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붓다입문

불교란 무엇인가? ②

by 파장波長 2022. 4. 28.

참 나를 찾아서

어려운 처지에 처해 고민하고 괴로워할 때 그것을 구해 줄 사람을 만나면 얼마나 기쁜가요? 어두운 밤에 피곤한 몸으로 힘든 길을 갈 때 함께 길 동무를 만나면 얼마나 고마운가요? 이런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은 세상살이에 지치고 힘든 이를 위로하고 격려해 주면서 진리를 가르쳐 자유롭고 편안한 인생이 되게 합니다. 인생의 새로운 가치에 눈 뜰 때 삶이 변합니다. 따라서 인생관과 가치관이 정립되었을 때 인생은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잠 못 드는 사람에게 밤은 길고
피곤한 나그네에게 길이 멀듯이
진리를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에겐
생사의 밤길은 길고도 멀어라. <법구경>

사람이 전생의 업을 다하고 악도에서 벗어나더라도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기 어려우며, 사람으로 태어나더라도 부처님
법을 만나기가 어려우며, 부처님 법을 만났을지라도 수행자를
만나기 어렵고, 수행자를 만났다 하더라도 신심을 내기 어렵다." <사십이장경>

우리의 삶은 올바른 진리의 길에 들어설 줄 모르고 감정과 욕망에 이끌려 마치 뱀의 꼬리가 앞장을 서서 길을 가려는 것과 같이 가시덩굴에 들어가고 불 속에도 들어가고 결국에는 낭떠러지에 떨어지게 되는 격입니다. 즉, 우리들이 불타는 집과도 같은 이 세상을 윤회하는 것은 끝없이 세상에 대한 탐욕을 버리지 못한 탓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어느날 숲 속에 있는 한 나무 아래에서 좌선을 하고 계셨다. 이때 젊은이들이 숲 속에서 여기저기 무엇인가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나무 아래 조용히 앉아 있는 부처님을 보고 그들이 다급하게 물었다. ‘한 여자가 도망가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까?’ 사연인즉, 그들은 이 지역에 사는 지체 있는 집안의 자제들인데, 오십 명이 저마다 자기 아내를 데리고 숲에 놀이를 왔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의 미혼자만은 기생을 데리고 왔었는데, 모두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그 기생은 여러 사람의 옷과 값진 물건을 가지고 달아나 버렸다. 그래서 그 여인을 찾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사정을 듣고 부처님은 그들에게 물으셨다. ‘젊은이들이여, 달아난 여인을 찾는 것과 자기 자신을 찾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놀이에만 팔려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여인을 찾아 헤매던 그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자기 자신을 찾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그럼, 다들 거기 앉아라. 내가 이제 그대들을 위해 자기 자신을 찾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 이리하여 그 젊은이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모두 부처님 제자가 되었다." <사분율 제32권>

이 젊은이들은 자신이 더 중요함을 곧 깨달아 출가했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은 탐욕의 세계로 달려가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항상 탐욕을 버리하고 설하시며, 부처님께서도 ‘왕자의 지위를 문틈에 비치눈 먼지처럼 보고, 금이나 옥 따위의 보배를 깨어진 기왓장처럼 보며, 비단옷을 헌 누더기 같이 보고, 삼천대천세계를 한 알의 겨자씨 같이 보아<사십이장경>’ 궁궐을 버리고 출가하여위대한 깨달음을 얻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세속의 탐욕을 벗어났음을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늘 당신은 ‘길을 가르키는 사람’ 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은 만나는 사람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 지혜와 평화의 길을 주셨습니다. 즉,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깨달음과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몸소 가시며 가르침을 주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깨달음을 이루고, 못 이루고는 우리에게 달린 것입니다. 

고려시대 야운스님은 당신의 수행을 살피는 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부처님 법 안에서 도를 이루었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아직도 고해에서 헤매고 있는가. 그대는 시작 없는 옛적부터 이 생에 이르도록 깨달음을 등지고 속진에 묻혀 어리석은 생각에 빠져 있구나. 항상 악업을 지어 삼악도에 떨어지고 착한 일을 하지 않으니 생사의 바다에 빠진 것이 아닌가." <자경문>

진리를 향해 정진하는 삶

(1) 바른 믿음으로

일상적인 삶을 살다 불교에 입문하려고 첫 마음을 냈다면, 그 순간부터 바른 믿음을 가지고 사는 참다운 불자가 되어야 합니다.

