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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교리

아뢰야식(阿賴耶識)

by 파장波長 2024. 2. 15.

유식학파가 대승불교에서 독립된 학파로 자리매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은 아뢰야식(阿賴耶識)입니다. 이 식의 발견은 ‘부파불교’이래 윤회의 주체에 대한 추구의 긴 여정에 종지부를 찍은 셈입니다. 

바라문교가 윤회의 주체를 아(我)라고 하는 정신적인 상징을 설정한 반면, 불교는 무아(無我)를 주창하면서 윤회를 설명해야 하는 어려운 입장에 놓이게 됩니다. 즉 전생의 업력에 의해 현재의 자신이 형성된다고 할 때, 전생의 자기와 현재의 자기를 동일체로 설정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불교윤회설이 안고 있는 문제점이었던 것입니다. 

부파불교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십이지연기설(十二支緣起說)로 설명하는 것과 십이지연기설과는 별도로 윤회의 주체를 설정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습니다. 

설일체유부의 경우는 전자를 취해 십이지연기설에서 윤회의 주체를 오취온(五取蘊)으로 보았고, 상좌부의 유분식(有分識), 대중부의 근본식(根本識), 화지부의 궁생사온(窮生死蘊) 등과 같은 정신적인 기체를 윤회의 주체로 설정한 것은 후자의 경우입니다. 

유식학파에서는 처음에는 이 두 가지 방향이 모두 추구되었으나 후에 둘이 결합되어 십이지연기설 가운데 식을 아뢰야식으로 설정하기에 이릅니다. 아뢰야식이라는 개념은 유식학파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유식학파가 이 식을 발견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요가의 체험에서 나옵니다. 

요가는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몰두시켜 6식의 활동을 멈추게 하는 것을 본질로 합니다. 이 6식의 활동이 멈추면 그 속에 잠재되어 있던 심층심리의 세계가 전개되는데 이 심층심리의 세계가 바로 아뢰야식의 세계인 것입니다. 

이 아뢰야식의 대상과 인식작용은 깊고 미세하여 지각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따라서 유식학파에서는 성문과 독각이 6식의 현상만을 관찰하는 것에 비해 대승의 보살은 심층의 현상도 관찰하여 모든 대상을 아는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증득해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뢰야라는 개념은 원시불교경전에 나오며 ‘집착’이나 ‘집착의 대상’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부파불교에서는 집착의 대상으로 여러 가지 사물들이 고려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유식학파에서는 집착의 근원적인 대상으로 아뢰야식을 발견한 것입니다. 따라서 집착의 근원적인 대상 즉 ‘집착되어 진 식’이라는 의미에서 아뢰야식이 만들어 졌습니다. 아뢰야에는 이 이외에도 장(藏)이나 택(宅)으로 한역되는 ‘저장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아뢰야식은 모든 법을 습기(習氣)의 형태로 저장하고 있습니다. 습기는 과거에 지은 행위의 인상이므로 모든 법을 결과로서 저장하고 있는 셈입니다. 요가 수행자들이 이 식이 마치 습기를 저장하는 곳이나 창고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아뢰야를 붙여 아뢰야식이라고 명명했습니다. 그런데 이미 아뢰야가 집착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었으나 유식학파에서는 집착보다는 저장 즉 섭장(攝藏)의 의미가 더욱 강조되었다고 보입니다. 이는 무착의 섭대승론에 아뢰야식의 어의 해석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무슨 인연으로 이 식을 아뢰야식이라고 명하는가라는 질문에 이 식은 일체 중생의 잡염품법이 여기에 저장되어 과성(果性)이 되고 인성(因性)이 되고, 중생은 이 식을 섭장(攝藏)해서 자아로 삼기 때문에 아뢰야식이라고 명한다고 답하고 있습니다. 아뢰야식(阿賴耶識)의 뜻은 무엇인가요?


1. 아뢰야식(阿賴耶識)의 종류

(1) 팔식(八識)

마음 즉, 식(識)에는 총 8가지가 있어 팔식(八識)이라고 부릅니다.

