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붓다경전

도신스님-초전법륜경(初轉法輪經)

by 파장波長 2022. 4. 21.

불교라는 말그대로의 의미는 깨달은 사람의 가르침입니다. 불교에 많은 경전 가운데 초전법륜경(初轉法輪經)은 깨달은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처음 전한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깨달은 사람이 가장 마지막으로 전한 가르침은 열반경에 담겨 있습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 가르침을 설하시어 마쳤을 때, 
꼰단냐 존자에게는 ‘일어나는 법은
그 무엇이건 모두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 라는
청정하고 때가 없는 법의 눈이 생겼다.
이와 같이 세존께서 법의 바퀴를 굴리셨을 때 신들이 이와 같이 외쳤다.
“세존께서는 바라나시에 있는 이시빠따나의 녹야원에서
이러한 위없는 무상법륜을 굴리셨나니,
어떤 사문 바라문 신 마라 범천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이것을 멈추게 할 수 없다. <썅웃다 니까야 56:11>

 

초전법륜경의 다섯가지 의미와 특징들

 

초전법륜경은 깨달음 직후 붓다께서 가장 간절히 먼저 세상에 전하고 싶은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지만, 인간 고타마 싯타르의 깨달음은 저절로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의 성취를 위해서 부처님은 출가를 통해서 왕자라는 신분과 특권 그리고 가족을 버렸습니다. 또 7년이라는 짧지 않는 시간을 길 위에서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수행을 했습니다. 그렇게 수행을 하는 동안 목숨이 위태로울 만큼 자신이 할 수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마침내 그것을 이루었고, 잠시 고민이 있었지만, 모든 존재들의 행복을 위해서 부처님은 자신의 성취와 경험을 세상과 나누고자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약 250km의 거리를 맨발로 걸어가, 한 때 친구이자 동료였던 다섯 명의 수행자들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가르침을 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의 내용이 초전법륜경에 담겨져 있습니다. 앞의 과정과 배경을 생각해 볼 때, 초전법륜경은 마치 화덕에서 막구어나온 빵처럼, 막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의 따근따근한 가르침을 담고 있지 않는가 생각해 봅니다.  

이런 고생과 인내, 노력끝에 얻는 성취를 세상과 처음 나눈 순간이기 때문에 초전법륜경에 나오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당신이 세상에 가장 먼저 간절히 전하고 싶은 말과 진심이 그안에 담겨져 있다고 봅니다.

붓다의 간절한 말과 진심을 듣는 이의 마음을 두드렸고, 다섯 명의 제자중에 꼰다냐 존자는 가장 먼저 진리의 눈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붓다의 간전한 말과 진심이 하늘에도 전달이 되어, 모든 하늘의 신들이 함께 처음으로 법의 바퀴가 굴려지는 순간을 함께 기뻐했습니다.

붓다의 출가 그리고 깨달음을 이루기 까지의 과정, 다섯 명의 수행자가 있는 먼 길을 맨발로 걸어가신 것 등을 생각해보면 초전법륜경은 붓다께서 세상에 가장 먼저  전하고 싶은 말과 가르침이 담겨 있는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초전법륜경은 수행의 초보자가 아닌 숙련자를 대상으로 한 일종의 원포인트 레슨같은 가르침.팔상도의 녹원전법상에서 방금 깨달음을 이루신 붓다의 큰 고민은 자신이 깨달음으로 접한 삶과 존재의 진실을 과연 세상에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지, 스스로의 의문과 회의(懷疑)였습니다. 이것은 말과 언어가 진리를 표현함에 있어 같고 있는 근본적 한계에 문제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깨달은 진리의 모습이 욕망의 흐림에 따라가는 보통 사람의 생각과 너무도 반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붓다께서는 ‘에잇 관두자’ 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순간 다행히 하늘의 신이 나타나 부처님께 세상에 가르침을 전하기를 간절히 부탁을 드렸고, 당신은 생각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비록 마음을 바꾸기는 했지만, 길을 가다가 아무나 붙잡고 자신있게 ‘나는 부처다’ 라고 소개를 하며 가르침을 줄 수는 없는 노룻 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가르침을 듣고 이해할만한 수준의 사람이 누군가 하고 먼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고행을 포기하기 직전까지 함께 수행을 하던 다섯 명의 수행다를 떠올리고 그들을 찾아가 가르침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초전법륜경은 다섯 비구들을 위한 일종의 맞춤형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고, 오랜 수행의 경험을 같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원포인트 레슨이 아니었을까 라고 생각해 본니다. 

