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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

시작할때 그 마음으로

by 파장波長 2022. 4. 17.
이 글은 1998년 2월 24일, 법정스님의 명동 성당에서 강론했던 말씀으로, 김수환 추기경이 길상사 개원 법회에 참석해 축사 한 것의 답례 성격으로 이루어진 일이 있었다. 이해인 수녀님이 당시 강론을 녹음해서 세상에 알려졌다. 스님께서는 강론에 앞서 이렇게 인사했다. “명동성당 축성 10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 이 자리에서 강론을 하게 해 주신 천주님의 뜻에 거듭 감사드립니다”

가난을 배우라

경제가 어려울 때일수록 우리가 각성해야 할 것은 경제 때문에 관심 밖으로 밀려난 인간 존재입니다.
너무 경제, 경제 하면서 인간의 문제가 뒷전으로 밀리고 있습니다.
인간의 윤리적인 규범이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양심이 마비되고 전통적인 가치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돈 몇 푼 때문에 사람이 사람을 죽입니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미국식 산업구조 속에서 쓰다가 버리는 나쁜 생활습관으로 인해서 물건뿐 아니라 우리는 인간의 고귀한 덕성까지 버리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새삼스럽게 가난의 덕을 배우고 익힐 때가 되었습니다.
수도원의 규칙서 첫 장을 보면 ‘수도자는 먼저 가난해야 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가난하지 않고는 보리심, 진리에 대한 각성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어진 가난은 극복해야 할 과제이지만 스스로 억제하면서 선택한 맑은 가난,
청빈은 절제된 아름다움이며 삶의 미덕입니다.
마음속의 온갖 욕망과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을 때 사람은 비로소 전 우주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욕망과 아집에 사로잡히면 자신의 외부에 가득 차 있는 우주의 생명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소유물을 최소한으로 줄여서 스스로를 우주적인 생명으로 승화시킨 것이 바로 맑은 가난, 청빈입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생활 속에서는 사람이 타락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친절하고,
따뜻했느냐?
청빈淸貧의 덕을 쌓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따뜻한 가슴을 지녀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 편리한 물건은 한없이 쌓여 있습니다.
그것들을 사용하면서 우리는 과연 행복해졌는가? 물어야 합니다.
단추 하나만 누르면 밥이 되고 세탁이 되고 냉장이 됩니다.
이렇게 편리한 연장을 쓰면서 행복을 얼마나 느끼고 그런 사실을 고마워하고 있는가?
우리가 많은 것을 차지하고 살면서도 행복할 수 없는 것은 인간의 따뜻한 정을 잃고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머리만 가지고는 제대로 살 수 없습니다.
머리의 회전만을 중시하는 사회는 아주 냉혹하고 살벌해집니다.
산업사회와 정보화 사회는 머리만 존재할 뿐 따뜻한 가슴이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온갖 종류의 부정과 비리, 사기와 횡령, 한탕주의 등 사회악의 저변에는 간교한 머리가 적용하고 있습니다.
심장과 가슴은 작용하지 않습니다.
인재를 뽑는 대학에서 머리의 회전만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머리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믿음은 가슴에 나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마음 써야 할 것은 오늘 만나는 이웃에게 좀 더 친절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친구를 만났다면 내 안에 있는 따뜻한 기운이 전해져야 합니다.
그것이 친구를 만나는 것입니다.
따듯한 가슴에서 나오는 친절이야말로 모든 삶의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들 생애의 저녁에 이르면 우리는 얼마나 이웃을 사랑했는지 가를 두고 심판받을 것이다.’
나 자신도 이 구절을 읽으며 많은 반성을 했습니다.
내가 이웃을 만나면서 얼마나 친절하고 따뜻한 가슴을 전했느냐?
생각하니 몹시 부끄럽고 두려웠습니다.
이웃을 기쁘게 하면 내 자신이 기뻐지고 이웃을 언짢게 하거나 괴롭히면 내 자신이 괴로워집니다.