게으름이란 모든 허물의 바탕이다. 집에 있는 이가 게으르면 의식(衣食)이 부족하고, 사업이 쇠퇴할 것이요, 출가한 이가 게으르면 생사의 고통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모든 좋은 일은 정진에 의하여 일어나나니, 집에 있는 이가 정진하면 의식이 풍족해지고 사업이 번창할 것이요, 출가한 이가 정진하면, 법을 모두 성취하여 마침내는 부처님의 경지에 으르나니, 모두가 정진에 의해 이루어지느라. <보살본행경>

불교를 믿는 첫 결심을 한 것도 대단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처음에 발심한 그 마음을 가지고 생활 속에서 정진해 나가는 일입니다. 어떤 믿음을 가지고 정진해야 하는가? <대승기신론>에는 믿음을 네 종류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근본을 믿음이니, 진여(眞如)의 법을 즐기어 생각하는 것이다.
둘째는, 부처님께 한량 없는 공덕이 있음을 믿음이니, 항상 가까이 모시고 섬기기를 생각하는 것이다.
셋째는, 부처님의 법에 큰 이익이 있음을 믿음이니, 항상 모든 바라밀을 닦으려고 생각하는 것이다.
넷째는, 스님들은 나와 남을 이롭게 하는 행을 바르게 닦는다는 것을 믿음이니, 모든 수행자들을 가까이 섬기면서 올바른 행을 배울 것을 항상 생각함이다.

이런한 믿음을 가지고 부처님(佛)과 가르침(法)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僧)에 귀의하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를(三寶)라 합니다.  삼보에 귀의하는 것을 삼귀의(三歸依)라 하는데, 모든 불교 행사를 거행할 때마다 항상 삼귀의례를 올립니다. 부처님께 귀의한다 함은 법신(法身)에 귀의함이니, 온갖 지혜를 갖추고 더 배울 것이 없으며 여러 공덕으로 이루어진 몸을 뜻합니다. 법에 귀의한다고 함은 나와 남이 다한 곳에 귀의함이니, 즉 애욕을 끊고 애욕이 없어져서 적멸인 열반에 으르는 진리에 귀의함을 뜻합니다. 스님들께 귀의한다는 함은 부처님의 법을 따라 수행하고 가르치는 스승에게 귀의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올바른 믿을 가지고 하루하루 나태하지 말고 불교인으로 바른 신행을 해야 합니다. 원효스님은 첫 마음을 내어 부처님께 귀의한 이들에게 당부하십니다.

오늘이라 할 때 벌써 늦은 것이니 아침부터 서둘러야 할 것이다. … 시간이 지나가 어느새 하루가 흐르고 한 달이 되며, 한 달 두 달이 문득 한 해가 되고, 한 해 두 해가 바뀌어 어느덧 죽음에 이르게 된다. 부서진 수레는 구르지 못하고 늙은 사람은 닦을 수 없다. 누워서는 게으름만 피우고 앉으면 생각만 어지러워진다. 몇 생을 닦지 않고 세월만 보냈으며, 그 수많은 생을 헛되이 살았으면서도 한 평생을 닦지 않는가. 이 몸은 끝내 죽고야 말 것인데 다음 생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어찌 급하고 급하지 않는가. <발심수행장>

(2)자신을 낮추고

불교의 수행은 자신을 낮추는 공부입니다. 사람은 언제나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일 줄 알아야 합니다. 수행하는 사람은 더욱 그렇습니다. 이것을 하심(下心)이라 한다. 그 어느 누가 나를 보고 멸시하더라도 털끌만큼도 자신을 내세우지 말고 하심(下心)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 속에 찌들어 있는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업, 더러운 때를 닦아내고 맑은 성품을 발견하여 깨달음을 이루는 데는, 첫째도 줄째도 나를 낮추고 남을 공경하는 마음공부가 제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절에 다니는 횟수가 깊어질수록 ‘나는 무엇을 했네. 나는 무엇을 보았네’ 하며 처음 발심 했을 때의 겸손한 마음을 잃고 스스로 아상(我相)만 높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이 최고라 우쭐대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일이며, 특히 불자에게 이런 태도는 수행에 장애가 될 뿐만 아니라 점점 부처님의 법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불자는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검소하게 살아가야 함은 물론, 세상의 모든 일에서 교만심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부터 지금까지 스님들이 탁발하여 생활을 하는 것도 다른 이로 하여금 복을 짓게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세상 그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낮추어 해탈을 위해 정진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진정 자신을 낮출 때만 남을 받아들일 수 있고 자신의 마음을 부처님의 법으로 가득 채울 수 있는 것이다. 

