 여래장 장식의 본 성품은 청정하지만 객진(客塵)으로 물들어져 부정하게 된 것이다.
여래장의 장식은 부처님의 경계이므로 너희들 같은 비구와 청정한 지혜의 보살들이 행할 바요, 외도와 소승이 행할 바가 아니니라.

장식(藏識)은 업의 종자(種子)를 저장하는 식(識)으로 곧 아뢰야식(阿賴耶識) 이다. 능가경(楞伽經)』의 특징은 여기에서 보듯이 아뢰야식이라는 업의 종자를 저장하는 장식을 곧 여래장과 같다고 설하는 것이다. 본래 마음은 청정하지만 어리석음이 훈(薰)되어 그 본래의 청정한 바탕을 덮어버린 것이다. 본래 청정한 마음을 '바다'라고 하고, 그 위를 뒤덮은 무명을 파도로 본 것이다.청정한 마음이 법신이며 바다이고, 아뢰야식은 청정법신을 무명이 덮은 것으로 파도와 같다. 파도의 측면에서는 저장식인 아뢰야식이고, 바다의 측면에서 보면 여래장인 것이니, 그 둘은 결국 서로 다르지 않다. 여래장이 곧 아뢰야식인 것이다. 청정법신 여래가 미혹과 업장에 감추어져 있어서 여래장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색즉시공, 번뇌즉보리처럼 아뢰야식 즉 여래장인 것이다.

이것이 『능가경』의 특징이다. 『승만경』이나 『열반경』 같은 경전에서는 아뢰야식이 아닌 불성이나 여래장을 설한다. 『해심밀경』 같은 유식 사상에서는 아뢰야식을 설한다. 그러나 이 『능가경』에서는 여래장과 아뢰야식을 통합하고 있다. 여래장과 아뢰야식을 둘이 아닌 것으로 보아, 여래장이 무명에 덮이면 아뢰야식이고, 아뢰야식에서 무명이 벗겨 지면 여래장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통합은『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 보다 정교하게 마무리된다.

여래장에 장식 즉 아뢰야식이라는 업식(業識)이 없으면 생사윤회의 업이 사라지니 생사가 없다. 여래장의 본 성품은 청정하지만 객진으로, 즉 업식의 때로 물들게 되면 허망한 생사윤회가 생겨난다.

삼계유심(三界唯心), 유식무경(唯識無境)

사문과 바라문이 모든 법을 살필 때 자기 성품에 미혹하여 허공의 구름 같고, 빙빙 도는 불 수레바퀴와 같고, 신기루 같고, 환과 같고, 불꽃 같고, 물속에 비친 달 같고, 꿈같아서, 자기 마음을 떠나지 않은 것인데 무시이래의 허망한 견해 때문에 일체법이 밖에 있다고 한다.
여래장의 자성청정함을 전해서 그 32상으로 일체중생의 몸속으로 들어간다. 여래와 일체중생이 평등해서 둘이 아니다.
진실한 이치는 오직 마음뿐 경계는 없느니라.
대혜여, 만약 경계가 환과 같아 자기 마음에서 나타나는 것임을 알면 곧 삼계의 괴로움과 무지와 애욕의 업이 소멸한다. 
여래장은 청정상이지만 객진번뇌에 오염되어 부정한 것이 때 묻은 옷 속에 있는 것과 같다.
어리석은 이들에게는 삼승(三乘)이 있다고 말하지, 오직 마음 경계는 없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대혜여, 그런 사람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께서 설하신 자기 마음의 참된 경계는 알지 못하고, 마음 밖의 경계에 사로잡혀 항상 생사를 돌고 돌아 끊이지 않는다.
중생은 어리석어 대상에 집착한다. 과거로부터 쌓아온 습기로 인해 모든 현상이 자기 마음에서 생겨난 것임을 알지 못한다. 의 식의 본질을 바로 알아, 모든 현상이 자기 마음에서부터 생겨난 것임을 철저히 깨닫는다면 집착하는 주관과 집착되는 대상의 대 립을 떠나 분별없는 세계에 이를 수 있다.

유식무경(唯識無境), 참된 이치는 오로지 마음뿐, 경계는 없음이다. 일체법은 결코 밖에 있지 않다. 일체의 모든 경계는 신기루, 환영, 불꽃, 물에 비친 달, 꿈과 같아서 실체가 없다. 경계는 환영과 같아 자기의 마음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가 그토록 집착하고 소유하려 하던 그 모든 외부의 경계, 대상, 물질들이 사실은 자신의 마음에서 나타난 것임을 안다면 애욕이 사라질 것이고, 무지가 사라질 것이고, 모든 고통이 사라질 것이다.

어리석은 이들에게는 유식무경을 설하지 못하지만, 지혜로운 이에게는 유식무경, 삼계유심(三界唯心)을 설한다.

