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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담소

세 가지 종류의 보시

by 파장波長 2024. 3. 8.

보시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재시(財施)입니다. 물질로써 가난한 사람, 배고픈 사람, 헐벗은 사람에게 베풀어주는 것입니다. 물론 노동을 통해 도와주는 것도 이 재물보시에 포함됩니다.

춘추 전국시대에 맹상군(孟嘗君)이라는 제후가 살고 있었습니다. 권세도 높고 재물도 많은 맹상군은 어느해 생일날, 호화롭게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음식을 차렸고, 아름다운 풍악소리에 맞추어 미희들은 춤을 추었으며, 손님들이 가져온 선물들은 몇 개의 방에 차고도 남았습니다. 맹상군은 유쾌하여 술잔을 높이 들고 말했습니다.

 

“좋다. 정말 좋구나! 이렇게 좋은 날, 나를 슬프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나를 슬프게 할 자가 있다면 후한 상을 내리리라.”

그때 눈먼 장님 한 사람이 앵금을 들고 맹상군 앞으로 다 가섰다.

“비록 재주는 없으나 제가 대감의 눈에서 눈물이 나오도 록 해보겠습니다.”

“좋다. 한번 해보아라. 재주껏 나를 슬프게 만들어 보아라.”

장님은 앵금을 타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천상(天上)의 소리처럼 아름다운 선율로 연주하다가 좀 지나자 지옥의 고통섞인 소리를 만들어 내었고, 연이어 애간장을 녹이는 듯, 창자를 끊는 듯한 연주를 이어갔습니다. 모두가 앵금의 소리에 넋을 잃을 즈음, 장님은 기가 막힌 음성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空手來空手去 世上事如浮雲
공수래공수거 세상사부운여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나니, 세상의 모든 일 뜬구름과 같구나.

成墳墓人散後 山寂寂月黃昏
성분묘인산후 산적적월황혼

무덤을 만들고 사람들이 흩어진 후에 적적한 산속에 달은 황혼이어라.

 

空:빌공 手:손수 來:올래 去:갈거 浮:뜰부 雲:구름운 成:이룰성 墳:무덤분 墓:무덤묘 散:흩을산 後:뒤후 寂:고요할적 黃:누를황 昏:어두울혼

노래가 끝나는 순간 장님이 앵금을 세게 퉁기자 줄이 탁 끊어졌고, 앵금줄이 끊어지는 소리가 남과 동시에 맹상군은 통곡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무엇인가 좋은 일을 하면서 살아야 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날 이후 맹상군은 자기집에 큰 식당을 만들어놓고, 아침마다 국밥을 끓여 3천 명에게 식사를 제공했습니다. 그 국밥은 누구든지 와서 먹을 수 있었으며, 3천 명의 식객이 먹는 소리는 20리 밖에까지 들렸다고 합니다.

장님의 노랫소리에 인생의 실체를 깨달은 맹상군은 자신의 재물을 모두 풀었습니다. 헐벗고 굶주린 이들을 위해 매일같이 3천 그릇의 국밥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맹상군처럼은 못할지라도 베푸는 일에는 익숙해져야 합니다. 베풀 것이 있을 때 베풀어야 합니다. ‘돈을 많이 모은 다음 좋은 일을 하겠다.’고 하면서 미룰 일이 아닙니다. 조금 있으면 조금 있는 대로 보시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보시를 하는 그 마음 자체가 바로 도심(道心)이요 우리를 잘 살게 만들어주는 선공덕(善功德)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가진 재물로써 능력껏 베풀어 봅시다. 가진 것을 베풀 때 인색한 마음은 저절로 사라집니다. 탐하는 마음과 더불어 인색한 마음이 사라지므로 정신은 맑아지고, 재물로써 남을 살렸으니 마음 가득 환희가 넘치게 됩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 앞에 그릇되게 뚫려 있던 탐욕의 길, 투쟁의 길, 삿된 길들은 저절로 사라지게 되고, 지옥ㆍ아귀 등의 추한 세계도 자취를 감추게 되는 것입니다.

부디 도(道)로써 돈을 써보길 바랍니라. 틀림없이 좋은 일이 다가오고 좋은 세상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법보시(法布施)

두번째 보시는 법시(法施)이다. 흔히 법보시라고 칭하는 법시는 사람들이 온전한 정신을 가질 수 있도록 진리를 베 풀어주는 것입니다. 곧 재물을 보시하는 것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재물을 보시할 수 있는 근본정신을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수십 년 동안 미국의 원조를 받아 왔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물질적인 보시에 대해 ‘우리의 정신을 미국에 팔아온 것이 아니냐’ 하는 일부 의식있는 사람들의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었습니다.