보통 원포인트 레슨이란, 예를 들면 파아노를 치는 사람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발전이 없고, 한계점에 다달았다고 느낄때, 교습의 대가를 찾아가 기초적인 태크닉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아주 중요한 한가지 포인트를 찾아 가르침을 받습니다. 이렇게 한가지 결정적 가르침으로 피아노 연주자는 스스로 찾지 못한 문제점을 고치고 발전해 나가는 경우입니다. 붓다께서 찾아간 다섯명의 수행자들의 경력을 생각한다면 초전법륜경의 가르침도 원포인트 레슨과 비슷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붓다께서 고행을 포기한 이유는 그것이 아무런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뼈져린 성찰과 반성이였습니다. 하지만 함께 수행을 하던 다섯 명의 수행자는 고타마 싯타르타가 사치에 빠져 타락을 했다고 생각해서 그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가서 고행을 계속 이어나갔습니다. 다섯명의 수행자를 찾아간 부처님은 극단적 쾌락과 고행을 모두 버리라는 중도(中道)을 가장 먼저 설해주었습니다. 결국 중도의 가르침을 통해 부처님이 그랬듯이 고행을 버리고 다섯 명의 수행자는 바른 수행의 길을 세웠고, 팔정도(八正道)라는 구체적인 가르침과 사성제(四聖諦)를 통한 바른 안목으로 결국 모두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초전법륜경의 내용으로는 중도(中道), 사정제(四聖諦)는 불교의 뼈대 혹은 핵심을 이루고 있다. 초전법륜경은 아마도 부처님이 세상에 가장 먼저 전하고 싶은 가르침 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붓다의 가르침이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붓다께서는 먼저 중도(中道)의 가르침을 주고나서 팔정도(八正道)와 사성제(四聖諦)의 가르침을 주었는데, 조금 과장되게 표현하면 중도, 팔정도, 사성제에 모든 가르침의 핵심내용이 담겨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성철스님은 백일법문에서 불교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중도와 연기(緣起)라고 했습니다. 그 중도와 연기가 불교 역사를 통해서 시대에 따라 다양하고 복잡한 언어로 나타난 것이 불교 사상의 발전이었습니다. 초선법륜경에서 중도는 극단을 버린다는 수행의 방법론으로 먼저 나타나지만 그와 동시에 존재의 원리를 의미합니다. 철학의 단어를 써서 말하면 ‘중도’는 실천론과 존재론을 동시에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 존재의 원리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단어가 연기(緣起) 또는 연기법(緣起法)일 것입니다. 성철스님은 중도와 연기를 합쳐, 그것이 불교의 핵심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초전법륜경에서 부처님은 중도 다음으로 팔정도의 가르침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중도와 존재의 원리를 바탕으로 한 큰 틀에서의 바른수행을 의미 한다면, 팔정도는 극단을 떠난 수행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설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가 깨달음의 종교라면, ‘어떻게 깨달음을 얻을까?’ 라는 것은 불교을 떠받치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팔정도는 바로 중요한 물음에 답이 될 수 있을거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네가지 성스러운 진리라는 의미의 사성제는 만인을 아시듯이 붓다의 가르침에 가장 중요한 한 부분을 찾이하고 있습니다. 경전에서는 사성제를 모르기 때문에 중생은 끝없는 윤회의 고통을 겪는다는 말로, 부처님은 사성제의 중요성을 끝없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중도, 연기가 불교사상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것이라면 사성제는 불교사상의 전부를 포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초전법륜경의 내용은 부처님 다시 인도에 존재하는 여러 다른 종교사상과 불교가 결정적으로 무엇이 다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불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점은 중도, 팔정도, 사성제이라고 구분지을 수 있습니다.