따뜻한 가슴을 지녀야 청빈의 덕의 자랍니다.
우리가 불행한 것은 경제적인 결핍 때문에 아닙니다.
따뜻한 가슴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청빈은 절제된 아름다움이며 가장 큰 미덕이며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기본적인 조건입니다.
예전부터 깨어 있는 정신들은 자신의 삶을 절제된 아름다움으로 가꾸어 나갔습니다.

 

필요와 욕망의
차이를 가릴 줄 알아야 합니다.

둘째, 청빈의 덕을 쌓으려면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는 풍요로운 곳이지만 우리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는 궁핍한 곳이다.’
한정된 지구 자원이 고갈되어 가고 있습니다.
환경학자들에 따르면 21세기까지 지구가 이대로 존속될 수 있느냐 없느냐, 그게 걱정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시대에 와서 한정된 자원을 인간의 탐욕을 위해서 너무나 많이 고갈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수천 년 동안 풍요의 은혜를 누리고 살아왔습니다.
20세기 후반에 와서 지구 자체가 자정력을 잃고 재생할 힘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리뇨니 뭐니 하면서 지구 환경 전체가 커다란 이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지구에 사는 우리들이 고마운 자원을 함부로 소비하고 있기 때문에 지구에 이변이 오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와서 어머니 지구가 몸살을 하고 중병을 앓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물질적인 풍요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신적으로는 궁핍합니다.
20~30년 전에 우리는 연탄 몇 장, 썰 몇 되만으로도 행복해지고 고마워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훨씬 많은 것을 차지하고 살면서도 고마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것은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가릴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내가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에 달려 있습니다.

옛말에 ‘위에 견주면 모자라고 아래에 견주면 남는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행복을 찾는 오묘한 비결이 어디에 있는가를 깨우쳐 줍니다.
안으로 충만해지는 일은 밖으로 부자가 되는 일 못지않게 인생에서 중요한 몫입니다.
우리는 아무런 잡념 없어 이웃을 위한 기도를 올릴 때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행복해집니다.

대승불교의 위대한 스승인 ‘나가르주나’는 도둑맞은 친구에게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그대가 항상 만족해 있다면 그대가 가진 모든 것을 도둑맞는다 할지라도 그대는 스스로 부자로 여기리라.
그러나 만족할 줄 모른다면 그대는 돈과 재산의 노예일 뿐이다.’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도 만족할 줄 모릅니다.
이것은 현대인들의 공통적인 병입니다.
늘 갈증 상태입니다.
겉으로는 번쩍거리면서 것 같아도 정신적으로 초라하고 궁핍합니다.
크고 많은 것만을 원하기 때문에 작은 것과 적은 것에서 오는 살뜰함과 아름다움을 잃어버렸습니다.
행복은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성과 작은 것에서 고마움을 느끼는 살뜰한 마음에서 생겨납니다.
행복은 어려운 이웃을 돕고 사람들과 정을 나누는 일에서 피어나는 들꽃 같은 것입니다.

나는 산중에서 채마밭을 매다가 한 잔의 차를 우려 마시면서 행복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모든 인연에 감사하고 삶을 고맙게 느낍니다.
산길을 가다가 무심히 피어 있는 들꽃을 보고도 행복해집니다.
또 다정한 친구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
전화 한 통화를 통해서도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행복은 이와 같이 일상적이고 사소한 데에 있는 것이지 크고 많은 것에 있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이 많은 것을 소유하고도 정신적으로 공허하고 갈증 상태에 있는 것은,
아름다움과 살뜰함을 잃어버리고 크고 많은 것에서 행복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필요와 욕망의 차이를 가릴 줄 알아야 합니다.
욕망은 자기 분수 밖의 바람이고, 필요는 생활의 기본 조건입니다.
필요에 따라 살되 욕망에 따라 살지는 말아야 합니다.
하나가 필요할 때 하나만 가져야지 둘을 갖게 되면 하나마저 잃게 됩니다.

내가 선물 받는 예쁜 다기가 있어 소중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대만 여행 중 똑같은 다기가 있어 구입해 왔더니 처음의 예쁨과 살뜰한 맛이 없어졌습니다.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물건만이 아닙니다. 애인이 둘이 되면 하나마저 잃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것은 소극적 삶의 태도가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길입니다.
물건에 집착하면 그 물건이 인간 존재보다 소중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비싼 물건 사다 놓고 친구를 불러 뽐내고 자랑 치다가 가정부가 깨뜨려 버렸습니다.
그러면 야단이 납니다.
인간을 제한하는 소유물에 사로잡히면 소유의 비좁은 골방에 갇혀서 정신의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적은 것과 적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청빈의 덕입니다.

