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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입문

불교의 역사⑤ 한국

by 파장波長 2022. 4. 29.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단순히 외래종교의 전래라고 만은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나라에서의 불교가 종교로서로만이 아닌, 전반적인 문화 현상으로서 우리 민족문화의 모체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에 불교가 언제 처음 전해졌는지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것은 역사서(歷史書)들 대부분이 사실적이기 보다는 설화적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그 연도를 측정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중 한가지 설이 가야의 수로왕비인 인도출신의 허씨 왕후가 불교를 처음 전했다는 주장입니다. 이 설은 아직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이 설은 다른 전래 통로와는 다르게 인도불교가 직접 전해졌다는 것 때문에 그 중요성은 남다 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백제 후기 서산 마애여래삼존상(瑞山龍賢里磨崖如來三尊像)

어쨌거나 불교는 우리 민족역사에 있어서 고대문명와 문화의 창출과정부터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사이에 고루 전파됨으로써 민족의식의 한 부분에 깊이 스며들어 민족역사와 함께 해 나왔습니다.

이 땅에 불교가 뿌리내리기까지 숱한 격동도 있었고 영화로운 시대에 불타의 사상이 만개하기도 했습니다. 오늘을 사는 불교인들이 민족사 줄기마다의 역사를 돌이키며 불교를 이야기하게 되는 것은 단순히 전래가 오래되었고 그에 따른 민족종교임을 확인하여 자랑해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름지기 역사를 익히고 기린다는 것은 그 속에서 교훈을 찾고 오늘의 현실 속에서 새역사를 열어가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오랜동안 민족과 함께 해온 불교에 대하여 시각을 새로이 하고 전통을 바로 인식하여 도처에 산적한 과제를 하나 둘씩 해결해 나가야합니다. 

그러한 신심으로 우리 역사와 불교를 배워가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는 한국 불교에 대한 개괄적인 줄기를 함께 확인해 보고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직시 해 볼 수 있도록 합시다.

고구려 시대 불교

공식적인 문서로 확인된, 최초로 불교가 전래된 곳은 고구려입니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 중국 북쪽의 전진(前秦)에서 부벽왕(符壁王)이 사신과 순도(順道) 스님을 보내면서 불상과 불전을 전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2년 후에 (374) 다시 스님 아도(阿道)가 왔으며, 다시 그 이듬해(375)에는 최초로 성문사(省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세웠습니다. 이를 한국불교의 최초의 전래로 삼고, 또한 사원 창건의 효시로 보고있습니다.⓯

당시 고구려가 받아들인 시기의 불교는 노장사상을 매개로 불교를 이해 하려는 격의불교였습니다. 이후 인도의 중관사상을 계승한 삼론종에 대한 연구가 발달하였고, 유식학과 중국의 천태종, 열반종이 유입되어 교학의 발전이 이루어졌습니다. 25대 평원왕(平原王) 18년(576) 경에는 고구려의 대표적인 스님 의연(義淵)이 중국 북제(北齊)로 가서 정국사 법왕에게 불기(佛紀) 및 중국의 불교 전래 등 불교의 역사 전개와 교학에 관한 여러 가지 문제 등에 대해서 배우고 돌아와 문물유입에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또한, 영양왕 21년(610) 고승 담징(曇徵)은 불교는 물론 오경(五經)에도 통달하여 일본에 이를 전했으며, 또 채색과 종이, 붓 만드는 법 및 맷돌 쓰는 법 등을 가르쳐서 일본인들의 생활 향상과 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습니다.(일본 나량(奈良) 법륭사(法隆寺)의 금당벽화는 그가 그린 것이라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이렇듯 고구려는 처음부터 불교를 긍정적으로 수용, 급속도로 발전시켜서 국가적인 불교문화를 형성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 말기에는 도교(道敎)가 성행하고 고구려 불교는 정치적 세력 투쟁에 휘말려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채 고구려의 멸망을 맞았습니다.

백제시대 불교

백제불교는 침류왕 1년(A.D. 384년) 동진(東晋) 마라난타(摩羅難陀)의 전래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⓰ 백제는 그 이듬해(385) 당시 수도인 한산(漢山)에 절을 세우고 10명의 스님을 배출시켰습니다.신지로는 백제 불교도 이보다 훨씬 먼저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사서(史書)에 의하면 ‘마라난타가 동진으로부터 바다를 건너왔을 때, 침류왕은 그를 크게 환영하고, 궁중으로 모시고 공경하였다' 라고 하는데, 이는 백제에서도 불교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할 만안 계기가 전부터 마련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백제불교의 특징은 율종 중심의 교학에 있는데 그 밖에 열반종, 삼론종, 성실종 등의 연구도 활발하여 불교 교리의 연구에 있어 선구적 역할을 했습니다. 일찌기 고승 겸익(謙益)은 바다를 건너 중인도부 상가나사(常伽那寺)에서 5년동안 범문을 익히고 계율을 깊이 연구했습니다. 그는 26대 성왕 4년 (526)에 불전 원전을 가지고 백제로 돌아왔는데, 왕은 그를 흥륜사(興輪寺) 에서 고승 28명과 함께 원전을 번역하도록 했습니다. 이때 율부72권을 번역했고, 담욱(旭)과 혜인(惠仁) 두 법사가 이 율문의 소(疏) 36권을 저술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겸익은 백제 율종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겸익의 행적은 백제가 종래의 중국을 거쳐서 들어왔던, 말하자면 간접적인 불교문화에만 만족하지 않고 직접 인도에서 불교를 직수입했다는 것에 그 의미가 더합니다.