초전법륜경은 역사에 나타나는 불교의 복잡하고 다양한 불교 사상 발전의 뿌리 혹은 토대가 되었습니다. 넓고 큰 강을 거슬로 올라가면 그 시작인 수원(水原)을 찾을 수 있듯이 초전법륜경은 불교사상의 수원(水原)또는 근본(根本)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초전법륜경이 부처님의 가르침의 시작인 동시에 뼈대이자 핵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붓다의 많은 가르침은 뼈대에 살을 붙이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그리고 붓다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붓다께서 열반에 드신 후 불교는 변해가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양하고 복잡하게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런한 의미에서 초전법륜경은 불교라는 큰 강물의 수원, 근원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초전법륜경 내용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때 세존께서는 바라나시 가까운 곳 선인들이 머무르는 사슴동산(녹야원)에 머물고 계셨다.

2. 그곳에서 세존께서는 다섯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3. “비구들이여, 출가자가 가까이하지 않아야 할 두 가지 극단이 있다. 무엇이 둘인가? 그것은 저열하고 촌스럽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감각적 욕망들에 대한 쾌락의 탐닉에 몰두하는 것과, 또 하나는 괴롭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자기 학대에 몰두 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두가지 극단을 버리고, 여래는 중도(中道)를 완전히 깨달았나니 이 중도는 안목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고,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하느니라.”

4.“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것이 여래가 완전하게 깨달았으며, 안목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중도인가?”
그것은 바로 팔정도이니,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노력,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의 성스러운 여덟 가지 길이니라.

비구들이여, 이것이 바로 여래가 완전하게 깨달았으며, 안목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중도이니라.

5.“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 [고성제 苦聖諦] 이다. 태어남도 괴로움이다. 늙음도 괴로움이다. 병도 괴로움이요, 죽음도 괴로움이다. 싫어하는 것들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요, 좋아하는 것들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요컨대 집착하는 오온(五蘊) 차체가 괴로움이다.

6.“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고집성제 苦集聖諦] 진리이다. 그것은 바로 갈애(渴愛)이니,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즐김과 탐욕이 힘께하며 여기저기 즐기는 것이다. 즉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가 그것이다.”

7.“비부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고멸성제 苦滅聖諦] 진리이다. 그것은 바로 그러한 갈애가 남김없이 및 바래어 소멸함, 버림, 놓아버림, 벗어남, 집착없음이다.”

8.“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성스러운 진리 [고멸도성제 苦滅道聖諦] 진리이다.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팔정도(八正道)이니, 즉 바른 견해(정견 正見), 바른 사유(정사유 正思惟), 바른 말(정어 正語), 바른 행위(정업 正業), 바른 생계(정명 正命), 바른 노력(정정진 正精進), 바른 마음챙김(정념 正念), 바른 삼매(정정 正定) 이다.”

9.“비구들이여 나에게는 ‘이것이 괴로움의 [고성제苦聖諦] 진리이다.’ 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이 괴로움의 진리를 철저하게 알아져야 한다.’ 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이 괴로움의 진리를 철저하게 알아졌다.’ 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10.비구들이여 나에게는 ‘이것이 괴로움의 이러남의 [집성제 集聖諦] 진리이다.’ 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명명이 생겼다.