정녕 우리가 우리의 속알맹이인 정신은 잃어버리고 물질적인 풍요에만 만족한다면, 그것이 개인이 되었든 국가가 되었든 결과는 비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지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면서도 정신을 돌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요즘 시중에서는 하나에 수십만원 하는 속옷, 수천만원짜리 명품들이 잘 팔려나간다고 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일러주는 것일까요? 자기 정신을 팔아먹고 분수를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이 이 땅에 많이 살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때가 문제입니다. 바로 이러한 때일수록 우리 모두가 올바른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법보시를 베풀어야 하는것 입니다.

그렇다면 참다운 법보시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금강경』에는 “삼천대천세계에 칠보(七寶)로 보시하는 것보다 금강경 사구게(四旬偈)한 구절을 일러주는 것이 낫다.”고 한 구절이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금강경』을 외워서 줄줄 읊어주는 것이 복이 된다는 말은 아니라 그 내용을 깨닫도록 일러주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내용을 깊이 깨달아야 복이 되는 것이고, 그 참뜻을 이해시켜야 진짜 그 사람의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보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금강경』사구게 중에는 “모양이 있는 것은 다 허망하다(凡所有相 皆是虛妄).”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구절을 들려준다고 하여 누구나 무상함을 절감할 수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말씀을 듣고도 무상을 절감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설할 때는 모양 있는 모든 것이 진정으로 허망하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허망한 것을 깨우치되, 팔순 할머니와 스무살 처녀를 같이 볼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이쪽은 예쁘고 저쪽은 밉다는 차별심만 있으면 말로만 허망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확증을 심어줄 수만 있다면 『금강경』의 말씀대로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로써 보시한 것보다 더 많은 복을 짓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복 짓는 일 중에서 깨달음을 얻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해주는 복보다 더 큰 복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위 사람들에게 성심성의를 다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여, 그들의 참정신을 일깨워주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는 것이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능력껏 불교책을 법보시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책을 법보시할 때는 꼭 불경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오히려 어려운 불경보다는 읽어서 진리를 분명히 깨우칠 수 있고 정신을 온전하게 만들어주는, 쉬운 불교책이나 글을 법보시하는 것이 더 좋을 경우도 있습니다.

참되게 살 수 있는 길을 제시해주는 책, 마음의 눈을 열어줄 수 있는 글을 가깝고 먼 사람에게 두루 공양한다면, 그 공덕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무외시(無畏施)

세번째 보시는 무외시(無畏施)이다. 무외시는 모든 두려움을 제거하여 평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는 보시입니다.

쉽게 비유하자면, 어린아이가 권투도 잘하고 기운도 센 자기 형과 함께 다니면 어디를 가든지 겁날 것이 하나도 없고 마음이 든든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혼자 있을 때는 싸움은 커녕 도망가기 바쁘던 아이도, 든든한 형과 같이 있으면 자기보다 힘센 친구에게 얼마든지 당당해질 수 있고 깡패들이 몰려와도 힘을 딱 주고 버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외시이다. 든든하게 믿을 수 있는 것이 있으면 두려울 게 없는 것입니다. 나아가 마음의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완전히 얻은 사람은 죽음에 임해서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렇게 생사의 두려움까지도 다 해탈시켜주면 그것이 바로 최상의 무외시인 것입니다.

나아가 성현(聖賢)의 가피를 입는 것도 무외시에 속합니다. 만약 언제 어디서나 부처님께서 나를 지켜주고 계신다는 확실한 믿음만 있으면, 그 사람은 두려울 것이 없는 무외의 경계에 들어선 사람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 부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관세음보살이 내 뒤를 바짝 따라다니신다는 믿음이 있으면 총알이 빗방울처럼 날리는 전쟁터에 나가도 걱정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일제강점시 때 김석원(金錫源, 1893~1978)이라는 장군은 매일 관세음보살 몽수경(夢授經)을 지극한 마음으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1937년 중일전쟁에 참가한 장군은 산서성(山西省) 전투에서 가슴에 총탄을 맞고 그자리에서 쓰러졌습니다.

당연히 죽었어야 할 그였지만, 놀랍게도 정신을 차려 일어나보니 다친 데가 하나도 없이 멀쩡했습니다. 이상히 여겨 자세히 살펴보니 가슴에 넣고 다닌 관세음보살 호신불(護身佛)에만 구멍이 뚫려 있었습니다.