특히 백제불교는 일본에 전파되어 선진문물을 전해줌으로써 일본 고대사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26대 성왕 30년(552)에 처음 일본에 불교가 전파되고 나서 그 2년 뒤인 성왕 32년(554) 2월에 담혜(景慧)와 도심(道深) 등 여러스님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교화활동을 했습니다. 또한, 단지 불교의 전 파에 그치지 않고, 30대 무왕 3년(602)에는 고승 관늑(觀勒)이 천문, 지리, 역서, 둔갑(甲), 방술서(方術書), 의술(醫術) 등을 일본에 전하는 한편 일본의 불교문화 진흥에 많은 공을 세웠습니다. 이외에도 도장(道藏), 비구니 법명(法明) 등 백제에서 일본에 건너가 문화를 전파한 스님은 무척 많았습니다. 삼국의 불교전래에 있어서 신라에서의 상황은 고구려와 백제에서의 상황과 무척 달랐습니다. 삼국 가운데 문화적으로 가장 뒤떨어져 있던 신라는 불교 문화의 새흐름을 무조건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신라시대 불교

신라는 고구려의 묵호자(墨胡子)에 의해 417년에 불교가 전래되었으나, 공인된 것은 23대 법흥왕 14년(527) 이차돈(異次頓)의 순교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신라의 불교는 24대 진흥왕대에 이르러서야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됩니다. 이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국선(國仙)·화랑도(花郞道)의 창설이었습니다. 화랑도는 불교사상을 근간으로 하여 나라를 흥하게 할 목적으로 불교의 미륵사상과 이상국가 사상인 전륜성왕사상 등을 중심으로 해서 만들어졌습니다.

진흥왕은 이외에도 대사원의 건립, 스님의 양성 및 승총제도(僧銃制度)의 성립 등 많은 일을 했습니다. 이후 후대왕들도 이를 이어받아 불교문화를 보호하고 진흥시켰으며, 이런 국가적인 지원 아래 많은 훌륭한 고승들이 배출 되어 신라 불교문화를 더욱 빛나게 하였습니다.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고승을 말하라면 역시 원효(元曉)와 의상(義湘)을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 이전에도 원광(圓光), 자장(慈藏), 혜숙(蕙宿), 혜공(萬 空) 그리고 대안(大安) 등 많은 고승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혜숙, 혜공, 대안스님 은 각각 시골마을과 도성안의 뒷골목, 그리고 장터를 떠돌아 다니며 불교문화를 대중화 시키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러한 노력은 원효 대에 이르러서 그 완성을 보았습니다. 이렇듯 원효는 불교의 참뜻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고 또 생활화하려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85종 180권의 저서를 남겨서 우리 역사상 가장 많은 저술을 남겼을 뿐 아니라, 그 내용에 있어서 당(唐)의 학자들이 그의 저소(著疏)를 해동소(海東疏)라고 하여 존중하였다.⓱ 그는 불교인이면서 위대한 사상가였고 또 초인적인 저술가였으며 뛰어난 실천가였습니다.의상은 학덕이 뛰어났습니다. 그는 당에 유학을 다녀와서, 교학을 크게 일으켜 제자들을 가르치고 백성들을 교화시켰습니다. 그는 국왕을 일깨워 백성들의 노역을 덜게 한 애민(愛民)의 고승으로서 오랜 전쟁을 겪어 피폐할대로 피폐한 국민들의 의지처가 되었습니다. 그는 특히 훌륭한 제자들이 많았으며 후학 양성에도 큰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비하여 저술은 많지 않았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특히 당의 학자인 번경삼장(豫經三藏)은 그의 ⟪금강삼매경소(金剛三昧經疏)⟫를⟪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이라 하여 존중하였다.