유식무경에서 식(識)은 인간의 의식 즉 육식(六識)을 나타낸다. 그리고 육식 또한 실체가 없어 공하다. 결국 유식무경에서 ‘오직 식만 있다’ 는 말은 ‘식’이 고정불변한 실체라는 것도 아니고, 여래장이라는 말도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다시 여래장을 설하는 이유는, 여래장이라는 마음 바탕, 근원의 마음에서 식이라는 허망한 분별의식이 드러나고 사라지기 때문이다. 허망한 분별의식인 식의 근원, 배경, 바탕이 바로 여래장이기 때문이다.

식이 바로 객진번뇌(客塵煩惱)이니, 여래장은 본래 청정상이지만 ‘식’이라는 객진번뇌에 오염되어 있을 뿐이고, 그 오염된 식이 이 세상이라는 일체의 대상 경계를 거짓으로 지어낼 뿐, 그 대상은 실체가 아니다. 물론 그 대상을 지어내는 식 또한 실체적인 것은 아니다. 여래장이라는 청정한 바탕 위에서 거짓으로 식이 일체의 대상경계를 지어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여래장과 유식무경의 관계를 설하는 이유다.

점수(漸修)와 돈오(頓悟)

“세존이시여, 어떻게 일체 중생이 현실에서 자기 마음의 흐름을 청정하게 합니까? 점차(漸)로 청정하게 되는지요? 아니면 단번(頓)에 청정하게 되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혜여, 점차로 청정하여지지 단번에 되는 것이 아니다. 나무 열매가 점점 익고 단번에 익지 않는 것처럼 현실적으로는 일체 중생의 마음의 흐름도 그와 같다. 점차로 청정하게 되는 것이지 단번에 청정하게 되지는 않는다.
도공이 그릇을 만들 때 조금씩 만들어지는 것이지 단박에 완성되지 않듯이, 중생의 마음의 청정함도 그와 같이 점차로 흘러서 되는 것이지 단번에 되지는 않는다.
비유하면 땅 위에 초목이 피어날 때 점차로 생기지 단번에 나지 않는 것과도 같다. 모든 부처님께서 중생의 마음의 흐름을 청정하게 하심도 그처럼 점차로 되는 것이지 단번에 되지는 않는다.
대혜여, 비유하면 사람이 음악과 글과 그림 등 갖가지 기술을 배울 때도 점차로 되지 단번에 이루어지지는 않듯이 모든 부처님께서 중생의 마음의 흐름을 청정하게 하심도 그처럼 점차로 되는 것이지 단번에 되지는 않는다.”

돈오돈수(頓惡頓修)니 돈오점수(頓惡漸修) 하는 논쟁들은 선종의 역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논쟁거리였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관점의 차이일 뿐 본질에서는 서로 다르지 않다.

일단 깨달음은 돈오(頓惡)다. 몰록 깨닫는다. 다만 몰록 깨닫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신심을 내어 발심을 하고 꾸준히 법을 가까이하고, 법문을 듣고, 수행을 하면서 의심과 분심(憤心)을 이어가는 등의 정진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점차적인 공부를 통해 깨닫는다고 볼 수 있겠으나, 깨달음의 측면에서 보면 아무리 그렇게 발심을 이어가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할지라도 깨달음을 얻는 그 견성의 순간은 점차가 아닌 몰록, 단박에 깨닫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이렇게 단박에 깨닫는 ‘돈오’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으나, 돈오 이후에 보임의 단계에서 점차적으로 닦아가는 것인가, 아니면 돈오를 하면 곧장 그 자리에서 수행 또한 몰록 끝나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논쟁의 중심이다. 바로 이 점이, 사실은 서로 다르지 않고 다만 관점의 차이일 뿐이라는 것이다.

돈오, 즉 견성의 깨달음이 있으면 사실은 그 자리가 이미 깨달음의 자리다. 자기의 성품을 확인했으면 그것으로 깨달음은 끝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돈오돈수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중생들의 오랜 습기로 인해 깨달음의 자리를 이미 확인했으면서도, 자꾸만 생각과 분별심이 올라오고, 이 자성의 자리가 조금씩 희미해져 가는 듯이 느껴진다. 대부분의 경우 깨달음의 순간에 부수적으로 일어나는 경이로운 느낌이라거나, 놀라운 체험 등의 부수적인 느낌, 감정에 집착한 나머지 그런 느낌이 깨달음인 것으로 오해 한다. 그래서 그런 감정적인 황홀경 같은 것을 붙잡으려고 하지만 그것은 짐시일뿐 곧 물러가고 다시 평상으로 돌아간다. 그러다보니 깨달음이 왔는데 다시 사라졌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이는 깨달음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깨달음에 익숙하지 않고, 확연하지 못한 중생의 분별심의 습기로 인해 오해한 것이다.