이러한 기적이 모두 관세음보살의 보살핌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은 장군은, 그뒤부터 하루에 관세음보살을 만번씩 불렀습니다. 사무를 보면서도 관세음보살, 전쟁터에서도 관세음 보살을 불러, 잠시도 입에서 관세음보살을 뗀 적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깊은 믿음이 생기면 두려울 것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무외시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듯한 무외시. 그러나 곰곰히 따져보면 두려움을 없애주는 무외시야말로 최상의 보시이고 가장 복을 잘 짓는 일입니다. 우리 모두 주위 사람들에게 이와같은 무외의 보시를 즐겨 베풀어 봅시다.

누군가에게 어려운 일이 닥쳐서 ‘아이구 이걸 어떻게 하 나’ 할 때 ‘어떻게 하긴 무엇을 어떻게 해…, 용기를 잃지 않으면 할 수 있어…’ 하면서 안심시켜주고, ‘이러다가 내가 죽 는게 아닐까’ 할 때 ‘그런 염려 말아…, 부처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잖아!’ 하면서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도록 하여야 합니다.=

무외시는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힘이 드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우리가 하고자 마음만 내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의 축원과 함께 따뜻한 마음으로 무외의 보시를 베푸는 습관을 길러봅시다. 주위가 온통 훈훈한 복밭(福田)으로 바뀔 것입니다.


자비로써 보시하자

부처님께서는 수많은 경전을 통하여 이제까지 우리가 살펴본 세 가지 보시 중 그 어떤 보시라도 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하셨습니다. 우리 불자들은 부처님의 제자답게 힘에 따라 형편에 따라 법과 재물을 은혜롭게 베풀 줄 알아야 합니다. 꼭 부처님께서 시켰기 때문에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중생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재물과 법을 베풀어서 나와 중생의 마음 밑바닥에까지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간탐심을 보리심으로 바꾸어놓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자비로써 보시합시다. 그리고 그 자비를 더욱 승화시켜 동체대비를 이룰 수 있도록 합시다.

동체대비(同體大悲)! 그것은 한 몸의 사랑이요, 동체대비에 입각한 보시는 내가 나에게 주듯이 남에게 베풀어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보시이기에 여기에는 주는 사람, 받는 사람, 주고 받는 물건에 대한 미련이 없습니다.

“내가 누구에게 무엇을 주었지. 많은 공덕이 있을거야.”

이러한 자랑 섞인 보시는 자비보시가 아닙니다. 아직은 모자람이 있는 보시입니다. 보시가 해탈로 직결되려면 서로 동체(同體)라는 인식 아래 평등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내가 너에게’라는 상대적인 생각, ‘내가 베풀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베푼다.’

는 생각을 갖고 있으면 온전한 해탈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곧 보시는 평등한 마음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오직 평등한 마음, 자연스러운 마음으로 보시를 해야 합니다. 하나의 법계(法界) 속에 살고 있는, 미래 부처될 존재들끼리 기꺼이 나누어 살고자 하는 마음…, 만일 이렇게 평등심을 유지 하여 보시를 한다면 부처님의 평등성지(平等性智)를 얻어 해탈할 수 있으며, 능히 보시바라밀을 완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입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무주상보시를 고집하거나 강요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동체대비의 보시가 되지 않는다고 포기할 일도 아닙니다. 우선은 베푸는 일이 중요합니다. 베푸는 연습을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리고 보시한 것을 자랑하고 싶으면 자랑을 해도 좋습니다. 결코 ‘무주상’을 강조하며 자랑을 막을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나와 남의 마음을 여는 보시를 끊임없이 행하다보면 모양 [相]을 내는 것은 언젠가 저절로 사라지기 마련인 것입니다. 모든 불자들이여, 우리 모두 ‘내 마음’의 그릇 속에 하루 아침의 티끌을 담지 말고 천년의 보배를 담도록 합니다. 베풀면서 마음을 닦고 환희심을 기르도록 합시다.

그리고 형편 따라 염불하고 기도하고 참선하여 마음자리를 밝혀가도록 합시다. 틀림없이 이것이 ‘나’의 인생을 보배롭게 만듭니다. 현생에서 뿐만 아니라 내생에서도 ‘나’의 등불이 되고, 세세생생 나와 함께 앞길을 밝혀주는 것입니다.

일타 큰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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