 

욕심은 부리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입니다.

셋째, 청빈의 덕을 쌓으려면 단순하고 간소하게 살아야 합니다.

가끔 언론에서 인터뷰를 할 때 스님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면 개인적인 소원은 보다 간소하고 단순하게 사는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어떤 사람은 대통령이 되고 싶어서 책상 앞에 어린 시절부터 ‘대통령’이라고 써서 주문을 외웠다고 합니다.
저는 부엌 벽에 ‘보다 단순하고 보다 간소하게’ 이렇게 낙서를 해 놓았습니다.
단순과 간소함이란 본질적인 세계입니다.
단순과 간소함이란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내고 필요 불가결한 것, 꼭 있어야 할 것만으로 이루어진 결정체입니다.
그것은 바로 단순과 간소입니다.
복잡한 것들을 다 소화하고 나서 어떤 궁극에 다다른 경지, 그림으로 치면 수목화 같은 것입니다.

그 먹은 단순히 검은빛이 아닙니다.
그 속에 모든 빛이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단순과 간소는 다른 말로 하자면 침묵의 세계이며 텅 빈 충만의 경지입니다.
여백과 공간의 아름다움은 단순과 간소에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무엇이든지 넘치도록 가득 채우려고 하지 텅 비울 줄을 모릅니다.
텅 비어야 그 안에서 영혼의 메아리가 울립니다.
텅 비어야 거기에 새로운 것이 들어갑니다.

한 생각 버리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때 거기서 어떤 영혼의 메아리가 올립니다.
텅 비었을 때 그 단순한 충만감 그것이 바로 하늘나라를 얼핏 체험하는 순간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남보다 적게 가지고 있어도 기죽지 않고 그 단순한 간소함 속에서 삶의 기쁨과 순수성을 잃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인생을 살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신의 사람이고 청빈의 화신입니다.
그것은 모자람이 아니고 충만입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은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입니다.

욕심은 부리는 것이 아니고 버리는 것입니다.
욕심을 버린 수행자는 후세에까지 영원히 빛을 발합니다.
제가 이렇게 가난을 강조하는 것은 궁상스럽게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너무 넘치는 것만을 원하기 때문에, 제정신을 차리고 우리의 삶을 옛 스승들의 거울에 스스로 비추어 보자는 뜻입니다.

청빈은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일시적인 생활 방편이 아닙니다.
우리가 두고두고 배우며 익혀 가야 할 항구적이고 지속적인 생활규범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지구촌에는 우리가 나누고 살아야 할 어려운 이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지구의 자원은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는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인간의 탐욕을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간디의 말처럼, 청빈의 상대 개념은 부자가 아니라 탐욕입니다.

절재된 미덕인 청빈은 그저 맑은 가난이 아니라 나누어 갖는다는 뜻입니다.
탐자(貪者)는 조개 패貝 위에 이제 금今자를 씁니다.
빈자(貧者)는 조개 패貝 위에 나눌 분分자를 씁니다.

과거 중국에서는 화폐의 기능을 조개껍데기가 했습니다.
화패를 움켜쥐고 있는 것은 탐욕입니다.
손에 쥔 화패를 나누는 것이 청빈입니다.
청빈이라는 말,
가난이라는 말은 나누어 갖는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에게 만약 가난이 없었다면 나누어 가지는 것을 몰랐을 것입니다.
내가 가난을 겪어 봄으로써 이웃의 어려움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논리를 빌지자면 가난은 우리 자신은 우리 자신을 떨어뜨려는 것이 아니라 들어 올리는 것입니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웃과 나누어 가질 때 그것은 우리 자신을 높이 올리는 일이 됩니다.
우리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 경제위기는 우리 자신을 떨어뜨리지 않고 높이 들어 올리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이웃들과 나누어 갖는 뜻을 거듭거듭 생활화시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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