전오식(前五識) : ①안식(眼識), ②이식(耳識), ③비식(鼻識), ④설식(舌識), ⑤신식(身識) 
⑥제6의식(第六意識) 
⑦제7말나식(第七末那識)
⑧제8아뢰야식(第八阿賴耶識)

전오식(前五識)은 형상(色), 소리(聲), 냄새(香), 맛(味), 감촉(觸)이라는 5가지 물질을 대상(所緣)으로 일어나는 마음입니다.

①안식(眼識)은 형상을 대상으로 하여 일어나는 마음이고, 
②이식(耳識)은 소리를 대상으로 하여 일어나는 마음이고, 
③비식(鼻識)은 냄새를 대상으로 하여 일어나는 마음이고, 
④설식(舌識)은 맛을 대상으로 하여 일어나는 마음이고, 
⑤신식(身識)은 감촉을 대상으로 하여 일어나는 마음입니다.

제6의식은 물질과 정신과 열반 등 일체법을 대상(所緣)으로 일어나는 마음이고,  제7말나식은 항상 제8아뢰야식을 대상으로 ‘나’라고 헤아리고 집착하며, 제8아뢰야식은 전칠식의 본체인 근본마음입니다.

(2) 식(識)의 능변(能變)과 소변(所變)

변(變)이란 식(識)이 스스로 변하여 주관인 견분(見分)과 객관인 상분(相分)의 둘로 나누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능변(能變)이란 본식(本識)인 자증분(自證分)이고, 소변(所變)이란 이 능변이 전변(轉變)하여 모습을 바꾼 것입니다.

이 소변(所變)은 견분과 상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여기에 아(我)와 법(法)을 가설(假設)함으로 인하여 가지가지의 상(相)이 나타납니다. 즉, 아(我)와 법(法) 그리고 견분과 상분이 모두 식(識)이 변해서 나타난 것(識所變)입니다.

능변 즉 식은 팔식인데 이것을 크게 나누면 3가지가 되니 첫째는 이숙식(異熟識) 즉 제8아뢰야식으로서 원인과 결과가 다르게 익는 특성이고, 둘째는 사량식(思量識) 즉 제7말나식으로서 항상 ‘나’를 헤아리고 집착하는 특성이며, 셋째는 요별경식(了別境識) 즉 전육식으로서 항상 경계를 분별하여 아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3) 유식무경(唯識無境)

이 아(我)와 법(法)은 항상 안의 식(內識)에 있는 것이지만, 분별로 인하여 밖의 경계(外境)처럼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모든 유정(有情、衆生)들은 시작없는 과거로부터 이것을 집착하여 진실한 나(實我)와 진실한 대상(實法)이 있다고 집착해 왔습니다. 마치 꿈을 꾸는 사람이 꿈속에서 밖의 경계가 실제로 있다고 집착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밖의 경계라고 착각하는 꿈속의 모든 사물이 자신의 의식속에 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오직 마음뿐 경계가 없다(唯識無境)”고 말합니다.

2. 아뢰야식(識)의 성질

아뢰야식은 가장 깊은 마음으로서 극히 미세하여 알기 어려우며, 부처님의 지혜로서만 볼 수 있습니다. 아뢰야식은 진여(眞如)와는 다르지만 진여의 의지처(所依)가 됩니다.

(1) 아뢰야식의 3가지 명칭

아뢰야식은 3가지 이름이 있으니 아뢰야식, 이숙식, 일체종식입니다.

① 아뢰야식(阿賴耶識)

아뢰야는 “업종자(業種子)가 저장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뢰야식을 장식(藏識)이라고 부릅니다. 장(藏)에는 삼장(三藏)의 뜻이 있으니, 능장(能藏), 소장(所藏), 집장(執藏)입니다.

가. 능장(能藏)이란 “업종자를 간직한다는 뜻(持種義)”입니다.
나. 소장(所藏)은 “훈습을 받는다는 뜻(受熏義)”입니다.
댜. 집장(執藏)은 “집착한다”는 뜻(執藏義)입니다. 즉, 제7말나식이 제8아뢰야식을 ‘나’라고 집착한다는 것입니다. 잡염(雜染)과 서로서로 연(緣)이 되므로 유정(有情)이 이 제8식을 집착하여 ‘안의 나(內我)’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② 이숙식(異熟識)

이숙식은 결과를 말한 것입니다. 이숙(異熟)은 “다르게 익는다”는 뜻입니다. 업을 지은 원인(因)은 선성(善性)이었는데 결과(果)는 낙(樂)의 무기성(無記性)이 되니 다르게 익는 것이고, 불선성(不善性.惡性)의 인(因)은 고(苦)의 무기성(無記性)이 되니 다르게 익는 것입니다. 또한 이류(異類)로 달라지니 인간의 종류였다가 축생의 종류가 되는 것 등입니다.