이렇듯 통일신라시대까지 발전을 거듭하던 신라의 불교는 36대 혜공왕(蕙 恭王)때에 이르러 교단이 침체해지고 불교인의 활동도 줄어 불교문화도 차츰 침체기로 접어들기 시작했습니다. 불교가 침체해지던 통일기 말기에, 중국에서 성행하던 선종이 들어와 불교계에 새로운 양상을 전개시켰습니다. 하지만 선법이 신라에 들어온 이후 신라의 교단은 지금까지와 전연 다른 형태로 바뀌었으나, 불교문화상으로는 별다른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고려시대 불교

고려불교는 통일신라 말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선종의 흐름을 계승하여 신라 말에 성립한 7산의 개창과 고려 초에 2산을 개산하면서 구산선문(九山 禪門)의 선파를 성립시켜 오교구산(五敎九山)의 성립을 이루었습니다. 오교구산 이란 5개의 교종종파와 9개의 선종종파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선종의 번성은 교학불교의 위축을 반증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종 9산은 대각국사의 천태종 개창에 의해 다시 선종과 천태종의 양종으로 통합되어 고려불교는 오교 양종으로 통합됩니다. 그러나 고려불교의 오교양종이니 하는 종파의 분리는 교리상의 분열이라기 보다는 인물 위주의 분열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려불교는 전반적인 교학의 퇴조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현존하는 최고의 경전인 고려대장경을 조판하고 의천의 고려속장(高麗續藏)의 조성으로 출판 문화의 우수성을 제고시켰습니다.⓲ 불교문화에 있어서도 전반적인 수준저하 현상 가운데서도 유독 불화만은 현재까지 최고의 걸작으로 인정되는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보조국사의 정혜쌍수(定慧雙修)를 기점으로 한국 토양에 맞는 자기화한 선종을 성립시키기에 이름니다.

조선시대 불교

조선불교는 숭유억불의 국시에 의한 억압과 수난의 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양반 사대부들은 통치이념인 주자학과 성리학으로 자신들의 통치철학을 세워나갔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억불의 기운 가운데서도 완전히 소멸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왕가와 귀족사회에서는 불교신앙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태조와 태종, 세종과 세조, 정조 등은 음으로 양으로 불교를 지원했으며 비빈들은 대부분 불교를 깊이 신봉하고 있었습니다. 양반 사대부를 중심으로 하는 집권세력은 스님의 도성출입을 금지시키는 등 불교를 소외시키고 탄압했지만 오히려 불교는 민간 속으로 들어가 민중의 종교로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현대사 불교

개항과 더불어 밀려들어온 일본불교는 식민지 전략의 일환으로 한국불교를 친일화 시키면서 청정비구승단을 대처승단으로 만들고 어용불교화 시켰습니다. 이것은 서구의 제국주의 열강들이 침략행위를 하기 전에 선교사를 파견하여 식민지 침략의 구실을 삼았던 식민지 전략을 일본식으로 바꾼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와중에서도 식민지배와 일본불교화에 맞섰던 한용운, 박한영, 백용성스님 등의 선각자들에 의해 한국불교의 전통은 소멸되지 않고 그 역사를 이어갔습니다.

해방과 더불어 한국불교에 남겨진 과제는 친일불교의 청산과 교단의 정화, 그리고 교단에 뿌리박힌 일제의 불교정책 청산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제는 자체적인 청산을 이루지 못한 채 1954년 이승만의 정화유시에 따른 외부적 힘에 의한 정화가 이루어졌고, 이것은 한국불교에 있어서 오늘날의 분열된 모습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즉 비구 대처 싸움은 한국불교를 황폐화시켰고 종권 다툼의 와중에서 소홀했던 인재양성과 교육의 미비는 오늘날까지 불교의 질곡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1994년 일어난 불교개혁과 개혁종단의 출범은 우리불교의 새 날을 열어 가는 시금석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불교는 격랑과 도전 속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역사는 어느 한 사람이나 한 집단이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사부대중 모두의 결집과 화합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자각된 불자, 믿음과 실천을 겸비한 불자들에 의해 한국불교는 밝은 내일을 열 것입니다. 또한 문명의 파괴로 인한 세계의 위기를 책임지는 종교로서의 역할이 한국불교에 주어진 사명감이기도 합니다.


Note :
⓯ 양고승전(梁高僧傳)이나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 의하면 동진(東晋)때의 고승 지둔도림(支通道林)이 고구려의 고승에게 글을 보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지둔도림이 366년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이는 순도가 불교를 전래한 연도보다 앞선다. 또한 서신을 왕래할 정도로 고구려에 불교가 자리잡았으므로 고구려의 불교 전래는 훨씬 이전이라고 볼 수 있다.
⓰ 신지로는 백제 불교도 이보다 훨씬 먼저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사서(史書)에 의하면 ‘마라난타가 동진으로부터 바다를 건너왔을 때, 침류왕은 그를 크게 환영하고, 궁중으로 모시고 공경하였다' 라고 하는데, 이는 백제에서도 불교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할 만안 계기가 전부터 마련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⓱ 특히 당의 학자인 번경삼장(豫經三藏)은 그의 「금강삼매경소(金剛三昧經疏)」를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이라 하여 존중하였다.
⓲ 대각국사의 이와 같은 사업은 앞서 이루어진 현종대의 초조장경(初雕藏經)에 이은 불교전적의 총정리이며 완비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깊다. 이 장경은 총 1,010부 4,740권의 목록이 들어있는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에 의거하여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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