(3) 생활을 반성하며

우리가 불교를 믿고 행하면서 잘못이 없을 수 없습니다. 매 순간 욕망이 싹트고 주위 사람에게 화를 내기도 하고 또 순간적으로 판단을 그르쳐 잘못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는 부처님의 법을 따르는 불자임을 명심하고 하루하루의 삶을 돌이켜 보고 반성해 나가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처음 공부하는 보살이 비록 신심이 두터우나 전생부터의 무거운 죄와 나쁜 업장이 많으므로 때로 삿된 마왕에게 홀리기도 하고, 세상 일에 끄달리기도 하고, 가지가지 병고에 시달리기도 하여 재난이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불자들이 자칫 착한 법을 닦는 일을 멈추게 되나니, 밤낮으로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으로 참회하며 권청하고 수희(隋喜)하며 보리에 회향하기를 늘 쉬지 아니하면, 나쁜 업장이 차츰 소멸하고 선근이 늘어나리라. <대승시승론>   

참회(懺悔)는 수행의 길에 중요한 것입니다. ‘참(懺)’ 이란? 지나간 허물을 뉘우침입니다. 전에 지은 악업인 어리석고 교만하고 허황하고 시기・질투하는 죄를 다 뉘우쳐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고, ‘회(悔)’ 란? 다음에 지을 죄를 미리 깨닫고 아주 끊어 다시는 짓지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우리는 흔히 지나간 허물을 뉘우친다 하더라도 앞으로의 허물에 대해 살필 줄 모름니다. 그래서 결국 지나간 죄도 없어지지 않고 새로운 허물이 잇따라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인들 허물이 없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허물이 있다면 곧 뉘우쳐야 하는 것입니다. 허물이 있거든 곧 참회하고 부끄러워하여,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하면 그 죄업은 날로 없어지고 그래서 마침내 도(道)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실 때였다. 그 자리에 아니룻가도 있었는데 그는 법회 중에 꾸벅꾸벅 졸았다. 부처님께서 법회가 끝난 뒤 아니룻다를 따로 불러 말씀하셨다. ‘아니룻다야, 너는 어째서 집을 나와 도를 배우느냐?’ ‘생노병사와 근심 걱정의 괴로움이 싫어 그것을 버리려고 집을 나왔습니다.’ ‘그런데 너는 설법을 하고 있는 자리에서 졸고 있으니 어떻게 된 일이냐?’ 아니룻다는 큰 허물을 뉘우치고 끓어 앉아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이제부터는 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는 부처님께서 설법하실 때 졸지 않겠습니다.’ 이때부터 아니룻다는 밤에도 자지 않고 뜬 눈으로 계속 정진하다가 마침내 눈병이 나고 말았다. 부처님은 아니룻다에게 타이르셨다. ‘아니룻다야, 너무 애쓰면 조바심과 어울리고 너무 게으르면 번뇌와 어울리게 된다. 너는 그 중간에 취하도록 하여라’ 그러나 아니롯다는 전에 부처님 앞에서 다시는 졸지 않겠다고 맹세한 일을 상기하면서 부처님의 타이름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아니룻다의 눈병은 날로 심각해져 마침내 앞을 볼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애써 정진한 끝에 마음의 눈이 열리게 되었다. <증일아함경 九品>

우리가 부처님을 믿고 정진해 나감에 있어 가져야 할 삶의 바른 자세 중 하나가 바로 자기 반성입니다. 우리는 끊임없는 반성속에 삶을 돌이켜 보고, 올바르게 부처님 곁에 가고 있는지 또는 처음 부처님께 귀의하였을 때의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만약 스스로의 허물을 발견하면 부처님 앞에 그 잘못을 말하고 가볍고 무거운 정도에 따라 삼배, 백팔배, 천팔십배, 삼천배를 하여 참회하는 것이 좋ㅅ다.

