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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

무엇을 깨닫고 무엇을 닦을 것인가

by 파장波長 2022. 4. 17.

​타이베이台北에서 겪은 일이다.
타고온 택시에서 내려 차비를 치르려는데 그 자리에서 차를 타게 된 청년이 차비는 자기가 공양할테니 스님들은 그냥 내리시라고 했다.
어느날 고궁박물관을 관람하고 나와 점심을 먹기 위해 채식 식당을 찾아 두리번 거리고 있을 때, 지나가는 아주머니 한 분에게 이곳에서 가까운 채씩 식당이 어디쯤에 있는지를 물었었다.
아주머니는 가던 길을 돌아서 우리 일행을 데리고 한참을가더니 깨끗한 식당을 알선해주고 갔다.
점심을 맛있게 먹고 식비를 내려고 카운터에 서니 아까 그 아주머니가 이미 점심값을 냈다는 것이다.
생면 부지의 외국 스님에게 베푼 두 불자의 선의善意를 보고 대만 불교의 한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종교란 도대체 무엇인가?
신앙생활이란 어떤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 말할 것도 없이 자비의 실천이야말로 참 종교이고 살아있는 신앙 생활이 아니겠는가 싶었다.

 

​살아있는 행行은없이 형해화形骸化되고 관념화되어 가는 한국 불교계 일각에서는,
어떻게 깨닫고 어떻게 닦는것이 바른 법인가만을 시끄럽게 떠들어왔지, 정작 무엇을 깨닫고 무엇을 닦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소홀이 여겨왔다.


단박 깨닫고 단박 닦는 것만이 옳은 법이고, 깨달은 다음에도 계속해서 닦는 일은 그릇된 법이라고 몰아세웠다.
어떻게 깨닫고 어떻게 닦느냐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방법의 문제다.
그런데 그 방법이 오로지 한 가지밖에 없다고 고집하는 것은, 불타 석가모니의 가르침에서 크게 벗어난 잘못된 소견이다.

사람마다 그 그릇과 기질과 취향이 다르기 때문에 그 방법은 얼마든지 다양해질 수 있다.
무엇 때문에 불타 석가모니가 45년 동안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을 그토록 다양하게 설했는지 그 뜻을 알아차려야 한다.
수행의 본질은 더 말할 것도 없이 깨달음과 닦음에 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을 깨닫고 무엇을 닦을 것인가의 문제로 관심이 기울어져야 한다.
즉 깨달음과 닦음의 대상은 무엇인가의 문제다.
불교뿐 아니라 모든 종교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이는 지혜와 자비의 영역이고, 내 자신과 사회(혹은 중생계)의 문제로 집약될 수 있다.

깨달음과 닦음의 중생은 곧 자기 자신의 중생이다.
자기 자신을 깨닫고 중생(자성 중생과 이웃)을 닦는다. 깨달음에 안주하여 중생을 닦지 않는다면 그런 깨달음은 가짜다.
그런데 한국 불교계에서 스스로 깨달았노라고 큰소리치는 사람이나 깨달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출가와 재가를 물을 것도 없이 자신의 깨달음인 지혜의 완성에만 집착한 나머지 자비의 실천을 망각하고 있거나 소홀히 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주장만이 가장 옳고 정당한 것으로 착각, 세상을 현혹시키고 있다.

 

​불교의 교조 불타 석가모니는 이런 사람들을 위해 초기 경전인 <숫타니파타>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제4장 '여덟 편의 시' 중에서 )

 

"세상 학자들은 저마다 어떤 견해와 서로 다른 편견을 가지고 자기야말로 진리에 통달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여러 가지로 주장한다. 이렇게 아는 사람은 진리를 알고 있고,이것을 비난하는 사람은 아직 깨달은 사람이 아니다’ 라고. 만약 남의 가르침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주장만을 내세운다면, 그들이야말로 자신의 견해만을 고집하고 있기 때문에 참으로 어리석고 지혜가 뒤떨어진 사람이다."

부처님은 같은 경전에서 또 이와 같이 말씀하신다.

"세상에 많은 여러 가지 진리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영원한 것으로 상상할 따름이다. 그들은 여러 가지 견해에 대해서 사색하고 탐구하여 내 말은 진리이고 다른 사람의 말은 거짓이다.’ 라고 두 가지로 말한다. 반대자를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보고 자신은 진리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면서 남을 멸시한다. 그러나 그는 망견妄見으로 차있고 교만에 넘쳐 있다. 자기 학설만을 청정하다고 말하고, 남의 가르침에는 청정이 없다고 한다. 이설異說의 무리들은 이와 같이 집착하여 자기 길만을 완고히 내세운다.”

 

​불교의 특성은 대승보살 사상에 있다.
보살 사상이란 곧 자비의 실천이다.
자신의 깨달음을 제쳐두고 먼저 이웃에 눈을 돌려 나누어 가지려는 염원이다.
그 현장은 오늘의 세계와 사회 곧 중생계다.
자기 자신의 지혜의 완성과 깨달음에만 집착하는 것을 소승小乘이라하고 이웃에 눈을 돌려 함께 기뻐하고 아파하면서 깨달음과 닦음으로 함께 나아가는 것을 대승大乘이라고 한다.

종교가 어느 문화 현상보다도 값진 것이라면, 자비의 실천인 이 나누어 가짐 때문이다.
절대적인 진리의 세계를 체험했다면 보편적인 중생에까지 그 기량이 미쳐야 한다.
그렇지 않고 말로만 깨달았노라고 자처하면서 그 기량이 중생계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그 누가 되었건 그는 가짜다.
왜냐하면 옛부처님과 조사들이 한결 같이 지혜와 자비의 그 길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깨달음이 무엇인지, 닦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일상생활 속에서 인간의 선의지善意志를 이웃과 함께 나누어 가지는 쪽이 오히려 보다 진실한 신앙인이요, 보살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어떤 종교이건 간에 인간의 길을 위해 인간이 만들어놓은 것이라면,
인간의 삶과 이어지는 종교는 좋은 종교이고,
인간의 삶을 등지거나 소홀히 하는 종교는 좋은 종교라고 할 수 없다.
이 말을 바꾸어 한다면, 올바른 진리는 인간의 삶으로 이어지고 진리를 가장한 거짓은 인간의 삶을 소홀히 한다.
앞으로 이 땅의 불교는 어떤 방법으로 깨닫고 닦을 것인가의 지엽적인 문제에서 벗어나 무엇을 깨닫고 무엇을 닦을 것인가의 본질적인 과제 앞에 마주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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