③ 일체종식(一切種識)

일체종식은 원인을 말한 것입니다. 일체종(一切種)은 “일체법의 종자가 저장되어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전칠식(前七識)의 법에 훈습되어 전칠식의 일체법의 종자를 저장하여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마치 레코드판에 모든 소리를 저장한 것과 같습니다. 전칠식의 과거와 미래의 일체 현행(現行)은 모두 이 식에 저장된 종자로부터 발생하여 일어나는 것입니다.

(2) 소연(所緣)

이 아뢰야식의 대상 즉 소연(所緣)은 아뢰야식이 변해서 나타난 것입니다. 여기에는 3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모든 종자(諸種子)이고 둘째 유근신(有根身)이고 셋째는 처(處)입니다.

① 모든 종자(諸種子)

모든 종자란 모든 상(相)과 명(名)과 분별습기(分別習氣)를 말합니다. 이중에 상(相)이란 상분(相分、객관)입니다. 명(名)이란 견분(見分、주관)입니다. 분별습기란 능(能、주관)과 소(所、객관)을 분별하여 업종자를 훈습하기 때문에 분별습기라고 말하며 이것은 곧 종자(種子)의 뜻입니다.

종자는 2종류로서 유루법(有漏法)의 종자가 있고, 무루법(無漏法)의 종자가 있습니다. 유루법의 종자는 이숙식의 소연(대상)이 됩니다. 그런데 무루법의 종자는 비록 이숙식과 분리되지는 않지만 이숙식의 소연은 아닙니다.

② 유근신(有根身)

유근신(有根身)이란 오근(五根)인데 색근(色根) 즉, 승의근(勝義根)과 근의처(根依處) 즉, 부진근(浮塵根)입니다. 승의근은 감각 그 자체(신경)이고, 부진근은 이 감각이 의지한 물질인데 눈알이나 고막 등과 같은 것입니다.

③ 처(處 )

처(處)란 중생들(有情)이 의지하여 살고 있는 세상 즉, 기세간(器世間)을 뜻합니다. 이숙식이 공상(共相)의 업종자로 인하여 성숙한 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곧 밖의 사대(四大)와 사대로부터 파생된 물질(所造色)입니다.

비록 모든 유정들의 식소변(識所變)인 상분(相分)이 각각 별개이지만, 서로 유사한 처소가 다르지 않으니, 마치 여러 등불(燈)이 밝아서 함께 비추지만 대상은 마치 하나의 대상처럼 보이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것은 앞의 “유식무경(唯識無境) 오직 마음뿐 경계가 없다”는 뜻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부분은 중요하니 추가설명합니다.

중생들이 공업(共業)의 과보로 인하여 같은 모양의 기세간이 나타남을 자신들의 마음안에서 보지만 등불이 서로 방해하지 않는 것과 같이 기세간이 하나처럼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산하대지(山河大地)가 하나처럼 나타나기 때문에 중생들은 자신의 마음과 별개로 밖에 물질경계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각자가 자기 마음속에서 같은 모양의 산하대지를 보는 것이지, 마음밖에 따로 산하대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유식이십론의 설명을 인용합니다.

외도가 묻기를 ‘만약 오직 식(識)뿐이고 밖의 경계가 없다면 어째서 여러 사람이 동일한 장소와 동일한 시간에 한 경계를 같이 보는가?’하고 따져물었습니다. 즉, 오직 식뿐이라면 한 사람이 한 경계를 보면 그것은 그 사람 마음속의 경계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그 경계를 볼 수 없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세친은 아귀와 지옥의 예를 들어 논파하였습니다. “아귀들은 실재하지 않는 경계를 업으로 본다. 고름이 가득찬 강(膿河)을 같이 보기도 하고 오줌이나 똥이나 쇠가 흐르는 강을 같이 본다. 또한 강의 양 기슭에 많은 사람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지키며 아귀들이 강물을 마시지 못하게 하는 것을 본다. 이것들은 실재로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지만 아귀들은 공업(共業)으로 한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모두 같이 보는 것이다.”