“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진리는 버려져야 한다.’ 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진리는 버려졌다.’ 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11.“비구들이여, 나에게는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滅聖諦] 진리이다.’ 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통찰지가 생기고, 멸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이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는 실현되어야야 한다.’ 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이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는 실현되었다.’ 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12.비구들이여, 나에게는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의 [道聖諦] 진리이다.’ 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통찰지가 생기고, 멸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의 진리는 닦아져야 한다.’ 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이 괴로움의 소멸의 인도하는 길의 진리는 닦아졌다.’ 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13.“비구들이여, 내가 이와 같이 세 가지 양상과 열두 가지 형태를 갖추어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것이 지극히 청정하게 되지 못하였다면 나는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실현하였다고 천인과 마라와 법천을 포함한 세상에서, 사문 바라문 천인과 사람을 포함한 무리 가운데서 스스로 천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14.“비구들이여,그러나 내가 이와 같이 세 가지 양상과 열 두가지 형태를 갖추어서 네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것이 지극히 청정하게 되었기 때문에 나는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실현했다고 천인과 마라와 범천을 포함한 세상에서, 사문 바라문과 천인과 사람을 포함한 무리 가운데에서 스스로 천명하였다.”

그리고 나에게는 ‘나의 해탈은 확고부동하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태어남이며, 이제 더 이상의 다시 태어남은 없다’ 라는 지와 견이 일어났다.”

15.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섯 비구는 마음이 흡족해져서 세존의 말씀에 크게 기뻐하였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 가르침을 설하시어 마쳤을 때, 꼰단냐 존자는 ‘무엇이든 조건지어 일어난 것은 조건따라 사라진다.’는 사실이 진리임을 알게 되어 청정하고 때가 없는 법의 눈이 생겨났다.

16.세존께서 이와같이 법의 바퀴를 굴리어서 바른 법을 세우시니, 땅에 머문 모든 신들이 소리높여 외쳤다.

“세존께서 이와 같이 바라나시 선인들이 머무는 녹야원에 계시면서 무상법륜 굴리시어 바른 법을 세웠으니 이는 과거 그 누구에 의해서도 자세히 설명되지 않았던 법, 사문들과 바라문과 천신들과 마군들과 법천 등등, 이 세상 어떤 자도 이것을 멈추게 할 수 없도다!” 라고 

17.땅의 신들의 소리를 듣고 사대천왕 신들도 한 목소리로 외쳤다.

“세존께서 이와 같이 바라나시 선인들이 머무는 녹야원에 계시면서 무상법륜 굴리시어 바른 법을 세웠으니 이는 과거 그 누구에 의해서도 자세히 설명되지 않았던 법, 사문들과 바라문과 천신들과 마군들과 법천 등등, 이 세상 어떤 자도 이것을 멈추게 할 수 없도다!” 라고.

18.사대왕천의 신들의 소리를 듣고 삼십삼천의 신들이…야마천의 신들이…도솔천의 신들이…화락천의 신들이…타화자재천의 신들이…범신천의 신들이 외쳤다. 

“세존께서 이와 같이 바라나시 선인들이 머무는 녹야원에 계시면서 무상법륜 굴리시어 바른 법을 세웠으니 이는 과거 그 누구에 의해서도 자세히 설명되지 않았던 법, 사문들과 바라문과 천신들과 마군들과 법천 등등, 이 세상 어떤 자도 이것을 멈추게 할 수 없도다!” 라고.

19.기쁨에 넘쳐 외치는 신들의 소리를 듣고, 그 신들은 또 다른 신들에게 알리고, 기쁨에 넘쳐 외치는 신들의 소리를 듣고 브라흐마들도 한목소리로 외치고…이처럼 그 찰나, 그짧은 순간, 그 순간에 범천의 세상에 이르기까지 그 소리는 퍼져나갔다. 그리고 일만 세계는 흔들렸고 강하게 요동쳤으며, 한량없는 찬란한 빛이 나타났나니, 그것은 천인들의 광채를 능가하였다.

20.바로 그때 세존께서 찬탄하여 말씀하시길, “참으로 꼰다냐는 깨달았다. 참으로 꼰단냐는 깨달았다.” 이로 인해 꼰단냐 존자는 안냐꼰단냐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붓다경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법화경(法華經)  (3) 2024.02.14
화엄경(華嚴經)  (1) 2024.02.14
유마경(維摩經)  (1) 2024.02.13
반야경(般若經)  (1) 2024.02.13
대승경전의 분류  (2) 2024.02.13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