개옥불밀 천우즉루(蓋屋不密 天雨則漏)
지붕을 성글게 이어 놓으면 비가 내릴 때 빗물이 새듯이
의불유행 음일위천(意不惟行 淫泆爲穿)
마음을 조심해 간직하지 않으면 탐욕은 곧 이것을 뚫고 만다. <법구경 쌍요품>

(4) 끊임없이 정진하라

불교를 믿고자 하는 첫 마음을 간직하고 변함없이 정진해 가는 길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흐르면 처음 결심이 이런저런 이유로 인하여 변하기 쉽습니다. ‘차라리 다른 길이 낫지 않을까?, ‘깨닫지도 못할 것, 차라리 다른 일이 낫지 않을까?’하는 성급한 마음에 다른 생각을 할 때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라자가하의 죽림정사에 계실 때였다. 소오나 비구는 영축산에서 쉬지 않고 닦다가 이렇게 생각했다. "부처님의 제자로서 정진하는 성문 중에 나도 들어갔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번뇌를 다하지 못했다. 애를 써도 이루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집에 돌아가 보시를 행하면서 복을 짓는 것이 낫지 않을까?" 부처님은 소오나의 마음을 살펴 아시고 한 비구를 시켜 그를 불러오도록 하셨다. 그리고 부처님은 소오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소오나야, 너는 세속에 있을 때에 거문고를 잘 탔었다지?”
 “네, 그랬습니다.” 
“네가 거문고를 탈 때 만약 그 줄을 너무 조이면 어떻더냐?”

“그때도 잘 나지 않습니다”
“줄을 너무 늦추었을 때는 어떻하냐?”
“그때도 잘 나지 않습니다. 줄을 너무 늦추거나 조이지 않고 알맞게 잘 고루어야만 맑고 미묘한 소리가 남니다.”

부처님은 소오나를 기특하게 여기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너의 공부도 그와 같다. 정진을 할 때 너무 조급히 하면 들뜨게 되고 너무 느르게하면 게으르게 된다. 그러므로 알맞게 하여 집착하지도 말고 방일하지도 말라.”

소오나는 이때부터 항상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거문고를 타는 비유를 생각하면서 부지런히 정진하여 오래지 않아 아라한(阿羅漢)이 되었다. <잡아하경>

소오나 비구의 생각처럼 우리들도 종종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활 속에서 정진해 나갈 때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굳게 행하면 우리의 발원이 꼭 이루어 진다는 믿음으로 부지런히 정진해 나가야 합니다. 한편 처음 발심했을 때의 결심이 비록 작은 것일지라도 하찮게 보지 말고 한마음으로 부지런히 정진해 나갈 때, 낙수가 떨어져 돌을 뚫는 것과 같이 작고 작은 선업이 쌓여 마침내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를 의지하여라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의지하여라

방일하지 말라.
나는 방일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정각(正覺)을 이루었다. 한량없는 온갖 착함도 또한 방일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다. <장아함경 유행경>

불교적인 삶

불교는 자기 완성만이 아니라 나와 남이 함께 깨달아 이 세상을 불국정토로 만드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합니다. 이는 바른 믿음과 생활 속의 바른 행을 중시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불자로서 지켜야 할 실천덕목으로 오계(五戒)를 말씀하셨습니다.

① 불살생(不殺生) 산 목숨을 죽이지 말라.
② 불투도(不偸盜) 주지 않는 것을 갖지 말라. 
③ 불사음(不邪淫) 불사음삿된 음행을 하지 말라. 
④ 불망어(不妄語) 거짓말을 하지 말라. 
⑤ 불음주(不飮酒) 음주를 하지 말라.

오계(五戒)는 산스크리트어로 판차실라(pañca-śīla)를 번역한 말로서 재가자들이 지켜야 할 계(戒)를 말합니다.

오계는 모든 악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인 다섯 가지 악을 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지 말라’ 는 것은 금지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실천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산 목숨을 죽이지 말라’ 의 경우, 모든 생명은 불성을 가진 고귀한 존재이니  ‘산 목숨을 죽이지 말라’ 의 뜻입니다. 