“또한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과 별개로 옥졸과 개와 까마귀등이 있다. 이것들은 실재하는 중생이 아니고 지옥중생들의 죄업으로 나타난 것들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지옥의 고통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중생이라면 뜨거운 쇠로 된 땅에서 견디지 못하고 고통받아야 마땅하지만 이 옥졸등은 고통을 받지 않고 지옥중생들에게 고통주는 일만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지옥중생들이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같은 장소와 같은 시간에 실재하지 않는 옥졸등을 모두 다 같이 보는 것이다.”

(3) 인(因)과 과(果)

유식삼십론송에서 이 아뢰야식을 상전여폭류(常轉如瀑流)라고 하니 “항상 염념생멸(念念生滅)하여 전후가 달라져서 빈틈이 없이 마치 폭류처럼 구른다”는 것입니다. 이 식은 시작없는 과거로부터 상속(相續)하여 왔습니다.

항(恒)은 인(因)이 과(果)로 상속한다는 뜻이니 단(斷)이 아닙니다. 전(轉)은 과(果)가 발생하면 인(因)은 소멸한다는 뜻이니 상(常)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비단비상(非斷非常)을 인과의 법칙이라고 말합니다.

(4) 무기성(無記性)

이 식은 선(善)도 아니고 악(惡)도 아닌 무기(無記)의 성질을 지니는데, 번뇌의 오염으로서 마음을 덮지 않으므로 무부무기(無覆無記)의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과 악은 반드시 과보를 초래하지만 무기의 성질은 과보를 초래하지 않습니다.

(5) 언제 떠나는가

① 아뢰야식을 떠나는 경지

번뇌가 끊어지고 다해 없어진 것을 아라한(阿羅漢)이라 이름합니다. 이 아라한이란 삼승(三乘)의 무학과위(無學果位)에 통하고 포섭하는 것입니다. 즉, 성문승의 아라한도 아라한이고, 연각승의 벽지불도 아라한이며, 보살승의 보살8지이상의 대보살도 아라한이라는 공통의 이름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가. 세 성자들이 영원히 번뇌의 적을 없앴기 때문(殺賊)에 아라한이라는 이름을 갖습니다.
나. 응당 세간의 미묘한 공양을 받을만 하기 때문(應供)에 아라한이라는 이름을 갖습니다.
다. 영원히 다시는 분단생사(分段生死)를 받지 않기 때문에 아라한이라는 이름을 갖습니다.

이 세 아라한들은 영원히 번뇌장(煩惱障)인 구생아집(俱生我執)을 끊었으며 불퇴전(不退轉)입니다. 구생아집(俱生我執)이란 “태어나면서부터 갖는 ‘나’에 대한 집착”인데 이것이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불퇴전(不退轉)이란 “더이상 물러남이 없는 경지”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 무학(無學)을 모두 다 아라한이라 이름합니다.

이 아라한의 지위에서 아뢰야(阿賴耶)라는 이름을 떠납니다. 그러므로 아라한들은 오직 이숙식과 일체종식의 이름만 남아있습니다. 아라한들은 이숙식을 떠나지 못했으므로 아직 의생신(意生身)의 변역생사(變易生死)가 있습니다. 성문과 연각은 무여열반에 들 때 아뢰야를 버립니다. 보살은 보리(菩提)를 얻을 때 떠납니다.

② 이숙식을 떠나는 경지

묘각(妙覺)의 불지(佛地)에서는 이숙식이라는 이름도 떠납니다. 부처님들은 오직 일체종식(一切種識)만 남아있습니다. 이숙식을 떠났기 때문에 의생신(意生身)의 변역생사(變易生死)도 없는 대열반을 얻습니다.

이 일체종식을 또한 암마라식(菴摩羅識), 무구식(無垢識)이라고도 이름하며 또한 대원경지상응심품(大圓鏡智相應心品)이라 이름합니다. 이 무구식(無垢識)은 결코 버리는 때가 없으니, 항상 유정에게 이익과 즐거움을 주어 다하는 때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이 일체종식、암마라식、무구식은 일체여래의 법신(法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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