새로운 깨달음의 자리를 확인했더라도 이제부터는 거기에 익숙해지는 시간, 완전히 그 자리에 안착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기 전 까지는 왔다 갔다 하는 것처럼 보인다. 세간과 출세간, 깨달음의 자리와 세간의 자리를 왔다 갔다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서 점차 이 공부를 꾸준히 이어가다 보면, 점차적으로 안정이 되고, 이 자리에 익숙해지면서, 결국 세간과 출세간이 둘이 아니라는 불이법에 대한 확고함이 서게 된다.

때로는 이때 두 번째 깨달음이 왔다는 표현을 쓰기도 하지만, 이것은 또 다른 더 높은 깨달음이 온 것이 아니라, 첫 번째의 깨달음에 대해 더욱 익숙하게 자리 잡는 체험에 불과하다.

깨달음의 단계가 두 번, 세 번 있는 것이 아니다. 보통 이러한 체험은 초견성(初見性) 이후에도 한두 번 정도씩 더 경험하는 경우가 보통이다. 이것은 단계적인 깨달음이 아니라 첫 번째의 돈오가 점차 익숙해지고, 업습은 점차로 옅어지는 경험일 뿐, 새로운 깨달음을 또다시 얻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점수라고 말할 수도 있고, 돈수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능가경』에서는 업습을 조복시키고, 깨달음의 자리에 점차 익숙해지는 관점에서 점수를 설한 것일 뿐, 본질의 깨달음은 언제나 돈오일 뿐이다.

삼자성상(三自性相)

대혜여,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3가지 자성의 모양을 잘 알아야 한다. 어떤 것이 3가지 자성상인가?
첫째는, 망계자성(妄計自性, 망령되이 헤아리는 자성, 遍計所執性)이며,
둘째는, 연기자성(緣起自性, 인연 따라 연하여 일어나는 자성, 依他起性)이고,
셋째는, 원성자성(圓成自性, 원만한 성품의 자성, 圓成實性)이다. 

망계자성은 상으로부터 생긴다. 이름에 계착하는 상(名)과 사물의 모양(事相)에 계착하는 상, 이 2가지를 망령되게 헤아리는 성품에서 생긴다.
대혜여, 의지하는 바와 연기하는 바에서 일어나니 이것이 연기자성이다.
어떤 것이 원성자성인가?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는 상이 일체분별을 떠나 바른 깨달음을 얻은 지혜의 진여이다. 이것이 원성 자상의 여래장심이다.

유식불교에서 매우 중요한 삼성설이 『능가경』에서는 망계자성(변계소집성), 연기자성(의타기성), 원성자성(원성실성)으로 나온다. 망계자성 즉 변계소집성은 분별망상에 의해 만들어진 허망한 것들을 말한다. 연기자 즉 의타기성은 인연을 만나 생겨난 것들을 말한다. 원성자성 즉 원성실성은 원만하게 스스로 완성된 참된 성품을 말한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인연을 따라서 이루어진 것이거나, 망령된 우리의 헛된 분별망상 때문에 있다고 여겨진 것들뿐이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원성실성이 있다.

망계자성은 허망하게 생겨난 것으로,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서 허망하게 상(모양)으로 그려낸 것이다. 우리는 허망하게 만들어낸 모양에 이름을 붙여서 헤아리고, 모양을 헤아린다. 명상(名相)에 집착하는 것이다. 대상에 이름과 모양을 붙여서 허망하게 분별심으로 대상을 실체화하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모든 것들을 변계소집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생겨난 모든 상(相)은 실체적인 것이 아니다. 그래서 상무자성(相無自性)이라고 한다.

연기자성은 인연 따라 생겨난 것들, 의존적으로 생겨난 것이다. 일체 모든 것들은 인연 따라 생겨나지 않은 것이 없다. 인연생기로 인해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인연 따라 생겨난 것은 인연이 다하면 사라질 유한하고, 비실체적인 것일 뿐이다. 인연생 인연멸하는 것에는 실체가 없다. 그래서 인연 따라 생겨난 모든 것은 사실 진짜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생무자성(生無自性)이라고 한다.

원성자성은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지 않고, 분별에 의해 허망하게 생겨난 것이 아닌 일체 분별을 떠난 원만한 본래 성품이다. 그러나 물론 이 또한 본래성품이라는 특별한 자성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승의무자성(勝義無自性)이라고 한다.

