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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

어진 이를 가까이하라.

by 파장波長 2022. 4. 17.

​어떤 인연에서였건 간에 금생에 불법佛法을 만나게 된 것은 개인의 생애에 있어서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
출가出家와 재가在家를 물을 것 없이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은 우리들 일상의 든든한 의지처가 될 뿐 아니라,
삶의 가치 척도가 된다.

 

​요즘 처럼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의지처와 가치 척도가 더욱 절실한 삶의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그런데 지나간 과거와 현재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처럼 바른 법은 만났으면서도 자신의 삶에 그 지혜와 자비의 교훈이 생활화되지 않고 보편화되지 않아 물에 기름 돌 듯 겉도는 수가 많다.

 

봄 능소화가 있는 사찰 풍경

 

​불법의 문전에서만 서성거리다가 시류에 휩쓸리고만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가.
투철한 구도정신과 출가정신 없이 그날그날 무위도식無位徒食 하면서 되는 대로 살아가는 직업적인 승려들이나,
아직도 정법正法 안에 들어서지 못한 채 습관적으로 절에 드나드는 신도들이 얼마나 또 많은가.

 

​오늘날 한국 불교의 위상은 곧 불자인 우리들 자신의 삶의 모습이기도 하다.
어떤 종파의 종교이건 간에 기성신도들은 출가와 재가를 따질 것 없이 관념적인 종교의 타성에 물들고 찌들어 오염된 사람들이다.
이제 처음으로 불법에 관심을 가지고 탐구하려는 초발심자들은 기성신도들의 그런 타성에 물들거나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옛 성인들의 간절한 가르침에 귀기울이며 자신이 서있는 자리를 시시로 되돌아보라.
이와 같은 탐구와 자기 반성이 없으면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성의 그 탁류에 편승하고 만다.

 

​8백 년 전 고려시대의 보조국사 지눌 스님은
수선사修禪寺의 수행자들을 위해 그들이 지녀야 할 생활규범으로서 '초발심자에게 당부하는 글 誠初心學人文'을 써서 선포한 바 있다.
이글은 상총尙聰 선사가 조계종의 총본산인 흥천사의 제1대 주지로 취임한 1937년(조선 태조 6년)에 전국 사찰의 청규淸規로서 시행한 이래, 한국 불교 승단의 일상 생활규범으로 현재까지도 계승되고 있다.

 

​불법을 배우기 위해 처음으로 발심한 사람들이 유념해야 할 일은,
맨 먼저 나쁜 벗을 멀리하고 어질고 착한 이를 가까이 하라는 교훈이다.
초심자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도 많을 텐데 그 가운데서도 이 가르침을 맨 처음으로 들고 나온 것은,
일상적으로 대하는 친구의 영향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친구의 영향은 마치 안개 속에서 옷이 젖는 것과 같아서 자기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영향을 받는다.
좋은 일이건 궂은 일이건 함께 어울리다 보면 그렇게 물들게 마련이다.
또 그 사람을 알려면 그가 사귀고 있는 친구를 보면 곧 알 수 있다는 말도 그 영향을 예상해서 하는 소리다.
유유상종類類相從, 끼리끼리 어울린다는 이 말도 업이 비슷한 사람끼리 무리를 짓기 때문에 나온 소리다.

 

​절에 처음 발을 들여놓게 되는 인연도 친구를 따라가는 경우가 드물지 않을 것이다.
좋은 친구를 따라다니면 바른 법을 만나 바른 신앙생활을 이루어 삶의 의미와 보람을 함께 누릴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예상도 못했던 엉뚱한 길로 빗나가는 일이 허다하다.
집안일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채 기도다 불사다 하면서 이 절 저 절 분주히 쏘다니는 사람을 가리켜 바른 신앙인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바른 법을 만나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집안일부터 안정이 되어야 한다.
밖으로 겉돌 수가 없다.
지금까지 밖으로 팔았던 시선이나 관심을 안으로 돌이켜
자신의 삶을 개선하는 일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나쁜 벗은 또 자신만이 아니라 남의 영역에 폐를 끼치는 사람이다.
자기 것은 금쪽처럼 인색하도록 아끼면서 남의 것에 눈독을 들이고 손해를 끼치고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뻔뻔스런 사람이다.


남보다 먼저 절에 다닌다고 해서 (절에 다닌다는 것이 곧 정법에 귀의했다는 뜻은 아니다) 걸핏하면 남의 흉이나 보고,
절 살림에 이러쿵 저러쿵 참견하는 사람도 좋은 벗이 될 수는 없다.
아무리 종교에 귀의한 지가 오래되었다 할지라도 보리심과 자비심을 발하지 못했다면 그도 사이비임에 틀림없다.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남의 허물을 보지 않고, 자신의 허물을 고쳐갈 뿐이다.
또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말수가 적은 사람이다.
말이 많은 사람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속이 비어 있다.
속이 찬 사람은 말수가 적을 수밖에 없다.
진리는 말 밖에 있다.
쓸데없는 말 때문에 세상은 얼마나 시끄러운가.
정신의 집중을 익히려면 우선 말수가 적어야 한다.
쓸데없는 대화를 피하고 자신이 하는 일에 기쁨과 감사의 염을 지니고 순수하게 지속적으로 몰입해야 한다.
그 침묵과 고요와 몰입을 통해서 마음속에 뿌리내려 있는 가장 곱고 향기로운 자신의 연꽃이 피어난다.
거듭 말하고 싶다.

 

​아무 의미도 없는 무가치한 말로써 남의 귀중한 시간을 빼앗고 남에게 상처를 입히는 사람은 좋은 친구가 될 수 없다.
에리히 프롬의 명저 <사랑의 기술>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의 기술' 이란 말을 사랑의 기교쯤으로 오해하지 말기를.
'The Art of Loving'이 원제이므로 사랑을 예술로까지 승화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그는 말하기를, 정신의 집중(삼매의 경지)을 익히려면 쓸데없는 대화를 피하는 것이 중요하듯이 나쁜 친구를 멀리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한다.
나쁜 친구란 악의가 있고, 파괴적인 사람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다.

 

​나쁜 친구란?

​일상적인 생활태도가 음울하고 불쾌한 자들,
육신은 살아 있으면서 정신은 죽어 있는 자들,
사상과 대화가 보잘것없는 자들.
또 나쁜 친구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끝도 없이 지껄이고 있는 자들,
자신의 머리로 생각해 보지도 않고
상투적인 의견을 주장하고 있는 자들이
곧 나쁜 친구라고 지적하고 있다.

 

​친구란? 더 말할 것도 없이 내 부름에 대한 응답인 메아리다.
이 말이 진실이라면 내 이웃에서 나쁜 친구를 가려내기 전에 내 자신은 과연 남에게 좋은 친구의 구실을 하고 있는지부터 살펴볼 일이다.
남의 허물보다 자신의 허물을 찾는 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자세이기 때문이다.
바른 법 안으로 들어가려면,
먼저 나쁜 벗을 멀리하고 어진 이를 가까이하라는 이 교훈을 명심하라.
그래야 이웃에 오염되지 않고 어진 덕의 지혜를 입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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