옛날 자비심이 지극한 왕이 매에게 쫓겨 피해온 비둘기 대신 자신의 살점을 뜯어 주었다는 자비심이야말로 ‘산 목숨을 죽이지 말라’ 는 실천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동의 사회 생활을 하는 우리들이 악을 범하지 않고 선을 실천함으로써, 서로를 존중하고 아끼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삶의 터전을 이룩하려는 것이 이 오계(五戒)의 목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계를 스승으로 삼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가장 안온한 공덕이 계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청정한 계를 가지면 괴로움을 없애는 지혜와 선정의 온갖 좋은 공덕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계의 가르침을 자신의 삶에 실현하도록 해야 합니다. 즉, 일상적인 삶 하나하나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행하여 다른 사람과 더불어 이 세상을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반가운 이, 그리운 이를 만나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예(禮)로써 그 뜻을 표시합니다. 불교에서는 스님 또는 법우를 서로 만나게 되면 열 손가락을 가지런하게 하고 양 손바닥을 맞대어 흩어진 생각과 마음을 집중해서 합장으로 예를 표합니다

이렇게 다소곳이 고개 숙여 합장하는 마음이 바로 믿음의 출발입니다. 큰 절이 아니더라도 합장은 나의 마음을 뜻하며, 더 나아가 나와 너의 마음이 하나의 진리 위에 서로 만났음을 뜻하는 동시에 존경과 진실과 자비의 마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절을 하고 합장을 하는 의식 속에는 자신을 낮추고 덕 높은 스님,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수행의 방편으로 매일 108배를 하면, 항상 교만심을 버리고 하심(下心)을 하여 남에게 성내지 않고 좋은 태도를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공양 전후에 언제나 합장하며 ‘이 음식에 깃들인 모든 이의 공덕을 생각하며 감사히 먹겠습니다.’ 라고 읆조릴 때 자신을 있게 해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니, 어찌 감히 다른 이에게 해로운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불공(佛供)을 드릴 때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불공을 올림은 일체 중생을 고통으로부터 구제하시고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시며 열반의 길로 인도하시는 부처님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의 표시입니다. 또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다는 것은 모든 중생에게 회향한다는 뜻도 담겨 있기에 모든 중생의 은혜를 갚는 길이기도 합니다. 너 나아가 우리의 이웃에게 따뜻한 마음씨를 베품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기에, 부처님께 공양을 올림과 다름이 없으며 이 세상을 더욱 말고 청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님 앞에 발원할 때도 자신의 욕망과 이익을 성취하기 위한 것보다 모든 중생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하여야 합니다. 아울러 모든 번뇌를 여의고 하루 빨이 부처님 법을 익혀 깨닫도록 발원함이 참다운 불자의 발원입니다. ‘언제 어느 곳에서는 고통과 괴로움에 빠진 중생이 나를 부를 때는 반드시 그곳에 가서 구해내리라’ 는 관세음보살의 발원과 ‘지옥에 있는 중생을 모두 구하기 전에는 결코 성불하지 않겠다.’ 는 지장보살의 발원이야말로 참다운 발원인 것입니다. 즉, 현실에서 중생의 아픔을 함께 하며, 고통을 덜어주고자 커다란 원을 세우고 자신을 아끼지 않고 실행해 가는 것이 참다운 불자의 모습입니다.

이처럼 불자의 수행은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만나는 이에게 머리를 숙이고 합장하는 자세, 공양을 하면서 이웃을 생각하는 자세, 불공이나 발원을 하면서도 자신보다는 더불어 사는 세상을 생각하는 자세, 주위 사람을 부처님이나 스님들을 공경하듯이 받드는 자세, 이러한 자세가 몸에 배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나 뿐만 아니라 주의 사람들도 더불어 이런 자세를 긴직할 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회합의 정신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로 가족끼리 사랑하고 화목을 이루며 넓게는 이웃과 더불어 생각하며 살아갈 때, 마른 풀이 수미산 같이 쌓여 있더라도 겨자씨 만한 불똥 하나로 다 태울 수 있듯이 우리들의 조그만한 신행의 촛불이 세상의 온갖 더러움을 태우고 불국정토세계를 이 땅에 구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경전을 아무리 외워도 실행하지 못하는 게으른 사람은 
밤의 소를 세는 목동과 같아서 수행의 보람을 얻기 어렵네. <법구경>

'붓다입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교의 명절의례∴  (0) 2022.04.28
불교란 무엇인가? ①  (0) 2022.04.28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비교  (0) 2022.04.23
불교 미술과 일반상식  (0) 2022.04.22
불상의 구분과 의미  (0) 2022.04.21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