오법(五法)

대혜여, 어떤 것이 오법(五法)인가? 첫째는 명(名)이고, 둘째는 상(相)이며, 셋째는 분별(分別)이요, 넷째는 정지(正智)요, 다섯째는 진여(眞如)이다.
대혜여, 어떤 것이 명인가? 말하자면 안식과 눈앞의 색(色) 등인 일체 모든 존재의 모양이니 소리의 모양, 귀의 모양, 코의 모양, 혀의 모양, 몸의 모양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모양을 나는 말하여 명상(名相)이라고 하느니라.
대헤여, 어떤 것이 분별인가? 어떤 존재에 대해 이름을 말하고 상을 취하여 요별(了別)하되, ‘이것은 분명 이와 같다’고 분별함에서 말하자면 코끼리, 말, 수레, 사람 등으로 가지가지 모양을 분별함이니 이를 분별이라 이름한다.
배혜여, 어떤 것이 정지인가? 명과 상을 볼 뿐 그 이면의 진실을 보지 않나니…  분별식의 모양은 바른 것이 아니니… 이를 정지라 이름한다. 보살은 정지에 의하여 명상을 하여 있다거나 없다고 하지 않으니 유무(有無)의 삿된 견해를 떠났기 때문이다. 명과 상을 보지 않는 것이 바로 이 경지이니, 그렇기에 나는 말하여 진여(眞如)라고 이름한다.
대혜여, 보살이 진여에 머무는 자는 모양 없는 고요한 경계에 들어가리니, 들어가서는 보살의 첫 번째 환희지(歡喜地)를 얻게 되리라.

어리석은 중생은 대상을 명(明)과 상(相)으로 분별한다. 어리석어 미혹한 이는 주관적인 의식으로 분별하며, 객관 세계를 이름과 모양으로써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명과 상을 분별하여 보지 않고 바른 지혜, 즉 정지로 보게 되면 그것은 곧 진여가 된다. 깨달은 지혜로운 이의 주관은 정지가 되고, 객관은 진여가 된다.

4가지 선(禪),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

대혜여, 4가지의 선이 있다.
첫째는, 우부소행선(愚夫所行禪)으로 이는 어리석은 범부들이 닦는 선이다.
둘째는, 관찰의선(觀察義禪)으로 이는 이치를 관찰하는 선이다.
셋째는, 진여반연선(眞如攀緣禪)으로 진여에 반연하는 선이며,
넷째는, 제여래선(諸如來禪)으로 즉 모든 부처님께서 닦는 선이다.

대혜여, 어떤 것이 우부소행선인가? 어리석은 범부가 닦는 선으로 소승법을 닦는 이가 ‘나 없음(無我)’을 알고, 모든 사람들은 뼈마디의 몸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모두 무상하고 괴롭고 더러운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관찰하여 집착하지 않고, 모든 번뇌를 없애 삼매에 이르니 이것이 우부소행선이다.
어떤 것이 관찰의선인가? 이치를 관찰하는 선이다. 인무아(人無我)를 아는데서 한발 더 나아가 법무아(無戎)를 관찰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진여반연선인가? 인무아, 법무아가 둘이 있다고 분별하면서 허망하게 생각하니,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면 무아라거나 무아가 아니라거나 하는 망상이 일어나지 않느니라. 이것이 진여반연선이다. .어떤 것이 제여래선인가? 여래의 경지에 들어가 증득한 성스러운 지혜와 법락에 머무르며, 중생을 위해 부사의(不思議)한 일을 행하니 이것이 모든 부처님들이 닦는 선이니라.

첫 번째 우부소행선은 말 그대로 어리석은 범부가 닦는 선으로 무아법을 관찰함으로써 ‘나’에 집착하지 않고, 아집과 아상이라는 번뇌를 없애는 선이다. 이는 범부선이고 소승선이다. 아공(我空), 인무아(人無我)를 깨달아 ‘나’에 집착하지 않는 선이다.

둘째 관찰의선은 이치를 관찰하는 선으로, 인무아(人無我)뿐 아니라 법무아(法無我)를 관찰하는 선이다. 아공법공을 관하는 선이다. ‘나’만 공한 것이 아니라, 일체 모든 존재인 ‘법’도 공함을 깨닫는 것이다. 나도 세상도 모두 공함을 요달하는 것이다.

세 번째 진여반연선은 인무아와 법무아,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을 둘이라고 나누어 생각하는 분별조차 사라지는 선이다. 나와 세상이 따로 있거나, 나 없음과 일체법의 없음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는 자각이다.

네 번째 제여래선은 완전한 여래의 경지에 들어가 일체의 분별없이 성스러운 지혜와 법의 즐거움을 누리는 선으로, 이때는 다시금 중생들에게 내려와 중생들을 위한 이타적인 부사의한 자비행을 실천하게 된다.

선불교와 관련된 경구(經句)

나는 정각을 이룬 그날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49년간 한 자도 설하지 않았다.(如來一字不說)
달을 가리켜 보이는데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을 보는 것과 같이, 경전의 문자를 볼 뿐 자신의 진실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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